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 정서로 철두철미 포장되어 있지만 알고 보면 따먹을 과실이 눈앞에 있던 부류들. 황빠, 디빠...
주류도 아닌 걸 주류로 설정하여 까대며 자신의 정당성을 찾는 부류. 비주류의 비주류나 아웃사이더라기보다는 스따.
주류가 곧 정의라고 생각하는 부류. 졸라 대다수. 목소리만 큰 앞의 두 부류를 비웃고 살지.
나는 이 말이
"시장을 철폐하자" "자본주의를 반대한다" 따위의 구호보다
훨씬 좌파적이라고 생각한다.
알튀세르주의자들이 폴라니에 경기를 하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그냥 한번 시비나 걸어보잔답시고 나서는 이들도 있나 보다.
이택광 씨라는 사람도 한번 그랬던 것 같다.
알튀세르는 제대로 자본론을 읽지도 않고 잘난체하느라 내심 걱정을 많이 했다던데
(알튀세르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론적 측면을 떠나서.)
나오자마자 비판적 지식인이란답시고 두들겨나보자는 이들, 고생이 참 많다.
알튀세르주의자든 그냥 한번 까보자는 인간이든 도리어 자신의 문제를 폭로하고 있는 것이 있다.
홍성태 교수는 얼마 전 낙원음악영화축제 토론회에서
건축적 폐해 때문에 낙원상가가 철거되어야 한다고 보지만
철거할 때의 태도가 지을 때의 태도와 같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계획경제에 대해서도 이런 견해가 성립될 수 있다.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와 신자유주의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 있다.
교조적 마르스크주의는 시장의 전제를 계획지상주의로 대체하고자 하고
신자유주의는 시장'들'을 압도하고 사회원리를 뒤덮는 단일시장원리를 추구한다.
폴라니의 사상은, 바로 그에 대한 안티 테제다.
이건 양비론도 아니고 절충주의도 아니다. 획일성과 전체주의적 사유에 맞선 거대한 대결이다.
계획 대 시장의 구도 자체가 허구라는 얘기다.
그걸 뒤엎지 않고, 자본주의에 반대해야 좌파이고
시장경제를 부정하지 않는 폴라니는 별로 좌파적이라고 지껄이는 건 무의미하다.
(또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완벽히 동일시하는 제 시각부터 점검해야 할 것이다.)
알튀세르주의자들이야 내 개인적으로는 내놓은 인간들이라고 쳐도,
나머지 폴라니 비판자들은, 우습지도 않다.
무슨 장기판 좌파 어쩌고 하는 표현까지 나왔던데, 자신한테 어울리는 옷을
남한테 입히려고 노력하진 말았으면 좋겠다.
이따위 꼬라지를 보고도, 홍기빈씨는 가만히 있었나?
3년전에 썼던 어설픈 글: 민주주의로 시장을 갈아치울 수는 없다.
시장과 민주주의는 완전히 조화될 수 없고, 언제나 갈등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진전은 곧 시장의 축소를 뜻하는가? 정치캠프의 한 동지는, 내가 이해하기로는, 결국 민주주의에 따른
계획경제가 대안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그 시각에 따르면 시장의 축소는 민주주의의 진전이다. 그러나 이런 진전은 민주주의를
저해함으로써 결국 민주주의의 모순을 불러 일으킨다. 당연한 현상이다. 원래 민주주의라는 것 자체가 모순과 경합 속에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 더욱 그러하다.
민주주의와 계획을 통해 경제를 운영하는 것이 효율성이나 경쟁력은커녕 민주주의 원리조차 파괴한다는 사실을 여기서, 일단 간단히 증명해 보이겠다.
자, 드디어 어디에선가 계획경제의 이상이 실현되었다. 볼펜의 가격을 측정하고자 한다. 한 무리들은 500원으로 하자고 입을 모은다. 다른 한 무리들은 1000원을 내세운다. 여기에는 두가지 경우를 상정해 보겠다.
첫
번째, 그 가운데 가격을 요구하는 무리들이 별로 없고, 양쪽이 팽팽하게 나눠진 경우다. 500원이 47퍼센트, 1000원이
51퍼센트로 승리했다. 단, 4퍼센트의 표가 연필 값을 500원이나 뛰게 만든 것이다. 49퍼센트는 사표가 되었다.
50
퍼센트만 넘기면 뭐든 할 수 있다! 한번의 게임으로 구성원들은 모든 것을 깨달았다. 이때 인민의 몸값에는 차등이 생긴다.
