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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Stapp <Broken>

Listen to the 무직 | 2008. 6. 14. 22:02 | Posted by 김수민



몇달 전부터 서점에 <핫뮤직>이 들어오지 않고, 음악계 사정에 더욱 더 눈이 어두워져 가는 중이다. 어쩐지 요즘 난 음악을 많이 듣지 않게 됐다. 나는 70년대 올드패션 하드록 좋아하고, 80년대 NWOBHM, LA메탈, 스래쉬 메탈 다 끌리고, 90년대 그런지 음악에 환장한다. 하지만 2000년대에 나온 신주류 음악들은 별로다. 모던락, 브릿팝 재미 없다. 랩코어 중에 RATM은 좋지만 힙합으로 좀 더 기울어진 쪽엔 감흥을 못 느낀다.

제대 직후에는 아예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서 살벌하게 들었다. 그때는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던 터라 특집을 준비하며 오만가지 음악을 다 들었다. 블루스, 컨트리, 포크, 글램, 펑크, 하드코어-펑크, 싸이키델릭, 아트 록... 거기다가 재즈까지. 그중엔 좋아하는 것도 있고 끌리지 않는 것도 있고 가끔만 듣고픈 것도 있다. 그렇게 그렇게 지금까지 왔다. 얼마 전 만난 한 시민운동가는 내게 클래식에도 로큰롤만큼 다이나믹한 명곡이 있다며 감상의 폭을 넓힐 것을 권하였다. 그럴 생각이다. 잘 될지는 몰라도.  

취향이라는 게 참 무섭고 갑갑하다. 빠져 나오려는 순간, 음악듣기가 작업이 되어 버린다. 그런 차에 왕년의 용사들이 새롭게 뭉쳐 나오면 정말 반갑다. 오디오 슬레이브, 벨벳 리볼버...

산다 산다 하다가 결국 못 산 음반이 있다. 크리드의 보컬이었던 스캇 스탭이 2005년에 낸 음반이다. 못 샀다는 걸 알면서도 레코드가게를 최근에 들르질 못했다. 벅스 뮤직이 시간이 꽤 흘러서야 그 음반을 스트리밍 서비스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음반을 사서 처음 돌릴 때 느끼던 두근거림을 나는 스무한살께부터 잃었다. 어제 스캇 스탭의 음반을 컴퓨터로 듣기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무언가가 부메랑처럼 돌아와 불꽃을 일으키고 있음을 이내 느꼈다.

가장 마지막 트랙인 <Broken>이 참 가슴 찡하다. 나와 목소리가 비슷하기 때문에 스캇 스탭에게 더 애착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한때 저런 발성으로 호령하듯 노래부르던 시절이 있었다(그때 음정은 잘 맞았는지 모르겠다. 주변에 아첨쟁이들이 많아서...)

크리스찬들이 멜로디는 참 잘 만든다. 크리드는 가장 유명한 크리스찬 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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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이냐 경찰이냐... 전투경찰

Free Speech | 2008. 6. 13. 14:50 | Posted by 김수민

참 어수선한 시국, 한 전경이 자신을 육군으로 보내 달라 요청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의경은 경찰청이 국방부에 잠시 훈련을 의탁한 다음 다시 경찰학교로 불러들여서 양산해 내는 것이고, 전경은 국방부가 인력을 경찰청으로 파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전경은 의경에 비해 군인의식이 강하다.
나도 2003년 4월말 훈련소를 나와 경찰학교로 갈 때 8천원에 팔려갔고, 그중 절반인 4천원이 내 호주머니로 들어왔다. 

