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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성주의 적대적 공존

Forum | 2009. 6. 18. 19:45 | Posted by 김수민
배울 거 다 배우고 약아빠진 놈들이 입만 열면 '먹물'이니 '식자우환'이니 떠들고
그다지 지적이지도 않은 녀석들이 자기가 욕먹으면 반지성주의라고 입방아찧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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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간 연대

Forum | 2009. 6. 18. 00:55 | Posted by 김수민
김용민씨가 20대를 나무라면서 터진 논란을 지켜보며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세대내의 연대와 일체감에 취한 사람일수록 다른 세대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겉으로는 배려하고 추켜올려도 그것은 지극히 기능적인 측면에 그치는 것이다. 기획 측면에서의 연대나 경합은 벌어지지 않는다. 나와 친한 '참이슬'씨가 진보신당의 당령초안에 문제제기를 했다가 한 당관료에게 항의전화를 받았다. 불만을 공개적인 논쟁으로 풀지 않고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그가 자기 후배세대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폭로한 사건이었다.

나는 88만원세대 담론 이후에 나온 여러 대안적 기획에 한결같이 뚜렷한 한계가 깔려 있음을 본다. 88만원세대가 뭉쳐서 해결할 일은 없고, 오히려 그것으로써 잘못된 구도를 더욱 굳히는 효과만을 낳는 것이다. 88만원세대가 386세대의 매우 훌륭한 직계후배라는 나의 비아냥은 잘못된 대안으로 더욱 힘을 얻게 된다. 그러니 당당하게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세대상은 없다"고 말해줘야 한다.

나는 이따금 나보다 스무살 어리거나 스무살 많은 이들과의 관계형성을 고민한다. 세대내 연대는 세대적 문제를 풀 만한 별다른 해법을 제공하지 못한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박보장기는 엎어버리는 것이 정석이다.

끼리끼리 시시덕거리면서 다니는 그 어떠한 길도 철저히 외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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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1997년

Free Speech | 2009. 6. 12. 16:18 | Posted by 김수민

중학교 졸업여행길에 올랐던 날은 아마도 대선을 이틀인가 사흘인가를 앞둔 시점이었다.

A: 이번엔 바까야 돼. IMF도 터졌고 하니까.
B: 지랄 바꾸긴. 김종필이 국무총리되는 게 바뀌는 거냐.
A: 그럼 이번에 또 정권을 연장시켜줘야 되는 거야?
B: 김대중-김종필보단 이회창-조순이 차라리 낫겠다.

나는 둘 중 어느 쪽일까?

C: 그럼 넌 누굴 지지하는데?
B: 권영길이 사람은 젤 낫지.
C: 암튼 전두환이가 김대중을 완전히 쫓아냈어야 했는데...

A, B: 조까고 있네. 넌 빠져 임마.

2000년에 나는 유시민이 쓴 <1997 대선, 게임의 법칙>을 읽었다.
내가 1997년에 가진 생각도 유시민이랑 거의 비슷한 생각이었다.

통합민주당 후원회장이었던 박형규 목사가 "DJ나 JP가 되는 것보다 김영삼 대통령이 개혁적인 인물을 미는 게 낫다"라고 발언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김덕룡이나 이인제 등등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았다.
여기엔 이회창도 들어간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분명
1990년대 중반의 상황에서 이회창은 김대중보다 더 개혁을 대변했다.

언젠가 국민학교 6학년 시절 쓴 일기를 들춰보니 이회창에 대한 구절이 나왔다. 
나는 머리속에 '쓰면 지는 거다'에 해당하는 어휘를 모은 수첩이 있다. 
그 첫줄에 씌어 있는 건 '융통성'. 
내가 본 어른들이란,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그것을 저지하는 남에게는 '융통성이 없다'고 내뱉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래서 '융통성'이라는 말을 매우 싫어하는 동시에 그게 없다는 말을 듣는 사람에게 호감이 갔다. 
내가 이회창에게 가졌던 호감이란 것도 그런 것이었다. 
1995년경에는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기억하건대 주변의 어른들은 원래 이회창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내 고향 구미 사람들은 김영삼 다음은 김윤환이라고 착각하고 살았다.
박정희 다음에 대통령이 구미에서 한명 더 나온다나?
(박정희가 대통령되기 전에 구미에서 대통령 나온다는 말은 없었을 것이다.)
다시 돌아봐도 바보 같은 태도였다. 김윤환이 어딜 봐서? 이런 수준이니, "노무혀이는 절대 안 된다"는 장담 덕에
노무현이 당선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구경북 민심은 이회창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이는 몇년간 계속되었다. 
나는 이회창이 통합민주당이 아니라 신한국당을 택하면서, 그리고 민정계 김윤환의 후원을 받기 시작하면서
존경심을 조금씩 거두어들였다.

