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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ft 1848~2000

史의 찬미 | 2008. 3. 3. 09:48 | Posted by 김수민

며칠 전 산 둔기 <The Left>를 읽고 있다. 첫장 '민주주의의 사회화'는 의외로 어느 사회민주연맹 회원 둘의 '자유연애 결합' 사건으로부터 출발한다.

책장을 넘기다 이렇게 두꺼운 작품을 완성한 건 학구열이 아니라 예술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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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과 모계 사회에 대한 잡상

Free Speech | 2008. 3. 2. 22:16 | Posted by 김수민

***

어쩌다 주말에 대형서점에 가면 기분이 영 좋지 않다. 공간은 온통 네모로 채워져 있다. 가족단위로 한 네모. 아이들이고 어른들이고 뒤섞여 있지만 네모는 깨지지 않는다. 성급한 일반화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른들이 지키려 하는 바운더리는 철저하게 가족들, '내 새끼들'이다. 보호하기 위해 감시와 훈계가 따르는 것은 기본이다. 사람이 붐빌수록 그 많은 사람들은 서로 닮아간다. 남이 밀리든 말든 자기 애만 붙잡으면 다다.  

***

애들은, 남의 애라도 귀엽지 않나? 보육에 자기 자식, 남의 자식이 따로 있지는 않다. 태어난지 1년이 지나야 걷는 인간의 특성상 '낳은 사람'이 기르고 돌보는 것은 당연한 거지만...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고, 그 사회가 동물들과 다르다면야 키우는 것은 여러 사람의 몫이다. 부모, 보모, 교사한테 떠맡기면 다가 아니다. 잘 보라니깐? 애들은 남의 애라도 귀엽다고...

***

<괴물>의 박강두(송강호)는 한강에 괴물이 나타나 날뛰던 중 딸을 잃어버린다. 남의 딸 손을 잡고 뛰었기 때문에... 실수지만 인상적인 장면이다. 아름답지 아니한가? 강두는 마지막에 친자식이 아닌 아이를 거두어 키우게 된다.

***

양육, 보육, 교육이 사회화된다면야 예전 형태의 가족제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특히 가부장은 쓰잘데기 없는 존재다. 가부장은 다른 집에 가부장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외에 가부장이 차세대의 성장에 별 도움이 되는 건 없는 것 같다.

암컷이야 몇가지 사례를 빼면 자기가 낳은 애를 알아보지만 수컷은 그렇지 않다. 수컷은 먹을 거 가져와서 모으고 나누는 일에 암컷과 함께 참여하면 된다. 그럼 자기 애든 남의 애든 다 살릴 수 있다. 젖도 안 나오는 가부장이 뭐 그리 붙박이로서 쓸모가 있겠냐...

물론 사회화가 더 진행되면 암컷이 붙박이로 있을 이유도 없지만, 인류의 진화단계상 오랜 기간동안 책임지는 '상근자'가 아이들에게 필요할 것이다. 일단은 모계 사회부터~

세줄요약
1. 애들은 다 귀엽다.
2. 내 애인지 어떻게 알아? 그리고 그게 중요해? (DNA 검사? 검사자는 신이거나 중립자인가?)
3. 쓸모 많으신 여자들이 상근하고, 남성들은 무차별적 돌봄에 나서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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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악

Free Speech | 2008. 3. 2. 03:46 | Posted by 김수민

아무리 절대권력자라도 자살을 한다거나 죽음을 앞둔 상황이면 그 순간만큼은 소수자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대뜸 한 사람이 "그럼 이건희 딸이 죽은 것도 불쌍해요?"라고 물어왔다.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이건희 딸이라면, 남들이 보기에 꽤 스펙이 좋으면서도 "평민"이었던 연인과 만나다 집안의 반대에 절망해 자살한 그 사람을 말하는 것이잖아".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 순간 그는 경악하며 비판했다. 아니 비판하지도 않았다. 순간 술자리에는 가벼운 소란이 일었다. "와~ 어떻게" "그게 무슨..."이라는 반응 사이에 가려진 진의는 누구라도 알 것이다. 진보적이라는 이가 어찌 재벌가 딸의 죽음을 동정할 수 있느냐는 얘기다.

도저히 대화가 진행되지 않는 지경까지 간 탓에 내가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은 이렇다: "안 됐다..."라고 생각되는 게 측은지심이다. "이건희 딸은 이건희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짚어내는 것은 시비지심이다. 부유한 강자의 집안에서도 발생하는 폭압이 약자와 빈자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울지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은 수오지심이다. 첫번째와 두번째에도 이르지 못한 자가 세번째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허위의식이다.

그는 사양지심이라도 가졌을까? 남의 죽음에 대해서, 그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 함부로 재단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사람에게 '겸손하야 남에게 사양하는 마음'은 어울리지 않다.

그 사람은 -엔엘파는 아니었지만- 평소에 몹시도 품성을 중시해왔으며, 폭력적이기는커녕 매우 유약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왜 그리 생각하고 말하게 되었을까? 계속해서 주접을 떨어대는 그에게 난 입 쳐닫고 있으라고 했다.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에서 그의 언행을 넘어갔다. 다만 나는 도대체 무엇이 그를 저렇게 망가뜨리는지, 그러고도 세상은 자칭 좌파를 생산해내는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늘 사람은 윤리적으로 고만고만하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런 결론을 지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다. 암튼 날 경악하게 만든 사람이 하나가 아니고 그들이 세상을 장악하면... 난 그날로 끽이다.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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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와 베른슈타인

史의 찬미 | 2008. 3. 1. 14:27 | Posted by 김수민
룩: 그러니까 네 말은 그거한답시고 원래 해야 하는 걸 덮는 거 아녀?
베: 무슨 소릴하능겨. 어차피 우회하는 건 날로 먹는 거라고.
룩: 에, 그거 하면서 은근슬쩍 훼방놓고 원칙 박살내는 거잖아~
베: 아 거... 한다고 해도 문제, 안한다고 해도 문제...

따지고 보면 그런 이야기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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