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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5

전파낭비 | 2009. 7. 18. 17:39 | Posted by 김수민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5가 17일 종영됐다. 당초 16회 분량이었지만 시청자들의 요구로 20회까지 늘어났다. 시즌 5가 시작할무렵 나는 시즌 1의 1회부터 보기 시작했다. 80회 이상의 전편을 본 셈이다. 김현숙씨가 사촌누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만 같을 정도가 됐다. 시즌 6을 가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좀 막막하다. 내가 팬이 된 까닭은, 리얼 드라마 형식의 독특한 재미가 있고, 연기력 빵꾸가 나지 않았으며, 여러 등장인물로부터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터이다.  

이영애(김현숙)는 그리 불행하고 불운한 인물은 아니다. 설정상 중산층으로 되어 있지만 집안을 들여보면 잘 사는 편이다. 항상 골치가 되는 건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외모와 꼬이고 뒤틀리는 러브 라인이다. 거기에 시즌 5에서 계약직으로 내려앉은 노동조건이 추가된 정도다. 하지만 그녀가 외모적 소수자로서 마주치는 불이익은 만만하지 않다. 불의를 보면 못 참는 그녀는 따지는 과정에서 항상 "아줌마" 소릴 듣게 되고, 이것은 그녀가 핸드백을 휘두르는 도화선이 되고야 만다. 이영애는, 그러니까 김현숙은, 정말이지 제대로, 속시원하게 '팬다'. 그는 주변 인물들과도 돌아가면서 쉴 새 없이 싸우는데, 내가 발견한 이상한 점 또는 아쉬운 점이 있다. 제부 김혁규(고세원)와의 사이에는 이렇다 할 이야기도 없고, 대화도 잘 일어나지 않는다. 시즌 6에서는 둘 사이의 관계가 부각됐으면 한다.

대화가 많지 않은 영애와 혁규. 가끔 이렇게 위협감을 느끼는 정도?



여러가지 애로사항에도 불구 내가 이영애를 행운녀라고 여기는 이유는 친구의 존재다. 학교 동창이자 직장 동료인 변지원 역은 도지원(동명이인데 나이가 덜 든 쪽)이 맡았다. 이 배우는 이목구비가 참 예쁘다. 하지만 <용의 눈물>에서 세종대왕비 심씨로 나왔던 12년전과는 판이하게, <막돼먹은>에서는 망가질대로 망가진다. 예쁘긴 하지만 키가 작고 돌아이(돌아온 이혼녀)라는 핸디캡을 안고 있다. 또, 집안이 엽기적으로 지저분하다. 아, 동질감!

반면, 내가 전혀 동질감을 느끼지 못한 인물이 정지순, 일명 개지순이다. 얻어쳐먹는 건 좋아하지만 식사를 사는 법이 없으며, 아부에서 비아냥까지 미움받을 만한 짓은 두루 하고 다니고, 처음에 여자한테 치근덕댔다가도 여의치 않으면 바로 깡끄리 무시한다. 얼마 전에는 사면발이에 걸려 "사발면이 생각난다"고 놀림받는 등 진상의 극치에 이르렀다. 이러다 보니 참다못해 그를 때린 직장동료도 부지기수다. 아마 나라도 한방 먹였을 법하다. 하지만 그가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무거운 짐에 힘겨워할 때, 과거 사랑한 여자의 결혼 소식을 듣고 눈물흘릴 때야말로 드라마의 가장 슬픈 장면이 연출된다. 물론, 연민도 잠시, 그는 또 개지순으로 돌아가지만. 이 배우의 등장은 연기적 측면에서 <막돼먹은>이 거둔 최대 수확이다.

영애와 어머니가 한 화면에 잡힐 때, 가끔 유체이탈인 줄 알고 허걱하는 경우가 있다. 시즌이 뒤로 올수록 그렇다.



