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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명

Free Speech | 2009. 6. 11. 00:57 | Posted by 김수민

내외가에 아버지가 지은 이름을 품고 사는 애들이 여덟은 된다. 아버지가 꼬박 한나절을 바쳐 작명하는 걸 몇차례 본 적이 있다. 그에게 한글 발음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독특한 작품도 별로 없다. 내 생각엔 '우찬'이 그중 가장 괜찮은 것 같다. 아이 부모들이 원래 원하던 이름들은 대체로 기각된다. 한자의 획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내 이름도 과연 그렇게 지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동학농민군 출신 의병장 金秀敏의 별명은 金守民이었다. 그의 별명이 내 이름이다. 아버지가 그를 알고 지은 이름은 아니지만, 작명의 취지는 같을 것이다. 나는 내 이름이 그야말로 별명으로나 어울릴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물론 그것을 별명으로도 쓸 생각이 없다. 나는 우리를 지키는 것보다 나를 지키는 것이, 다른 이들도 각자 그러고 사는 것이 자연스러움을 넘어 옳다고 믿는다. 그것이 우리를 지키는 일의 시작이자 곧 우리를 지키는 일이다. 수민보다는, 숨인이 바르다. 그래서 늘 너무 강한 의지가 투영되어 있는 이름이 그 발음의 여성성만큼이나 부담스러웠다.  

얼마 전 '저주'에 관해 쓴 글에 어느 분이 댓글을 달아주셨다. "사주명리학적 접근을 해보자면 '개운'이 있습니다...  흔히 하는 개명도 개운의 한 방법이죠. 저도 한자만 바꾼 경험이 있는데..." 나도 개명할 작심을 안해본 건 아니었다. 어렸을 적에는 그나마 발음이랑 얼굴이 맞아떨어지는 편이었지만 이젠 그도 아니다. 그럼에도 바꾸지 않은 건 새 전화번호 하나 정하지 못하는 내가 대안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자라도 바꾸어 볼까 싶다. 자신의 정체를 가장 명확하게 밝히는 이름을 자기가 짓지 못한다는 극단적 보수성을 안고 있다는 사실이 지겹다. (이런 생각과 표현, 어디서 읽은 듯한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참고로, '수민'이라는 단어에는 '수심하여 번민함', '뛰어나고 민첩합'(의병장의 본명이 담은 뜻이다)이라는 의미도 있다. 아, '소금쟁이'도 있지. 이게 제일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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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

Free Speech | 2009. 6. 8. 18:42 | Posted by 김수민

말에 설킨 당사자 모르게 퍼지고 있다면, 그 소문은
발설자 스스로의 처지와 컴플렉스를 실토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뻘소릴 다해놓고 자리가 나오니 말을 뒤집고 덥썩 앉는 사람
그럴싸한 핑계로 돈떼먹고 도망가려다 걸린 사람
팩트의 왜곡으로 불안해진 발밑을 이념과 이론으로 떼우고 넘어갔던 사람
이 자리에 없는 저 사람 욕하고, 이 사람 없는 저 자리에서는 이 사람 욕한 사람

이런 주제에 남의 이미지를 타격하려는 데 나서고 다니는 꼴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모형이나 그림이 아니라 실제의 자기 자신이 정조준당하고 있음을 아는지나 모르겠다. 
남의 약점을 알고 있는 게 자신을 지키기 편하다는 씁쓸한 원리를 새삼 깨우친다.  

소문을 퍼뜨릴 일이 있으면 반드시
당사자 귀에 들어가도록 온갖 노력을 다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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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1992년

Free Speech | 2009. 6. 5. 10:14 | Posted by 김수민

1992년은 정치적 계략이라는 걸 처음 부린 해로 기억된다.

그해 총선 이튿날 <소년한국일보>에는 민자당이 과반의석에 못 미쳤다고 나왔다.
아버지에게 '과반'이 무슨 의미냐고 물으니 '반을 초과하는 것'이었다.
총의석은 299석이었고 민자당이 획득한 의석은 149석이었다.

1990년 1월에 초유의 사건이 터졌다. 3당합당이었다. 분명히 기억하건대
대통령후보로 나섰던 사람 셋이 손을 잡아버린 기가 찬 사태였다. 쇼라고 하기에도 별난 사태였다.
그런데 그러고도 과반을 못 얻었다니... 입안이 고소했다.

