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생 신분이었던 2001년 3월~2009년 2월(군복무 기간 포함)에 발표된 에세이 및 칼럼들 중에 열 편을 골랐다. 메시지가 마음에 들고 울림이 크면서, 미문이거나 독특한 스타일이 빛난 작품들이다. 순위는 없으며, 발표 순서대로 배열한다.
고심 끝에 작품별 해설은 생략하기로 했다. 밑줄도 치지 않았다. 괜한 주접이 될 터이므로. 단 하나만 뇌까리자면, 대중음악을 다룬 에세이가 수상작에 포함되지 않아 아쉽다.
수상작 명단
[장정일] 인생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 행복한책읽기, 2001)
[이성욱] 김동성은 태극기를 안 던졌어야 했다? (시사저널, 2002)
[박노자] 극미로 가는 더 큰 길 (한겨레, 2002)
[정운영] 프라하는 봄이었다 (중앙일보, 2003)
[고종석] 당신이 바로 하류지식인이다 (한국일보, 2004)
[김명인] 스텐카 라진 (한겨레21, 2004)
[박민규] 구구 팔십일 (한겨레21, 2005)
[박홍규] 젊은 벗이여, 당당하게 살아라 (<젊은 날의 깨달음>, 인물과사상사, 2005)
[이재현] 나, 이재현은 좌빠+자빠다 (한겨레, 2006)
[진중권] 민주노동당은 죽었다 (프레시안, 2008)
1. [장정일] 인생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 행복한책읽기, 2001)
김희선과 최지우는 참 예쁘다. 두 사람이 서로 친한지 어쩐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두 사람이 분위기 좋고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비싼 식당에서 포도주를 한 잔씩 기울이며 가끔씩 인생을 이야기 하였으면 하고 바란다. 작년인가 재작년에 네티즌들이 이런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여자 연예인 가운데 가장 공부를 못했을 것 같은 사람은 누구?' 이런 할 일 없는 사람들 때문에 연예인들은 참 피곤하다. 결과는 김희선이 1등, 최지우가 2등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며칠 전에는 신문의 한 귀퉁이에서 이런 기사를 보았다. '여자 연예인 가운데 가장 책을 읽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은?' 네티즌, 이 사람들 스토커가 아닌지 모르겠다. 결과는 김희선이 1등, 최지우가 2등. 아내의 평소 지론에 의하면 인생이란 즐기는 것이다. 책이나 공부는 어떤 권리를 얻기 위한 패스포드일지는 몰라도 결코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 해변가의 모래밭에서 햇볕을 쬐거나 물장구치기, 산에 올라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는 거나 절 구경을 하는 것, 강아지나 고양이와 뒹굴며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맛있는 음식이나 술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것, 비오는 날 아무것도 안하고 게으르게 창 밖을 바라보는 것, 공원의 벤치에 누워 햇빛에 물든 나뭇잎의 변화무쌍한 푸름을 즐기는 것, 낯선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며 이야기하는 것, 분홍 신을 구해 신고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갈 정도로 춤을 추는 것,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도록 세 끼 식사를 걸러가며 사랑하는 사람과 긴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온종일 입맞추는 것 등등. 음악은 좀 다른 경우에 속하지만 책이나 영화에서 훔치고자하는 즐거움은 앞서의 즐거움을 대신하는 빈약한 대체물일 따름이다. 열거한 즐거움들을 이웃과 함께 나누거나 다른 사람들도 누릴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확고한 원칙과 각오만 되어있다면 철저히 개인적으로 사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 오직 개인적인 만족과 즐거움만을 위해 주위에 눈을 돌리지 않고 사는 일이, 민족과 국가의 이름을 빌어 개인적인 사욕을 키우는 사람들 보다 더 신뢰가 간다. 보기만 해도 창자가 울렁거리는 이회창이나, 여성 운동을 팔아 한나라당 전국구 의원이 된 이연숙 같은 사람보다 아무도 찍어 바르지 않는 개인주의자가 훨 낫다. 예쁜 사람이 머리 나쁜 것은 신이 그만큼 공평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지 쪽팔릴 일도 아니고 사는 데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뜻에서 나는 안티미스코리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엄청 잔인하게 느껴진다. 모든 분야에서 완벽할 수 없기에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서 가장 뛰어난 장점과 특기로 성공하고자 노력한다. 예를 들어 나처럼 구구단도 못 외우고 영어도 할 줄 모르지만 기막히게 예쁜 얼굴과 몸매를 가진 여자가 있다면 그녀에게도 1등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야 하고, 타고난 두뇌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듯이 타고난 미모로도 자긍심과 성취욕을 느낄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생각해 보라. 예쁘고 머리 나쁜 여자는 식모나 점원을 해야만 당신들의 직성이 풀리나? 사실을 말해보면, 자신을 과시하고 카메라 플래시를 받고 관심의 대상이 되고 싶은 것은 비단 미녀들만의 허영만은 아니다. 성상품화니 여성 비하니 하는 것은 당사자가 느껴야 절실한 것이지 주위 사람들이 대신 해줄 수 없다. 학교 성적을 알 수는 없으나, 하려고만 했다면 김희선이나 최지우도 전교 1등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서 자신이 승부를 내야할 분야를 잘 알고 있었기에 우등상 같은 건 다른 동료들이 받을 수 있도록 양보했을 것이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네티즌들은 여자 연예인 가운데 가장 공부를 못했을 사람이거나 가장 책을 읽지 않을 사람과 같은 시시콜콜한 문제로 여담을 하기 보다 신의 불공정과 같은 좀 더 해골 아픈 문제로 골을 쥐어짰을 것이다. 두 미녀분들, 책에 대해서는 내가 좀 아는 편인데 며칠 전의 그 기사를 보았더라도 절대 책 읽지 마세요. 인생은 알죠? 앞에 쓴 그대로랍니다. 인생의 즐거운 일 가운데 분명 하나이기 때문에, 두 분이서 포도주 마실 때, 나도 그 사이에 끼어 있고 싶어요.
2. [이성욱] 김동성은 태극기를 안 던졌어야 했다? (시사저널, 2002)
이번 겨울 올림픽의 ‘김동성 사태’는 의외로 많은 문제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실격으로 처리되었다는 통보가 전광판에 뜨자, 순간 불같이 분노한 김동성은 손에 쥔 태극기를 내던진다(혹은 손아귀에서 태극기가 미끄러져 나갔다). 다음날 <조선일보>에는 ‘텃세로 우승 가로채는 짓이나, 그렇다고 태극기 내던지는 짓’이나 모두 인간 말류가 하는 짓이라고 비난하는 만평이 실렸다. 그리고 같은 신문 ‘미니칼럼’에도 김동성의 행동을 삼엄하게 나무라는 논조가 게재되었다.
그 만평이나 칼럼이 김동성에게 요구하는 율법은 물론 국가주의이다. 말하자면 국가 및 그것의 상징인 국기 앞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개인의 감정을 먼저 내세워서는 안되며 더불어 어떤 감정이나 분노도 모두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완벽히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는 강철 의지에의 요구이다.그런 맥락에서 보면 김동성은 ‘국가 대표’임에도 불구하고 이 국가주의적 모범생의 행동 방식을 취하지 않은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셈이다.
