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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배구시합에 대한 기억

Free Speech | 2007. 12. 23. 20:27 | Posted by 김수민
내가 6학년 때 몸담고 있던 배구부는 학교에 체육관이 없어서 경쟁 학교로 가서 그쪽 배구부와 연습을 함께 했다. 그런데 일주일에 한두번은 연습게임을 했는데, 실력이 엇비슷함에도 도저히 이기지를 못하는 것이다. 근소한 차이로 세트를 번번히 내주는가 하면, 호쾌하게 첫 세트를 따내도 그 다음 세트에서는 연이어 지는 바람에 판판히 깨지고 마는 것이다.

하루는 코치 선생이 오지 않은 상황에서 일단 게임이 시작됐다. 첫 세트에서 15대 7정도로 승리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음 세트에서는 15대 2인가 1로 이겼다. 서브 에이스도 많고 서브 범실도 많던 나는 여덟 번 연속으로 서브를 넣었다. 리시브가 쉽지 않자 당황한 상대편은 네트 밑으로 스파이크하는 등 허둥지둥하면서 매우 힘없이 경기를 마쳤다.

경기가 끝난 뒤 상대 팀 코치가 두 팀 선수들을 모두 분식집으로 내려가던 찰나에 우리 코치가 나타났다. 그는 경기 결과를 물어보더니 아무 말 없이 추가연습에 돌입했다. 연습이 끝나고 그는 우리에게 "코치 없이 경기하니까 기분이 어떻냐"고 물어봤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일부러 체육관에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잠깐씩 경기를 몰래 지켜봤다고 했다.

그때가 봄이었는데, 겨울방학 내내 우리 팀은 모 공고 체육관에서 연습을 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오후 2시부터 오후 대여섯시까지 연습을 했다. 토요일에는 오전에만 체력훈련을 하고, 일요일에는 쉬었다. 엄청난 고난도의 연습으로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 키는 큰데 점프력은 낮다고 스스로 치부하고 있었던 나는 크게 달라졌고, 도내에서 블로킹 득점이 가능한 얼마 안 되는 공격수가 되었다.

그러나 팀 선수 가운데 동계훈련에 개근한 이는 한명밖에 없었다. 나도 하루를 빠졌고, 일주일씩 빠지는 아이도 있었다. 훈련이 고되기도 했지만 특히 체벌이 만만치 않았다. 훈련을 마치고 집에오면 TV를 좀 보다가 밥을 먹고 두시간쯤은 공부를 했는데 의자에 앉는 것이 힘들었던 적도 숱하다. 아무리 깡으로 견뎌도 눈물이 쏙나오고 어쩔 때는 발을 동동구를 만큼 엉덩이를 험하게 맞았다. 부담은 연습경기에서도 이어졌고 겁먹고 주눅들어 제 플레이가 나오지 않을 때도 많았다. 코치는 '사내자식들이 베짱이 없다'고 나무라곤 했다.  

코치 선생님은 좋은 분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열세살쯤 많은, 사범대학 체육교육학과를 갓 졸업한 분이었고, 보디빌더이기도 했다. 주말에는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고 평소에도 선수들과 농담따먹기하는 걸 즐겼다. 그분이 부임한 뒤 동계훈련을 거쳐 처음 있었던 경기에서, 비록 끝내 패했긴 했지만, 선수들의 공격과 수비가 탁월할 때마다 온몸으로 반응하는 그를 보면서, 그가 우리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빠진 채 치러진 연습경기에서 우리가 완승했다는 걸 듣고서도, 기분이 좋지 않은 듯하였다. 어린 선수들은 다들 눈치챘을 것이다. '왜 코치가 없는데 이겼을까. 그가 지켜보고 있을 때는 왜 졌을까.'

하지만 경북 최강이 되려던 우리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5학년에게 팀을 인계한 이튿날 선생님은 학부모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선수들의 집을 돌아다녔다(마지막에 들른 주장네 집에서 내가 밥을 다섯그릇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가 처음 코치로 발령나서 훈련에 돌입한 게 12월 초였고, 6학년 팀이 해산한 것이 3월 말이었다. 그에게나 우리에게나 시간은 너무 짧았다. 사실 그 코치는 대구에서 지도한 자신의 팀에게 지역 우승컵을 안겼던 유능한 코치였다. 그는 원래 받던 것보다 20만원 가량은 적을 법한 50만원의 박봉을 받고 우리 팀을 맡았고,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바 없던 우리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악전고투하면서 자주 몽둥이를 들게 되었던 것이다.

중학교 3학년 올라가기 전에 그를 뵈러 체육관을 찾았었다.그곳은 바로 우리가 연습했던 다른 학교 체육관이었고, 그는 그 팀의 코치가 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왠지 예전의 우리보다 어려보였고 키도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당당한 경북 최강팀이었다. 체육관 안에 몽둥이가 보이지 않았다. 탈의실에서 만난 코치 선생님은 매를 들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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