나는 주변의 어른들과 친구들에게 '정주영 좋다', '정주영 될 수 있다'는 말을 퍼뜨렸다.
전자보다는 후자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내가 진짜로 지지한 후보는 김대중이었다.

내가 어린 마음에 김대중을 지지한 데는 거창한 이유가 깔려 있지는 않았다.
그 사람이 민주화운동을 했었음은 어디서 주워 들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이번이 세번째 출마인데 하늘이 무심하지 않다면 당선되는 게 세상의 순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71년 박정희와 붙어 46%씩이나 득표했고, 그마저도 부정선거가 없었다면 승패가 뒤집힐 수도 있었으며,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기까지 했으니 대통령직에 앉는 게 정당한 보상이라는 생각.

민자당이 과반을 얻지 못한 까닭은 창당 직후 총선을 치른 통일국민당의 선전에 있었고
정주영으로 표를 돌려놓으면, 정주영이 5, 600만표쯤 얻으면 김대중이 당선된다는 건 누가 봐도 명명백백했다.
박철언, 김복동이 정주영을 지지했을 때 나는 쾌재를 불렀다. 강원도 뿐 아니라 대구경북에서도 표가 깨지겠구나~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내 주변 어른들은 정주영을 지지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비방을 너무 많이 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건 정주영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가 아니라, 그 결과였을 것이다.
그때 정주영에게 표가 쏠리지 않는 원인은 두고두고 연구하고 분석할 만한 현상이다.
단지 반-김대중 정서가 김영삼으로 결집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만일 그것만이 주효했다면
정주영은 340여만표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니까.
재벌이 직접 정치에 나서는 것에 대한, 좌우를 망라한 거부감이 있었을 테고,
오랫동안 정치를 하고 고난을 겪으며 카리스마를 쌓은 양김씨를 청산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정주영이 김영삼의 표를 깎았다면, 김대중의 표를 깎는 사람도 있었다.
하루는 TV에서 한복을 두르고 나온 한 후보를 보았다.
그는 연설 도중 몸에 기름을 끼얹고 분신자살한 노동자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그가 전태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 '역사만화'를 읽어서.
그렇다. 민자당 시절에도 사회적 민주화의 흐름은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백기완 후보가 김대중 후보와 다른 편인 까닭이 궁금했다. 물론 오래 궁금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백 후보는 박찬종 후보에도 못 미치는, 꼴찌에 가까운 성적을 거둘 것 같았으므로.

친구들이랑 누가 꼴찌를 할까 내기도 했었다. 어떤 애는 이병호에, 다른 애는 백기완에, 나는 김옥선에 걸었다.
결국 이병호에 건 녀석이 과자를 먹었다.

돌아보면 3당합당으로 호남이 포위되었을 때 이미 게임은 끝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투표 당일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외숙부가 놀러와서 김영삼이 되는 판이 아니냐고 묻자 아버지는
"그래도 김대중이 이길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그 한마디가 내게는 희망이었다.

그날 MBC는 개표방송을 재밌게 한답시고 최병서의 성대모사에다가 퀴즈 코너도 개설했는데
대한민국 11대 대통령이 누구냐는 퀴즈는 아직까지도 기억난다.
10대는 최규하고, 12대는 전두환인데 11대는 누구냐는 것이다.

자고 일어나 학교에 등교하던 도중 김영삼 후보의 승리가 확정되었다는 소식이 차안 라디오로 울려 퍼졌다.
정주영은 한마디로 '조땠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수사를 받았는데, 담당검사가 나와 이름이 같아서인지
기억이 좀 또렷하다.

김대중은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기자회견장은 울음바다가 됐고 TV를 시청하던 나도 좀 찡했다.
하늘의 공평함보다는 인간세상의 세력판도가 더 세다는 걸 깨달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대통령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될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럼 나는 김영삼의 당선에 실망했었나. 그것도 아니었다.
그 역시 김대중과 더불어 박정희, 전두환에 저항했었던 정치인이었고
'정권교체'에 못지 않은, 32년만의 '문민정부'의 탄생이라는 신기원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듬해인 1993년, 김영삼의 인기는 참으로 하늘을 찔렀었다.
정주영은 찍소리 않고 바짝 엎드렸고, 김대중은 캠브리지 유학을 다녀와 아태재단을 만들었다.
4위를 했던 박찬종은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꼽혔다.

