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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 논란, 해명5부작에 초점 맞추죠

Forum | 2009. 3. 3. 02:09 | Posted by 김수민

신해철의 해명 글이 올라온 곳은 신해철닷컴인데, 회원가입을 하지 않으면 볼 수 없게 되어 있군요. 이거 영 낚이는 것 같아 찜찜하긴 했지만, 원문을 모두 봐야겠다는 생각에 가입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 그는 사교육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혔군요. 스스로 예찬론자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나, 많은 사람들이 어림하고 멋대로 추측한 것보단 훨씬 더 과격한 사교육 옹호론이었습니다. "이명박 덕택에 득템" 발언을 정권을 조롱하는 퍼포먼스라거나 혹은 그러려는 척하면서 위기를 돌파하려는 꼼수로 읽어내신 분들의 자리는 더 좁아졌습니다. 애초에 그건 속내 읽기와 혐의 씌우기의 향연에 불과했지요. 이명박이 사교육시장을 키워 결국 자신이 돈을 벌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신해철의 인식체계 내에서는 사실입니다. 이걸 곧죽어라 해석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 계신데, '이명박'이란 말을 듣자마자 광속으로 치달은 귀결이 아닌가 하네요. 이명박을 싫어할 테니까, 이명박을 조롱한 것이다? 그게 아니면 뭐냐? 신해철의 말을 통해서 누군가가 이명박이 결과적으로 조롱당했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신해철의 의도를 따져묻기 좋아할수록 되레 그렇게 생각 안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듯하네요. 사람들의 예단을 밑도는, 별 뜻 없이 뇌까린 말이라든가 다른 경우를 따져볼 수도 있고, 뭔지 모르면 그냥 접어두면 되지, 뭐하러 그런 독심술을 펼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번 해명 5부작에서 신해철은 이명박 정권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신해철이 착각한 거라는 반론은 가능하겠습니다. 노무현 정권에서도 이미 사교육비 지출은 극에 이르렀고, 2008년을 기점으로 그래프가 그다지 상승한 것은 없다거나 하는 근거를 제출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니가 무슨 의도로 이명박 이야기를 꺼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이명박 땜에 니가 득템한 건 아니다,라고 할 수는 있겠지요.

언행불일치나 자기모순의 관점에서 접근하시는 분들. 이 문제에 대해서 지난번에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 유의할 만한 제보가 들어왔네요. 라됴방송에서 사교육 문제는 하나둘셋하고 학부모들이 모두 손을 떼야 한다, 학원에 자식을 보내지 말자는 동맹을 맺자,는 이야기를 했다는 제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안을 모두에게 권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이걸 모든 사람에게 권하고, 그것이 해결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한 것인지? 학원 안 보내서 성적이 하위권이 되고 대학에 못 가도 좋으니 다같이 하자는 이야기도 아니고 할 수 있는 사람끼리만 하자는 이야기는 아닌지, 못박기 힘들다는 생각입니다. 아직은.

그 제보와 제보자 분의 해석이 맞다고 치지요. 그런데 이번 글에서 신해철은 공교육은 음식과 같고 사교육은 핸드폰 같은 것이며, 평소 그저 어린이들의 과도한 사교육을 비판하고 아이가 원하지 않는다면 학교에를 보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라는군요.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공교육과 사교육을 이야기하면서 고등학생으로 돌아가라면 학교는 안 다니고 학원에만 다니겠다고 말했습니다. 이것도 뭐 일단 접수하도록 하지요. 혹 이게 거짓말이라고 입증하실 분 계신지. 그보다 제 눈에 띄는 건, 제보자의 제보내용과 신해철의 설명이 둘 다 진실이라고 쳤을 때, 그가 이번의 비판자들 상당수가 '모순'이나 '불일치'라는 단어로써 비판받을 만한, 일관성이 있고 체계적인 사교육관을 견지하고 있는지부터가 의심스럽네요. 그간 변동이 있었던 것을 잊어먹거나 말하지 않으면서 신해철이 자신은 일관되었었다고 우긴 건지, 아니면 몇번인지 헤아리지도 못할 만큼 스스로 입장이 엎치락뒤치락했던 건지...  오히려 사태는 더 오리무중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애초에 담론지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해명 글 가운데 제가 공감했던 것은 "이 나라는 소신도 세트메뉴로 가야 하나"라는 항변이었습니다. 어떤 말을 했던 것을 두고 어떤 사람이 표하지 않은 의견, 그 여백들까지 꽉 채워버리고 나서, 인물에 대해 조작된 이미지에 걸맞지 않으면 불일치니 모순이니 하는 것은 처음부터 너무 소모적이었습니다. 아, 소모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무의미한 건 아니에요. 그런데 신해철이 했던 발언의 텍스트를 모으고(그것도 위에서 말했던 이치대로 간다면, 모으면 모을수록 더 모아야 하는 지경으로 갑니다), 라됴방송의 경우 편집 없이 모두 따서 올리는 그런 논증 작업을 굳이나 해야 하는 걸까요? 가장 무게를 둘 수 있는 건 본인이 '최근'에 '글'로 정리를 해서 올린 내용일 겁니다. 이를 두고 가치판단을 하는 게 훨 낫지요.