시즌 5에서는 청년실업자, 계약직, 인턴 사원 캐릭터가 등장하면서 고용과 노동 문제를 비추기도 했다. 워낙에 유행어가 되어 별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88만원세대'라는 문구도 자막으로 볼 수 있었다. 마지막 장면은 누군가가 해고된다는 예고를 담고 있는데, 이외에도 여러가지 돌발변수들이 갑자기 나타나 시즌 6이 어떻게 흘러갈지 엄청난 궁금증과 조바심, 그리고 '자칫 막장드라마로 변하지 않을까' 약간의 걱정 안겨다주며 시즌 5가 끝났다. 시즌 6을 만든 건 8할이 시청자의 공로인 만큼 그것이 마지막 시즌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고로 시즌 6은 당연히 러브 라인을 정리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 같다.

영애와 설킨 남자는 예전 직장후배였고 이미 두차례 사귀며 친숙해진 '도련님' 최원준과 상냥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편했던 디자인 과장인 장동건(이해영). 영애 곁에 최후에 남는 남자는, 제작진이 구체적인 결말을 다 정해놨을 공산이 높으나, 내 생각엔 시청자가 좌우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가을에 시청 소감 게시판에서 한판 벌어지면 흥미진진하겠다. 구경만 할 계획이지만 나는 장동건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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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납북도 월북의 일부

史의 찬미 | 2009. 7. 17. 15:33 | Posted by 김수민
"사상범으로 몰려 늘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아가며 살아왔습니다."(잊혀진 '납북 제헌의원' 40여명) 얼핏 남로당이나 보도연맹 연루자 유가족의 증언 같지만, 김영동 제헌의원 아들의 증언이다. 1969년 건국훈장 수여 대상에서도 김 의원은 제외됐다. 월북인지 납북인지 뚜렷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재산가이며 따라서 좌익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 1960년대 초반 북한에서 막노동에 시달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납북임이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납북과 월북을 구별할 수도 없는 주제에 둘을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삼는 정부의 태도는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북조선이 서울을 장악한 다음 북측이 마련한 첫 방송연설에 나선 남측 인사는 초대 육군 참모총장 송호성이었고, 그 다음이 제3대 내무부 장관 김효석이었다. 반공반북의 핵심인물들이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 잔류하며 겪은 일들을 기록한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는 안재홍, 조소앙 등이 대한민국을 덜 욕하고 인민공화국에 덜 아첨한 데 비해, 김효석의 연설이 지나치게 비굴했다고 적고 있다. 물론 다들 전쟁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연설에 나선 결과지만, 북측에서 생명을 위협하거나 내용을 일일이 강제한 정황은 없었다는 게 연구결과다. (이신철, <북의 통일정책과 월 납북인의 통일운동 (1948~1961년),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대학원 박사논문, 2005)

제헌 국회의원들은 미제의 무력침공 반대를 골자로 하는 <조선 인민의 성명서>에서도 서명했는데, 조소앙, 안재홍, 여운홍,원세훈 등의 이름이 눈에 띈다. 김영동 의원의 이름도 올라가 있다. 단 국회프락치 관련자들은 명단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평양으로 떠나 있었다. 해서 그들이 실제로 프락치였다는 의혹이 후일 제기되었다. 납북인사들의 활동을 증언했던 신경완도 소장파들이 북측의 성시백과 연결되어 활동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규식에 이어, 북측에 의해 마이크를 잡았던 김약수는 이승만 정권이 국회프락치 사건을 날조했다고 규탄했다. 이승만 정권을 견디고 있던 좌익이 월북했다는 것,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 등이 납북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국회프락치사건 당사자들에 이르면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그들이 진짜 프락치일 가능성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이 북으로 넘어가게 만든 1등공신이 이승만 정권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6.25 직후 유력인사들이 서울에서 가진 방송을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김영동을 비롯한 관련 국회의원들은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

6.25 직후 <조선일보> 사주인 방응모가 도강하지 않고 서울에 잔류해 있었다. 설마 자신한테 북측이나 좌익이 심하게 하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전쟁이 터졌을 무렵 야구장에서 태연히 앉아 있던 서울 시민들도 있었다. 북측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 초기는 수없는 국지전 끝에 남침한 북조선에게 내전조차도 아니었다. 전쟁으로 이남을 먹겠다는 태도보다 서울을 잡으면 국토완정에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훨씬 뚜렷했다. 월북이든 납북이든 평양에 '모셔진' 인사들도 나중에 서울로 되돌리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6.25는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가 들어선지 불과 2년도 안 되어 벌어진 일일 뿐이었다. 당시로서는 그렇다.

