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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학창시절의 끝에서 3

Free Speech | 2009. 2. 21. 14:14 | Posted by 김수민

강의석씨의 국군의날 헤프닝이 터졌을 때, 평화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사람들조차도 많이들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는 그들의 불쾌감이 이해되지 않았다. 잡다한 '이색행보'를 소재로 그가 언론지상에 출연할 적에야 짜증이 났었지만. 아마도 강의석씨를 향한 손가락질은 질투심이라는 자원을 한껏 불태운 결과이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 20대 '사회운동' 참여자 가운데 강씨는 거의 유일무이한 유명 인사다. 해묵은 정파질서에서 대장질을 하는 자나, '88만원세대' 담론에 달떠 "우리가 못난 건 사회구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그러니까 내게도 한몫 달라"는 자나 강씨에게 질시의 감정을 가지기 쉬울 것이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추후에 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강씨가 하는 것도 명백히 평화운동이고 누구도 그것을 차단할 권리가 없는데 평화운동을 어지럽혔다는 따위의 비난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러나 오마이뉴스 지면 등에서 며칠동안 강씨를 둘러싼 논란은 지루하게(어떤 사람들에게는 흥미진진하게) 진행되었다. 나무꾼 하나에 집착하여 줄거리가 <선녀와 나무꾼>인지 <도끼와 나무꾼>인지 <나무꾼의 애정행각2: 물레부인 방아찧네>인지 분간하지 못한 꼴이다. 피곤한 언쟁에 가담하기 싫어 널리 피력하지는 않았으나 나는 지인들에게 사건을 좀 더 넓게 보기를 주문했다. 군부의 쿠데타와 독재로 점철되었던 나라에서 마침내 어떤 젊은이가 군대를 폐지하자며 국군의날(어떤 나라에서 군부의 퍼레이드는 쿠데타 시도로 비화되곤 했다) 행사에서 소동을 벌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탱크는 알몸의 강씨 앞에서 멈춰섰으며, 강씨는 국정원 취조실로 끌려가지 않고 경찰에 검거돼 경범죄 스티커를 떼고 풀려났다. 이 어찌 대단한 진전이 아니랴! 나는 이 흐름 속에서 모처럼만에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느꼈다. 이렇게, 사건 주인공 일개인의 위상은 명확해지고,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비평에서도 벗어날 길은 있는 것이다.  

새내기 시절 '안티조선'운동을 하면서 나는 '부정적인 사람'으로 찍히기 일쑤였다. 조선일보 말고도 반대할 것이 많은 내게, "너는 그럼 찬성하는 게 뭐냐?"는 은근한 공세까지 뒤따랐다. 안티조선운동을 한겨레찬성운동과 등치시키려는 저질적인 시도도 그 일환이다. 이런 걸 보면 네거티브 캠페인은 참 포지티브하다. 도리어 무언가를 찬성한다고 했을 때 반대자들이 더 많아지는 일이 잦다. 내가 2002년에 노무현을 민다고 했을 때, 그후에 진보정당활동을 했을 때, 나한테 "그럼 반대하는 건 도대체 뭐냐?"라고 따져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부정적'이라고 일컬은 것의 정확한 표현은 '비판적'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비판'을 어떤 의미에서 썼든 나는 틀림없이 '비판적'이 되려고 노력했다. 매사에 비판적이려고 했다. 그래야 매사에 부정적인 것을 면할 수 있으므로. 그들이야말로 '부정적'이라고 낙인 찍은 것에 대해 매사에 부정적이었다. 비판과 부정의 다름은 그 주제를 띄웠을 때 누구나 다 수긍할 만한 것이다. 

비판, 날선 언어, 종종 성을 내고 인상을 쓰는 행동. 허름할지라도 망원경과 현미경을, 왼쪽 귀와 오른쪽 귀를, 어금니와 송곳니를 겸비하려는 안간힘에서 나온 것이었다. 가장 좋은 것에서도 나쁜 것을 찾는 행위는 남들에게 불편하고 신경질적으로 비쳐졌다. 그러나 나는 똑같이 가장 나쁜 것에서 좋은 것을 찾는 애를 썼다. 위에서 예로 든 강의석씨 사건 당시의 내 관점처럼 클로즈업과 롱샷을 능란하게 구사하는 인생의 감독이 나는 되고 싶었다.  

에, 그러니까, 요컨대, 그랬었다고... 그랬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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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가든 친가든 가풍이 학문과 그리 밀접하지 않다. 육촌 범위 내에서 보자면 한학자였던 외증조할아버지만이 예외가 될 것이다. 외증조모는 책상물림인 지아비의 경제적 무능에 환멸을 느껴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1969년경 돌아가신 나의 외할아버지는 문맹자였다.

