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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우리편이다?

史의 찬미 | 2009. 2. 11. 04:38 | Posted by 김수민
새로 공개된 정조의 어찰은 독살설을 반증하고 있지 않다. 입증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반증이람. 독살설은 당대에 '썰'로도 취급받지 못한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김조순이 벽파를 날릴 때 이용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남인 전체도 아닌 영남 구석에 있던 남인들끼리 유포한 카더라 통신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영남 남인에 합세하여 독살설을 믿거나, 혹은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정조를 추앙하는 이들은 민족자존의 얼굴을 한 서구중심주의자들이다. 절대계몽군주를 거쳐야 -시민혁명 따위를 통해- 근대를 열어제낄 수 있다는 도식에 기대고 있는 몇몇 역사학자들 말이다. 그들은 희한하게도 정조에 대해서는 절대계몽군주의 성격을 부여하면서, 붕당정치가 토리당-휘그당처럼 발전해나갈 수 있는 여지는 조금도 두지 않는다. 붕당은 형이상학적 논쟁이나 권력투쟁만 수행한 것이 아니라 여러 쟁점을 겪으며 꾸준히 진화하고 발전해 왔다는 것, 후대에 '실학자'로 일컬어진 박지원, 정약용 등이 엄연히 붕당의 소속원이라는 것, 조선은 분명 선비의 나라였다는 것 등도 고려되지 않는다. 박지원은 군주를 士 집단의 일원으로 간주하였지만, 정조는 하 은 주 시대의 관념까지 끌어와 임금과 스승의 위치를 겸할 것을 선포하고 '만천명월주인옹'을 자처했다. 이에 대해서 사회경제사적으로는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소농 중심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왕권을 강화하여 신권을 견제할 수밖에 없다는 해명이 있다. 그런데 이번의 어찰은 '정조=개혁', '붕당(노론 벽파)=수구기득권'이라는 구도를 뒤흔들었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 정조가 노론 벽파와 실은 온전히 한패거리였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정조가 격한 표현을 쓰면서 자기 측근들을 비방했다는 사실에 눈길이 간다. 정조는 붕당을 억누르기 위해 소장파들로 친위세력을 구성했지만, 그들이 서학과 북학을 선도해 나가는 것 또한 용납하지 않았다. 척사보다는 부정학이라는 부드러운 태도를 취했지만, 어쨌든 정조도 시대의 변화에 저항하는 보수주의자였던 것은 틀림 없다. 정조는 영조와 달리 각 당파의 의리론을 인정하는 의리탕평론을 폈으나 어렵사리 성취한 삼상연립정권은 균형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의왕권강화책은 공론정치의 붕괴를 가져왔고 세도정치의 씨앗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를 한사코 썩은 모리배들에 의해 좌절된 개혁군주로 묘사하는 까닭은? "왕은 우리편이다"라는, 그만은 그래도 우리편이었었다는 의식이 아닐까. 민중 봉기가 성공하거나 그 성공이 유지된 적이 없는 나라에서 '民다이'는 '君다이'와 결합해야 했던 것이 아닐까. 民으로서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을 君이 그 강력한 힘으로 추진했었다는 환상. 그러나 그 君도 臣의 음모로 주저 앉음으로써 民과 같은 약자였다는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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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민에세이상 뒷이야기

책이라곤 읽지 않는 | 2009. 2. 10. 13:41 | Posted by 김수민

나는 김수민에세이상 수상작을 선정하며 평을 붙이지 않았으나, 별도의 포스팅으로써 나름의 소감을 밝히기로 결심을 수정했다. 

1. 장정일 <인생>
나는 스무살이 되기 전까지 기껏 그를 '야한 소설 잘 쓰는 작가', 조금 더 그럴싸하게는 누군가의 표현대로 '추문에 휩싸인 사제'쯤으로 여겼었다. 그런 내게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에 실린 단상들은 고정관념을 깨고 그를 정치사회적 발언가로도 인정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선정작 '인생'은 유미주의 반대가 지성주의의 탈을 쓰고 암약하는 사회상에 유쾌하게 맞서고 있다. 여기서 장정일이 피력한 견해는 작년에 내가 작성한 '미스코리아가 누드모델보다 잘났어?'('20대 대구 여성'이 많이 읽은, 나로서는 이례적인 기사였다)로 이어졌음을 고백한다. 옛날 장정일은 시쓰는 법을 잃어버렸다며 그후 소설과 희곡에 천착해 왔는데, 요즘엔 교술 분야에 몰두하고 있다. 어쩌면 소설쓰는 법조차 잃어버렸는지 모르겠지만, 아쉬울 때마다 집이나 도서관의 책장에서 예전 작품을 뽑으면 그만.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하고 바꿔야 할 때 바꾸지 못하는 우리네 인생을 곱씹어보면, 그의 행로는 넉넉하게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앞으로도 그의 인문학 공부를 훔쳐 보련다.