국가 대표 선발 과정에 국가를 위해서라면 감정을 비롯한 개인의 모든 것을 다 헌납할 수 있는, 요컨대 ‘국가주의 순도 측정치’ 검사도 있는지 모르겠으나, 아무려나 김동성이 잘못을 하기는 했다. 일순 눈이 뒤집히는 분노가 치솟아도 우선은 손에 든 태극기를 얌전히 개켜놓은 다음, 그 연후에야 비로소 이마로 아이스링크를 다 깨어 버리든지, 주심을 들이받든지 해야 할 일을 그는 너무 순진하게 제 감정에 충실했던 것이다. 아마 태극기를 모셔놓은 다음에 분노의 ‘액션’이 나왔더라면 아카데미 주연상은, 손 올리는 제스처 하나로 금메달을 가져간 미국의 안톤 오노가 아니라 김동성에게 돌아갔을 터이다.
한데 예의 만평이나 칼럼을 뒤집어 보면 그 이면은 너무 끔찍하다. 그것들의 요구는 한 개인의 감정이나 내면을 너무나 간단히 잘라버리는 국가주의적 ‘개작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장 공비’가 총을 머리에 대고 위협을 해도, 이승복 어린이처럼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쳐야 한다고 강요하던 반공주의의 율법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비록 어린이일망정 총구 앞에서 겁을 집어먹거나, 이리저리 갈등해서는 안된다는. 반공의 율법 앞에서는 개인의 어떤 감정도 내면도 모두 유예되거나 소거해야 한다는 광기의 이력이, 지난 역사가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활보하고 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 앞에서 끔찍함을 보지 않으면 뭘 볼 수 있을까. 난자당하는 개인성 앞에서 끔찍함을 느끼지 않으면 뭘 느낄 수 있을까.
겨울 올림픽의 주연은 국가주의·민족주의·애국주의
문제의 심층은 물론 다른 것과 연결되어 있다. 이번 솔트레이크 겨울 올림픽의 주연은 국가주의·민족주의·애국주의 3형제였다. 미국의 선정적인 애국주의가 개막식을 더럽히기 시작하더니, 거기에 러시아의 슬라브 민족주의가 미국 애국주의를 을러대면서 선수단 철수를 러시아 의회 차원에서 결의하는 데에까지 이른다. 거기에 IOC 홈페이지를 폭탄 메일로 순식간에 마비시켜 버리고 안톤 오노에게 협박 메일을 날리는 우리의 ‘신세대’ 국가주의, 대선 주자를 비롯해 김동성 문제를 초당적으로 대처하자는 우리 국회의원들의 눈물겨운 애국주의 등도 실로 ‘불광동 휘발유’처럼 불탄다.
다른 문제도 겹친다. 김동성이 실격당한 이유는 반칙이 아니다. 얼굴이 노랗기 때문이다. 전이경이 IOC 위원 선거에서 낙관적이던 전망과 달리 낙선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예의 삼형제 옆에 인종주의라는 형제 하나가 더 손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보네타 플라워스가 봅슬레이 여자 2인승에서 겨울 올림픽 사상 ‘첫 흑인’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는 점은 바로 그런 인종주의의 오랜 역사를 증거한다.
국가보다는 개인, 성적보다는 참가 그리고 세계 평화라는 구호를 걸었던 올림픽은 스스로를 배반해 온 배덕자의 역사이자 20세기 최대의 사기 중 하나이다. 거룩한 구호와 정반대로 국가주의·민족주의의 전장이 되고, 검은 애들이나 노란 애들은 알리바이용으로 배치될 뿐인 백인들의 동네 운동회가 올림픽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김동성 문제에 대한 ‘국가적’ 분노가 없으면 올림픽은 지속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국가주의나 먹고 사는 올림픽에 대해 왜 우리가 이렇게 악을 쓰고 분노해야 하는지, 또 그 분노의 엔진인 국가와 민족이라는 것은 우리와 대체 무슨 관계인지, 우리는 알 수 없는 늪 위에서 알 수 없는 적을 향해 옆차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3. [박노자] 극미로 가는 더 큰 길 (한겨레, 2002)
한겨레 2002. 12. 15
"하나 속에 모든 것이 포함돼 있고, 모든 것은 하나의 개체로 표현된다." (一卽多 多卽一) 효순이와 미선이 살해자가 법정에서 무죄평결을 받고 지은 미소를 보면서, 필자의 머리 속에서는 동양 성현들의 그 명언이 떠올랐다. 왜냐하면, “미군으로서의 자긍심”으로 가득 찬 살인자의 미소 속에서 한 인간을 그처럼 비인간화시켜버리는 집단의 내력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도 웃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속한 집단이 무기와 돈의 힘을 빌려 전세계에서 수백만, 수천만명의 목숨을 짓밟았으면서도 이에 대해 한번도 제대로 참회하지 못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열등 인종’을 살인하는 것이 왜 나쁜지 모르겠다는 그 얼굴 속에서, 살인적인 경제제재로 굶어죽거나 약이 없어서 죽은 수백만명의 이라크의 효순이와 미선이들의 부어버린 배들이 보였고, 폭격과 기아로 사지가 찢어지거나 아사하거나 노예로 팔려버린 아프간의 효순이와 미선이들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이 모든 대형 국가범죄에 유죄판결을 내리기는커녕 ‘테러와의 전쟁’을 찬양하는 그들의 무수한 신문과 방송들의 자만에 가득 찬 어조가 기억났다. 장갑차를 몰고다니는 살인자뿐만 아니라 그들을 ‘자유세계의 수호천사’라고 치켜세우는 펜과 카메라의 살인마들도 전세계의 효순이와 미선이들을 깔아뭉개고 있다.
이 폭력과 오만은 우리뿐만 아니라 전세계로 하여금 지속적인 ‘인신 제사’를 요구하는 지구적 차원의 힘과 죽임의 사교(邪敎)다. 그 사교의 광신도들이 우리에게 강요한 희생이 우리의 분노를 일으키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한햇동안 전세계의 수많은 효순이와 미선이들을 굶어죽게 만들거나 폭격·지뢰로 죽이는 광신도들에게 분노할 때, 우리의 아픔만 생각하는 것은 과연 올바른 마음가짐인가. 이라크나 아프간의 효순이와 미선이들은, 비록 얼굴과 피부가 다르게 생겼지만, 살인주의자의 손에 억울하게 죽을 때 우리의 효순이·미선이와 같은 고통을 받고, 그 부모의 통곡소리도 결코 다르지 않다.