할아버지의 일본인 담임선생은 똑똑한 제자를 일본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증조부는 반대했고, 답답하고 서글퍼진 할아버지는 마당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할아버지는 결국 중학교에도 가지 못했다. 나는 증조할아버지의 반대 사유가 단지 곤궁한 집안사정 때문인 줄로 알았는데, 얼마 전 할아버지로부터 또다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중학교 가면 빨개이가 많다 캐서." (할아버지네 마을은 한국전쟁 때 최후방어선이었던 곳과 가깝다. 그 빨갱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중학생 시절의 아버지는 라디오방송국에 엽서와 편지를 즐겨 보냈다. 그의 글은 계속해서 방송을 탔고 여학생들의 팬레터가 쌓이며 급기야 출연으로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상세히는 모르겠으나 거의 방송인이 되는 분위기 속에서 할아버지가 반대하고 나섰다. 나쁜 길로 빠질까봐서 그랬었단다. 물론, 이렇게 대물림된 억압의 근간에는 일개인의 아집과 성격보다는 시대적 배경과 사회경제적 처지가 두껍게 깔려 있었을 것이다.

나의 부모는 명문고를 다녔으나 대학에는 가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마지막 억압은 학력주의로부터 나왔다. 여기서의 학력은 學歷과 學力을 모두 포괄한다. 나는 전자의 학력주의로 인해 현실교육체제와 그 경쟁구도에 휘둘렸으며, 책상에 지긋이 앉아 있는 것이나 먹물티 내는 짓을 싫어하는 성격은 후자의 학력주의에 억눌렸다. 아예 처음부터 자녀들에게 1등을 기대하지 않는 상당수 가정의 편안함도, 명문대를 나온 일부 부모들이 자녀교육에서 보여주는 여유도, 집안에는 없었다. 대신 공부하고 좋은 학교에 가지 않으면 패자가 된다는 노파심이 가득차 있었다. 내게 자녀가 있게 될 확률은 미미하지만, 어떻게 되든 가족사에서든 전사회적 차원에서든 나는 학력주의의 억압을 끊어내려고 크고 작은 노력들을 기울일 것이다.

사실 대를 이은 노파심의 고리는 내가 대학에 들어온 이후 너덜너덜해졌다. 나의 부모는 내가 위험해지기 쉽상인 처지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나 내 주변의 사람들이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내가 위험스러운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스무 살 넘어 단 한번도 나의 덜미를 잡지 않았다. 이 역시 시대적 배경과 사회경제적 처지 때문이를 수도 있지만, 그분들의 이니셔티브가 없었다면 그런 진전은 이뤄지지 못했을 테다. 졸업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부모님께 감사한다.

오늘 상경한 어머니와의 대화. "20년 학교를 다녔는데, 역시 공부는 체질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네 동생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렇고, 공부하는 걸 체질적으로 싫어하데."  아, 전통과 관념보다 딱딱하고 굵은, 유전
의 파이프 라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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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일어났더니 일이 커졌던 두번째 편지..

연세대학교 자유게시판에도 올렸었다. 거기선 추천수가 3을 넘기가 힘든데, 이 나름의 선전포고에 추천을 눌러준 스물 여섯 분께 감사드린다(알아본 결과 그 스물 여섯 분의 대다수는 운동권이 아니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계셨던 분들이었던 것 같다). 그분들께 또한, 죄송한 마음 전하고 싶다.



방우영 이사장님, 이제 그만 물러나십시오
[주장] 사학 이사장이자 언론사주인 방우영님께 일개 학생이 드리는 편지
 
    김수민 (lolla) 
 
 
 
안녕하십니까. 연세대학교 재단이사장 방우영 선생님. 조선일보 명예회장 방우영 선생님. 저는 연세대 교육학과에 재학 중인 김수민이라고 합니다.

저는 조선일보를 보지 않습니다. 예전엔 구독을 하지 않고 도서관에서 열람하거나, 누가 버린 신문을 보거나, 네티즌들이 퍼다 나른 글을 보면서 논조를 분석하고 비판했습니다. 이제는 아예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제 정신적·육체적 건강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조선일보를 모른 체 할 수 없었습니다. 사립학교법 개정에 대한 견해가 너무나 궁금했던 터라 조선닷컴을 방문했습니다.