해방정국기 역사를 공부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는 어느 쪽이냐? 재밌는 대답이 떠올랐다. "북조선에 살았으면 월남했을 것이고, 남한에 살았으면 월북했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 고향을 떠나야 한다. 자리를 옮긴 뒤로는 사상적 건전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겠지만, 이내 새로 만난 체제의 주류와도 불화했을 터이다. 남에서 북으로 간 김원봉이나 북에서 남으로 간 장준하처럼. 통일된 조국에서라면, 혹은 평화적 분단체제에서라면, 중도좌파나 중도우파로 엄연히 존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그런 경로를 밟아야 했다. 한국전쟁 당시 북조선은 다양한 사회주의세력과 홍명희 같은 중도파까지 껴안고 있던 체제였다. 처음부터 강성 독재는 아니었다. 백퍼센트 자발적 월북이더라도 그것만으로 대한민국 헌법의 가치관에 어긋난다고 판정할 수는 없다. 

거푸 말하지만 납북이든 월북이든 그들은 이승만 정권의 극우독재와 한국전쟁의 상황에 의해 북으로 내몰린 것이다. 어찌 됐건 '선을 넘어갔다'는 사실만이 오로지 명확하다. 월북을 폭넓게 해석하면 납북인은 그 하위 분류인 셈이다. 월북과 납북의 구별은 난망할 뿐더러 의미가 별로 없다. 북조선에서 호의호식한 게 아니라면, 김영동 의원을 비롯한 월납북인들은 남한 정부에게 정당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 반민특위에 투신했던 김 의원이 사후에도 벗어나지 못한,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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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껍

Free Speech | 2009. 7. 15. 17:58 | Posted by 김수민
소리나 촉감이 아닌, 냄새 때문에 잠에서 깬 적이 있는가? 당연히 다들 있을 것이다. 아마도 상당수는 맛있는 아침 냄새가 아니었을까? 오늘 나는 코에 의해 깨어나 눈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글쎄 방안이 온통 연기로 자욱하지 뭔가. 불이 났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는 시껍하고 작은 집안을 돌아다녔다. 원인이 될 만한 건 담뱃불이 유일한데, 그것은 화장실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나는 베란다에서 전말을 깨달았다. 아랫집의 연기가 열린 창문을 통해 내 방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아랫집에 사는 원룸 주인 아줌마는 바깥 수돗가에서 생선을 태워먹은 프라이팬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화제가 아님을 확인했음에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연기는 끊이지 않아서 나는 베란다 창문을 닫았고, 방안에 들어온 연기는 반대편 화장실쪽 창문으로 나가길 거부하며 방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아랫집에서 연기가 그치길 기다렸다가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연기가 완전히 빠지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냄새를 참으려 담배를 피우면서도 헛구역질을 했다. 나는 생선비린내에 매우 취약한 사람이다. 못다한 잠을 청한 뒤, 꿈 속의 나는 넓은 집에 살고 있었는데 여기저기서 연기가 나서 끄느라 고생을 했다. 아직도 방에는 비린내가 감돈다. 황사 등 자연현상에서부터 신자유주의 금융위기 같은 인재까지... 이 나라에도 연기가 자욱하고 비린내가 진동한다. 윗집 아랫집 가릴 처지가 못 된다. 특히 연기는 위로 뜨기 마련이라는 걸 '윗것'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용산참사 유가족들의 행진이 예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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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박라디오, 뉴규 아이디어냐규

전파낭비 | 2009. 7. 15. 02:04 | Posted by 김수민

김대중의 말은 논평과 거의 비슷하다. 노무현이 대변인이던 시절 막히는 게 있으면 동교동으로 가서 김대중 총재의 말을 들었는데, 그냥 받아적어도 논평감이었다고 한다. 사상시비를 비롯해 여러 음해를 받았던 정치인으로서 제 말이 활자화되었을 때를 충분히 대비하는 자세 덕일 것이다. 반대로 노무현은 활자매체에서는 두드려맞기 딱 알맞은 스타일이나, 영상매체에는 대단히 부합한다. TV앞 정치인은 진실하고 생생하면서도, 카메라 앵글에 잡기 좋은 연기력이 있어야 한다. 정동영과 김근태는 잘해야 둘 중 하나만 갖춘 경우다.