저는 이번 해명 5부작을 통해 확인한 신해철의 교육관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지지하지 않는 이유를 이야기하면 그만이지요. 그걸 여기서 길게 늘어놓지는 않겠지만(여기서 니가 신해철에 비판적임을 증명하라고 다그치는 얼빵한 사람 없길 바랍니다. 종전의 댓글 내용을 감안하면 없으리라고 사료됩니다만), 추천을 하자면 <레디앙>에 올라온 하재근 씨의 글이 가장 적절하다고 보여지네요. 하재근은 모순이니 언행불일치는 물론이고 학원광고를 찍지 않는 게 대안이라는 데도 동의하지 않지만, 신해철의 사교육관에 대해서 분명히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글은 "신해철 의견에 동의 못한다. 그건 이러이러해서 그르다"는 데 그치지 않고 안타깝다는 투의 감정이입을 계속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안타까울 게 뭐가 있나요. 신해철이란 사람의 의식이 그 정도인 것을.

신해철 두둔론 중에도 희한한 것들이 눈에 띕니다. "그는 좌파가 아니라 자유주의자이다." 자유주의자라도 신해철이랑 생각이 얼마든 다를 수 있어요. 좌파? 모르죠. 좌파니 자유주의자니 하는 개념과 용어를 쓸 필요가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설명을 더 편하게 해주느냐? 설명 더 편하게 하려고 경계를 죽죽 긋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별로 편하지 않아요. 진보진영의 논객들 일부가 내고 있는 관점인데, 가만 보면 박근혜처럼 "수첩 백단어"가 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듭니다.

또 어떤 분은 이 사건을 계기로 신해철이 카리스마 어린 자리를 버리고 내려왔다는 식의 의미부여를 하고 계십니다. 그게 신해철 두둔론이라는 건 아닙니다. 언제는 올라가 있었냐고 묻고 싶을 따름입니다. 예술인이고 연예인이고 공연인이니까 때에 따라 높게 올라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요. 그러나 그도, 언행불일치니 옳고그름이니 떠나서 n개의 정견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한 개인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입니다. 연예인이니까 좀 봐주라는 진중권씨의 옹호도 촌스럽습니다.

요약을 하지요. "이러려구 그러는 거 아니겠어? 그게 아니면?"이라고 어리석게 되물어야 하는 머릿속 해부법부터, 학원광고 이전에 견지해왔던 교육관을 단정짓거나 또는 그때만큼은 일관되었다고 전제하고 배신, 실망 등을 운위하는 것보다는, 신해철이 해명 5부작으로 피력한 교육관 자체에 대해 논평하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논의는 계속 신해철의 행위와 해명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한국사회의 교육 자체에 대한 성찰과 토론으로 이어지겠지요. 물론 '인물'이라는 뜨거운 감자가 빠져버려 각기 입을 닫고 숨어버릴 가능성도 있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 알죠? 그건 자신들의 주제가 한 인물을 두둔할 거냐, '처리'해 버릴 거냐,에 불과했다는 고백에 지나지 않습니다.

뭐, 학원광고를 두고 수군거릴 때는 한가했다가, 조금 더 그의 교육관에 대해서 언행불일치니 하는 공세 말고 직접적이고 자신의 본격적인 가치판단이 들어 있는 비판을 할 때가 되어서 갑자기 바빠져서 토론을 이어가지 못하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개학도 했으니깐여. 다만, 생각이라도 좀 해봅시다. 화제에서 신해철을 빼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해철의 앞뒤와 전후, 속내와 혐의에 골몰하지 말고, 그와 내가 다른 점은 무엇이며 어느 것이 옳고 그른가를 따져보자는 겁니다.