내 주변 어른들이 "세력이 없어서 안 된다"던 이회창은 결국 신한국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한보사태로 김영삼의 역할이 줄어들고 최형우가 쓰러진 뒤 민주계에게는 힘이 없었던 것이다.
민주계는 이인제, 김덕룡, 이수성을 향해 뿔뿔이 흩어졌다.
당시에는 이수성이 후보가 되리라는 관측이 유력했다. 1차투표에서는 이회창이 이기더라도
당내 반대자가 많아서 결선에서 뒤집힌다는 시나리오였다.
그해 나온 고원정의 소설도 이수성의 출마를 예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인물이 정치에서 성공하기는 어렵다. 전국에 형님아우하는 사람이 몇만몇천명이라도 소용없다.
김영삼에게 "독단적인 인물에게 미래 없다"라는 말을 듣고도
"비민주적 정당에게 미래 없다"라고 받아친 이회창 정도의 깡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어 국민회의 경선에서는 김대중이 정대철을 꼬마다루듯 가뿐하게 꺾고 승리했다.
정계은퇴로 가슴을 찡하게 했던 김대중은 선언을 번복하고 복귀했다.
그가 다시 돌아오는 게 맞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다.
뉴스를 보던 삼촌은 "다시 하는 게 맞지. 그럼 누가 하노?"라고 밝혔다.
몇달 전 그는 <김대중 죽이기>라는 책을 읽은 터이기도 했다.

그러나 공갈협박하듯 당권을 내놓으라 하더니 제1야당을 깨버린 처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1996년 총선은 철저히 삼김의 지역분할로 진행되었다. 김대중씨는 그때 내게 '구악'의 일원으로 여겨졌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조순 지지는 유시민의 조순 지지와는 조금 달랐다.
유시민은 당선가능성을 주된 잣대로 삼았겠지만, 나는 민주화나 정권교체에 더해, 지역주의와 보스정치를
반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물론 배움이 많지 않고 지금보다도 열 서너살이 어린 나였기에 좌우 구도나 이런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최종확정된 대선 후보 중 권영길이 제일 낫다고 한 것도,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감화되어서가 아니라
그가 도덕적인 흠결이 없는 후보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보니 노무현이 당시에 "조순, 권영길 후보만 도덕적이다"라는 발언도 했었다 한다.

강준만은 옛 정권 출신인 조순을 어떻게 밀 수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나야말로 되묻고 싶었다.
박정희 추모행사인가에, 김대중이 참석해 재평가 발언을 늘어놓았고,
조순만이 참석하지 않은 것은 어떻게 볼 것인가?
역시나, 김대중은 대통령 재직 도중 박정희기념관 국고보조를 선언했고,
조순은 박정희기념관반대운동에 가담했다.
오늘날 김대중은 한미FTA 찬성론자이고 조순은 반대론자이다.
사회경제적 좌우 구도가 머리속에 자리잡지 않은 점은 그때의 강준만도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조순은 드디어 서울시장직을 사퇴하며 민주당 후보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내가 '단안'이라는 낱말을 처음 주워들은 게 이때였다.
다소 연로하다는 단점은 있었으나 그는 김대중, 김종필보다 젊거니와, 나이보다 젊은 이미지를 가졌다.
거기에 노무현 등 통추 그룹이 붙어주면 보완이 될 터였다.
지금도 기억나건대, 조순은 등장하자마자 여론조사에서 24%를 얻어 김대중에 1% 뒤진 2위를 했다.
이인제가 떴을 때 지지율이 토막났지만 둘이 단일화를 할 경우 이긴다는 조사도 나온 적이 있었다.

한편 이인제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별 감흥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박정희 흉내를 내면서 지랄한다고 생각했다.
이만큼 '박정희'라는 것은 내게 중요한 준거였다. 내가 김종필과 손잡은 김대중을 지지 못했던 까닭도 거기 있다.

