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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 무적인가

Listen to the 무직 | 2009. 4. 24. 18:28 | Posted by 김수민
CF
핸드폰
원색
4+5
후렴구 멜로디 한번 랩 한번


맞설 생각도 없지만
당해낼 재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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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유행 번역

Listen to the 무직 | 2009. 4. 1. 15:03 | Posted by 김수민

"요즘 재즈가 유행입니다." (1990년대 중반쯤)
=> "후까시맨들이 술 먹을 때 필요한 경음악을 발굴하고 있습니다."

"요즘 펑크가 유행입니다." (1990년대 후반쯤)
=> 슬램하면서 팔꿈치로 코를 때리는 좆병신들이 출몰하고 있습니다."

"요즘 인디가 잘 나갑니다."
=> TV에 안 나와도 유명해지는 뮤지션들이 있습니다.
(90년대 중반 이전 용어. '인디'->'언더')

"요즘 일렉트로니카가 대세입니다."
=> 기존 밴드 구성의 일부에 전자음을 덧입힌 다음, 여자 보컬을 내세우면 짱 먹어줍니다.

"요즘 테크노 천지예요." (1998~2000년)
=> 네. 유로댄스 깔아놓고 요래요래 고갤 흔드세요."

"에이 난 뭐 요즘 난 뽕짝이 좋더라." (always)
많은이들에게 진리. 번역 필요 없음.

"딴음악 좀 들으려고 하는데, 펄 잼 1집 재발매로 다시 그런지에 꽂히고 있어."
=> 그렇습니다. 김수민씨는 수구세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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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코넬, 럴수럴수 이럴 수가...

Listen to the 무직 | 2009. 3. 20. 05:15 | Posted by 김수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3월 11일 나온 크리스 코넬의 신보를 듣고 있다.

You know that feeling you get when somebody embarrasses themselves so badly YOU feel uncomfortable? Heard Chris Cornell’s record? Jesus.

나인 인치 네일스의 트랜트 레즈너가 했다는 말이다. 나는 조금도 동의할 수 없다.

오래 전에 이미 사운드가든 시절의 그 쌩쌩한 목소리는 성대 이상을 앓은 뒤
거칠고 소울풀하게 변모했고 우리는 그것을 크리스 코넬의 솔로음반과
레이지 어갠스트 더 머신 출신 멤버들과 함께한 오디오슬레이브의 음반 세장으로
추가 만끽할 수 있었다.

크리스 코넬의 보컬역사는 마치 로버트 플랜트와 데이빗 커버데일이 차례로 왕림한 것만 같았다.  

그 크리스 코넬이 2년 전 마이클 잭슨의 원곡을 록발라드로 리메이크한 데 이어,
이번에는 아예 댄스 음반을 내놨다.
저스틴 팀벌레이크, 제이 지의 앨범을 프로듀싱한 팀벌랜드의 어시스트에 힘입어.



Chris Cornell "Part Of Me" (produced by Timbaland
by ThomasCrownChronicles


이번 <<Scream>>을 통해 코넬은 댄스 가수로 변신했다.
그러나 위의 뮤직 비디오가 상징하듯
그는 춤추는 가수가 아니라 춤곡을 부르는 가수다.

그리고 그것은 기존 솔로앨범에서 자랑한 정중동의 여유와 미덕을
그대로 승계하고 있다.

 
보컬열전 6편을 누구로 할까 고민중이었는데,
크리스 코넬이 빠르게 치고 올라온다.


다음은 그의 사운드가든 시절이다.
Soundgarden - Jesus Christ P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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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보컬열전 (5) 제니스 조플린

Listen to the 무직 | 2009. 2. 24. 20:26 | Posted by 김수민

내 친구 중에 가수가 하나 있다. '가리나 프로젝트'라는 팀의 싱어... 모른다고? 그냥 아는체해라. 소개한 내 입장이 뭐가 되냐능;; 팬틴 무시기 샴푸 광고에도 노래가 흘러 나왔고 유명 그룹이당.(이렇게 덧붙일수록 더 군색해질지도 ㅋ 아직 못 들어본 분은 여기서 들어보시라.) 이번 포스트를 준비하다, 제니스 조플린의 테잎을 나는 2001년도에 그에게 빌려 아직껏 갖다주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몇주 전 그녀석과 학교 도서관에서 마주쳤는데, 쫀쫀하게도 미반납 사실을 알고 있었다.