우리가 효순이와 미선이를 추모하는 시위를 하면서 우리의 요구인 한미주둔군지위협정(소파) 개정 등을 내세우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와 함께 이라크와 아프간, 그 외 수많은 나라들의 무고한 아이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살인주의자들의 침략을 규탄하고 그들 희생자들과 연대와 동감의 뜻을 나타내는 것은 더 순리가 아닐까 자신들의 집단을 최고의 진리이자 유일한 선(善)으로 생각하는 그들과 달리, 우리가 우리의 아픔뿐 아니라 다른 희생자들의 아픔도 함께 나누는 바로 그 순간, 우리의 마음 속에서 진정한 ‘극미’(克美)가 이루어진다. 우리 안의 집단·민족이기주의를 극복하고 전세계의 상처를 우리의 상처로 인식할 때, 그들이 뿌린 악의 씨를 조금씩 제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의 ‘철권’(鐵拳)은 민족과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어제는 아프간, 오늘은 이라크가 희생되고, 내일은 북녘 아이들의 폭탄에 맞아 죽는 비명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 그들의 주먹이 전세계를 위협하는 만큼 우리도 민족과 국적을 가릴 형편이 못된다. 미군의 폭력에 의해 무고하게 죽는다는 의미에서 우리들은 이라크인들이고, 아프간의 청소년들은 모두 우리의 아이들이다. 미선이와 효순이를 추모하는 우리의 목소리에 ‘민족감정’뿐만 아니라 그들이 오래 전부터 내동댕이쳐버린 인류의 보편적 가치들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이해한다면, 그들의 태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맞서는 것이 개별적인 국가나 민족이 아닌 몇몇 공범들을 제외한 전세계라는 사실을, 전 인류가 하나가 돼서 그들의 악행을 규탄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살인을 기뻐하는 웃음은 꼬리를 감출 것이다.
4. [정운영] 프라하는 봄이었다 (중앙일보, 2003)
[정운영 칼럼] 프라하는 봄이었다
[중앙일보 2003-05-01 21:09]
국경을 넘어 밤새 달려온 기차가 프라하 중앙역에 이르렀다. 카프카의 게토, 스메타나의 조국 체크에 도착한 것이다. 미명의 적막에서 나를 깨운 것은 작가와 음악가가 아니라 예전 체코슬로바키아 시절의 한 정치인과 한 경제학자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들을 불러낸 호출 부호는 단연 혁명이고, 그들 모두 혁명의 보헤미안이었다. 보헤미아는 기원전 이곳을 정복하고 다스린 민족으로 지금은 이 지역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사회주의가 인간의 얼굴 가지면
프라하는 봄이었다. 1968년에는 '프라하의 봄'이 있었다. 서구에서 타오른 68혁명의 봉화는 부패한 자본주의 문명을 성토했고, 중국 대륙을 휩쓴 문화혁명은 주자(走資)로의 탈선을 고발했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경직된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과녁이었다. 카프카의 복권으로 개시된 60년대 해빙기에 작가 밀란 쿤데라, 영화감독 밀로시 포르만 등 문화계 지식인이 저항의 불씨를 지폈다. 불길은 공산당에서도 올랐는데, 47세로 제1서기에 오른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주역이었다. 그는 구체제를 개혁하고, 당과 사회의 민주화를 정력적으로 추진했다. 의회 제도 확립, 정당 정치 부활, 법에 의한 재판, 사전 검열 폐지 등 그의 민주주의 상식 실험을 흔히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문제는 '야수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의 역공이었다. 이해 8월 소련 탱크를 앞세운 바르샤바 동맹군 50만명이 체코슬로바키아에 진주했다. 프라하의 성지 바츨라프-영어로는 윈체슬라스-광장은 점령군과 시위대의 격돌로 피를 뿌렸고, 외국군 장갑차와 대포가 공산당 중앙위원회 청사를 겨눈 가운데 둡체크를 비롯한 개혁 지도부는 모스크바로 압송된다. 뒤따른 고문.투옥.유배.숙청 등 '사회 정화'의 미친 바람 속에 프라하의 봄은 여지없이 뭉개졌다. 프랑스의 코스타-가브라스 감독은 당시의 고통과 좌절을 영화 '고백'으로 만들었는데 취조가-배후의 권력이-얼마나 간악하며 사람의 육체가 얼마나 나약한 것인지를 리얼리즘보다 '리얼한' 이브 몽탕의 연기로 모골이 송연하도록 그려냈다.
이해 11월 소련은 소위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천명한다. 한 사회주의 국가의 행동으로 주변국 생존이 위험할 경우 이를 사회주의 진영 전체의 위협으로 간주해 주권을 제한할-무력으로 개입할-권리가 있다는 희한한 주장이다.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를 '살해하고' 급조한 명분이었다. 프라하 시위대의 구호대로 "레닌이 깨어나 브레즈네프가 미쳐버린" 것일까? 이듬해 공산당에서 제명된 둡체크는 잠시 터키 대사로 유배됐다가 슬로바키아 지방의 산림 감시원으로 목숨을 부지한다. 새 권부는 반혁명을 물리치고 '정상화'를 되찾았다면서, 봄을 빼앗은 대신 빵을 늘리는 '실질적 사회주의' 건설을 약속했다.
자유란 참 묘한 것이어서 한번 맛들이면 좀처럼 끊기 어렵다. 바츨라프 하벨을 위시한 민주화 인사들은 작품과 무대에서 줄곧 프라하의 봄을 풀무질했고, 스웨덴 한림원은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줌으로써 잊혀진 봄에 대한 국제 사회의 관심과 연대를 부추겼다. 나치의 학생 학살 50주년 기념일을 맞아 대학이 휴업과 시위를 결정한 89년 11월 체코슬로바키아 민중은 공산당 체제에 전면전을 선포했다. 이에 극장들도 동조했는데 이것이 '벨벳 혁명'의 발단이었다. 혁명은 거리의 폭력이 아닌 극장의 우단 의자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벨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둡체크는 연방의회 의장으로 복귀했다. 봄에서 벨벳으로! 20년 방랑 끝의 멋진 복수였다.
극장 의자에서 시작된 벨벳 혁명
프라하를 보려거든 동구의 물이 빠지기 전에 보라고 했다. 그러나 홈쇼핑 채널의 비만 치료제 선전에서 역전 광장의 섹스숍까지 도처에 서구의 물이 찰랑거렸다. 개나리와 진달래만 피라는 봄은 아니니까…. 체크의 젖줄 블타바-몰다우-강을 가로지르는 카를루프 모스트-찰스 브리지-는 정재와 미연의 10년 사랑이 이뤄지는 커피 광고의 배경이 된다.
둡체크의 공관은 지금 한국 대사의 관저로 쓰인다. 혹시 최고 권력자의 상징이나 흔적이 있더냐는 질문에 L대사는 "전혀 없어요. 검소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경제학자 얘기는 뒷날로 미뤄야겠다.