2. 이성욱 <김동성은 태극기를 안 던졌어야 했다?>  
기숙사 자치회실에서 받아읽던 <시사저널>에 실린 작품. 그가 이 에세이에서 지적한 민족주의, 애국주의에 의거한 '옆차기'는(지랄옆차기여!) 내가 대학생활 내내 경계해온 것이다. 그는 거짓말처럼 2002년 가을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병을 숨겼던 탓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죽음이었다고 한다. 공 잘 차고 춤 잘 춘다는 그는 자신의 저서 제목처럼 리베로의 구평을 구사해 왔다. 1980년대 PD계열 활동가 겸 비평가였다는 사실, 이인화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베낀 증거를 잡아낸 지난 사건은 나중에 알았다. 이성욱처럼 다재다능한 비평가로는 정윤수와 성기완을 꼽을 수 있는데, 적어도 나한테는 한 분은 축구해설가로 다른 한 분은 기타리스트 또는 시인으로 더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니까 리베로 '비평가'로서 나는 이성욱을 제일 첫자리에 앉혀 놓겠다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이성욱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고, 소장한 저서도 <비평의 길>밖에는 없다. 이 작품을 선정하면서, <쇼쇼쇼 - 김추자, 선데이서울 게다가 긴급조치>를 그간 별러왔으면서도 읽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3. 박노자 <극미로 가는 더 큰 길>
나는 2002년의 반미 무드가 석연치 않았고 못마땅했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하등의 반성도 없었으며 이주노동자를 괄시하던 이들이 언제 그리도 "약소국 국민"으로서 분개했는지 우습기 그지 없었다(곧 있음 강대국된다매?). 나는 그래서 민족주의를 초월한 미국 비판을 부산교대 교지의 기고문을 통해 주문하기도 했었다. 반미운동의 심각한 결함은 도리어 심미선, 신효순 씨 사건으로 더욱 분명히 폭로되었다.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날 즈음 온 나라는 월드컵에 취해 다른 이슈를 마실 생각도 하지 않았다. 뒤늦게 시위가 터지자, 일부 민족해방운동가들은 주검의 사진을 들고 나오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동록 사망에 침묵하다가 별안간 "효순이, 미선이"를 부르짖은 대중들은 가부장주의("감히 우리 딸을!")를 실토했다. 반성은 없었다. 촛불시위를 제안한 네티즌 '앙마'는 세계주의적 자세를 시종 견지했고 이라크전쟁반대운동까지 꾀했지만, 우리의 '운동권'들께서는 소파개정구호를 주한미군철수요구로 뒤바꾸는 쇼를 감행했다. 다시 한번 분노의 마음으로, 필자에 관한 소감까지 생략하면서, 이 글을 되새긴다.

4. 정운영 <프라하는 봄이었다>
운동가는 아니었고 진보적이지도 않았지만, 남북통일을 시급한 과제로 설정하였던 한 선배가 있었다. "궁극적인 가치와 목적은 통일이 아니라 평화"라고 못박던 내게 그는 "그런 발상이면 통일은 영영되지 않는다. 김대중 정권기 내에 통일을 하지 못하면 기회는 없다"고 타일렀다. 그는 내게 2000년 연세대에서 있었던 정운영 강연의 한토막을 들려주었다. "통일운동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하셨다나.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그의 마르크스주의경제학에도 관심이 없었고, 미문으로 명성이 높았던 그의 글도 챙겨 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가 중앙일보에 안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무감했다. 중앙일보 논설위원 초창기 시절에 내놓은 칼럼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고, 본작처럼 울림이 큰 경우도 있었다. 왼쪽으로 흐르고 있던 나는 오른쪽으로 걸어가던 그와 이 칼럼에서 조우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둡체크의 방랑과 복수! 한동안 나는 가보고 싶은 나라와 도시로 체코와 프라하를 꼽았다. 정운영은 고인이 되었고, 그 선배는 노동쟁의로 들끓었던 어느 기업의 직원이 되었다. 비조합원이다.

