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는 자신의 문학 작품 <구토>를 두고
"죽어가는 아이 앞에서 아무런 힘도 없다"고 말했다.
그에 대해 누보로망(신소설)의 선두주자 리카르두는
"<구토>는 아이가 죽어가는 추문을 폭로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고종석은 "사르트르도 옳고 리카르두도 옳다"고 했지만
나는 리카르두가 더 옳다고 생각했다.
국민학교 1학년 시절 우리반에 창길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공부를 못하는 편이었고 옷차림도 남루했다.
그 아이는 화장실 가기를 두려워했는데, 성기에 난 점 때문이었다.
스무명이 넘는 아이들이 화장실에서 그를 발견하면
"창길이 고추에 점났대요"를 그렇게도 신나게 불러댔다.
한번은 창길이랑 화장실에서 단 둘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혼자인 줄 알고 편하게 일을 보려다 흠칫 놀라버린 그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안 놀릴게, 나는."
'창길이가 놀림받는 건 공부와 옷차림 때문이야.
그런데 창길이한테는 죄가 없다.
걔네 부모님한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닐까?'
창길이네 집이 위치한 마을은 학교 부근 '새터'로
이름과는 달리 슬레이트 지붕을 한 집이 대부분이었다.
'창길이네 아버지는 게을로서 돈을 못 벌어오는 사람일 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우리집도 잘살지는 못해서
사원주택에 살지만, 아버지가 새벽에 퇴근하면서까지
열심히 일하시는데...
게으를 뿐만 아니라 아주 나쁜 사람일 거야.
애를 저렇게 놔두다니...'
그러나 나는 보고야 말았다.
창길이 아버지의 모습을.
덥수룩한 수염만 제외하면 아들과 거의 비슷하게 생긴
창길이 아버지가 하교하는 창길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지나갔다.
일을 많이 한듯 피곤한 모습이었지만
인사하는 우리에게 오냐,하며 환히 웃었다.
풍경은 스쳐지나갔지만 생각은 길디 길었다.
왜 우리집은 회장 사장 아저씨네만큼 살지 못하고,
창길이네 집은 왜 우리집보다도 더 못사는가.
능력의 차이인가, 정말?
내가 평등과 노동에 관해 본격적이고 꾸준하게 글을 쓰진 않았지만,
글쓴이로서의 나는, 적어도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국민학교 1학년이던 1989년에 머물러 있다.
2학년 진학 후에는 이야기도 거의 해보지 않았던
창길이의 아버지는 오늘도 나의 든든한 우군이다.
나는 그러나 만으로 25년을 살아오면서
평등의 길에 초석 하나 깔기는커녕
단 한사람의 생명도 구하지 못했다.
청소년기 나는 노약자나 어린이를 사고사의 위험에서 구하고
대신 죽거나 다치는 공상에나 의지하고 살았으며,
지금은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
솔직히 이제 나는 내 스스로의 생명조차 감당하지 못한다.
내 안의 리카르두는 묵묵부답이고
대신 사르트르의 비관적 문학관이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제 내 안의 리카르두는 대답해야 한다. 창길이 아버지한테.
질문하지 않고 묵묵히 웃는 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