훈련소 3주차쯤 전투경찰로 200명쯤이 빠진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훈련병 대다수는 그걸 유언비어로 치부했다. 훈련병 이전에 3박 4일동안 춘천 102보충대에서 '장정'으로 있으면서 "너희는 전방으로 가지 않는다. 최전방으로 간다" 따위의 말이나 들어왔고 2년동안 화천 15사단에 자리를 틀 준비를 하고 있었던 차라, 쉽게 예상하고 납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15사단 신병들은 내 기억으로 38연대, 39연대, 50연대로 흩어져 전입하게 되는데, 나는 38연대나 39연대를 희망하고 있었다. 거기가 GOP 부대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리로 가지 않아 GOP부대의 자세한 사정은 지금도 모르지만, GOP에 들어가면 철책선 경계근무가 중요하므로 훈련이나 다른 근무는 하지 않거나 뒷전으로 둔다고 알고 있었다. 또 적어도 후방보다는 내무실 생활이 편하고 선임병과의 관계가 좋다고 알려져 있었다. 물론 그런다고 영하 수십도의 추위가 날아가는 건 아니지만.

훈련병 4주차쯤에 부대에서 설문조사를 했다. 전경으로 가고 싶은 사람과 그러고 싶지 않은 사람이 각자가 딱 반반이었다. 시위 막는 게 얼마나 고된지 짐작이 갔던 나는 당연히 가고 싶지 않다는 쪽이었다. 물론 개개인의 희망을 조사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별 기대는 가지 않았다.

그런데 어쩐지 전경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람 마음이 참 우습다. 훈련소 동기들이 자대로 막 배치되어 적응하는 동안, 전경으로 차출된 인원들은 경찰학교에서 2주간 지내게 된다. 직접 겪어보았지만 경찰학교에서의 생활은 파라다이스다. 방패술, 봉술 훈련을 대강 받고(20분하고 40분 쉰 적도 많다), 강의실 이론교육 때는 적당히 존다. 일과 중 가장 힘들 때가 언제냐, 줄맞춰서 식당 앞으로 걸어갈 때다. 의경들이 자습하고 있는 시간에는 신나게 노가리를 깐다. 전경은 의경과 달리 시험을 치지 않고 추첨으로 근무지역을 결정하니까. 훈련소에서 금지되었던 담배도 태울 수 있다.

훈련소 나갈 때 나는 얄팍한 심사로 전경 복무를 기대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나는 아무 근거도 없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나는 진압부대(전투경찰대)로 가지 않고 왠지 경찰서 같은 데로 배치될 것 같아. 전경의 파라다이스 근무지라는 경찰학교에서 일하는 꿈까지 꿨다.

결과는 강원도로 돌아가는 것이었고, 그것도 강원도 유일의 전투경찰대로 가는 것이었다. 나중엔 일이 쉽게 풀렸지만 초창기에는 정말 고생했다. 2주간 중대신병 교육을 받으면서 하루에 물을 두 모금 먹었다. 악습과 가혹행위 때문이었다. 소대 배치된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구타와 암기강요에 노출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흉통이 도지고 손도 다쳤다. 사실 당시에 고발도 했었다. 내가 고발했음을 눈치챈 선임병들은 우습게도 그때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또 고발하지는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는지 '제 식구 만들기'를 재개하였다. 그게 한창이던 중 나는 일선 치안현장으로 파견을 나가게 됐고 오랫동안 횡성 일대를 떠돌며 근무했다. 꽤 시간이 흘러서 나는 본대에 붙박히게 되었는데 내가 그다지 설쳐대지 않았음에도 처음에는 부대에 남아 있던 몇몇 동기와의 마찰이 있었다.

부대는 처음에 내게 원주 톨게이트의 최고참으로 근무하며 기소중지자를 검거하는 일을 맡겼다. 하지만 당시 소대장의 뜻으로 분대장을 달면서 짧은 톨게이트 임무를 마치고 복귀해야 했었다. 권력이 강하지 않은 최고참이 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쫄병들, 그것도 차이가 많이 나는 쫄병들에게 잘해주는 일이었다. 내 동기들과 눈도 마주치지 못할 만큼 까마득한 후임과도 잘 지냈다. 나중에 들으니 "제대한 고참 가운데 누구와 사이가 좋았느냐?"라는 설문을 했는데 내 이름이 계속해서 나왔다고 한다(내 출신 부대는 내가 제대하고 3개월이 지나 터진 '전경부대 알몸진급식' 사건으로 홍역을 치렀던 곳이다. 정보가 새어 나가는 것 같아 아마 그런 설문을 했던 걸로 보인다). 1년 이상의 차이가 나는 후임들에게 특히 좋은 고참이었다는 것을, 나는 아직도 평생에서 제일가는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다.  