5. 고종석 <당신이 바로 하류지식인이다>
진보개혁을 지지하지만 고종석의 글을 싫어한다는 이들은, 그의 신중함과 거리두기에 이물감을 느낀다고들 한다. 그러나 고종석만큼 편파적인 글장이도 없다. 상대방의 비열함에 맞춰 자신의 강약을 훌륭히 조절하는 그는 자주 가차 없는 독설가로 등장한다. 이 글을 그 증거로 제출한다. 2000년대 초반만해도 이문열의 담론권력은 막강했다. 언론사 세무조사가 옳은가 그른가를 물으면 6:4가 나왔지만 이문열의 홍위병 발언이 옳은가 물은가를 조사하면 비율이 거꾸로 뒤집힐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이문열은 창작에 부진했고 제자를 양성하러 만든 부악문원도 흐지부지되었으며 그의 말빨은 예전처럼 잘 먹혀들지 않는다. 이에 고종석의 기여가 높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 에세이는 참으로 적절한 수준의 사나움으로 이문열의 사기극을 제압하였다. 이문열의 수구반동성에 동조하거나 그에게 예술가-예외주의를 베풀던 팬들이야 벌떼처럼 흥분했지만, 이제 담론권력으로 치면 검도 5단 이문열보다 뿅망치 1단 진중권이 더 강렬한 시대가 왔다. 나중에 이문열은 이빨빠진 호랑이의 모습으로 고종석과 대담하였다.

6. 김명인 <스텐카 라진>
2006년 추석 연휴를 앞둔 밤 술을 진탕 마신 나는 버스 안에서 약간의 두통과 극심한 허기를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귀향길이었다. 김명인이 낸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를 읽고 있었던 덕분이다. 정과리는 1988년 민중문학론을 이렇게 비판했다. "(...) 민중의 주체성의 회복 문제에 그들을 가둠으로써 (...) 결국 그것은 노동계급의 헤게모니라는 명분 하에, 그 노동 운동 내에서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 기도하게 된다." 그때 민중문학론의 한 가운데 있던 김명인은 1990년대 전향을 선언했다. 당시 이를 격렬히 비난했다는 모 비평가는 세해 전 재인식 어쩌구를 지껄이는 집단에 가담했으며, 정과리는 수구신문과 어울리고 있다. 김명인은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정과리에게 배운 셈이 되었지만, 정과리는 김명인에게 전혀 배운 바가 없는 듯하다. 김명인은 7, 80년대와는 다른 이념과 방법으로 여전히 폭압에 저항하고 있다. <스텐카 라진>(잡지 수록 당시 제목은 <찬가의 비극>)의 감동은 그가 90년대 새 길에 들어서며 내놓았던 <불을 찾아서>보다도 훨씬 진하고 또 은은하다.

7. 박민규 <구구 팔십일>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바람을 타고 박민규는 <한겨레>의 '야! 한국사회'로까지 나아갔다. 대통령탄핵의 폭풍과 후폭풍이 한국사회를 휩쓸 무렵 그가 표출한 유머러스한 결기가 아직 생생하다. 그러나 그가 소설에서 갈구한 '일 많이 하지 않는 인생'이라는 화두는 한국사회에 닥쳐온 실업과 고용불안 속에서 손쉽게 사장되었다. 박민규는 "우리가 나누기 시작한다면 (...) 곱셈은 곧 누구나 통과해버린 시시한 셈이 되고 말 것이다"라고 했지만, 그가 흠칫했듯 '십구구단'과 같은 고난도 코스가 새로 들어선 대신, 가감승제 가운데 나눗셈만은 우리네의 '스펙'에서 철저히 제외되었다. 박민규는 후일 용 네 마리가 모여 이룬 '말많을 절'이라는 한자를 제목으로 삼은 소설을 발표했다. 무림고수의 극악빙공은 지구온난화에 꺾여 버리고, 민주는 아빠에게 자긴 돈이 전부라고 소리친다. 곱셈을 넘어 제곱에 맛 들린 이 나라에, 박민규는 루트를 씌울 수 있을까. 제법 똑똑하고 제 정신이기도 한 몇몇 사람들이 지구 멸망에 대비한다며 충북 단양으로 피신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민규, 단양에서 취재하시라.
 