5. [고종석] 당신이 바로 하류지식인이다 (한국일보, 2004)
[이런 생각] 이문열씨 인식에 중대 착오 · 대중적 인기로 정치 선동
벌써 이태 전 일이지만, 소설가 이문열씨는 시민운동 단체들을 홍위병이라고 몰아쳤던 자신에게 항의해 그의 책 반환운동을 펼친 부산의 한 사진가에게 ‘당신 전라도지?’라고 다그친 바 있다. 기자는 그 사건을 살핀 한 칼럼에서, 이씨가 그 동안 되풀이 보여준 엽기적 언행을 생각하면 그의 ‘전라도’ 발언이 놀랄 일도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정작 놀라운 것은 그의 양식 있는 문단 동료들이 그의 반사회적 발언에 침묵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자는 그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이씨에게서 아무런 시민적 양식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최근 그의 산문집 발간에 즈음해 신문 지면 위에 흩날렸던 그의 발언들을 읽으면서도 윤리적 감수성이 발동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곰곰 생각하면 주관적 윤리의 수준에서 이씨의 바탕이 별나게 무르다고 단정할 이유도 없다. 그가 정부와 개혁 진영에 험담의 팔매질을 해대는 것도 그 나름의 애국심, 구국의 일념에 바탕을 둔 것일 테니 말이다. 사실, 애국심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이 살아온 기자는 이씨의 나라 사랑 앞에서 외려 옷깃이라도 여미며 부끄러워해야 할 처지다. 심미적 수준에서도, 그에게 ‘부름’을 내렸다는 ‘한국 보수세력’의 눈에는 그의 악담과 선동이 아름답게까지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윤리나 심미와 무관한 ‘순수이성’의 수준에서, 이씨의 자기 인식에 중대한 착오가 있다는 지적은 해야겠다.
한 석간 신문을 보니, 이씨는 이른바 ‘개혁’이나 ‘진보’ 쪽에 궁둥이를 걸친 인텔리들에게 ‘하류 지식인’이라는 판정을 내린 모양이다. ‘하류’니 ‘상류’니 하는 말이 그 자체로 천하기는 하지만, 그의 판단이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자는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한 가지만 짚자. 그가 자신이 비판하고 있는 대상에게 ‘하류 지식인’이라는 딱지를 붙였다면, 그 발언은 적어도 자신은 ‘하류 지식인’이 아니라는 인식을 깔고 있을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자신이 ‘상류’ 지식인이라는 인식을 깔고 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기자는 이씨에게 동의할 수 없다. 이씨는 무슨 근거로 자신이 ‘하류 지식인’이 아니라고, ‘상류 지식인’이라고 판단하는가? 그가 다녔다는 대학이 ‘상류’ 대학이고 몇몇 ‘상류 지식인’을 배출했기 때문에?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국민 작가’가 모교의 명성이나 몇몇 뛰어난 동문의 이름에 기대 자신의 ‘상류 지식인’ 됨을 확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책을 수천만 부나 팔았기 때문에? 그러나 이것도 석연치 않다. 그의 눈부신 책 판매량은 그가 재주 있는 대중 작가라는 증거는 될 수 있어도 그가 ‘상류 지식인’이라는 증거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씨는 우리 시대 최고의 대중 작가고, 그가 지닌 문화 권력의 대부분은 그의 이런 대중성에서 온 것이다. 그의 들큼한 문장에 녹아 난 수백만의 ‘천둥벌거숭이들’(이들은 이씨가 애호하는 또 다른 전문용어로는 ‘홍위병’이다)이 그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고 있다. 소설가 장정일씨는 이씨의 행태를 비판적으로 살핀 한 칼럼(문화일보 2월16일자)에서 그를 ‘엘리트’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그 ‘엘리트’라는 말이 ‘엘리트 문학의 생산자’라는 뜻이라면 기자는 그것이 터무니없는 규정이라고 생각한다. 독자들에게 일정한 심미적 훈련을 사전에 요구하는 문학이 엘리트 문학이라면, 외려 장정일 문학이 이문열 문학보다 ‘엘리트 문학’에 근접해 있다.
대중 작가로서의 이씨의 재능은 그를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만든 대신, 그가 ‘상류 지식인’이 되는 것을 방해한 것 같다. 이문열씨! 자신에 대한 비판을 지역주의의 틀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이 바로 하류 지식인이다. 제 소설의 대중적 인기를 정치 선동의 엔진으로 삼으며 ‘헤헤거리는’ 당신이 바로 포퓰리스트다.
6. [김명인] 스텐카 라진 (한겨레21, 2004)
“넘쳐 넘쳐 흐르는 볼가 강물 위…”로 시작되는 <스텐카 라진>이라는 제목의 그 노래를 불러본 지도 꽤나 오래되었다. 4반세기도 더 전, 대학 시절에 벗들과 모여 주점에 가거나 엠티를 가서 이 노래를 부르지 않은 적은 단 한번도 없을 정도로 추억의 애창곡이었다. 특히 대성리나 청평 등 강물이 흐르는 곳으로 엠티를 가서 나룻배로 강을 건널 때, 강물 위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맛은 각별했다. 에카테리나 여제가 연모했다고 전해지는, 또 다른 농민반란군 수괴였던 푸카체프와 함께 우리 70년대 후반 구닥다리 운동권들에게는 녹두장군의 러시아 버전으로 기억됐던 스텐카 라진을 추억하는 그 노래를, 그때는 질리지도 않고 참으로 목청을 다해 수없이 불러댔다.
러시아 민요 <스텐카 라진>의 모순
그러나 80년대에 와서 다른 노래들, 광주항쟁 이후의 <님을 위한 행진곡>, 또 조금 뒤의 <그날이 오면> <광야에서> 등등의 토종 386 노래들에 밀려 그 노래는 더 이상 잘 부르게도 들리지도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80년대 말쯤 개봉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한 영화 <프라하의 봄>에서 그 노래가 ‘프라하의 봄’을 짓밟은 소비에트 점령군 장교들의 회식 자리에서 마치 승전가처럼 불려지고 그것을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역겨워하는 장면에서 다시 듣게 되었을 때 복잡한 모욕감을 느꼈던 일이 기억난다. 침략군의 승전가로 불리는 것, 날라리 같은 자유주의자에 의해 그것이 경멸되는 것 모두가 조금 견디기 어려웠다. 그 이후 이 노래를 다시 부를 일은 없었고, 가끔 러시아 민요 음반을 통해 조금 복잡한 기분으로 종종 들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며칠 전, 차 안에서 이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니콜라이 갸우로프라는 유명한 베이스 가수의 부음을 전하는 FM 음악방송에서 그의 목소리를 통해 이 노래가 다시 흘러나왔다. 진행자는 이 노래의 가사가 농민반란군의 지도자인 스텐카 라진이 공주를 납치해서 볼가강 배 위에서 그녀와 주연을 벌이다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농민들의 항의를 듣고 문득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공주를 강물 속에 빠뜨리고 다시 농민들 속으로 들어간다는 내용임을 전해주었다. “교만할손 공주로다, 우리들은 주린다” “꿈을 깨친 스텐카 라진, 장하도다 그 모습, 외롭도다 그 모습” 우리가 불렀던 그 부분이다. 우리는 그 시절, 혁명과 반란의 대의 앞에서 사랑도 가차없이 버린 영웅 스텐카 라진에 대한 경외의 마음으로 이 노래를 그렇게 수없이 반복 재생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설명을 듣는 순간 나는 문득 스텐카 라진은 그렇게 다시 농민 속으로 들어가서 영웅이 되었겠지만, 납치되어 반란군 수괴의 노리개가 되었다가 한순간 수중 고혼이 되고 만 그 공주는 얼마나 끔찍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갸우로프의 그 장려한 목소리의 뒤에서 코러스를 넣는 합창단 속의 여가수들은 이런 내용의 노래에 아무 의식 없이 그렇게 고운 음성을 바쳤을까 하는 생각. 또 그 시절 함께 노래를 부른 동료 여학생들은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혁명이며 반란이며 이런 일들이 얼마나 반여성적이며 반생명적인가 하는 생각, 그리고 역사의 뒤꼍에서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희생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고 세상의 모든 찬가며 기념비며 헌사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생명의 찬가라면 모두 함께 부르리
세월이 많이 흘렀다. 세상은 여전히 착취와 억압과 기아와 살육이 횡행하는, 그러면서도 아무도 그렇다는 사실을 입을 열어 말하지 않으려는 ‘침묵의 아비지옥’이지만, 그 지옥을 또 다른 지옥으로 대체하는 일을 꿈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다시는 <스텐카 라진>을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 뒤에 누군가의 피와 눈물을 숨기고 있다면, 그 어떤 찬가도 행진곡도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기념비에도 그 어떤 헌사에도 고개 숙이지 않을 것이다. 다른 힘과 다른 지혜로, 다른 정의와 다른 사랑으로, 아무도 억압하지 않는,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 낮은 음정으로, 여럿이 불러도 혼자 부르는 것 같은 그런 노래만을 부를 것이다.
