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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과 '작가 소개'

책이라곤 읽지 않는 | 2009. 1. 14. 03:18 | Posted by 김수민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를 읽다. 그가 이 작품을 쓰면서 깊이 알아야 했던 것은 비단 민생단사건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흐름과 당대 만주의 상황,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사정은 물론 그 시기 유행했던 노래에까지 파고 들어갔을 작가의 노고가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탁월한 감각이 발휘된 묘사의 힘으로써, 역사소설이라는 장르에 설치된 바리케이트에 걸려 그만 설명과 서사에 주도권을 가벼이 넘기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밤은 노래한다>는 아마 소설쓰기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악몽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온 오프라인의 웅성거림을 들어보니 나에 앞서 이 작품을 읽은 이들이 매우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김연수가 NL이었던 것 같아"라는 속삭임도 더러 스며들어 있었다. 나는 그런 촌평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정녕 NL의 냄새가 난다면 뒤지지 않아도 맡아낼 요량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틀간 각일의 밤을 빌려 읽으며 나는 중간중간에 저 촌평을 돌아보게 되었다. 왜냐면, 외려 도대체 그의 전력이 드러날 만한 구절을 전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제와 중공의 양압에 신음하는 조선인들을 그렸다고 해서 작가를 민족주의자라거나 민족해방파로 모는, 몰지각하고 폭력적인 독해습성이 없는 사람은 다들 나와 같았을 것이다.

의문은 '작가의 말'에서 풀렸다. 김연수가 NL임을 확인한 것이 아니라 촌평자들이 얼마나 희떠운지를 깨닫게 됐다. 단지 북한 사투리로 시를 써보았다고 해서, 촛불시위에서 만난 남총련의 깃발과 학생들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고 해서, 그가 NL이었던 것 같다고 말하다니. 물론 촌평자들이 그게 아닌 소설 텍스트의 어떤 부분(들)을 근거로 삼았을 수도 있으나, 앞서 말한 바 소설의 설정에서부터 섬세한 묘사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런 근거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만일 그 촌평자들이 작품 이전에 '작가의 말'을 읽었더라면, 작품을 읽는 내내 불필요한 선입견과 잡념에 휘둘렸을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한국사회에서(다른 나라의 사회에서는 살아보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좁힌다) 텍스트의 함의가 전력으로부터 연유된 속내 읽기에 거꾸러지는 사건은 흔하게 벌어진다.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태도다.

그런데 이렇게 써놓고 나니 내 엉덩이밑도 약간 불안하다. 나는 김연수가 여섯 해전인가에 조선일보가 수여하는 동인문학상을 받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는 책날개의 작가 소개에도 나타나 있다. 김연수 씨는 대찬 작가는 아니다 싶었었다. 그래도 나는 종래의 인물평으로 소설읽기를 덮치지는 않았다,라며 이 글의 첫 문단을 증거로 제출할 수도 있지만, 불안하기는 불안하다. 소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나는 동인문학상 수상에 대한 비판의식이 작품에 대한 필요 이상의 악평으로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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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공화국 전복 2

Forum | 2009. 1. 13. 03:07 | Posted by 김수민

한 정치학자가 어느 동네의 문화센터에 와서 설명한다. "중대선거구제에서는 소수정당이 약진할 가능성이 높고 어쩌고 설라무네..." 그러자 이웃집 박씨 아저씨가 손을 들고 질문한다. "근데요. 85년도 2.12총선 때는 민정당이 반은 묵고 들어갔잖아요. 그때 중선거구제였는데 어찌 된 건지..." 이때 학자는 아마추어의 질문을 대충 뭉개고 넘어갈 공산이 얼마간 있다. 박씨 아저씨가 이웃이자 동료 수강생들에게 밟힐 가능성은 그보다 더 높을 것이다. "아이고, 뭘 안다고. 네가 교수해라." 하지만 무엇보다 한국사회에서 이렇게 전문가와 일반인이 만나는 광경이 벌어질 가능성부터가 이미 낮다.

내가 요 밑에 붙여놓은 <가라공화국 전복>을 읽고, "세상이 그렇게 빡빡하면 안 굴러가는데..." "이 친구 참 골치 아픈 사람이로군"이라 느낀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가라공화국만큼 빡빡한 곳도 없다. 가라공화국은 실상보다 타이틀과 스펙에 의존한다. 그래서 거꾸로, 위의 예화에서처럼 이 곳에서는 타이틀과 스펙에서 열세인 쪽은 고전을 면치 못한다. 전문가가 독점한 영역을 인민대중의 손으로 넘기는 것은 봉쇄되어 있다.