8. 박홍규 <젊은 벗이여, 당당하게 살아라!>
교수들이란, 참 믿기 힘든 사람들이다. 얼마나 많이 남의 다리 밑을 기면서, 숱하게 학문적 재미나 이념적 소신을 집어 던졌을까. 박홍규는 "(...) 나도 선생이 되었고, 나의 선생들처럼 당당하게 살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래도 박홍규는 믿을 만한 교수이다. "쓰레기 같은 이메일이라 잘 보지 않지만 가끔 이렇게 반가운 편지를 받기도 해서 그냥 두고 있습니다.": 2005년 가을 내가 보낸 메일에 대한 그의 답신이었다. 이 에세이에 밀려 아깝게 수상작에서 떨어진 <나의 초라한 보수주의>를 옮긴다: "어제 참 오랜만에 ‘진보’ 교수들과 개강 술 같은 걸 마시면서, 정규 교수직 임금을 10%만 깎아도 비정규 교수직 임금은 2배가 되는데 그런 운동을 하자고 했더니 모두 웃었다. (...) 공생을 위해 대학에서는 자가용이나 휴대전화를 쓰지 말자고 하면 교수는 물론 학생들도 컴맹인 나를 시대착오적 골통 ‘보수’라고 비웃는다." 박교수여, -그대로- 당당하게 살아라! 그는 급진주의와 보수주의를 일치시키며 살아가고 있는 지식인이다. 구미가 고향이라는 박홍규를 보면, 갑자기 내 안에서 애향주의가 도지기까지 한다.   

9. 이재현 <나, 이재현은 좌빠+자빠다>
중학교 1학년생일 때 그를 처음 읽었다. 이 글은 2006년 1월 어느날 아침에 받아든 한겨레신문에 있었다. 와우, 그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아는가? 나는 2년에 걸쳐 한 대목을 내 프로필에 가져다 썼다. "좌파와 달리 좌빠의 좋은 점은, 세계의 칼에 베여도 결코 죽지 않는다는 거다. 세계는 나를 바꾸지도 못하고 심지어 세계는 나를 해석하지도 못한다. 내 쪽이야말로 흐르는 강이므로 세계는 같은 나를 두 번 건널 수 없다는 식이다."  사실 그 뿐이 아니다. 나는 어느 기고문의 초반부에서 이재현이 한총련 학생들에게 했던 표현("한총련은 30초 안에 버릴 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야 한다. 내가 로버트 드니로라면, 화염병보다 먼저 주체사상을 버렸을 것이다" )을 인용하고, 뒷부분에서는 학생사회는 운동권문화와 기만적 탈정치를 30초 안에 모두 버려야 한다고 변주한 적도 있다. 그해는 내가 가장 열심히 다양한 운동(movement)에 뛰어들었던 해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싸움에서 졌다. 하지만 난 세계의 칼에 베여 죽지 않았고, 멍청한 세계는 역시나 나를 해석하는 데 완벽하게 실패하였다.  

 10. 진중권 <민주노동당은 죽었다>
이번의 수상자 가운데 진중권은 이재현, 고종석과 함께 청소년기부터 내게 영향을 끼친 글장이로 꼽힌다. 그는 글을 빠르게 많이 쓰고, 본 수상작 말고도 기억에 남는 글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2년 반에 걸쳐 유지한 민주노동당 당원자격을 버린 직후에 나온 이 글을 뽑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2004년 2월 민주노동당 입당 결심을 굳혔고, 제대하고 나서 3개월쯤 지나 입당했다. 민족해방파와 사회주의자들 양쪽 등쌀을 못 견뎌낼 것 같아 말 많이 하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2006년초부터 지난한 당혁신운동에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했다. 물론 제대로 해낸 것은 아무것도 없고, 2007년 9월 내가 밀었던 노회찬 후보가 꼴등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TKO를 선고했다. 내가 그러는 동안 진중권은 별다른 정치적 실천을 하지 않았다. 학내 강연에 그를 초빙하러 연락했을 때, 그는 정치적인 내용은 다루지 않겠다고 사양하였다. 민노당 분당을 전후해 나는 "진중권 안 오기만 해봐"라며 내심 벼르고 있었다. 그는 이 글의 말미에 "건설될 새로운 진보정당에 입당을 신청한다"고 썼다. 콧날이 시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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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민에세이상 수상작 열 편