7. [박민규] 구구 팔십일 (한겨레21, 2005)
웰빙은 즉, 뺄셈이었다. 그런 눈치를, 이제 우리도 긁었다. 적게 먹고, 업무량과 스트레스를 줄이고, 생활의 속도를 줄여 느리게 살고, 한적하게, 그리하여 심신의 여유를 지키는 것이 웰빙이란 사실을, 이제야 비로소 우리는 알게 되었다. 덜자, 그리고 줄이자, 버릴 것은 버리자, 빈 채로 남겨두자, 빼고 나니 살 것 같다, 이제 좀, 잘 살아보자. 인식의 전환이 있기까지는 - 잘 살아보자 외치며 달려온 지난 50년의 덧셈이 있었다. 개인도 사회도 모으자, 키우자, 찌우자, 채우자로 살아온 웃지 못할 시절이었다. 얼마든지 드세요. 소고기 뷔페가 있었고, 본전을 뽑느라 과식을 하고 소화제를 털어넣던 인간들이 있었다(먹을 땐 꼭 보릿고개 얘기를 했지, 한 오분). 야근에 특근에 잔업에 휴가 반납을 해가며 넓힌 집에, 넓어진 면적보다 두세배 많은 가구를 채워넣고 만족해하던 우리가 있었다.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바쁜 게 자랑이고, 복부 비만을 풍채라 여기고, 큰 차를 타는 게 자랑인 한국인들이 있었다. 그렇다. 이제 그것이 웰빙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알게, 되었다. 비로소 이제 당신도 내 말에 공감하겠지만 웰빙은 즉, 뺄셈이다.
이제 곱셈을 하는 거야
이제 덧셈을 하는 한국인은 없다. 모두가 웰빙을 해서가 아니라, 차곡차곡 예컨대 은행적금 같은 걸 재테크라 믿을 촌뜨기는 한국에 없다. 돈은 그렇게 버는 게 아니란 걸 우리는 알아버렸다. 그런 눈치를, 긁은 지도 오래다. 주식(株式)은 어느새 우리가 일용할 주식(主食)이 되었고, 부동산은 바야흐로 전 국민이 뛰놀고픈 꽃동산이 되었다. 돈은 이렇게 버는 거야, 그것은 곱셈이었다. 큰돈을 굴리든 쌈짓돈을 굴리든, 늙으나 젊으나 우리는 곱셈을 익히고 또 익혔다. 그것은 열풍이었다. 사오 이십, 사륙이 이십사… 칠일은 칠, 칠이 십사… 소고기 뷔페에서 열심히 고기를 집어넣던 일념으로 우리는 구구단을 외기 시작했다. 구구단은, 이를테면 글쎄 얼마 전에 산 주식이 상장되거나, 눈치로 사둔 땅이 덜컥 개발 열풍을 타거나, 시세차익으로 글쎄 얼마를 챙겼지 뭐니 - 로 구술되었다. 제가 요즘 팔단을 외웁니다. 그럼 팔육은? 사십팔! 부럽습니다. 저는 아직 삼단을 외고 있는데. 말하자면 한국인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인식의 전환은 - 실은 덧셈에서 곱셈이 된 것이지, 뺄셈으로 이어진 게 아니었다. 지글지글, 연기 한번 자욱한 우리들의 한국은, 여전히 후끈한 단체환영 소고기 뷔페다. 자, 많이들 드시오. 구구 팔십일, 이제 더는 욀 것도 없다(아차, 요즘은 인도의 십구구단을 외어야 한다지).
웰빙은 나눗셈이어야 한다
웰빙을 해봐서 알겠지만, 당신은 이것이 웰빙이 아님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안쓰럽고, 말하자면 촌스럽다. 즉 소고기 뷔페에 앉아 있는 80년대의 인간, 그 인간의 이마에 맺힌 땀을 쳐다보는 2005년의 인간, 그 인간의 안쓰런 마음 같은 것이 자꾸만 일어 나는 그만 웃지도 못하겠다. 아니 실은 울고 싶은데, 울지도 못하겠다. 미련한 것은 울거나 웃을 감정의 대상이 아니므로, 그런 것이므로. 말하자면 이제 웰빙은 즉, 그래서 나눗셈이어야 한다. 결국 우리가 괴로운 것은, 어떻다 해도 돈이 많아야 장땡이란 저 간단하고 명쾌한 진리 때문이다. 그것은 부정할 수도, 부정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소고기는 어쨌든 몸에 좋은 것이고, 곱셈은 편리한 것이며, 구구는 팔십일이니까. 불변의 진리를 시시하게 만드는 방법은 빨리 진도를 나가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나누기 시작한다면, 삼단이든 오단이든 각자의 레벨에서 나눗셈을 시작한다면, 곱셈은 곧 누구나 통과해버린 시시한 셈이 되고 말 것이다. 아마도 그 기분을, 웰빙을 경험한 당신은 알 것이다. 구구 팔십일 외치는 게 시들해지는 세상은, 그래서 당신과 내가 얼마나 나눌 수 있느냐에 승부가 달려 있다. 웰빙하자. 구구단은 이제 그만,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
8. [박홍규] 젊은 벗이여, 당당하게 살아라 (<젊은 날의 깨달음>, 인물과사상사, 2005)
젊은 날, 오로지 당당하게 살고 싶었다. 그 맑은 눈에 어른들이 당당하지 않게 보여, 그들처럼은 살지 않으려 했다. 중학교 1학년 때인가,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는 작문 숙제에 나는 선생 아닌 다른 것은 무엇이라도 좋다고 썼다가 심한 꾸중을 들었다. 선생인 아버지와 친척들, 그리고 학교 선생들에 대한 반항 탓이었다. 그러나 나도 선생이 되었고, 나의 선생들처럼 당당하게 살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젊은 벗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당하게 살아라!