한편 전문가는 자신이 입증해야 마땅한 것 바깥의 작업에 정신이 없다. 쌓아올린 실상은 허름한데, 다른 일에서 혹사당하고 엉뚱한 달인이 되는 것이다. 관련된 능력 하나 제대로 뽐내는 것으로 족한 게 아니라, 윗사람에게 잘 보이고 갈라먹을 때 옆자리 놈보다 더 많이 챙기느라 분주하다. 이 상황에서 잔머리 굴리기를 멈추기란 고속도로에서 시속 140km를 밟는 도중에 5초간 한눈 파는 꼴과 같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 가라 아닌 것은 없다. 얼렁뚱당 넘어간 부분이 조금도 없는 것은 만들어지지 않은 것, 선보여지지 않은 것이다. 질외사정에 의존하며 피임을 가라로 한 결과로 태어난 사람도, 내가 확인한 바는 없지만, 있을 수밖에 없다. 도무지 성에 안 차는 작품을 응모마감을 앞두고 에라 모르겠다며 대충 마무리 땜질을 하고 냈다가 등단하는 작가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든 작품이든 그런 결과로 태어나도 제 스스로 오롯하고 당당하게 서고, 또 타인과 사회에 행복과 이익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

다만 문제는, 쉽고 간단하며 피상적이게 가라로 말하자면, 그게 아닌 또는 그에 매우 못 미치는 경우라는 얘기다. 누가 가라를 먼저 시작했느냐, 누가 더 큰 가라를 자행하고 있느냐도 굉장히 중요하다. 가령 어떤 학생이 가라로 숙제를 했다. 하지 않은 채 백지를 펼칠 경우 선생에게 두들겨 맞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전복하자고 한 가라공화국의 일등시민은 학생이 아니라 선생이다. 얼마나 설득력이 없으면 매를 들어야 학생이 숙제를 해오겠는가. 그깟 숙제 좀 안 한다고 학생을 때리는 놈이 진짜 자신이 챙겨야 할 일은 제대로 챙기겠는가.

이런 가라로 잘난체하고, 남들을 딛고 올라서고, 돈까지 벌어먹는 세상에서 여유란 존재할 수 없다. 만약에, 저서 같은 건 낼 역량도 없으며 부지런을 떨기가 너무 귀찮으니까 어쩔 수 없이 이런 블로그에나 글을 쓰는 나 같은 사람에게, 치렁치렁 타이틀 걸고 무슨무슨 전문가니 하면서 돈도 짭잘히 버는 사람이 별 논리도 없이 대뜸 "조또 아닌 놈이 닥쳐"라고 말하고 그런 짓이 먹혀 드는 세상이 된다면, 가라로 딴 명예와 권력이 바로 누구나 응당 누려야 할 게으름과 여백마저도 앗아가 버리는 것이다. 엘리트 연주자가 펑크 뮤지션을 괄시한 다음 정작 자기네들끼리는 쓰리 코드로 연주하며 관중을 후리는 데가 바로 가라공화국이다.

어떤 과잉은 동시동소에서의 어떤 결핍을 상징하는 법이다. 전문가주의는 가까이에선 허술한 전문가를 낳고, 멀리 있는 DIY 정신을 부진으로 이끈다. 이를 타격하는 것이 곧 가라공화국을 전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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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공화국 전복

Forum | 2009. 1. 12. 00:22 | Posted by 김수민

1월 10일 오후 나는 <지금은 라디오시대>를 듣고 있었다. 사연을 읽다 별안간 조영남이 미네르바를 비하하기 시작했다. 그에 환호하던 사람들이 이제 망신을 당해 등을 돌리고 있다면서, 누가 뭐라고 하면 몰려가고 따르는 현상이 몹시 한심하다고 말했다. 공동진행자 최유라와 게스트 김영철은 전혀 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이견이 있어서가 아니라 진행과 상관이 없기 때문일 터이다. 하지만 조영남은 연달아 미네르바를 입에 올리며 오호통재라는 투로 한탄을 거듭했다.


조영남은 히트곡도 별로 없이, 심심하면 남의 노래를 가져다 부르고, 기껏 가사나 바꿔 불러대는 뮤지션으로 악명 높다. 그러나 대중은 늘 그에게 관대했다. 그는 예술가이고 연예인이니까.  한편으로는 성악과 출신다운 기본기가 있기도 하거니와, 중퇴했지만 서울대를 다녔다는 이력이 그를 보호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재롱이든 작품이든 예술가가 인상을 쓰고 비분강개조로 세상에 침을 뱉었을 때, 의미는 물론이고 재미마저 없으면 더는 참기 힘든 노릇이다. 그동안 '가라'로 해왔던 짓거리에 대해서 더는 관용을 베풀 수 없다. 그래서 무언가 심오하다는 듯 화투장을 그린 그림이나 서울대 성악과 학력 같은 데 아랑곳하지 않고, 얼기설기 쌓아올린 예술 세계를 가차 없이 난타하기에 이를 수도 있다.


역시나 미네르바와 조영남은 대조되는 사람들이다. 조영남은 재주와 실력에 비해 게으르게 살면서도 '가라월드' 속에서 누릴 것은 다 누렸다. 반면 미네르바에게는 단적으로 봐도 일단 학벌이 없고, 검찰조사에 따르면 그의 출중한 명문도 짜깁기의 결과라고 한다. 그러나, 미네르바는 작곡가나 소설가가 아니다. 아고라 경제칼럼으로 돈다발을 챙긴 적도 없다. 아니, 조영남식으로 애써 미화하자면, 미네르바는 페스티쉬(혼성모방)에서 일가를 세우기까지 했다. 남대문 불탄 이래 장관이 된 우리 만수는 그것도 못한다. 시침질도 못하는 놈들이 무슨 수로 짜깁기를 비난한다는 말인가.