책이라곤 읽지 않는 | 2009. 2. 8. 17:23 | Posted by 김수민
김수민에세이상은 김수영문학상이 김수영을 기리는 상인 것과는 달리, 김수민을 기리는 상이 아니라 김수민이 주는 상이다. (당연한 말씀...) 상품, 상장, 상금은 일절 제공하지 않으며 정기적으로 시상식이 개최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내가 대학생 신분이었던 2001년 3월~2009년 2월(군복무 기간 포함)에 발표된 에세이 및 칼럼들 중에 열 편을 골랐다. 메시지가 마음에 들고 울림이 크면서, 미문이거나 독특한 스타일이 빛난 작품들이다. 순위는 없으며, 발표 순서대로 배열한다. 

고심 끝에 작품별 해설은 생략하기로 했다. 밑줄도 치지 않았다. 괜한 주접이 될 터이므로. 단 하나만 뇌까리자면, 대중음악을 다룬 에세이가 수상작에 포함되지 않아 아쉽다.  

수상작 명단
[장정일] 인생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 행복한책읽기, 2001)
[이성욱] 김동성은 태극기를 안 던졌어야 했다? (시사저널, 2002)
[박노자] 극미로 가는 더 큰 길 (한겨레, 2002)
[정운영] 프라하는 봄이었다 (중앙일보, 2003)
[고종석] 당신이 바로 하류지식인이다 (한국일보, 2004)
[김명인] 스텐카 라진 (한겨레21, 2004)
[박민규] 구구 팔십일 (한겨레21, 2005)
[박홍규] 젊은 벗이여, 당당하게 살아라 (<젊은 날의 깨달음>, 인물과사상사, 2005)
[이재현] 나, 이재현은 좌빠+자빠다 (한겨레, 2006)
[진중권] 민주노동당은 죽었다 (프레시안, 2008)



1. [장정일] 인생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 행복한책읽기, 2001)

 

2. [이성욱] 김동성은 태극기를 안 던졌어야 했다? (시사저널, 2002)



3. [박노자] 극미로 가는 더 큰 길 (한겨레, 2002)


4. [정운영] 프라하는 봄이었다 (중앙일보, 2003)



5. [고종석] 당신이 바로 하류지식인이다 (한국일보, 2004)


6. [김명인] 스텐카 라진 (한겨레21, 2004)


7. [박민규] 구구 팔십일 (한겨레21, 2005)


8. [박홍규] 젊은 벗이여, 당당하게 살아라 (<젊은 날의 깨달음>, 인물과사상사, 2005)


9. [이재현] 나, 이재현은 좌빠+자빠다 (한겨레, 2006)



10. [진중권] 민주노동당은 죽었다 (프레시안,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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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다니던 도중 몇번 공개서한을 썼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일이 커진 적도 두 차례 있었다.
2001년 여름, 언론사 세무조사를 둘러싼 공방이 한창이던 시절에 발표한 글.


안녕하십니까, 저는 동아일보 독자인 대학교 1학년생입니다.

제가 객지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고 정기구독하는 신문이 없기에, 신문은 인터넷으로 보거나 기숙사나 캠퍼스 내에 널린 신문을 읽고는 했습니다. 제가 즐겨보는 신문은 다른 신문들이었고 동아일보는 거의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어느덧 방학을 맞이하여 집에 내려와서는 아침마다 동아일보를 받아보고 있습니다.

저의 집은 94년부터 동아일보를 구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할 당시 동아일보 지국에서 사람이 나와 짐을 나르는 것을 도와주었던 것이 그 계기였습니다. 어렸던 저는 그때 신문지국이 이삿짐 센터까지 겸하고 있는 줄로 알았었지요.


자유언론의 전통 지켜라?