당당하게 산다는 것은 홀로 자신만의 삶을 사는 것이다. 어떤 인연의 무리든 간에 그 속에 뒤섞여 자아를 잃고 살지 말라. 어려서부터 무리 속의 삶에 지쳤던 나는 부모, 형제, 처자까지 남들과 똑같이 대하고자 노력했다. 기타 혈연, 지연, 학연, 지연 따위는 철저히 무시했다. 따라서 동창회든 종친회든, 등산회든 골프회든, 친목계든 관혼상제든, 교회든 절이든 일체의 모임에 가지 않는다. 젊은 벗이여, 고독해라!
내게는 그런 인연으로 맺어진 동기, 동료, 선후배나 스승, 제자, 벗이 없다. 물론 스승, 제자, 벗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배울 만하면 스승이고, 가르칠 만하면 제자이며, 마음이 통하면 벗이다. 그들은 오직 인간 대 인간으로 그렇게 관련될 뿐이다. 따라서 스승이라고 해서 우러러볼 것도, 제자라고 해서 낮춰 볼 것도 아니다. 사실은 모두 벗이다. 사랑도 마찬가지 아닌가? 젊은 벗이여, 모든 인간을 벗삼아라.
당당하게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어떤 지배, 명령, 복종, 지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벗으로서의 자유와 평등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어떤 권력이나 이데올로기부터도 자유롭고, 영웅주의나 천재주의도 인정하지 않는 모든 인간의 평등한 존엄과 가치를 지켜라. 그리고 그런 세상을 꿈꾸고 그렇지 못한 현실에 당당히 맞서라. 미래에 대한 비전 없이, 현실에 대한 도전 없이 당당한 삶은 있을 수 없다. 젊은 벗이여, 꿈꾸고 맞서라!
당당하게 산다는 것은 참된 벗일수록 각자가 분명한 자신의 생각을 갖고 그것을 굽히지 않으며 실천하는 것이다. 자기 생각 없이, 아니 아무 생각 없이 남들에 떠밀려 사는 사람들을 어려서부터 많이 보아온 나는 남들과 똑같은 소리를 하거나 글을 쓰는 자를 경멸한다. 특히 자기 생각을 굽히거나 말과 행동이 다르게 사는 자를 스승은커녕 벗으로도 삼지 말라. 젊은 벗이여, 굽히지 말라!
물론 이처럼 당당하게 산다는 것은 이 세상 어느 나라보다 한국에서 특히 어렵다. 그래서 나는 다시 말한다. 젊은이여, 그럴수록 더욱더 당당하게 살라고. 오로지 당당하게 당당하게 살라고. 당당하게 사는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젊은 벗이여, 저 도도한 패거리 문화가 만드는 억압과 불평등, 무사상과 무실천의 야만을 당당하게 갈아엎어라!
2005년 4월에
박홍규
9. [이재현] 나, 이재현은 좌빠+자빠다 (한겨레, 2006)
이재현의 인물로 세상읽기/이재현
난 ‘좌빠’다. 최근 유행하는 식으로 딱지 붙이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십 수년 동안 겪은 정치적 환멸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환멸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욱 더 좌파 이념을 믿어왔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이제 나는 내 믿음대로 세상이 확 뒤집어지거나 혹은 방향을 홱 바꿔 굴러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믿고 있는 바는, 옛날 식으로 표현해서, ‘숨은 신’이다.
요즘 ‘죽은 개’ 취급을 당하는 어떤 철학자는 딱 160년 전에 유명한 명제를 통해 세계의 해석보다 세계의 변혁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 말을 처음 접한 이십대 초반의 나는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가. 하지만 지금은 일단 세계를 해석하는 것, 즉 ‘단지 다양하게 해석’하는 것 중에서 하나라도 제대로 해내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음을 잘 안다. 독일어로 ‘다양하게’란 말은 ‘죽은’ ‘서거한’이란 뜻도 지닌다. 그 말이 어원상 칼로 무언가를 갈라서 분리한다는 뜻에서 비롯된 탓이다. 헌데, 세계를 바꾸기는커녕, 내 나름대로 세계를 이리저리 갈라보며 분별하는 것도 매우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 먼저 재빠르게 세계의 변화가 나를 베어버렸다.
좌파와 달리 좌빠의 좋은 점은, 세계의 칼에 베여도 결코 죽지 않는다는 거다. 세계는 나를 바꾸지도 못하고 심지어 세계는 나를 해석하지도 못한다. 내 쪽이야말로 흐르는 강이므로 세계는 같은 나를 두 번 건널 수 없다는 식이다. 이거야말로 환멸과 상처를 십 수년 이상 견디고서 얻은 나름의 지론이다.
나는 한쪽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잽싸게 읽어내려고 애써 노력해 온 반면에, 다른 쪽으로는, 없이, 둔하게 살아왔다. 없이 살아왔다는 건, 내게 없는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해외에 한번도 나가 보지 못했다. 못한 거냐 안한 거냐 라고 묻는다면 둘 다 라고 답해야 맞을 것이다. 둘째, 차도 없고 면허도 없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다. 면허를 딸 여유가 있다면 차라리 영어 작문이나 회화 공부를 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신용카드를 가져본 적이 없다. 특별한 직업이나 기술이 없는 나로서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이었다.
세계는 나를 바꾸지 못해
좌빠로서 세상을 견디며 사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렇게 나는 살아왔다. 또 멍청하고 둔하게도, 이렇듯 내게 없는 세 가지를 내심으로는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다. 안에 틀어박혀 있지만 책과 신문과 인터넷이면 충분해. 배기 가스로 공기를 더럽히거나 주차 문제로 열 받아 싸우지는 않아. 카드를 안 쓰니 거대 전자관리시스템이 내 사생활 정보를 속속들이 알 수는 없어.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세계가 나를 변질시키기 전에 내가 먼저 세상의 변화를 읽고 쓰는, 새로운 길을 찾는 과정에서 나는 과거의 내 친구나 동지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은 적이 있고, 지금도 간간이 그러하다. 나로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지만, 문학평론을 때려치우고 만화평론‘이나’ 한다든가 또 요즘에는 그 만화평론‘도’ 하지 않고 있다든가 하는 비난이 그것이다. 대학에서 보따리 장사를 해서 최저생계비의 일부를 벌기 위해, 내가 늦깎이로, 예컨대 만화 및 사진을 포함한 이미지의 역사나 문화 이론 등을 힘들게 공부해 가는 게 옛 친구들로서는 이해될 리 없었던가 보다. 그런데 나이 먹은 좌빠로서 이런 분야들을 새로 공부하는 것은 어려움도 크지만 즐거움도 많다. 제대로 공부해보자고 맘을 먹으면 신이 나서 뇌에서 엔돌핀, 즉 마약이 마구 분비되는 것이다.