그무렵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정종식', '정권교체' 대신에 세대교체를 꿈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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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1987년

Free Speech | 2009. 6. 4. 15:01 | Posted by 김수민

그해 매일처럼 TV에 아저씨 넷이 나왔다.
그들 각자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인 현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소리를 질렀다.
부모에게 물어 그것이 나라의 최고지도자를 뽑는 행사임을 알았고, 거듭된 뉴스 시청을 통해 네 후보의 이름과 소속정당을 다 외웠다.

기호 1번은 인상이 후덕해 보였다. 반면 내 눈에 2번은 불손했고, 3번은 무서웠고, 4번은 칙칙했다. 
10년이 지나서야 찌푸린 3번의 표정이 방송의 편파왜곡보도의 결과임을 깨달았다.
또 기억에 남아 있는 건 후보들의 손동작이다. 노태우 후보는 브이자를 그렸고, 김영삼은 엄지와 검지를 붙여 0을
만들고 나머지 세 손가락은 펴서 본인이 03임을 만방에 과시했다.  

호감도의 순서는, 1번, 4번, 2번, 3번 순이었다. 
나는 그래서 1번이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투표와 개표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알 리 없는 아이였기에
나는 알아서 1번이 당선되는 줄 알았다. 뿐더러 나머지 순위도 기호 순대로 정해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버이도 모두 1번을 지지했다.

2002년 대선을 지나 우리 집안에 아주 잠깐 과거사청산의 열풍이 불었다.
그해 숙부들은 노무현을 지지했고, 숙모들은 이회창을 지지했다.
막내 숙부와 숙모는 투표장에까지 가서 언성을 높이며 싸웠다. 육탄전 직전이었다.
그들은 모두 경북 지역에서 자라났으나 남자들은 정치를 생각할 시간이 있었고 여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이를 '남자의 개혁성, 여자의 수구성'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쟤들은 부부가 따로 찍는데, 당신은 그때 날 왜 말렸느냐"며 아버지에게 따졌다.

사연인즉슨, 어머니는 1987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찍으려고 했었다.
물론 어머니 역시 포항에서 자란 분이고 특별히 진보적일 리가 없었다.
그는 1986년 건대 시위 화면을 보며 "학생이 공부나 할 것이지"라고 한마디해 친척 오빠들의 호응을 받기도 했었다.어머니는 직장에 취업했을 때 거듭 질문을 받았다. 성적이 좋아서 굳이 이쪽으로 오려는 이유를 회사측에서 궁금히 여겼기 때문이다. 사측은 어머니의 고향집으로 사람을 보내기도 했다. '위장취업'을 의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위장취업이란 팔자 좋은 대학생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다만 그런 어머니도 뭔가 나라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중 가장 신선하다고 느껴진 김대중에게 마음이 갔었다. 어머니가 어렸을 적 동네의 김대중 포스터는 늘 훼손되고 낙서로 뒤덮였다고 하는데, 그것이 되레 역발상을 초래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버지는 강력하게 "김대중이 되면 나라가 망한다"고 어머니를 책망했고
별다른 논리를 가지지 않은 어머니는 수긍하고야 만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은 당시 세살배기에 불과한 내 동생만을 빼고 세 명이 모두 노태우를 지지했고 두 명이 그에 표를 보탰다.
어머니가 기호 2번에 투표하기까지는 15년이라는 세월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나의 의심은 빨리 찾아왔다.

국민학교 3학년 무렵, 중립적 관점의 역사만화만 봐도 박정희가 장기집권한 독재자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전에 이미 TV에 연일 중계되던 청문회를 통해 망신당하는 전두환을 목격했다.
나는 노태우는 좀 다른 사람이라고 느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인상'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뉴스에서 "노대통령 사과해야"라는 헤드라인을 봤다.
아주 오랜 뒤에 돌아보니, 그 사건은 윤석양 이병의 안기부 사찰 폭로일 확률이 크다.
이승만만 나쁜 놈이 아니라 현 대통령도 잘못을 하고 그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어른들한테 속았을 수도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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