"사학법에 무슨 딴 뜻 있기에 이렇게 밀어붙였나." 조선일보는 저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학교운영위원회는 교사와 학부모, 지역대표들로 구성돼 있지만 운영회의 주도권은 조직화-세력화돼 있는 전교조 교사들에게 넘어갈 것이 뻔하다"며 전체 교사의 6퍼센트에 불과한 인원이 모인 전교조를 손수 고무·찬양해주셨습니다.

"일부 사학 재단 운영에 문제가 있다면 당국이 엄정한 감사를 통해 적발하고 바로잡으면 된다"는 말은 무책임한 말씀입니다. 참고로 저는 사립학교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사립학교에 문제가 생기면 사립학교 내부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설립자 나름의 종교적, 교육적 이념을 실현하려고 귀한 재산을 내놓아 세워진" 학교를 당국의 엄정한 감사만으로 유지하고 바로세울 수 있겠습니까? 설립자가 먼저 부패를 일소해야 하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사학 내부의 여러 구성원들이 나서야 하며, 그마저 여의치 않으면 국가나 시민사회가 참견할 수밖에 없겠지요. 이해가 가지 않으신다면 상문고나 에바다농아학교의 사례를 공부해보시기 바랍니다.

사설의 마지막 부분은 "전교조가 만들어내는 인간형에 기대 앞으로 몇 십 년 더 집권해 보겠다는 정권의 딴 뜻"을 거론합니다. 내친 김에 "다음 주 중 하루를 휴교하고 앞으로 헌법소원, 정권 퇴진 운동, 2006년도 신입생 모집 중지, 학교 폐쇄 등으로 대응해 나가기로" 결정한 한국사학법인연합회의 "딴 뜻"도 짐작해주시기 바랍니다.

조선일보는 후속 사설을 위해 친히 홍성대씨가 세운 상산고의 "운동장에" 서셨습니다. 사립학교법의 개정이 돈과 열정을 들여 건립되고 있는 자립형 사립고를 해친다는 걱정을 하고 계십니다. 말씀하신대로 "학교가 정한 기준에 따라 신입생을 선발할 수 있고, 교육과정의 재량 폭이 크고, 등록금은 일반 학교의 3배 이내에서 자율로 정할 수 있는 게 자립형 사립고"입니다. 그 외 예시한 장밋빛 현황과 희망찬 미래에 대해서는 별로 논의하고 싶지 않군요.

그런데 문제는 사립학교법 개정이 자립형 사립학교의 진취적 사업에 물을 끼얹었다고 단언하시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립학교법을 개정하면 홍성대씨의 막대한 투자금이 밖으로 샌답니까? 개방형 이사를 두면 하루아침에 자립형 사립고의 자율적 정책이 흔들리기라도 합니까? 자립형 사립고의 확대를 보류하자는 교육부 자문기구의 결정만으로 현존하는 자립형 사립고가 존폐의 기로에 서는 것입니까? 조선일보야말로 합리적 정책의 "다리를 잡아끌"고, 교육의 공공성을 "내리눌러" "공멸의 불평등" 앞에 눈을 감는 작태를 저지르는 것 아닙니까?

조선일보는 '종교계가 교육에 둔 뜻을 짓밟아버린 사립학교법'이라는 사실에서 사학 비리의 대부분이 족벌경영과 재산싸움이며, 종교계 소속 사학은 해당되지 않음을 강조합니다(그렇다면 족벌경영과 재산싸움으로 얼룩진 사학은 왜 강조하지 않았을까요?).

조선일보가 착각하고 있는 지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조선일보는 종교계가 세운 사학은 가족끼리 '사바사바'하는 사학과 다르다고 착각합니다. '가족'이 문제가 되는 까닭이 단순히 혈연관계로 맺어진 유착과 독점 때문일까요? 문제는 유착과 독점 그 자체입니다. 종교계는 여기서 자유로웠습니까?

지난해 종교 자유를 억압하는 학교에 맞선 학생이 징계를 감수하고 투쟁을 벌이고, 양심적인 목회자는 외로이 그 싸움을 지지했습니다. 그 학교는 종교단체가 세운 학교라서 문제가 없고, 맞서 싸운 학생과 목회자는 건학이념을 몰이해했던 것입니까?

둘째, 사립학교법의 개정은 사학의 부패척결을 위한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이었습니다. 거꾸로 말해 사립학교법의 개정안은 특정 사학은 물론 전체 사학을 겨냥하고 있지 않습니다. '부패의 조건'을 최대한 줄이려는 법안일 뿐, 사학을 거꾸러뜨릴 수 있는 무기가 아닙니다. 개방형이사의 비율도 '1/3'에서 '1/4'로 후퇴했습니다.