김대중이 통일과 경제분야에 식견이 있는 정치인임은 분명했다.
조순은 TV토론에서 그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보수적인 발언도 꽤 많았던 것 같다.
나는 김대중과 조순이 단일화하길, 그래서 민주연합이 성사되길 바랐다. 하지만 결과는 DJP의 연합이었다.
그때 나는 그룹과외를 하고 있었는데 과외선생이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나는 "후세들에게 부끄러운 짓"이라고 했다.

1997년 당시에 내가 성인이라 투표권이 있었다면 누굴 찍었을까?
김대중이나 이인제는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표 버리는 심정으로 권영길을 찍었거나, 차라리 이회창을 찍었을 것이다.

1997년 대선 내게 마지막 변수는 노무현이었다. 갑자기 그가 대선출마를 시사해 버린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통추의 이인제 지지 흐름을 차단하기 위한 방책이었지만,
그때 난 저 사람이 다음에는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했다.

노무현은 아마 한동안 조순을 지지했겠지만 조순은 이회창에게 후보직을 양보했다.
나는 노무현이 낄 데가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김대중을 지지하고 나섰다.
내 눈에는 오히려 권영길을 지지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였는데 말이다.

나는 그때 왜 노무현이 김대중을 지지했는지 시간이 지나서야 이해했다.
삼김을 청산하는 것보다는 일단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 새 인물들의 등장에 이로웠다.
그리고 DJP연합은, 너무나 적절한 시점에서 깨진 덕분에,
예상과는 달리 한국정치사에 큰 해악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술수와 초심을 겸비한 김대중이라는 인물의 능력이었다고 본다.

신한국당의 대선 주자들을 두고 구룡이니 팔룡이니 말이 많았다.
대선 후보가 아니라 대통령이 그들 중에 나오리라는 관측이 유력했다.
그러나 '준비된 대통령'+'정권교체'라는, 저변에 흐르던 도도한 흐름을 이길 수는 없었다.
대구경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김대중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말들이 30대 사이에서 돌고 있었다.
박태준까지 지지한다니 예전처럼 색깔을 의심하지 않아도 되었다.

대선 당일, 아버지는 밤 11시경 "에이, 마 끝났다. TV 끄자"라는 말을 남기고 주무시더니
다음날 아침 신문 1면을 자고 있는 어머니 눈앞에서 흔들었다.
1987년과 1992년 김대중을 찍으려고 했던 어머니는 1997년에는 전혀 김대중 지지의사가 없었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나까지 욕하는데 찍을 명분을 찾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선거 직후 나는 친구들과 고등학교 합격자 오리엔테이션(?)을 다녀왔다.
시내와 버스 안의 분위기는 촥 가라앉아 있었다. 특히 노인들 표정은 넋이 나간 듯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다른 감회를 가진 사람들은 있었다.

레코드 가게 종업원 남녀가 나눈 대화다.
"김대중이 당선이 됐네."
"거봐요."
"그렇게 찍자고 하더니. 됐어."
"오빠도 찍었잖아요."
"이제 대통령도 바뀌었으니 장사가 잘 되겠어."
"그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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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은 PD와 작가의 분리

전파낭비 | 2009. 6. 11. 16:12 | Posted by 김수민

"라디오 진행 몇년쯤 하셨어요."
"6,7년쯤 했습니다..."
"아 그래요? 그 프로는 작가 없어도 되겠네."

요즘 도는 대화내용이다. 라디오도 풍전등화인 것 같고, 간판투수인 쇼프로는 어쩔 수 없으니 일단 시사교양부터 정리하는 모양이다. <6시 내 고향>도 작가 없이 진행중이란다. KBS 'PD집필제'가 빚어낸 풍경이다. 한국방송작가협회가 성명을 낸 이래 MBC, SBS, EBS의 프로그램에서 일하는 작가들도 연대에 동참했다. 이동이 잦은 작가들의 보이콧은 예사롭지 않다. 비정규직 및 프리랜서 노동자로서의 저항권을 실현한 셈이다. 물론 반대로, 남들이 마다한 자리 얼른 채어가야 하는 작가들도 생겨나겠지만. 그러나 이 사태를 초래한 불안정노동 말고도, 근원에 자리잡은 기성 분업체계의 한계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PD와 작가들이 함께 PD집필제를 놓고 대담한 <미디어오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원고 쓰는 PD가 반드시 유능한 것은 아니다. 훌륭한 PD라도 글 못쓰는 PD 많다. 경쟁력 있는 PD는 프로그램 보는 눈이 있고, 스텝의 역량을 최대한 이끌어낼 수 있는 PD다."
- 김주영 한국방송작가협회 KBS사태 비상대책위원