연세대에서 교육사회학을 가르치는 한준상이라는 교수가 있습니다. 그의 저서로 <국가과외>라는 게 있는데, ebs의 수능강좌를 비판하는 것이 주요 골자입니다. 좀 거칠게 그의 지론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국가가 교육에 개입하는 것은 창조성이나 다양성을 파괴하는 길이다. 글의 일부만 읽어보면 언뜻 탈-국가주의, 반-국가주의, 즉 아나키즘(이 무정부주의와 동일어가 아님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로 읽힙니다. 그러나 그는 '시장'에 대해서는 별 비판을 하고 있지 않죠. 국가의 권위주의에 저항하지만 시장의 권위주의에는 저항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의견들이 교묘하게 '국가 이외의 영역' 또는 '시민사회' 등의 이름 뒤에 시장원리의 독재와 독주를 숨기고, 자신들의 수구보수적 논리를 급진적으로 치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해철과 한준상의 견해는 서로 유사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겠지만, 이번을 계기로 국가, 시장, 공(公), 공(共), 사(私)가 얽힌 문제들을 다뤄보면 좋겠습니다. '민영화'를 덮어두고 시대적 진전으로 포장하는 이명박 정권 치하에서, 우리가 '득템' 내지 '득햏'할 수 있는 호기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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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

Free Speech | 2009. 3. 2. 14:16 | Posted by 김수민
지난 주 서울시당 당원교육과 강사단 양성을 추진하는 모임에 다녀왔다. 부러 한나라당 또는 보수인체 하는 패널을 정해 교육, 주거, 의료 분야에서 토론을 벌였다. '의무교육'을 '강제훈육'쯤으로 받아들이는 일부 당원들의 인식이 섭섭하기는 하지만, 하향적이고 일방적인 강의를 피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부터 토론으로 몰아넣은 결과였다. 마치고 나서 탁월한 선택임을 깨달았다. 올 상반기 모임은 앞으로 쭉 이런 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하려는 얼마 안 되는 '실천'이기도 하다. 그밖에 '밥과 장미'의 사업도 있고, 모 선거와 관련한 문의도 어느 당직자로부터 받은 상황이다. 그러나 더이상 요구받기는 싫고, 요구받더라도 내 불참의사가 존중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난 8년여간의 내 인생은 다소 황당하게 전개된 측면이 있다. 나는 '운동'이라는 걸 열심히, 생을 걸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 와중에 많은 것들을 포기하거나 놓쳐야만 했다. 더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당 대변인이 사석에서 "당에 취업할 생각은 없느냐"고 했다. 고마운 권유지만 내게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동안도 억지로 몸을 이끌고 가담한 것인데, 나더러 더 해달라고 부탁하면 참 우울하다. 블로그나 당원게시판에 이따금 '정치비평'이라는 걸 쓰고 있지만, 나는 언론매체에 현실정치를 다루는 글을 2008년 초에 끊었다. 논객으로서는 은퇴상황인 것이다. 근래 들어 나를 '논객'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내가 예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잘 모르신다. 그렇기 때문에 블로그나 당게에 올린 글을 두고 논객이라고 하는 것이다.

논객'마저도' 아닌 내게 활동 내지는 활동가를 바라는 생각들이 매우 부담스럽다. 아예 소속을 정리하고 이탈하는 게 상책이라는 결론, 그 코앞까지 내딛고 만다. 의지도 박약하고 솜씨도 없는 내가, 활동에 엮여 또 활동하고 그러다 활동가가 된다면 당이나 운동단체에게도 얼마나 비극적인 일이 되겠는가. 진보신당은 대중정당을 표방한다. 활동가가 아니더라도 깜냥껏 활동할 수 있는 정당이다. 거꾸로 말해 자신의 사정을 얼마간 제쳐두고 찾아온 당원에게 활동가의 자리를 권하는 일이 어울리지 않는 정당이다. 나는 진보정당이나 진보운동의 바깥에 내 인생의 대부분을 두고 싶고, 늦었지만 올해부터는 정치적인 영역 바깥에서 가능한 많은, 많지 않더라도 최대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그게 내 개인의 행복이고(20대 초반 시절 옥천신문의 오한흥씨를 만났을 때, 그는 행복하지 않으면 운동을 하지 말라고 조언해주었다. 나는 행복하지 않게 되었고 그래서 운동을 거의 끊었다), 또 나중에는 당에도 더 이로운 일일 터이다.

나는 창당 이후 벌어진 이런저런 논란을 겪으며, 내가 4차원에 불과하거나 아니면 상대가 상상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상호설득을 기대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전혀 못 알아듣겠다는 건 어쩔 수 없다. 당명 문제도 그렇다. 어쩌면 '내가 말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더욱 듣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경험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시간이 흘러 더 만회가 어려운 지경까지 갈 공산도 크지만, 한번 당해보는 게 나을 것 같다. 나는 앞에 닥쳐올 그런 위기로부터 동지들을 구해야 할 의무가 없으며, '구한다'는 발상과 표현도 웃기는 것이다.