‘캐스팅 보트’를 쥔 사람을 꼬여오기 위해 이 무리 저 무리들을 최선을 다할 것이고, 결국 ‘캐스팅 보트’를 쥔 쪽의 구성원들은
어떤 무리의 평균 보상보다도 높은 보상을 차지하는 특권층이 될 것이다. 50 이하를 점한 세력은 또다시 그들을 빼내오기 위해 더
큰 몸값을 제공할 것이고, 악순환은 끊이지 않는다.
두 번째, 500원과 1000원 사이의 값을 내세우는 쪽이
영향력을 발휘할 만큼 존재할 경우이다. 그렇다면 항상 결과는 ‘중간’으로 수렴된다. 500원이나 1000원을 내세우는 쪽이
아무리 합리적이고 신중하게 판단을 했더라도 그들은 언제나 ‘양극단의 변두리세력’에 불과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항상 다수결의 문제를 불러온다. 이 다수결주의의 폐해를 가능한 막아내지 못하면 개인 및 소수자의 권익은 우중의 폭력 앞에 노출되고, 민주주의는 무의미해지거나 스스로 무너져 내린다.
민
주주의는 ‘1인1표’의 철학이다. 그러나 모든 영역에서 똑같이 ‘1인1표’를 행사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그래서 본격적인 결정이
내려지기 이전의 모든 단계에서는 각자의 능력, 도덕성, 신뢰도, 책임감 등이 반영되어 차등이 생기는 것이다. 역동적이고도 차분한
과정을 거치지 못한다면, 다수결주의가 낳은 특권층이 ‘1표’씩을 회수해가는 독재의 모델이 태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시장이나
의회 같은 직접민주주의에서 벗어나는 ‘기제’들이 꼭 보수적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이다.
4. 시장=경제=자본주의?
좌
파들은 반드시 시장을 비판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려왔다. 하지만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이 국가 자체에 대한 거부와 다르듯,
시장주의를 혐오하는 것이 시장기제를 부인하는 것과 같지는 않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반대가 모든 형태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국수주의가 아니듯, 비자본주의적인 시장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교환과 해방을 모색하는 길이기도 하다.
물론 현실 시장에서 파생되는 문제는 한눈에도 쉽게 보인다. 시장은 겉으로는 자유로운 개인이 자유롭게 거래하는
장소처럼 보이지만, 그 안은 선택 그리고 배제 나아가 서열화의 문제를 앓고 있다. 이는 공공공간의 소멸을 불러 일으키고
소비생활의 위계질서를 낳는다. 시장이 확대될수록 빈자들은 쉬어갈 시간과 장소를 잃고 쓰레기음식을 먹어온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 시장’의 문제는 시장경제가 초래한다는 자유경쟁/독점의 문제보다도 더 열등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다시 한번 묻는다. “시장이란 무엇인가?”
시
장은 경제 자체와 동일시되기도 하고, 자본주의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왜곡 등식은 사회주의=시장철폐라는 오해를 낳는다.
페르낭 브로델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경제는 시장, 자본주의, 물질생활이라는 3개의 층위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장은 투명한 교환행위의 장소이지만, 자본주의와 물질생활은 경제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층위라고 주장했다. 칼 폴라니도 시장은
경제행위의 다양한 유형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다양한 사회적 규제를 받던 시장‘들’과 사회를 지배하는 단일시장을 구별해야 한다고
했다.
시장은 원칙적으로 수요과 공급이 만나는 곳이고 사람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장소이다. 이 장소가
사라진다면 경제영역은 온전히 존재할 수 없고 폐쇄적인 생활만이 존재한다. 시장은 개방과 접근의 성격을 띤다. 다만 이랬던 시장이
국가권력과 자본주의를 통하여 거시적 일상적으로 사회원리를 잠식하는 괴물로 변신했던 것일 뿐이다. 앞서 밝혔듯 시장의 상층
영역에서는 자유 경쟁보다는 오히려 음모와 투기가 횡행하고 있고, 시장의 역학을 지배하는 자본주의는 교환행위를 필요와 협조보다
힘의 우열과 분포에 근거한 것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시장의 역사를 되새겨볼 때, 시장의 재구성도 세계를 바꾸는 일
가운데 하나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5. Not 시장 없는 사회주의...
심광현은
<문화사회와 문화정치>에서, “시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단지 교차로일 뿐이다. 교차로의 폭은 정보, 물건, 사람의
통행빈도와 압력에 조응하여 조절되어야 하는 것이지 무조건 넓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장전체주의적 폭력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국가사회주의는 교차로를 막아놓은 길로 비유할 수 있다.