김주영씨의 지적은 현재 한국방송의 현실에는 부합한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 기능주의적 관점을 안고 있다. 방송원고는 시나 소설이 아니라 '말'을 적는 것이다. 특별한 미문을 요구받지도 않는데도 자신의 방송에 나갈 글을 쓰지 못하는 PD를 원론적으로 훌륭하다고 볼 수는 없다. 자신이 직접 쓰지는 않더라도 작가의 원고를 검토할 역량이 있다면 자신이 쓸 수 있는 역량 또한 있을 것이다. 작가들과 함께 PD집필제 반대에 나선 PD들도 PD의 집필참여 자체에는 긍정적이다.

"PD가 글 쓸 수 있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나 <풍경이 있는 여행>처럼 1인 제작 시스템도 있다. 하지만 이는 PD집필제와는 다른 차원의 얘기다. 글 쓰는 문제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가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추진하는 이른바 PD집필제를 반대하는 것이다."
- 김덕재 KBS PD협회장

"PD집필제 시행의 가장 큰 이유는 제작비 절감이다. PD들 놀면 뭐하나 이런 시각도 있다고 본다. 물론 일부 PD가 써도 무방한 프로그램이 있다. <아시아 투데이>의 연출을 맞을 때 집필을 한 적이 있는데 이 프로그램은 PD가 현장에서 부딪혀야하기 때문에 현장에 다녀온 PD가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이번 PD집필제로 PD들의 일이 많이 늘었다. 섭외부터 구성, 가원고, 자료조사까지. PD가 다 알아서 해야 한다.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누적되면 힘들 수 있다. 맡고 있는 <역사추적>도 이번 주부터 집필을 하게됐다.
장점도 있다고 본다. 사실 PD들이 게을렀던 부분도 있다. 작가한테 맡기는 경우도 많았다. 개인적으로는 PD가 모든 것을 다해야 하기 때문에 더 꼼꼼하게 보게 된 것이 사실이다."
- 나원식 <역사추적> PD 



사람들이 흔히 예상가능한 원고작성은 물론, 아이디어를 내놓고 계속해서 촬영화면을 체크하는 등 작가들은 방송에 누구보다 깊이 개입해 왔다. 시사교양프로의 경우 촬영현장에 동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PD보다 확실히 낮은 위상을 가질 수는 없다. 굳이 따지면 작가는 내근 PD고, PD는 현장작가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지상파 방송에서, 명문대 나온 사람은 취업공부해서 PD로 입사하고, 작가는 '스펙'에 관계없이 도제 시스템을 밟아 프리랜서 및 비정규직으로 활동했다. 방송 전반을 궤뚫는 두 직종은 서로 배우고 수렴함에도 양자의 과정과 결과가 판이하다. 그리고 어김없이 비정규직은 쫓아내고 정규직은 혹사시킨다는 전형적 구도는 PD집필제를 통해 관철되고야 말았다.

꼭, PD보다 훨씬 많은 작가 인력을 되도록 정규직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PD를 프리랜서화, 비정규직화하자는 이야기도 아직은 꺼낼 계제가 아니다. PD와 작가의 업무와 노동형태에 관한 기존의 관념을 잊고, 현재 프로그램에서 맡고 있는 작업과 앞으로 요청받을 임무를 따져보자는 것이다. PD와 작가는 다른 직종인가? 다른 직종이어야 하는가? PD집필제를 하려거든 PD에 작가가 포함되는 '작가의 PD화'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 (물론 여기엔 방송분야의 정규노동과 비정규노동 전체의 재편이 뒤따라야겠고.) 이런 노력이 단순무식한 인력 정리보다는 훨씬 프로그램의 질 향상에 바람직하게 작용할 터이다.  

듣자하니 남은 작가들은 자신들의 원고보다 몇시에 무슨 일정을 소화할지 계획표를 써내는 쓸데없는 데 더 골머리를 앓는다고 한다. 현 대통령은 후보 시절 선거유세에서, 참여정부를 두고 "일을 참 못해요"라고 했다. 누워서 침뱉기격임을 스스로 아는지, 그 말은 방송사 사장한테는 못하는 것 같다. PD도 원고를 쓸 수 있으면 좋다. 이점에서 나름 경영진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머리 맞대기의 창조성을 깨닫지 못한다. 재벌과 신문, 방송, 검찰과 경찰이 머리를 맞대지 않았다면 MB 버라이어티쇼도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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