요즘 '밥과 장미'에 제출할 글을 세 편 준비하고 있다. 하나는 노회찬, 심상정의 리더십 비교 연구이고, 두번째는 내가 10대 중반부터 지지해 왔던 '이원정부제' 구상, 세번째는 4월 하순 세미나에 발제할 '제2공화국기 혁신정당들'이다. 예전부터 그래왔듯 대중적 실천이라기보다는 스스로의 관점과 노선을 정립할 기회로 삼으려고 한다.

나, 이제 열심히 안 합니다. 잡지 마세요. 확! 물어버립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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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 안의 풍토에 관해 두 가지 더 이야기하려는 바가 있었는데, 그냥 여기서 짤막하게 쓰려고 한다.

1. '훌륭하고 유명한' 누가 밖으로부터 혹은 조금 뒤에 들어와서 좀 아니다 싶은 이야기를 해도 그냥 넘어가거나 상대적으로 관대한 경향. 이거,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논리에 기초해 있다. 내부에서 박봉과 무명으로 고생하며, 주변 운동권들의 오류와 한계를 극복하고 피해 오면서 운동한 사람은 뭐가 되냐는 말이다. 박봉과 무명 그리고 다른 푸대접 중 하나는 확실히 해결해줘야 한다.  

2. '솔직하게 오픈업'하자. 진보신당 창당 후 부쩍 '우향우'하는 작은 목소리들이 늘어났다. 우향우 자체는 나쁜 게 아니다. 오히려 숨기고 있다가 나중에 딴소리를 하는 것, 남이 먼저 우향우를 치고 나갈 때 자기는 아닌척하면서 욕하는 것이 더 문제다. 진보진영 내부의 극좌, 급진파를 의식할 필요도 없다. 아직 혁명성을 가지고 있다는 따위의 항변은 쓸모없는 것이다. 노회찬 대표가 사민주의를 비판한 것도 별 의미가 없다. 노대표의 낭만주의는 존중하지만, 그가 비판하는 사민주의 세력은 현실에 없으며 주대환 등은 '사민주의 우파'도 아니지 않는가. '전진'이나 그 비슷한 성향의 활동가들도 마찬가지다. 개량주의라는 다른 정파의 비판을 차라리 그대로 받아들이고,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거푸 말해두지만, 공동대표 체제 때문에 노회찬, 심상정이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도 우스꽝스럽다. 과거 민자당에서 김영삼은 김영삼의 말을 하고, 김종필은 김종필의 말을 했다. 무개념 보수정당이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공동대표 체제의 특징이다. 두 대표는 1년여간 솔직하게 오픈업하지 못했다. 나중에 딴소리할까 두렵다.

진보신당의 진로와 관련된 가장 큰 관건은 민주당 및 민노당과의 관계가 될 것이다. 민주당과 적극적으로 선거연합을 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장기적으로는 민노당과 재통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고, 절대로 어디와도 손 함부로 잡지 말자는 주장도 있다. 나는 셋 다 마뜩치 않으나, 부디 숨기지는 말았으면 한다. 과거 개혁당에서도 동상이몽("결국 민주당과 합할 것" "우리끼리만 백년가는 정당 만들 것" "민주당 깨서 신주류와 합칠 것")이 끝내 내분을 불러 일으켰다. 진보신당 창당 과정에서도 "정말 좌파적인 당 한 번 만들어보자"와 "이번 기회에 좀 더 묽고 대중적인 정당으로 가자"는 상반된 꿈이 한 몸에 들어왔다. 정당이란 본디 동상이몽의 집단이다. 다만 그것은 공식적으로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다. 내부정치, 정파정치를 염두에 두지 말고 인민의 바다에서 헤엄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정말이지, 솔직하게 오픈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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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신해철이었다면 그런 광고 찍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면, 가오가 상하니까요.
92년 꽃게랑 이후에 CF를 별로 찍지 않았던 그가 하필 학원CF를 찍었는지
좀 의아하기도 했습니다. 친구가 학원장인가? 하는 생각도 했지요.


많은 분들이 신해철의 언행이 불일치하다고 하지만 글쎄요.
신해철이 "학원 다 없애야 한다. 학부모들이여, 애들 학원에 보내지 말아라.
얘들아, 학원 다니지 마"라고 한 적 있나요?
저는 들은 적 없는데, 있었으면 알려주세요.