요즘 들어 동아일보를 펼칠 때마다 피식 웃음이 나오고는 합니다. 그나마 정신 건강에는 좋아서 다행일 듯합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화가 벌컥벌컥 나고는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놀랐습니다. 언제부터 우리 나라 신문들이 이렇게 유머러스해졌는지 말입니다. 동아일보 사원들뿐 아니라 외부 필자까지도 농담 실력이 향상된 거 같습니다. 정말이지 저는 이것이 농담이라고 믿고 싶을 뿐입니다.

오늘 16일자, 전여옥 씨의 기고는 가히 압권이었습니다. 동아일보가 언론사 세무조사 정국에서 조선, 중앙과 달리 활용할 수 있었던 카드는 70년대의 그 자랑스러운 경력이었습니다. '백지광고 사태'로 일컬어지는, 언론자유를 갈망하는 언론인들과 유신 정권의 대결은 당시 세상에 없었던 저도 여러 경로를 통해 익히 들어 아는 바입니다.

신군부 등장 이후 납작 엎드려 있었던 '쪽 팔리는' 경력도 있었지만 '유시민의 항소이유서' 보도나, 박종철 씨 치사사건 특종 등으로 그 전통은 조금씩 이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전통을 동아일보는 새삼스레 되살려, 작금의 사태는 70년대의 언론탄압과 유사하다는 소도 웃을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여기에 전여옥 씨는 맞장구를 치며 80년대 초 신군부의 언론장악 사태를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그네는 또 몇몇 신문들이 현 상황에서 "납작 엎드렸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처럼 조중동 비대 언론의 공세 앞에서 "납작 엎드리지" 않은 몇몇 신문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는 걸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70년대의 동아일보와 관련하여 주시해야 할 쪽은 현 동아일보가 아니라 동아투위 출신의 사람들입니다. 동아투위 출신 사람들, 그리고 한때 동아일보가 품고 있었던 김중배 현 MBC 사장이나 손석춘 한겨레 미디어 팀장, 전 논설위원이었던 경기대 김재홍 교수를 비롯한 분들은 현재 동아일보가 언론탄압이라 주장하는 언론개혁을 두고, 찬성하는 입장에 서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언론자유를 외치던 사람들을 쫓아낸 동아일보가 남의 업적을 도둑질하고 있음에 경악하고 또 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아일보가 저지른 조세정의 침해와 신문시장 불공정 행위가 70년대 동아투위 기자들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언론자유입니까? 또 왜 지금 동아투위 분들이 언론사 세무조사를 지지하고 있겠습니까? 동아일보는 정상인데 그들이 변절해서입니까?


언론탄압은 어디서 오는가

필력에 걸맞지 않은 신비의 지능지수를 가진 이문열 씨가 지면에 나섰습니다. 이제는 그가 쓴 소설 제목이 <삼국지>인지 <홍위병>인지 얼핏 헷갈릴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에 이어 왕년에 재야운동권 출신이라던 김문수 의원은 "시민단체들이 최면에 걸려 있다"며 일갈했습니다.

그러나 동아일보만 보고서는 도저히 시민단체들이 도대체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언론개혁을 주장하는 인간들은 정신차려라라는 식의 공허한 외침만 들려올 뿐입니다. 조선, 중앙일보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신문은 각자의 논조와 입장이 있는 거지만 각계의 주장을 충분히 전달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 언론의 권리만 목이 터져라 주장하는 터라 의무는 잊은 것입니까?

눈에 띄는 건 <野 "세무조사는 언론탄압">류의 헤드라인 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예의상 빅3 언론이 한나라당의 기관지라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만, 언론개혁을 외치는 시민단체들이 홍위병이라는 투의 주장은 계속 흘러나오고 있고 빅3 언론은 계속해서 한나라당의 주장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언론을 두둔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습니다. 홍위병에 더 가까운 쪽은 빅3언론이 아닙니까?

언론문제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는 '대구, 부산엔 추석이 없다' 기사를 기억하십니까? 기껏 기자들이 현장에서 기사를 날라왔더니 그런 식으로 편집을 하고 있습니다. 언론탄압이 이제사 오고 있다구요? 스스로 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저는 동아일보를 볼 때마다 버마를 떠올립니다. 버마 민중들의 민주화 운동에 군부독재 정권은 극심한 탄압으로 일관하고 있지요. 국제 사회에서는 버마에 대해 경제적 제약을 비롯한 일련의 조치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럼 과연 버마 정부는 무어라고 항변할까요? 아마 "버마를 탄압하고 있다!"가 되지 않을까요? 기자들의 60%가 세무조사를 조세정의 확립이라고 보며 거의 대다수가 정간법 개정에 찬성하는 데도 불구하고 유력신문 3사의 의견은 왜 이 모양입니까.