"전교조의 장악"요? 겨우 추천권이나 행사하는 전교조가 개방형이사를 추대할 수 있겠습니까? 가능하더라도 겨우 전체 이사의 1/4를 가지고 학교를 장악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분은 나머지 3/4의 상당 부분을 꾀어 장악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문제입니다. 허나 그럴 가능성은 사학설립자의 입장이 3/4만큼 강하게 관철되고 결국에는 개방형이사마저도 사학설립자의 입맛에 맞는 인물들로 채워질 수 있는 가능성보다는 낮아 보이는군요.

만에 하나, 전교조의 학교장악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전교조가 해당 학교에서 큰 지지를 받아 절차적 정의에 따라 이뤄진 일일 겁니다. 저는 아직 불가능하다고 봅니다만, 조선일보의 전교조 찬양·고무는 끊이질 않는군요.

드디어 조선일보는 "학부모에 학교 선택권 되돌려주면 사학비리 해결"된다고 외칩니다. 평준화를 폐지 내지는 완화하라는 말씀이시군요. 평준화를 폐지하여 학교 간 서열이 생기는 것은 그렇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이 서열 구조에 놓인 학생들과 학부모들 가운데 "명문고라도 학교운영이 바람직하지 않으면 진학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영롱이도 웃고 스너피도 웃을 노릇입니다.

저는 이 따위 말장난으로 채워진 신문을 뿌려대는 조선일보의 명예회장님께서 연세대학교의 재단 이사장을 역임하시는 것을 반대해왔습니다. 연세대학교는 여러모로 부족한 구석이 있지만, 적어도 제국주의와 군부독재에 부역하고, 최소한의 개혁조치에도 반발하는 족벌신문의 우두머리가 재단이사장에 버젓이 앉아도 괜찮은 학교는 아닙니다.

저를 비롯한 몇몇 학생들은 2001년에 방우영 선생님의 퇴진을 외쳤습니다. 그 학생들은 운동권의 연합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 양심적인 개인으로서 자발적으로 연대하였습니다. 그해 여름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의 세금포탈이 적나라하게 들통 났고, 연세대와 고려대 학생들이 합동으로 방우영 선생님과 김병관 선생님이 각각 연세대와 고려대의 재단이사장직에서 물러나시라는 취지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작년에 학내의 진보적 학생들이 일제부역행위가 있는 용재 백낙준 선생의 동상을 철거하자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저는 그것이 완전한 실패로 돌아가리라 예상했지요. 탈정치를 내건 총학생회가 반대해서도, '철거'에 부담을 느끼고 멈칫한 여론 때문도 아닙니다. 얼마 뒤,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의 문제제기를 국학연구회가 받아들여 백낙준의 친일에 관한 심포지엄이 주최되었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발제와 반대토론에 학내 교수들 중 아무도 참가하지 않습니다.

이사장님께서 버티고 계신 한, 이런 현실은 바뀌지 않겠지요. 그리고 어느 누구도 이사장님의 퇴진을 외치지 않습니다. 심지어 퇴진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저에게 함께하자고 약속했던 사람들도, 그럴 의지도 계획도 없는 듯합니다. 방우영 이사장님께서는 박정희나 전두환보다 더 운이 좋으신 분인 것 같습니다.

저 혼자라도 이야기하렵니다. 방우영 이사장님, 이제 그만 물러나십시오. 사립학교법의 개정에 극렬히 반대하고, 과거사청산의 대의를 매장하는 신문사의 사주가 '과거사'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립학교'의 재단이사장인 것은 분명히 불합리합니다. 더욱이 연세대학교가 무슨 방우영 이사장님의 사재를 대거 털어 만든 '자립형 사립고'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사장님이 그만두시더라도 연세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조선일보가 혐오하는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고,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출한 까닭을 아십니까?(그들의 옳고 그름은 논외로 돌립시다.) 노무현은 사지에 몸을 연거푸 던지며 큰 승부에서 이겼고, 민주노동당은 맨땅에 헤딩을 하면서 어렵지만 꾸준히 컸습니다.

남의 특권을 해제하려면, 자기 것부터 걸어야 합니다. 방우영 이사장님이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사원들에게 넘기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일보다 더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방우영 이사장님. 연세대학교 재단이사장직에서 물러나십시오. 물러나서 '빨갱이'들과 싸우십시오. 용퇴를 부탁드립니다.