자기 자식은 홈스쿨링을 할 거라고 했으니,
학교는 물론 학원에도 보내지 않으려고 생각하는 것 같긴 합니다.
자기 처지에서 소화할 수 있기 때문에 내린 결심이겠지요.
자신이 역사나 음악, 국어, 영어를 부인이 과학이나 수학, 일본어을 가르칠 수 있다고 하는군요.


학원 문제는 진보진영에서도 처치 곤란한 것이기도 했지요.
우리 당이나 혹은 민주노동당에서 학원에 몸담았거나
현재에도 몸담는 분들이 계십니다. 당직자가 되신 분들 중에도 있구요.
당연히 그분들은 사교육비가 0에 수렴되기를 바라는 분들일 것입니다.
그런 날이 온다면 저항하고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학원이 맥을 못 추는 시절로 접어든다면 굳이 학원강사를 하지 않아도
공교육 속에서, 혹은 다른 영역에서 생계를 꾸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뒤집어 말해 학원의 존폐는 커다란 사회구조의 변화에 달려 있는 것이니까요.

학원은 수요가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지 공급이 있기 때문에 유지되는 게 아닙니다.


물론 한편으로 그의 행위에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거대기업에게 따낸 돈을 그 기업을 보이콧하는 단체에 기부한
첨바왐바의 화려한 퍼포먼스에 비교할 일은 결코 아닙니다.

신해철 자신도 이번의 제 행동에 정치사회적인 의미부여를 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명박 형님 땜에 득템했다,고는 했지만 그게 이명박 정부를 꼬집고 풍자하는
의도인지는 알 수가 없고, 그런 의도가 있다손 쳐도 대단한 행동은 아니며,
그리 해석하면서 찬성과 반대를 논하는 것도 무리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번 사건은 신해철을 꽤 급진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으로 오해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해철의 인터뷰나 라디오방송 진행을 평소에 자주 들었던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페이퍼>와의 인터뷰에서는 스스로를 "중도보수"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쾌변독설>에서는 한미FTA에 대한 찬반의견을 유보하면서도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요컨대 '대통령을 좌에서 뽑았다고 해서, 대통령이 반드시 좌쪽의 정책을 쓰라는 법은 없다. 대통령은 국민을 아우르는 사람이니까' 정도의 발언도 했었습니다.

이런 성향을 두고 이견을 말할 수는 있겠지만 '언행불일치'라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문득 2002년도에 노무현이 김영삼을 만난 사건이 생각나는데,
오바와 뻘짓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 사건 자체는 노무현의 평소 언행에 매우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노무현의 역사적 소임(!)이기도 했구요.
그런데 노무현 지지자의 일부와 노무현 반대자들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비난을 하더군요.
자기네들이 노무현을 잘못 안 걸 가지고...



추신:
더불어, 신해철 옹호론에 깔린 어떤 문제도 지적하겠습니다.

논란이 터진 직후 진중권 당원이 게시판에서 견해를 피력하셨지요.
근데 딴 건 둘째치고, 댓글에 드러난 예술인은 좀 봐줘야 한다는 생각은 참으로 위험하다고 봅니다.
논리적이지는 못한데 사람들을 설득해왔던 예술가-열외주의의 한 발로입니다.

지금은 팬이 많이 준 것 같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이문열의 위세는 막강했습니다.
칼럼으로 뻘소리를 해대고 그에 반론을 하면, 이문열의 팬들은 논쟁의 여지를 막아버리며
"뛰어난 문호에게 무슨 짓이냐" "그런 정치적 잣대를 예술인에게 들이대지 말라"고 호통쳤습니다.
이문열 소설은 매우 구리다는 게 제 사견이지만, 어쨌든 당시 한국사회 구성원의 절반 이상은
거기에 적극적 또는 소극적으로 찬동할 만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신해철에 대한 진 당원의 그러한 두둔이 과연 얼마나 이문열팬들의 인식과 다를지 모르겠습니다.

진 당원이 두둔하고자 한 것이, 다른 게 아니라 연예인, 예술인의 '오만함'이었다면
그 두둔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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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록보컬열전 (5) 제니스 조플린

Listen to the 무직 | 2009. 2. 24. 20:26 | Posted by 김수민

내 친구 중에 가수가 하나 있다. '가리나 프로젝트'라는 팀의 싱어... 모른다고? 그냥 아는체해라. 소개한 내 입장이 뭐가 되냐능;; 팬틴 무시기 샴푸 광고에도 노래가 흘러 나왔고 유명 그룹이당.(이렇게 덧붙일수록 더 군색해질지도 ㅋ 아직 못 들어본 분은 여기서 들어보시라.) 이번 포스트를 준비하다, 제니스 조플린의 테잎을 나는 2001년도에 그에게 빌려 아직껏 갖다주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몇주 전 그녀석과 학교 도서관에서 마주쳤는데, 쫀쫀하게도 미반납 사실을 알고 있었다.