이 나라의 전 영역이 가라, 가라, 가라로 세워지고 채워져 있다. 아마 이 가라공화국에서 가장 가라와 먼 것은 촛불집회의 든든한 빽이었던 '대한민국 헌법' 정도가 아닐까. 게을러빠진 나는 3층 건물을 1층으로 짓고 끝내는 일을 함부로 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찜질방 베개를 벽돌삼아 쌓아올리는 꼴은 도저히 넘겨줄 수가 없다. 학계에서 정계까지, 기업에서 운동단체까지, 우빨에서 좌파까지 가라 아닌 곳이 별로 없다. 학계를 대표로 잡아 한놈만 패자면, 나는 교수들이 식사모임이나 술자리에서 (학교나 학과의 행정 따위 말고) 학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으리라는 추측까지도 한다. 각자의 무식이 탄로나는 걸 막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정신적으로는 반지성주의와, 실생활에서는 엘리트주의와 작은 싸움을 벌여왔는데, 이제 전문가주의와 맞짱을 뜨기로 연초에 다짐을 한다. 강력한 전문가주의에도 불구하고 진짜 전문가가 나라에 드문 것인지, 아니면 본질적으로 전문가들의 가라에 의존하는 게 전문가주의인지, 이에 대해서는 일단 결론을 생략한다. 그저 전문가 타이틀로 감싸진 실상의 거의 모두가 가라인 이 공화국과 열라게 싸워야겠다. 공적 담론 뿐만이 아니라 윤리적이면서도 효과적인 한도 내에서의 사적 위협까지 동원해서!


제 정신인 사람들끼라도 서로 "세상에 그런 놈이 한둘이냐"라고 뱉고 덮는 짓은 하지 말자. 각자의 인생에서 한둘씩의 가라쟁이들을 엿먹여도 된다. 이 분업이야말로 상부상조의 정신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발견한 "그런 놈"이 너무 많으면, 추첨, 가장 기분 나쁜 놈을 추리기, 가장 만만한 놈부터 줘패기 등 여러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를 골라 잡으면 된다.


며칠 전 친하게 지내는 형과 대화하던 도중에 그에게 어떤 영어단어의 뜻을 물었다. 그랬더니 그냥 그 단어를 되풀이하여 발음하기만 했고, 나는 윽박질렀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쇼!" 그는 대답한다. "어, 그래그래. 몰라. 그래. 몰라. 어." 이 형은 사실 결코 가라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니 나의 윽박을 절실히 기다리는 곳이 굉장히 많을 것이다. 소속 단체의 강령도 모르는 정당 실무자부터 허 찔리고 학생한테 보복하는 대학 교수 그리고 대통령 각하까지, 시간 질질 끌지 말고 모르면 모른다고 대답하는 새해가 되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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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2

Forum | 2009. 1. 10. 15:09 | Posted by 김수민

몹시 유쾌한 기분이다. 검찰발표가 사실이었으면 하는 바람까지 든다. 혹은 집단창작이라도 괜찮다. 넥타이에 힘주고 전문가입네 까불던 골드 칼라들의 코가 납작해졌다. 미네르바의 글이 신자유주의의 약한 고리를 쳤다면, 검찰에 체포된 미네르바는 신자유주의의 핵심을 타격했다.

미네르바 열풍에 가담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반미네르바적 사고를 반성해야 한다. 그 원동력의 큰 부분이 전문가주의를 향한 동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진보진영도 이런 전문가주의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그리 자유롭지 않았다. 2004년 이후 한나라당 정신에 밀려나기 시작한 뒤 진보정당에서는 '정책'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정책전문가라고 하면 껌뻑 죽는 세태가 생겨났다. '정책'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방향이나 가치판단보다 도표와 수치에 대한 숙지와 기획으로 경도되어 버린 것이다. 깨놓고 말해서, 암기의 달인들이나 쌓은 서류의 높이에 초점이 맞춰진 셈이다.

미네르바의 눈부신 활약을 진보진영은 그저 입만 벌리고 좇아갔다. "미네르바 대단하다. 우리는 저렇게 못한다. 고로 열독하고 추앙하자." 세 가지를 자문해야 할 것이다. 첫째, 어찌하여 굵직한 스케일을 가지고 메네르바를 '이용'하지 못했는가. 둘째, 전문가도 아닌 미네르바가 할 수 있는 걸 왜 하지 못했는가. 셋째, 거칠고 성긴 이념에 의지해 왔으면서도 한낱 미네르바의 전문가성에 혹하게 된 자신의 컴플렉스는 무엇이었는가.


여담: 체포된 미네르바의 거주지는 서대문구 창천동이라고 한다. 신촌에 '미네르바'라는 유서 깊은 찻집이 있다. 혹시 거기서 이름을 따왔을까. 나를 비롯해서 처음 인터넷에 미네르바 바람이 불었을 때, 그 찻집 이름을 연상한 사람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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