방우영 재단이사장님께
종강을 맞이한 일개 학생 김수민 드림.


2005-12-22 17:15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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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 : 학창시절의 끝에서 1

Free Speech | 2009. 2. 11. 15:36 | Posted by 김수민

"대학원에 다니고 있어요."
"저는 학자입니다."
이런 말을 하게 되면,
자존심이

상할 것 같다.

내가 대학원에 가지 않는 이유, 학자가 될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첫째는 공부를 못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자존심 때문이다.

오해 없길, 학자나 공부를 우습게 보아서가 아니라 그냥
나니까, 체질이, 취향이
그렇다. 공부와 되도록이면 무관한 일을 하고, 그렇게 해도 천시당하지 않는 삶을 원한다. 독재자나 무인이 학자들의 입을 막고 책을 불태우는 것을 혐오하는 그만큼이나. 

초중등학생 시절 공부 잘하는 아이로 기억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기를 쓰고 공을 차고 배구선수로 뛰고 노래를 불러제꼈던 데에도 그런 사정이 얼마간 깃들어 있었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 성적이 떨어지자 더는 그런 평가를 듣지 않아도 되었다.

새내기 시절 어떤 형이 나의 글을 칭찬한다며 기껏 하는 말이
"얘 글을 보면 듣도보도 못한 외국 지식인들의 이론이 나오고..."
나는 그후 외국 지식인들의 이론을 인용하는 것을 자제했다.  
물론 공부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처음 유뉴스로부터 요청을 받고 칼럼을 연재했을 때
어려워서 못 알아듣겠다는 독자소감은 내게 상처가 되었다.
어렵게 쓰지 않았다는 나름의 자부심이 있기도 했고,
실제로 아무리 뜯어봐야 어려운 부분이란 찾기 힘들었다. (내 생각이겠지만...)
사유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서 생긴 문제라고 스스로 위안하고 넘어갔지만,
그 이후로도 쉽게 쓰려고, 이론 인용에 기대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했다. 

그렇게 나는 정신과 몸에 먹물이 묻을까 전전긍긍하고 살았다.
그러나 단지 어떤 대학교를 나왔다는 근거 하나만으로도
나는 내가 묶이기 싫어하는 엘리트들과 동류로 취급받아야 할 것이다.
자존심이 상한다.
그러나 결국 엘리트도 아니고 민중도 아니라는
그 지점에 이르러 나의 자존심은 기우뚱거리며 바로 선다. 

물론 공부 아닌 그 어떠한 일 역시, 나의 자존심을 떠받치지는 못할 것이다. 공부보다야 낫겠지만.  

이래저래 풀리지 않는 일에 염증과 짜증을 내다가 오히려 이 기회에 잘하면 고향에 내려가 동생과 장사를 하거나 집안 소유의 땅에서 농축산업을 할 수 있겠다는, 그것도 안 되면 마음 편하게 노숙자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를 때
우연히 술집 옆자리에서 기자라는 사람들이 잰체하고 있는 것을 '조까고 있네' 비웃고 막걸리잔을 들 때
비주류, 아웃사이더, 인디가 어쩌니 하는 말로도 포장되지 않고 유령으로 취급받을 때
얄팍한 공통점을 잡아 나를 어디다 분류하는 헛소리에 "전 그 사람들과 별 상관이 없어요"라고 할 때
입바른 소리를 하고 무시를 당했음에도 나의 이력을 밝히지 않고 그저 논리와 윤리만으로 반론하며 버틸 때(이러지 못할 때도 있어 부끄럽다) 
어제 쌓은 것을 뒤로 하고 원래 원했던 것으로 향할 때
영화제를 계기로 찾게된 마을의 어느 식당에 들어가 국밥을 시킬 때
조깅을 하다 앉아서 쉬며 놀러나온 개들을 볼 때
타인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서로 엉키며 혼선이 생길 때
자기소개를 얼버무리며 대충 하고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은 채 사람들을 구경하다 자리를 뜰 때
토요일 오후의 햇살을 받은 연두빛 나뭇잎을 바라볼 때
누워서 멍 때리고 있을 때
심심해서 길에서 주운 각목에 못질을 하고 있을 때
영양가, 칼로리는 하나도 없이 섬유질만 있는 이야기로 수다를 떨 때
라면이 익어가는 것을 볼 때
내가 라면과 가스와 냄비를 공급받게 된 사회시스템이 있지만 그것이 결코 라면을 끓여 먹는 행위 전부를 포박할 수 없음을 느끼는 순간

나의 자존심은 회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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