롤라팔
: 반갑다. 나는 스물 여덟살 젊은이다. 1943년에 태어나 1970년도에 사망한 당신도 한국 나이로 치면 죽을 무렵 스물 여덟살이다. ‘갑’끼리 이렇게 만나서 참 반갑다.
제니스: 한국식 나이는 기수가 아닌 서수 개념인가 보지? 그럼 당신은 1982년생인가 본데, 난 당신보다 39년 일찍 태어났다. 뭐, 사실 미국인이 한국인과 같은 경어를 쓰는 건 아니라 어차피 상관 없지만 말이다. ‘펄(pearl)’이라고 불러달라.

롤라팔: 내가 죽으면, 저승짬은 내가 당신한테 한참 못 미치니 그때는 누나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제니스: 누나누나해~) 보컬열전의 다섯 번째 인물로 선정되셨는데, 예전의 연재물을 본 적이 있나?
제니스: 도착하기 전 한 번 쭉 훑었다. 네 명 다 내가 죽은 뒤에 데뷔한 이들이라 이름을 처음 들었다. 전부 다 남자라는 것이 좀 거슬렸지만 취향이겠거니 했다. 그리고 다들 로커들이고, 메틀 뮤지션이었거나 그런 경력이 있더군. 편중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롤라팔: 그 점은 잘 알고 있고 앞으로 주의를 많이 기울일 것이다. 그래도 내가 록팬이라는 게 펄한테는 유리했다. 그게 펄이 아네사 프랭클린, 빌리 홀리데이를 앞질러 보컬열전에 출연하게 된 원인이었다.
제니스: 조치 안타. 당신은 아네사를 나보다 앞서 다뤘어야 했다.

롤라팔: 펄은 베시 스미스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알고 있다.
제니스: 맞다. 그녀 묘비의 절반을 산 적도 있다. (롤라팔: 나머지 반은?) 어떤 간호사가 샀다던가? 그리고 나는 남성 보컬리스트 중에 오티스 레딩도 좋아한다. 그의 필모어 공연을 감동 깊게 관람한 적도 있다. 나중에 오티스 레딩도 다뤄주었으면 한다. 아네사에 대해서 하나 흥분되는 기억이 있다. 그녀는 1968년 타임지의 6월 커버스토리를 장식하기도 했었는데, 그가 나에게 "백인 록 운동에서 탄생한 가장 강력한 가수"라는 칭찬을 해주었다.

롤라팔: <보그>지는 당신에게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 노래의 역사가 새로 시작된다"는 찬사를 보냈다. 리처드 골드스타인이라는 평자는 "그녀는 타르처럼 살금살금 걸어다니며 전쟁처럼 얼굴을 찌푸린다. 그녀는 조調를 무시하고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다가 기관총처럼 소리를 뿜어댄다. 그리고 마지막 절을 붙잡고 늘어지면서 떠나지 말라고 간청한다"라고도 했다. 그가 당신에게 "록계를 이끄는 최고의 여성 로커"라고 한 것은 물론이다.
제니스: 비평가들 전부가 내게 호의적지는 않았다. 1968년 2월 <롤링스톤>지는 내가 몸담은 ‘빅 브라더 앤 홀딩 컴퍼니’에 꽤나 비판적이었다.

롤라팔: <롤링스톤>은 펄을 “로큰롤의 주디 갈란드”라고 하기도 했다지? 주디 갈란드처럼 예쁘다는 뜻은 아닐 테고. (서로 웃음) 그런데 재미있는 건 당신이 ‘빅 브라더 앤 홀딩 컴퍼니’를 떠나 ‘코즈믹 블루스’로 옮기고 나서도 논란에 휩싸였다는 것이다. ‘빅브라더’와의 결별은 아마추어리즘의 종결을 의미했다. 이 자리에서는 사소한 부분일 테지만, 수익금 문제도 그렇다. 빅 브라더에 있을 때 당신은 멤버들과 똑같이 돈을 나누어 가졌으나, 코즈믹 블루스는 월급을 받는 시스템이었고 특히 당신은 높은 지명도를 인정받아 멤버들보다 훨씬 많은 돈을 만졌다.
제니스: 그래서 코즈믹 시절은 쇼비지니스의 논리가 한층 더 강하게 내 삶을 덮은 시기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즈음 내가 사치를 했다는 소문은 진실이 아니다.