이명박의 부상에는 활자(신문)나 영상(방송)보다는 입소문이 크게 좌우했다. "청계천을 과감하게 만들었다 카더라." "대통령 후보로 유력하다 카더라." 어차피 그를, 그가 출세한 기업인임을 모르는 대중은 드물었다. 이명박캠프의 유능(!)한 기획가들은 플래카드에서 원래 그의 얼굴을 뺐다. 고지가 눈앞인데 괜히 비호감 키울 일 없지 않은가.

그래도 이명박은 그나마 영상으로 보는 게 낫다. 얼굴은 별로면서도 목소리가 의외로 유려한 이들이 많지만, 이명박은 그것도 아니며 음성이 더 나쁘기 때문이다. 한 국가의 대통령에게 공영방송 라디오에 나와서 국정을 홍보할 권리는 있다. 노무현은 이상하게도 그 방법은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명박으로서는 라디오 출연이 패착이었다. 본인이 먼저 아이디어를 냈을 수도 있지만, 혹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건의한 자는 누구일까? 무능하도다. 

 

루스벨트가 가진 재능을 설명하려면 그가 좋아했던 의사소통 수단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라디오였다. 친밀성과 직접성은 매체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라디오는 지도자에게 가자 친밀한 사회 단위인 가족에 대한 접근을 가능케 했으며, 자신의 메시지를 그 가족 구성원들 각각에게 친히 전달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리하여 청취자들은 더 이상 연설가가 아닌 화자와 직접 대면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중략) 라디오 청취자들은 루스벨트가 "황금의 목소리", 즉 "신선하고", "유쾌하고", "풍부하고", "재치 있고", 그리고 "선율이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다고 믿었으며, 그러한 속성들을 루스벨트라는 한 인격체에 이입시켰다. (...) 1940년대의 한 수사학 연구자는 "만약 허버트 후버가 마이크에다 (루스벨트의 취임 연설과) 똑같은 단어들을 말했다면...... 주식 시장은 바닥으로 떨어졌을 것이며 그와 함께 국민의 신뢰도 붕괴했을 것이다"라고 결론 내렸다.

(중략) 마치 시대착오적인 커다란 제스처를 사용하는 동료들을 뒤로 한 채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영화의 등장으로 인해 이익을 었었던 것과 같았다. 장엄한 수사학적 양식이 없는 루스벨트의 연설 방식은 라디오 시대에는 오히려 유리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루스벨트의 성공은 단지 선천적인 재능의 산물만은 아니었다. 그의 라디오 연설들은 주의 깊게 구성되었으며 체계적으로 연습되었다. 히틀러가 거울 앞에서 제스처를 충분히 연습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루스벨트는 발음, 억양, 속도, 숨 돌림 길이, 그리고 단어 선택에서 다양한 변화를 실험하면서 자신의 노변정담들을 연습했다. 그의 기본적인 규칙들 중 하나는 미국식 영어에서 어디에서나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단어들로 제한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자신의 목소리에서 실제 연설에서는 거의 포착하기 어려운 경미한 쇳소리를 제거하기 위해 라디오 연설을 하기에 앞서 항상 의치를 했다.

(중략) 루스벨트의 노동부 장관이었던 프랜시스 퍼킨스는 백악관에서 있었던 노변정당의 녹음을 회고하면서 "마치 그가 실제로 청중들과 함께 현관의 베란다, 혹은 응접실에 앉아 있는 것처럼 그의 얼굴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고 밝았다"고 말했다. 청중들의 반응도 거의 똑같았다. 루스벨트의 보좌진들 중 한 사람이 백악관에 돌아와서, "이 아래 있는 모든 국민들은 자신들이 대통령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 그들은 대통령이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끼고 있다"고 보고했다.

- 볼프강 쉬벨부시 (차문석 옮김), <뉴딜, 세 편의 드라마>, 지식의 풍경, 2009, 86~91쪽.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더니 루스벨트가 아니라 이명박 '후버'가 된 것 같지 않은가? 청와대 학동들이여, 날로 먹을 꿈도 꾸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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