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어수선한 시국, 한 전경이 자신을 육군으로 보내 달라 요청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의경은 경찰청이 국방부에 잠시 훈련을 의탁한 다음 다시 경찰학교로 불러들여서 양산해 내는 것이고, 전경은 국방부가 인력을 경찰청으로 파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전경은 의경에 비해 군인의식이 강하다.
나도 2003년 4월말 훈련소를 나와 경찰학교로 갈 때 8천원에 팔려갔고, 그중 절반인 4천원이 내 호주머니로 들어왔다.
훈련소 3주차쯤 전투경찰로 200명쯤이 빠진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훈련병 대다수는 그걸 유언비어로 치부했다. 훈련병 이전에 3박 4일동안 춘천 102보충대에서 '장정'으로 있으면서 "너희는 전방으로 가지 않는다. 최전방으로 간다" 따위의 말이나 들어왔고 2년동안 화천 15사단에 자리를 틀 준비를 하고 있었던 차라, 쉽게 예상하고 납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15사단 신병들은 내 기억으로 38연대, 39연대, 50연대로 흩어져 전입하게 되는데, 나는 38연대나 39연대를 희망하고 있었다. 거기가 GOP 부대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리로 가지 않아 GOP부대의 자세한 사정은 지금도 모르지만, GOP에 들어가면 철책선 경계근무가 중요하므로 훈련이나 다른 근무는 하지 않거나 뒷전으로 둔다고 알고 있었다. 또 적어도 후방보다는 내무실 생활이 편하고 선임병과의 관계가 좋다고 알려져 있었다. 물론 그런다고 영하 수십도의 추위가 날아가는 건 아니지만.
훈련병 4주차쯤에 부대에서 설문조사를 했다. 전경으로 가고 싶은 사람과 그러고 싶지 않은 사람이 각자가 딱 반반이었다. 시위 막는 게 얼마나 고된지 짐작이 갔던 나는 당연히 가고 싶지 않다는 쪽이었다. 물론 개개인의 희망을 조사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별 기대는 가지 않았다.
그런데 어쩐지 전경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람 마음이 참 우습다. 훈련소 동기들이 자대로 막 배치되어 적응하는 동안, 전경으로 차출된 인원들은 경찰학교에서 2주간 지내게 된다. 직접 겪어보았지만 경찰학교에서의 생활은 파라다이스다. 방패술, 봉술 훈련을 대강 받고(20분하고 40분 쉰 적도 많다), 강의실 이론교육 때는 적당히 존다. 일과 중 가장 힘들 때가 언제냐, 줄맞춰서 식당 앞으로 걸어갈 때다. 의경들이 자습하고 있는 시간에는 신나게 노가리를 깐다. 전경은 의경과 달리 시험을 치지 않고 추첨으로 근무지역을 결정하니까. 훈련소에서 금지되었던 담배도 태울 수 있다.
훈련소 나갈 때 나는 얄팍한 심사로 전경 복무를 기대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나는 아무 근거도 없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나는 진압부대(전투경찰대)로 가지 않고 왠지 경찰서 같은 데로 배치될 것 같아. 전경의 파라다이스 근무지라는 경찰학교에서 일하는 꿈까지 꿨다.
결과는 강원도로 돌아가는 것이었고, 그것도 강원도 유일의 전투경찰대로 가는 것이었다. 나중엔 일이 쉽게 풀렸지만 초창기에는 정말 고생했다. 2주간 중대신병 교육을 받으면서 하루에 물을 두 모금 먹었다. 악습과 가혹행위 때문이었다. 소대 배치된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구타와 암기강요에 노출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흉통이 도지고 손도 다쳤다. 사실 당시에 고발도 했었다. 내가 고발했음을 눈치챈 선임병들은 우습게도 그때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또 고발하지는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는지 '제 식구 만들기'를 재개하였다. 그게 한창이던 중 나는 일선 치안현장으로 파견을 나가게 됐고 오랫동안 횡성 일대를 떠돌며 근무했다. 꽤 시간이 흘러서 나는 본대에 붙박히게 되었는데 내가 그다지 설쳐대지 않았음에도 처음에는 부대에 남아 있던 몇몇 동기와의 마찰이 있었다.
부대는 처음에 내게 원주 톨게이트의 최고참으로 근무하며 기소중지자를 검거하는 일을 맡겼다. 하지만 당시 소대장의 뜻으로 분대장을 달면서 짧은 톨게이트 임무를 마치고 복귀해야 했었다. 권력이 강하지 않은 최고참이 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쫄병들, 그것도 차이가 많이 나는 쫄병들에게 잘해주는 일이었다. 내 동기들과 눈도 마주치지 못할 만큼 까마득한 후임과도 잘 지냈다. 나중에 들으니 "제대한 고참 가운데 누구와 사이가 좋았느냐?"라는 설문을 했는데 내 이름이 계속해서 나왔다고 한다(내 출신 부대는 내가 제대하고 3개월이 지나 터진 '전경부대 알몸진급식' 사건으로 홍역을 치렀던 곳이다. 정보가 새어 나가는 것 같아 아마 그런 설문을 했던 걸로 보인다). 1년 이상의 차이가 나는 후임들에게 특히 좋은 고참이었다는 것을, 나는 아직도 평생에서 제일가는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다.
2년 간의 군 생활이란 건 무사히 끝냈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나는 왜 육군으로 입대한 사람이 경찰로 빼돌려져야만 하는지를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군사훈련을 받으며 익힌 제식을 버리고 듣도보도 못한 전경대 제식을 익힐 때 들었던 황당한 마음이 지금도 생생하다. 전경대는 중대 단위로 각자 떨어져 있어 상부계통에서 나온 지침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은 육군에 비해 구타가 잘 근절되지 않는 결정적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외에도 당시 소속 부대는 "아닙니다"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같은 내용들을 모두 "시정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등 희한한 관습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밥 먹었냐?" "시정하겠습니다.") 멜로디 없는 군가도 정말 외우기가 힘들었는데, 그건 전국적으로 전경부대의 공통점이었다.
'전투화'를 신고 운동장을 돌다가 '얼차려'를 받던 사람이, '워커'를 신고 경찰서 뒷마당을 돌고 구타를 당하는 건 당시의 나로서는 참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내 소속부대는 운동장이 있는 새 시설로 옮겨 갔고 구타와 가혹행위도 점점 줄어갔다. 하지만 그게 군인을 함부로 경찰로 교체하는 걸 합리화할 수는 없다. 경제 살리라고 대통령 시켜줬더니 미친소나 먹으라는 것과 똑같은 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