롤라팔: 코즈믹 시절 도리어 빅 브라더와 재결합하라는 요구까지 나왔다. 밴드의 통일성이 부족하고 지루하며 불안하다는 비난도 있었다.
제니스: 코즈믹 블루스의 음악엔 브래스 섹션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음색이 트럼펫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누누이 꼬집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걸 수용하지 않았다. 코즈믹은 프로적 전문성이 있는 밴드였다. 금방 성과를 거두진 못했지만, 1969년도 나는 블루스의 부활을 상징하는 인물로 꼽혔으며 뉴스위크지의 표지인물이 되기도 했다.

롤라팔: 어쨌든 빅 브라더의 매력과 코즈믹 블루스의 강점이 어우러져 세 번째 밴드 ‘풀 틸트 부기’의 눈부신 활약으로 이어졌다고는 생각한다. 그런데 잦은 설왕설래는 코즈믹 블루스에 국한된 건 아니었다. 펄의 독특한 목소리와 창법에 대해서도 폄하가 없지 않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당신이 제대로 발성의 노하우를 갖추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소리를 질러댔다고 여긴다. 펄은 언젠가 스테이플즈 싱어즈와 동시에 한 무대에 서는 걸 거절하기도 했다. 자신감 부족이었는가?제니스: 솔직히 비난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나는 원래 대중 앞에서 노래하는 게 힘겨울 만큼 숫기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었다. 나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는데, 어느 화가의 작품을 본 뒤 그림을 포기했다. 어떤 친구들은 내가 “최고가 될 수 없다면 어떤 분야든 하지 않았다”고 했다더라.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해두겠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특유의 신음과 비명조차도 사전에 충분히 계획했다. 당신은 내 보컬에 어떤 면모에 가장 신경이 쏠리나?

롤라팔: 당연히 그 탁성이 아니겠는가. 한국에 박경림이라는 방송인이 있다. 거의 음치에 가까운 노래로 가끔 사람들을 웃겨 놓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당신과 좀 비슷하다. 시간나면 검색해 보기 바란다. 나는 개인적으로 박경림씨가 펄의 <Summer Time>을 방송에서 카피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제니스: 대학 밴드 시절부터 빅 브라더 입단 전까지, 내게는 맑은 목소리도 있었다. 내가 죽었을 때도 목구멍에는 별 이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지? 나는 관중의 호응도에 따라 스타일을 바꿨다. 청승맞게 부르기도 하고, 쥐어짜듯 부르기도 했다. 하루는 내게 조안 바에즈와 같은 목소리를 기대한 관중들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나머지 반은 환호했던 적도 있다. 그런 식으로 톤을 잡아가다 보니 이렇게 됐다. 한편으로는, 독한 술을 많이 마셔서 위스키 같은 목소리가 되었다는 농반진반의 이야기도 있다.


박경림씨에게 이 노래를 권한다.


롤라팔
: 펄은 역시 '풀 틸트 부기' 시절 목소리가 더 풍성했고 샤우팅과 읊조림도 탁월하게 어우러졌던 것 같다. 노력의 결과이겠지만, 당신이 처음 음악을 접하던 어린 시절부터 조화에 쓰일 만한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으리라는 느낌도 받았다.
제니스: 고향인 텍사스와 그 부근의 루이지애나는 민속음악이 풍부한 곳이었다. 여기에 컨트리, 블루스, 멕시코 음악까지 흘러 들어왔으니... 나는 1962년 텍사스 나콕도체스 은행의 CF 송을 불렀다. 내 인생에서 최초로 녹음한 이 노래는 포크의 거장 우디 거스리의 <This is your land>를 편곡한 것이었다. 또 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백인 가스펠 음악인들과도 교류했었다. 음악 뿐 아니라 내 성장기에도 다양한 요소가 깃들어 있다. 나는 똑똑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이해받고 사랑받지는 못했다. 외로웠다.