난 ‘자빠’이기도 하다. 자빠로서 나는 신자유주의와 싸우는 걸 중요한 임무로 삼는다. 대한민국에서는 제대로 된 자유주의가 있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므로, 자유주의 앞에 ‘신’자를 붙인 채 사기를 치는, 낡아빠진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사람들을 착취하고 수탈하고 기만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늘 ‘전투 모드’로 임해서 매번 ‘보스전’을 벌인다. 물론 나의 전투는 거리에서의 몸싸움은 아니고 말이나 글로 싸우는 거지만. 이런 점에서, 나는 얼마 전에 보석으로 풀려나서 재판을 벌이는 홍콩 WTO(세계무역기구) 반대투쟁의 한류 전사들, 그 11명의 ‘수퍼 코리안’들에게 송구스러움을 느낀다.
아직,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 맞아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자유주의를 말하는 것은 여러모로 곤혹스러운 일이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내가 놀던 동네에서 자유주의자라는 것은 심한 욕이었으므로, 자빠로서 내가 말해 온 것은 고전적, 혹은 역사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자유해방주의(libertarianism)라고 변명을 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정치, 사회 영역에서든 문화 영역에서든 자유해방주의를 제대로 실천하려면 난봉꾼이 되어야 하는 법인데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기에는 나는 너무 약하고 소심하다.
자유주의를 말하기 힘든 현실
좌빠든 자빠든 간에 학삐리로서 말이나 글로 싸우다 보니까 모국어의 쓰임새에 늘 민감하다. 남한에서 최초로 일본어 등에 의존하지 않고 본격적, 전면적으로 모국어로 배우고 생각하고 느끼고 표현한, 최초의 세대가 문학 쪽의 4.19세대일 것이다. 모국어를 쓰는데 있어서, 이제 칠십을 바라보는 4.19세대와 지금의 내가 다른 점은 무엇일까. 나는 80년대 대학가의 대자보를 그 정치적 활력에 압도된 채 경이롭게 따라읽어간 적이 많다. 그러면서 동시에 저렇게 글을 거칠게 쓰면 어쩌나 하는 아쉬움을 느낀 것이 그 첫 번째 차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인터넷 게시판의 글, 댓글, 답변들이 그렇다. 나를 자주 ‘낚기’도 하지만, 생각이나 표현이 너무 거칠고 파괴적이어서, 마치 단세포 동물의 단말마로 느껴지는 짧은 글들, 더 정확히는 글이자 동시에 말이니까, 그 글-말들의 황폐함에 이래저래 속이 아주 상한다.
사회적으로 모국어가 거칠게 쓰인다는 것은 다른 쪽에서 보자면 우리의 모국어가 아직 어리고 여리다는 뜻이다. 4.19세대를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겨우 40년밖에 안되는 것이다. 우리 모국어의 역사에는 아직 라블레도 없고 셰익스피어도 없고 괴테도 없지만, 없다는 얘기는 얼마든지 앞으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거칠게 쓰이고는 있지만 우리 모국어는 싱싱하고 파릇파릇하다. 모국어의 감옥이 나는 좋다.
그러니까 나는, 육칠십대와 일이십대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사회적, 언어적 계곡 사이에 위태롭게 걸려 있다. 몇 가닥 밧줄로 엮인 구름다리인 셈이어서, 매순간 출렁거리기는 하지만 두 세대를 이어준다는 자부심이 있다. 이 자부심은 지극히 주관적인 거라서 냉정한 눈으로 보자면 헛다리짚는 걸로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끊어지지 않고 계속 허공에 걸려 있는 게 어디냐며 자위하며 살아간다.
한국에는 많은 이재현이 있다. 제일 유명한 이는 CJ(씨제이)그룹의 이재현이고, 그 다음으로는 CJ 이재현보다 더 많은 현찰을 한꺼번에 직접 주물러 본, 차떼기 주역인 전 한나라당 재정국장 이재현이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이재현들이 있는데, 나-이재현의 신년 계획은 일단 두 가지다. 하나는 외국에 나가보는 일이다. 보름쯤 전에 레바논 미술가들을 만나서 얘길 나누다가, 내가 사회복지나 문화의 측면에서 우리나라 인프라가 엉망이라고 개탄하면서 아직 한국은 제3세계라고 했다가 크게 반박을 당한 적이 있다. 여전히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던 것이다.
6070과 1020 이어주는 자부심
그 다음에는 장구를 배우는 일이다. 우선 타악기는 몸과 마음에 다 좋을 거 같아서고, 게다가 또, 사람 앞날은 모르는 거니까, 만에 하나 내가 쿠바나 푸에르토리코의 장구 치는 한국 대사가 되는 날이 오면, 마구 막말을 쏟아내기 위해서다. “미국, 너야말로 범죄정권이야, 너는 역사를 위조해 왔어”라고 장구를 치듯 흥겹게 막말을 내뱉게 될 지도 모른다.
양쪽 계획에 다 곁들여서, 말하고 듣고 쓰는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앞서 말한 철학자는 만 51세 되는 해 정월 초하룻날에 할아버지가 되었고 그 해 가을부터 러시아어를 새로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 분보다는 더 오래 살 작정이니까, 새로 시작하는 공부도 그 분에 비해서는 아주 빠른 편이 될 것이다.
10. [진중권] 민주노동당은 죽었다 (프레시안, 2008)
謹弔 민주노동당
예상했던 결과다. 비상대책위원회의 혁신안은 불필요한 수순이었지만, 아무 의미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중의 눈앞에 이른바 '자주파'의 정체를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제 당의 상황을 CD로 구워 북한 공작원에 넘겨주는 해당 행위를 해도, 민주노동당에서는 결코 제명당하지 않는다. 이른바 자주파는 그냥 당기위에 올려 조금 제재나 하자는 자기들 측의 중재안까지도 부결시켰다.
1.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이른바 평등파들이 퇴장하면서 다음 안건 하나가 의결 정족수 부족으로 상정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북핵자위론을 주장했던 어느 간부에 대한 징계안이다. 하지만 혁신안의 대부분의 내용이 부결되었으므로, 설사 의결이 이뤄졌어도 징계안은 부결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게 정당하다는 것이 민주노동당의 공식 입장이라는 얘기다.
비대위에서 혁신안 부결을 불신임으로 간주한다고 했는데도 부결시킨 것을 보면, 입에 '대동단결'을 달고 사는 그들도 충실한 종북이라는 원칙(?)이 문제가 되면, 대동단결을 안 하고 싶은 모양이다. 박용진 전 대변인이 '혁신안이 부결되면 당이 깨진다'고 울먹이며 호소를 해도, 종북파들의 태도는 단호했다. 당을 깨면 깼지, 북핵의 정당성과 '본사'에 보내는 보고의 의무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 태도의 분명함은 평가해줄 만하다. 사실 내가 걱정했던 것은 이들이 대충 혁신안을 받아들여 사태를 무마한 후, 숨을 고르다가 기회를 봐서 다시 튀어나와 이제까지 했던 짓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이번에 자신들의 색깔을 명확히 드러냈으니, 앞으로도 대중들 앞에서 거짓말하지 말고, 제 정치적 목표와 정체성을 숨김없이 분명히 밝히기 바란다.