시
장에 대한 과격한 사고방식으로 일관해 온 역사적 사회주의는 굳이 경쟁할 필요가 없는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 세상은 탐욕이
제어되고 수익성을 따질 필요도 없는, 범죄와 적대가 소멸한 세상이다. 달리 말해, 그러한 세상이 오지 않은 곳에서 그들의
‘시장’에 대한 가치관은 이상적이며 현실적합한 대안을 이끌어내는 데 철저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필
요에 따른 분배’라는 원칙은 풍요롭지 않다면 무효가 되며, 이 풍요는 사실 노동력의 높은 지출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때 체제는
개인에게 자발적인 노력을 권유하거나 혹은 강제로 노동력을 집행해야 한다. 비현실적이거나 혹은 폭력적이거나. 또한 결국 전적인
사회주의계획경제 하에서도 희소성의 문제를 풀지 않는 한 가치평가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노동력 집행과 상품의 가치비교는 누가 어떤 원리에 따라 수행해야 하는가?
마르크스는 화폐의 일반성이 아닌
무한성에 주목했다. 반면에 고전경제학은 화폐를 가치를 측정하는 지표로 바라보면서 단일한 균형체계를 유지했다. 가라타니 고진은
<은유로서의 건축>에서 이렇게 주장했다:“<자본론>은 무엇보다도 ‘국가 경제학’에 대한 칸트적 비판이다.
그것은 테제와 안티테제를 이루는 구축주의와 자발적 질서 둘 다 단지 하나의 가상일 뿐이라고 폭로했다.”
결국
계획경제나 시장경제에서 완전한 균형을 잡을 수 있다는 가히 종교적인 신념을 버리는 것만이 대안의 조건이 된다. 이를테면 자크
비데는 종합적 계획화는 자본주의시장경제와 유사하게, 사회전반을 유일하게 조율하는 지배양식이 된다며, “시장과 계획이 역사적
변증법에서 통일되는 것이 아니라, 메타구조와 구조들을 연결하는 일반적인 변증법적 형태의 양극적인 두 차원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6. ...but 자본주의로부터 해방된 시장
환경경제학자인 이정전은 자신의 저서에서
인류가 사회생활의 영역을 가른 다음 각기 걸맞는 정의(justice)의 원리를 꾸준히 적용한다는 것을 통계로 입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경제에서는 성과나 능력이, 정치에서는 평등이, 사회에서는 필요의 원칙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어쩌면 신자유주의나
현실사회주의의 문제는 여기에 있다. 신자유주의는 성과나 능력을 따지는 자세가 경제를 넘어 사회 전반까지로 확산이 되었고,
현실사회주의는 평등주의가 정치를 넘어 비대화되었다.
더 주목할 만한 사실은 경제영역에서 사람들이 중시한
‘성과’와 ‘능력’이라는 기준이 시장의 것이지 자본주의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능력과 성과에 의거한
소득배분을 누리는 계층은 기껏 중산층이며 부는 상층부에 집중된다. 대다수 하층부는 도리어 성과주의, 능률주의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필자는 마르크스에게 전해졌다고 평가되는 칸트의 명제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를 곱씹어 본다. “수단이 아니라”가 아니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라는 구절이 마음에 와닿는다(토마토 정치캠프가
무난히 반대 없이 통과시킨 ‘길’의 어휘 가운데에 ‘다원주의’가 있다. 다원주의는 바로 이러한 칸트적 명제가 끌어내는 경합과
묘미를 긍정하는 자세이다). 구좌파들은 고전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만이 아니라 동시에’가 아닌 ‘~이 아니라’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대적이고 섬세한 좌파로서 시장을 사고하며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길을 무엇일까. 통과된 ‘길’에
들어간 대로 ‘생산수단의’ 다양하고도 온전한 ‘사회화’라는, 국공기업과 사기업의 민주적 운영과 협동조합 및 자주관리의 창출을
상징하는, ‘사회적 경제’를 실현하는 방법이 있다. 당연히 인권이나 생활세계에서 추구할 사항들도 들어가 있으며, 의회를 활용하고
자치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도 담겨져 있다. 또한 청년문화에 대한 조항도 있다. 중앙, 연합, 개인간의 질서와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 각 영역에서의 방안이 간략하지만 두루두루 펼쳐진 셈이다.
필자는 여기에 덧붙여 자본주의의 지배에서
핵심을 이루며 시장에서 쌓은 성과를 왜곡하는 ‘임노동’을 겨냥하고자 했다. 가장 기본적으로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권력이 강해져야
하며, 노동이 고통스러움이 감소해야 하며, 인류가 호모 파베르‘만이 아니라 동시에’ 호모 루덴스여야 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장’을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다.
참고문헌
오창엽, <국가자본주의와 시장사회주의 비판: 해방연대 ‘사회주의’ 기획토론회 ①>, 프로메테우스, 2006. 3. 6. http://www.prometheus.co.kr/articles/110/20060306/20060306160000.html
Braudel, Fernand (주경철 옮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까치,1995.