롤라팔: 당신의 고립과 쓸쓸함에는....... 외모 콤플렉스도 있었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 뿐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학 시절 ‘캠퍼스에서 가장 못생긴 남자’로 지목되었던 데에는 당신이 학생단체들의 비위를 거스른 측면이 있었을 것이니까.
제니스: 뭐, 그랬다. 그랬었다....... 범생이들이 나를 미워했던 게지. 나도 그들을 자극했었고. 하지만 남들이 나를 못생긴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나는 그 사건 이후 샌프란시스코로 떠나기도 했고, 고향에 돌아오기도 했다. 고향에 들어와서는 결혼하려고 했다. 실패했지만. 결혼의 실패는 내가 노래에 몰두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후로도 죽기 전까지 나는 몇차례 결혼을 간절히 원했고 추진했다. 참 우스운 이야기지만...... 내가 죽은 해인 1970년도에 난 1년 뒤에 아이를 가질 생각도 했었다.

롤라팔: 아이 이야기는 의외다. 결혼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물론 달리 고려하면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다. 결혼제도가 강제하는 1부1처제는 얼마간의 평등을 담보해준다. 결혼이 유구하게 이어져 오고 있는 것도 섹스 상대를 최소한 1명 정해둘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다.
제니스: 외모 콤플렉스와 결혼시도의 실패는 내가 대중들의 인기를 갈망하는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그렇지만 나의 모습이 왜곡되거나 부풀려진 것도 많다. 남우세스러운 사연을 고백하자면, 나는 남자들과 잠자리를 가지거나 하는 일들을 좀 과장해서 주변에 말하곤 했다. 난 툭하면 일탈을 일삼고 다 뒤엎길 좋아하는 겁 없는 반항아는 아니었다. 나는 부모님과 한 번도 연락을 단절한 적 없다. 죽을 무렵 친하게 지냈던 폭주족 친구 하나는, 내가 죽은 직후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음, 그인, 참으로, 유순, 한 사, 사람이, 었다.

롤라팔: 펄에게는 허세가 어려 있다. 하지만 그 허세가 얼마나 진실했던 것인지 조금은 알게 될 것 같다. 잠시 숨을 돌리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지막 화제로 나가보자.
제니스: 당신은 인터뷰를 제의하면서 마약과 이성 이야기는 오늘 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지나버린 전생의 일이라 개의치 않았는데, 지금은 당신의 제의가 새삼 고맙다. 이쯤 하자.

롤라팔: 당신은 1960년대 후반 한창 활동한 뮤지션이다. 당시 미국 청년들은 유럽 청년들에 비해 훨씬 개인적이고 사적이었기는 했으나, 히피들은 마리화나나 LSD에 못잖게 ‘러브 앤 피스’에 미쳐 있었고, 반전운동, 민권운동에도 열심이었다. 그 시기 유럽의 절정이 1968년이었다면 미국의 절정은 이듬해인 1969년 우드스탁이었을 것이다. 펄도 그 무대에 섰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정치적 지향에 대해서 잠깐 코멘트해줄 수 있는가?
제니스: 코멘트를 ‘잠깐’ 해달라는 부탁은 당신의 탁월한 선택이다. 왜냐면 나는 정치에는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1968년 그해 여름, 일련의 정치적 흐름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나는 책깨나 읽었던 반면, 신문과 잡지는 거의 접하지 않았다. ‘개인적이고 사적’이었다는 특징만 나와 관련 있다.

롤라팔: 당신은 1969년 11월 16일 확성기를 들고 관중들에게 명령하는 경찰에게 항의하다가 체포되고 기소되었다. 이는 마이애미에서 짐 모리슨이 성기노출을 한 혐의로 체포된 사건과 맞물리면서, 상황이 악화됐다. 두 사건은 청년문화의 좌초 그리고 기득권세력의 반격을 상징한다.
제니스: 실제 나의 죽음은 록계의 전반적 쇠락이라는 흐름에 실려 찾아오기도 했다. 우드스탁 다음에 열린 페스티벌은 개판으로 점철되었고, 심지어 알타몬트에서는 흑인 참여자가 살해 당했다. 돌아보면, 화무십일홍이었다. 어른들은 강했다.

롤라팔: ‘어른’이라. 그렇다. 당신이 죽고 10년이 지나, 당신의 조국의 대통령이 된 그 양반만 봐도 그렇더라. MTV 이래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시대가 왔지만, 강한 놈들은 늘 음흉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예술은 아무리 슬프고 아파도 그들의 웃음보다 더 길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끝으로 한 말씀.
제니스: 한국에서는 제사라는 풍습이 있다지? 10월 4일, 내 기일을 챙겨달라. 마음으로.
롤라팔: 알겠다. 그 하루 전날이 한국 민족 대다수가 자신들의 공통 조상이라고 착각하는 어떤 이가 나라를 세운 것을 기리는 날이다. 그날보다 펄의 생일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더 의미 있다. 오늘 인터뷰 고마웠다. 한 잔하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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