법 질서 불신하는 엄살

언론사 세무조사는 정치적 의도가 강할까요? 물론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치계가 하는 일에서 정치적 의도를 빼면 시체지요. 당연한 일 아닙니까? 언론사 세무조사가 정권 재창출용일까요? 그럴 겁니다. 정권 재창출을 노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치가나 정당이 아니라 시민운동일 것입니다. 언론사 세무조사는 김정일 답방대비용일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현 정부가 노리고 있는 대북정책의 성과는 김정일의 답방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고 언론이 딴지를 걸어버릴 경우 실패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석연찮은 이유에도 불구하고 언론사 세무조사가 이뤄져야 하는 이유는 정치권 일각의 의도가 시대의 요청과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정치 행위는 욕망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당대가 요구하는 바와 일치할수록 그만큼 정당성을 띠게 됩니다.

모든 선행은 아주 순수한 동기만을 가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 선행으로서 자기를 만족시키려 하는 욕구, 양심을 회피하지 않음으로써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 하는 욕구, 자신의 이름을 알리며 얼마간의 대가를 누리고 싶어하는 욕구 등이 맞물린다는 것입니다.

언론사 세무조사는 정부가 마땅히 시행해야 할 기본적인 일이며 여기에 이익 욕구가 개입되었다고 해서 문제삼을 만한 게 아닙니다. 언론사 세무조사라는 제도가 현 정권이 급조한 것도 아니며 민주질서를 위반하는 위헌위법적 혹은 초헌초법적 행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부로서는 빅3언론의 이런저런 딴지걸기가 건설적 비판과 대안제시가 아니라 물어뜯기이며 빅3언론이 쥐고 있는 과도한 권력이 그 배경이라고 판단했을 법합니다. 그래서 아마 정부의 정책들이 여기저기서 파열음을 내고 있는 현 시점에서 뒤늦게나마 언론사 세무조사를 실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물론 많은 국민들이 언론개혁을 요구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탈법 행위는 그간 면제받아왔고 언론사는 성역으로 남았습니다. 조선조 말기 세도가처럼 되었다는 말입니다. 언론이 누리고 있는 과도한 권력이란 그 논조보다는 면제받아왔던 온갖 부정 행위를 뜻합니다. 한국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논조는 시민의 비판을 받고, 언론계의 자율적인 조정 속에서 이뤄져야 하지만 불법은 정부만이 단속하고 처벌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의도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세무조사가 어떠한 역할을 할 것이냐'입니다. 추징금이 과하게 매겨졌으며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법부로 달려 가십시오. 한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삼권분립을 지키고 있는 나라입니다. 언론탄압이요? 언론 재갈물리기요? 그것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은 스스로가 잘 아실 겁니다. 날마다 지면을 통해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으면서 탄압받고 있다니 어안이 벙벙합니다.

한국은 절도범뿐 아니라 사형수의 인권도 존중하게 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그깟 탈세 혐의 포착되었다고 겁 먹은 척하지 마시고 할 말은 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변명과 발뺌대신 과감한 시인과 진심어린 사과, 소속을 초월한 언론개혁 대의의 인정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같이 세무조사를 받고도 건전언론으로 거듭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정말이지 한국의 법 질서를 불신하지 마십시오. 왜 한국의 민주주의를 믿지 못합니까. 비록 완성도는 떨어질지언정 정부의 일방통행으로 언론이 탄압받을 정도는 아닙니다. 언론자유를 위해 싸우겠다는 허풍과 함께, 그런 엄살과 법적합리적 권위에 대한 무시가 보는 눈을 지치게 만듭니다.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오늘자 신문을 통해서 좋지 않은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김병관 명예회장의 부인인 안경희 씨의 별세 소식이었습니다. 고인에게 애도를 표하며 명복을 빕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세무조사가 언론의 목을 죄어온 결과 안경희 씨가 희생양이 되었다"는 주장이 만연할 것 같은 예감입니다.