칼 폴라니 (박현수 옮김), <<거대한 변환 : 우리시대의 정치적 경제적 기원>>, 민음사, 1991.
심광현, <<문화사회와 문화정치>>, 문화과학사, 2003.
가라타니 고진 (김재희 옮김), <<은유로서의 건축: 언어 수 화폐>>, 한나래, 1998.
Bidet, Jacques (박창렬 김석진 옮김), <<자본의 경제학 철학 이데올로기>>, 새날, 1995.
이정전, <<시장은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 시장에 관한 6가지 질문>>, 한길사, 2002.
아침에 가면서 "a c" 연발이었다. 그러나 가서 기분 나쁜 일은 없었다. 예비군들은 농땡이라기보다는 개그맨들이었다. 느슨한 훈련 중에도 쉴 새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이 옛날보다 계속 착해지는 건지 현역 사병들인 조교들 덜 괴롭히고 알아서 일을 빨리 끝냈다. 사실 지난해까지 3년동안 사격 농땡이를 쳐서(화장실에 갔다 오면서 사격 끝난 조에 편승하는 방법), 아주 간만에 진지하게 총을 잡았는데 탄착군이 형성된 것 자체가 신기했다. 의도하지 않은, 굳이 얻고 싶지는 않은, 하지만 얻어서 나쁠 것 없는 것들도 있었다. 근래 운동이라고는 안 하다가 북악산에도 올라가봤고, 6년만에 군대리아의 맛도 느꼈다.
지난 3년간 학생예비군으로 얼마나 큰 혜택을 입었는지 깨달았다. 나 같은 백수도 있지만, 직장인들이 2박 3일을 소화하고 갔다. 학생은 왜 하루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올해 예비군 4년차로 동원훈련은 빠이빠이라서 쉽게 하는 말인가.... (먼 산~)
악습이 많은 희한한 데서 자대 생활을 했던 탓에, 육군의 풍습 변화가 참 신기했었다. 지금도 병영은 쉼없이 바뀌고 있는 것 같았다. 지나치다 본 선후임 관계부터 화장실 가는 길에 슬쩍 엿본 내무반까지. 다들 몸 성하게 제대하길 바란다. 식당 앞에서 배치받은지 1주일도 안 되는 이등병들 여섯 명이 일렬로 선 모습을 봤는데, 거 참...ㄲㄲ
상인들을 비롯한 평택시내 다수 여론은 쌍용차투쟁에 적대적인 것 같다. 지난번 대추리 사태 당시에도 그랬다. 투쟁의 종결을 외치고 심지어 투쟁자들을 억누르기도 하는 대열의 맨앞에는 상인들이 존재한다. 노조가 정리해고를 수용하고 공장이 정상화되어야 평택 경제가 살아난다는 것이 그들의 중론이다. 대량해고가 구매력 감소를 불러일으킨다는 인식까지는 나아가지 못한다.
그럼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대형할인마트의 등장에 항의하거나 신음하는 상인들에게, "대형할인마트가 들어와 상업의 구조조정이 이뤄져야 경제가 발전한다"고. "우리 노동자들은 이왕이면 할인마트에서 구입하는 게 낫다"고. 그때 상인들은 무어라 답할 것인가? "남의 아픔엔 관심도 없는 놈"? 그건 대추리 사태 때 반대투쟁하는 활동가들을 폭행한 평택상인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노조의 투쟁을 욕하는 사람을 보면 나는 웃는다. 밥그릇 투쟁이라는 삿대질에는 더 크게 웃는다. 왜냐면 그는 분명 자기가 노동자였다면 밥그릇 투쟁에 나섰을 터이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청의 사업조정 조치로 대형마트의 진입이 멈칫하고 있다. 내게는 낯선 풍경이다. 이 시대 사람들 대부분도 그럴 것이라고 추측한다. 정치나 행정은 경제를 간섭하면 안 된다, 국가는 시장을 통제할 수 없다,라는 생각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야 된다, 할 수 있다는 근거는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다. 그리고 국가가 알아서 그리하지는 않으며, 결국 답은 '사회'에 있다는 걸 깨달아나갈 것이다.
우선 노동자-영세상인들의 동맹이 시급하다. 영세상인들이 자신의 이웃이자 단골인 노동자들의 정리해고에 관심을 가지는 것, 영세상인들의 보호에 이미 조직화되어 있는 노동자가 앞장서는 것. 이 나라에는 영세상인들이 매우 많다. 그들과 노동자와의 반목으로 남을 건 서민경제의 공멸 뿐이다. 이 실업자보다 민주노조운동과 상인단체의 시야가 더 넓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