2년 간의 군 생활이란 건 무사히 끝냈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나는 왜 육군으로 입대한 사람이 경찰로 빼돌려져야만 하는지를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군사훈련을 받으며 익힌 제식을 버리고 듣도보도 못한 전경대 제식을 익힐 때 들었던 황당한 마음이 지금도 생생하다. 전경대는 중대 단위로 각자 떨어져 있어 상부계통에서 나온 지침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은 육군에 비해 구타가 잘 근절되지 않는 결정적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외에도 당시 소속 부대는 "아닙니다"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같은 내용들을 모두 "시정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등 희한한 관습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밥 먹었냐?" "시정하겠습니다.") 멜로디 없는 군가도 정말 외우기가 힘들었는데, 그건 전국적으로 전경부대의 공통점이었다.

'전투화'를 신고 운동장을 돌다가 '얼차려'를 받던 사람이, '워커'를 신고 경찰서 뒷마당을 돌고 구타를 당하는 건 당시의 나로서는 참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내 소속부대는 운동장이 있는 새 시설로 옮겨 갔고 구타와 가혹행위도 점점 줄어갔다. 하지만 그게 군인을 함부로 경찰로 교체하는 걸 합리화할 수는 없다. 경제 살리라고 대통령 시켜줬더니 미친소나 먹으라는 것과 똑같은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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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나는 성난 시위대의 일원으로
조선일보 본사 앞으로 갔다.

만감이 교차한다.


6년 전 오늘이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정체도 불명확한 학생 10여명이
노(老) 교수의 퇴임식장에 들이닥쳐
거친말로 분위기를 한바탕 헤집어 놓았다는
사건이 있었다.


그때 우리가 송복 교수에게
"닭짓한 당신 떠나라"라는 내용을
입에 담지는 않고 피켓에 썼던 건 사실이다.

교사는 노조를 만들면 안 된다,
만들 거면 자동차공장으로 가라,
조선일보의 최장집 검증사건에서는 오독의 요인을 제공한 최장집에게도 책임이 있다
...

우리는 그것을 닭짓이라고 부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고
송복이 보수면 똥파리도 새냐고 외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피켓을 들고 서서, 송복 교수에게는 다가가지 않은 채
몇가지 구호를 외치고 에헤라디야~ 타령을 부르고 격문을 읽고
시위를 마쳤다.
우리는 초라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송 교수에게 직접 삿대질을 할
엄두를 내지 않았다.

반말로 시비를 거는 그의 제자인 현직 교수와
우리측 학생 한명이 잠시 말다툼을 했을 뿐이다.

한때 <청맥>에서 기자로 일했다가 통혁당사건으로 곤욕을 치렀던 그는,
"고기와 입장은 한번만 뒤집는 것"이라는 속설처럼  
매우 확실하게 꼴보수의 입장을 대변해 왔고 우리는 그것을
처량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또다른 꼴보수, 유석춘 교수는 마치 데스크인 양
조선일보 기자에게 "이런 것 좀 기사로 써라"고 주문했다.

조선일보는 사회면 하나를 가득 매울 만큼의 큰 기사를 내보냈다.

그리고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동아일보도
그런 기사를 내보냈다.
그해 언젠가 유시민은 동아일보더러
"똥 퍼다가 친구따라 장에 가는" 신문이라고 했다.


조선 동아는 그도 모자라
사설로 칼럼으로 우리를 조져대려고 했고
학교에는 시민들의 항의전화가 빗발쳤다고 한다.

사설과 칼럼에는 '패륜'이라는 말이 과감하게 등장했다.

그 공격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우리가 1991년도의 대학생처럼
달걀을 던졌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중의 압권은 우리가 썼던 단어 "송뽁"을 두고
조선일보의 이한우가 '뽁은 사창가의 비속어이다'라고 설명한 것이다.
나는 동료들에게 "형 뽁이란 말 알아요?" 물었지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장집을 사상검증한 다음 "스승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표현에 발끈해
발설자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였던 자가 바로 이한우다.