지난 91년 대학생들이 노태우 정권에 항거하여 자살을 택했던 잔인한 봄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방식에 대해서 안타까움과 불만과 회의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사회의 불온세력으로 몰아붙이는 태도에 대해서는 한치의 동감도 가질 수 없습니다. 그 시도를 증오합니다. 당시 김지하 시인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조선일보에 실으며 죽은 학생들을 잔인하게 묻었습니다.

하지만 그 죽음의 굿판은 죽은 당사자가 아니라 노태우 정권과 언론권력이 빚어낸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학생들을 죽음에 몰게 했고 그 죽음을 이용하여 한바탕 '굿판'을 벌인 것입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날, 죽음의 굿판이 재현할 기미가 보이고 있습니다. 동아일보는 오늘 7월 16일자 A30면에서 "일생 내조만 하며 살아온 전통적인 한국 여성이 권력과 시대상황이 빚은 거친 세파에 희생양이 된 것 아니냐며 안타까워 하고 있다"고 주변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의견에 대해서는 동감합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그 거친 세파의 책임에는 동아일보 스스로의 몫이 크다는 사실입니다. 그에 불구하고 동아일보를 비롯한 빅3 언론은 이 문제를 걸고 넘어질 태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죽음의 굿판인 것입니다.

안경희 씨의 안타까운 죽음을 현 정국에 이용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허풍과 엄살은 비판받을 대상이지만 죽음의 이용은 명백한 도의적인 문제입니다. 만일 동아일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죽음으로 모든 걸 무마하려 했다"고 떠든다면 동아일보측에서는 분노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무조사가 사람 죽였다"라는 말 역시 불합리하고 부도덕한 짓입니다.


부자유스러운 동아일보에게

저는 동아일보의 부자유스러움이 세무조사 정국이 아니라 그에 대응하는 모습에서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부자유스러움 앞에서, 동아일보에게 가졌던 일말의 기대들을 하나씩 접어나가고 있습니다.

저희 집은 신문을 두 개 보던 96년경, 정리해고(?)를 했습니다. 당시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를 보고 있었는데, 저는 하나만 보자는 부모님에게 좀더 개혁적이고 자랑스러운 전통을 가진 동아일보를 택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마다 문 앞에는 동아일보가 계속 배달되었고 어느덧 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99년이었던가요, 박정희 기념관 국고 보조를 반대하는 동아일보 사설을 읽고 뿌듯하고 다행스러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동아일보가 주는 감동은 점차 사라져 갔습니다. 어느새 "이거 끊어버려야 하는데, 끊어버려야 하는데"를 연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가장 나쁜 신문이라고 보지는 않지만 제대로 된 언론이라고 생각치도 않았던 것입니다.

시민들에게는 자신에게 더 맞으면서도 또 합리적인 논조를 내세우는 신문을 볼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아일보를 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가족들간에 합의가 되지 않아서 동아일보를 끊지 못하고 있지만 저는 이제 더 이상 애독자가 아닙니다. 동아일보에게 할 말에는 애정어린 제언이 아니라 분개와 항변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사회면이었던가요, 아주 조그만 기사로 "동아투위 기자들이 70년 광고탄압과 현 언론사 세무조사를 동일시하지 말라"는 항의 성명을 내었다는 소식을 담았습니다. 그 기사를 실으려 했던 분들에게는 칭찬을 보내고 싶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사실보도나마 해주는 분들께 앞으로도 어떠한 조건과 환경에서도 의지와 신념을 잃지 않을 것을 당부드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때의 자유언론, 동아일보의 양심회복을 촉구합니다. 세무조사를 역으로 이용한 언론탄압을 중단하고 부자유언론의 멍에를 벗기를 소망합니다.

독자 올림.

덧붙이는 글 | 수신인
동아일보 E-mail 주소 newsroom@donga.com
김학준 사장, 김용정 편집국장
이규민, 김충식, 송문홍, 송영언, 전진우, 황호덕, 민병욱 논설위원
윤영찬, 김정훈, 박성원, 선대인, 윤종구, 송인수, 김삼영, 문철, 이재호, 윤정훈 기자 (정치면을 참고하여 열 분을 기자 수신인으로 정했습니다)

출처 : 부자유언론 <동아일보>에 드리는 글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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