'종북노선이 문제가 아니라 패권주의 문제'라는 의견도 있다. 종북노선과 패권주의의 관계를 몰라서 하는 얘기다. 주사파들이 패권적 행태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바로 종북노선의 관철을 위해서다. 당내에서 자신들의 종북행위에 제동을 거는 세력이 존재하니,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벌이는 작태가 바로 패권주의가 아닌가. 따라서 종북노선이 존재하는 한 패권주의는 영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손석춘 씨가 "통일운동에 찬물 끼얹지 말라"고 했던가? 북한에서 핵무기 만드는 것을 옹호하는 것이 그가 원하는 '통일운동'이라면, 그런 통일운동에는 앞으로 찬물이 아니라 똥물을 끼얹을 것이다. 그는 또 '인간에 대한 예의'를 말한다. 그의 독특한 윤리 감각에 따르면, 제 동지들 신상 파악해 북한에 보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이고, 그걸 비판하면 인간에 대한 예의를 져버린 패륜 행위다.
옆에서 김민웅 씨도 거든다. 내 기억에 2002년인가? 제 동생이 서울시장 선거에 나왔을 때,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전쟁난다며 민주당에 표를 몰아달라고 해서, 나와 설전을 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쟁 위기까지 고취하며 민주노동당에 표주면 사표가 된다고 했던 그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갑자기 민주노동당에 대한 살가운 애정을 드러낸다. 그새 그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종북파의 정체를 몰라서 그런 발언 했다면 용서가 되겠지만, 그들을 접해 본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상황을 설명해주었고, 이번 대회에서 종북파의 정체가 명확히 드러났는데도 앞으로 계속 이 그들의 행태를 옹호하고 정당화한다면, 앞으로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종북파에게 갖춰야 할 인간적 예의가 있겠지만, 내게는 통일 되는 날 김정일 정권 아래 고생했던 북조선 인민들에 갖춰야 할 인간적 예의가 앞서기 때문이다.
3.
굶주린 북한 주민들이 먹을 것을 찾아 압록강을 건너다가 익사했다고 하자, 태연히 "남한에서도 여름에 익사 사고 나지 않냐"고 대꾸하던 이들. 동성애에 대해 묻자 버젓이 "자본주의적 퇴폐"라고 대답하던 이들. 북한에 갔을 때 안내원에게 노래를 하나 불러달라고 하자 지도원 동무에게 허락을 받고 노래를 하더라며, 이를 "집단주의의 미덕"이라고 찬양하는 이들. 미선이 효순이 끔찍한 사체 사진을 연하장(?)만들어 돌리는 이들. 이런 이들하고 같이 '진보'를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몇 년 전에 내가 당에 절대로 주사파를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을 때, 민주노동당 내의 모 인사가 "그들도 언젠가 변할 것"이라며 주사파들과 나의 화해(?)의 자리를 주선한 적이 있다. 그때 만난 주사파는 내게 자신이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민주노동당 가입을 권유하는지 자랑을 했다. "동지, 김 주석이라면 이 상황에서 무엇을 했을 것 같소. 내 생각에 김 주석이라면 남조선 상황에서는 민주노동당을 했을 것이요."
도대체 이런 사람들하고 진보정당을 같이 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 내가 얼마나 참담했겠는가. 종북주의자들이 온갖 편법으로 민주노동당의 조직을 장악해 들어와도 징계 하나 제대로 못하는 것을 보고, 나는 이미 당시에 민주노동당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그때 내가 탈당으로써 경고했던 일이 지금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운동을 해 봤다는 사람들이 결국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말인가? 이것도 이해가 안 간다.
이른바 평등파도 한때 망해가던 소련을 모델로 삼은 적이 있지만 동구의 몰락을 보고 생각을 바꾼 것처럼, 북한을 모델로 삼는 자주파도 언젠가 생각을 바꿀 것이다. 이게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언젠가 변할 것'이라는 기대는 주사파의 본질을 모르는 얘기다. 주사는 이성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 어떤 경험적 증거, 어떤 정합적 논리, 어떤 상황적 변화를 들이대도 깨지지 않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다.
4.
오늘로써 민주노동당은 죽었다. '본사'와 연락을 방해하던 세력이 다 나갈 터이니, 이제 이름도 자기들이 애초에 원하던 대로 '민족자주당'으로 바꾸는 게 어떨까? 그들은 드디어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다. 그들에게 축하의 말을 보내는 바이다. 앞으로 '본사'와 더 긴밀한 협력 아래 '조국은 하나다', '당과 인민도 하나다' 철학을 힘차게 구현해 나가며, 앞으로 진보진영과 아무 관계만 없어 주기를 바란다.
'북한에 정말 아사자가 생겼는가?' '아니면 미제의 공화국 모략 선동인가?' '북한의 핵무기가 정당한가?', '북조선에서는 정말 당과 인민이 하나인가?' '그래서 조선노동당을 비판하면 곧 북조선 인민을 모독하는 것이 되는가?' 이젠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제로 논쟁하느라 정력 낭비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평생 그렇게 믿고 살다가 죽게 내버려두고,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21세기 디지털 시대를 여는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의제를 향해 진보를 하면 그만이다.
민주노동당의 분열을 끝까지 막아보려고 남아 있었던 이들. 당신들의 생각과 충정을 존중한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으니, 더 이상 쓸 데 없는 노력을 접고 진정으로 현대적인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길에 나서라. 그리고 자신이 최소한 주사파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 남한의 진보정당이 최소한 조선노동당의 지사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이제 미련을 털기 바란다.
진보정당을 재건하는 과제가 생겼다. 다시 시작하려니 모든 것이 막막할 것이다. 하지만 8년 전의 상황을 기억해 보라. 그때는 지금보다 더 절망적이었다. 운동권 내에서 변화와 혁신을 거부하는 수구세력에 대한 기대는 접어버리자. 그리고 앞으로 진보정당의 새로운 토대가 될 이들에게 눈을 돌리자. 사회에 진보적 역량은 충분하다. 그 역량은 이제까지 낡은 운동권 방식, 낡은 주사파 형식으로 표현되기를 거부해왔을 뿐이다.
이미 수많은 이들이 새로운 진보정당에 참가할 뜻을 밝혔다. 남한의 진보운동이 드디어 거추장스런 주사파의 족쇄를 풀어버렸다. 몇 년 전에 버렸던 진보정당의 당원증 다시 주워들고 싶다. 오랜 세월이 걸릴지도 모르는 힘든 길이다. 하지만 진보하기를 포기할 수 없다면, 끝을 알 수 없는 길이라 하더라도 걸음은 내디뎌야 한다. 거대한 위기는 동시에 위대한 기회다. 건설될 새로운 진보정당에 입당을 신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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