아무튼 이 일로 우리는 곤경에 처했고
내 느낌상 학내 분위기도 8대 2 또는 9대 1 정도로 수세에 몰려 있었다.

6월 11일 그날 '별 일'이 없었음을 증명하는 오마이뉴스 동영상이 공개됐고
그것이 다시 MBC의 전파를 타고
김재홍, 박노자 교수가 송복 교수를 비판하거나 시위 학생을 옹호하고
우리가 수그러 듦 없이 학내에서 계속 자보전을 펼치면서
분위기는 조금씩 반전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 축구팀이 16강에서 이탈리아를 꺾으면서
이 사건은 잊혀져 갔다.


6년동안 안티조선운동은 노빠들이나 하는 철지난 운동이 되었고
황석영 등 기고거부를 선언한 지식인들은 하나둘씩 또다시
조선일보에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다들 안티조선은 끝났다고 했고
조중동을 다원주의적 관점에서 인정하자는 웃기는 소리도
진보정당의 구성원으로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다원주의 사회에 수구 신문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조선 또는 조중동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다원주의는 다원주의의 적을 적절히 제압할 때 지켜지는 것이지
그냥 넋 놓고 허용한다고 해서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

강준만은 조선일보에 제몫 찾아주자고 했다.
그 '제 몫'은 폐간이다.

단지 합법적, 합리적 방법으로 당장에 폐간시킬 수 없을 뿐이지
그 신문들은 원칙적으로 폐간되(었)어야 한다.


조선일보에 대한 보이콧과 스토킹은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어제 조선일보 본사 앞에서 느낀 바
아직도 거기 남아 있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노무현 지지자고 민족주의자들이다.


이제 진보정당이 앞장 서야 한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일제 식민 지배를 미화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경제성장률 등의 지표를 통해
그 시기가 경제적으로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흔히 '반민족'이라고 일컬어졌던 것의 본질이
'반민중'이고 '몰계급'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마찬가지다.
삼성의 경비견인 중앙일보는 말할 것도 없다.

진보정당은 진보정당의 맥락을 가지고
조중동과의 대결에 들어가야 한다.

잊지 말자
"이 가뭄에 웬 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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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동권 학생회장 이명박

Forum | 2008. 6. 11. 14:55 | Posted by 김수민
이명박 정말 대책이 서지 않는 인간이다. 촛불시위를 지켜 보며 "나는 민주화 1세대"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다. 요즘 쇠고기 정국에서 비운동권 총학생회까지 들고 일어나는 판국인데,
이명박 그 자신이 비운동권 학생회장 출신이다.

당시 대학가는 운동권은 주로 써클에서 활동했고 학생회는 민주화운동보다는 이념을 떠나
정치적 야심을 가진 학생들이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대학 내 고교 동문회간 경쟁도 치열했다.

흔히 6.3세대하면 소박한 반독재 노선에 민족주의 정도를 갖고 있었다고 하지만
이때 운동권의 몇몇 인물들은 이미 마오나 카스트로를 추종하고 복장을 흉내내는 정도로
인민민주주의에 경도되어 있기도 했다.
그러니 그무렵 운동권과 비운동권 사이에는 지금의 생각보다 넘기 힘든 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한일굴욕회담으로 대학이 하나로 뭉쳐졌으며
비운동권 학생회장까지 전면으로 튀어나오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명박, 김덕룡 등등 비운동권이었다고 보면 무방하다.
정형근 같은 이들도 당시의 판에 기웃거리는 상황이었다.


이명박은 또다른 이명박을 불러오게 될까?
그건 아닐 터이다. 요즘 비운동권 총학생회장 중에 뜰 만한 인물도 없을 것이고
개나 소나 길거리로 뛰어나갔던 6.3세대와 창백하고 나른한 현 20대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제2의 정두언은 나와도 제2의 이명박은 나오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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