롤라팔
: 반갑다. 나는 스물 여덟살 젊은이다. 1943년에 태어나 1970년도에 사망한 당신도 한국 나이로 치면 죽을 무렵 스물 여덟살이다. ‘갑’끼리 이렇게 만나서 참 반갑다.
제니스: 한국식 나이는 기수가 아닌 서수 개념인가 보지? 그럼 당신은 1982년생인가 본데, 난 당신보다 39년 일찍 태어났다. 뭐, 사실 미국인이 한국인과 같은 경어를 쓰는 건 아니라 어차피 상관 없지만 말이다. ‘펄(pearl)’이라고 불러달라.

롤라팔: 내가 죽으면, 저승짬은 내가 당신한테 한참 못 미치니 그때는 누나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제니스: 누나누나해~) 보컬열전의 다섯 번째 인물로 선정되셨는데, 예전의 연재물을 본 적이 있나?
제니스: 도착하기 전 한 번 쭉 훑었다. 네 명 다 내가 죽은 뒤에 데뷔한 이들이라 이름을 처음 들었다. 전부 다 남자라는 것이 좀 거슬렸지만 취향이겠거니 했다. 그리고 다들 로커들이고, 메틀 뮤지션이었거나 그런 경력이 있더군. 편중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롤라팔: 그 점은 잘 알고 있고 앞으로 주의를 많이 기울일 것이다. 그래도 내가 록팬이라는 게 펄한테는 유리했다. 그게 펄이 아네사 프랭클린, 빌리 홀리데이를 앞질러 보컬열전에 출연하게 된 원인이었다.
제니스: 조치 안타. 당신은 아네사를 나보다 앞서 다뤘어야 했다.

롤라팔: 펄은 베시 스미스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알고 있다.
제니스: 맞다. 그녀 묘비의 절반을 산 적도 있다. (롤라팔: 나머지 반은?) 어떤 간호사가 샀다던가? 그리고 나는 남성 보컬리스트 중에 오티스 레딩도 좋아한다. 그의 필모어 공연을 감동 깊게 관람한 적도 있다. 나중에 오티스 레딩도 다뤄주었으면 한다. 아네사에 대해서 하나 흥분되는 기억이 있다. 그녀는 1968년 타임지의 6월 커버스토리를 장식하기도 했었는데, 그가 나에게 "백인 록 운동에서 탄생한 가장 강력한 가수"라는 칭찬을 해주었다.

롤라팔: <보그>지는 당신에게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 노래의 역사가 새로 시작된다"는 찬사를 보냈다. 리처드 골드스타인이라는 평자는 "그녀는 타르처럼 살금살금 걸어다니며 전쟁처럼 얼굴을 찌푸린다. 그녀는 조調를 무시하고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다가 기관총처럼 소리를 뿜어댄다. 그리고 마지막 절을 붙잡고 늘어지면서 떠나지 말라고 간청한다"라고도 했다. 그가 당신에게 "록계를 이끄는 최고의 여성 로커"라고 한 것은 물론이다.
제니스: 비평가들 전부가 내게 호의적지는 않았다. 1968년 2월 <롤링스톤>지는 내가 몸담은 ‘빅 브라더 앤 홀딩 컴퍼니’에 꽤나 비판적이었다.

롤라팔: <롤링스톤>은 펄을 “로큰롤의 주디 갈란드”라고 하기도 했다지? 주디 갈란드처럼 예쁘다는 뜻은 아닐 테고. (서로 웃음) 그런데 재미있는 건 당신이 ‘빅 브라더 앤 홀딩 컴퍼니’를 떠나 ‘코즈믹 블루스’로 옮기고 나서도 논란에 휩싸였다는 것이다. ‘빅브라더’와의 결별은 아마추어리즘의 종결을 의미했다. 이 자리에서는 사소한 부분일 테지만, 수익금 문제도 그렇다. 빅 브라더에 있을 때 당신은 멤버들과 똑같이 돈을 나누어 가졌으나, 코즈믹 블루스는 월급을 받는 시스템이었고 특히 당신은 높은 지명도를 인정받아 멤버들보다 훨씬 많은 돈을 만졌다.
제니스: 그래서 코즈믹 시절은 쇼비지니스의 논리가 한층 더 강하게 내 삶을 덮은 시기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즈음 내가 사치를 했다는 소문은 진실이 아니다.

롤라팔: 코즈믹 시절 도리어 빅 브라더와 재결합하라는 요구까지 나왔다. 밴드의 통일성이 부족하고 지루하며 불안하다는 비난도 있었다.
제니스: 코즈믹 블루스의 음악엔 브래스 섹션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음색이 트럼펫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누누이 꼬집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걸 수용하지 않았다. 코즈믹은 프로적 전문성이 있는 밴드였다. 금방 성과를 거두진 못했지만, 1969년도 나는 블루스의 부활을 상징하는 인물로 꼽혔으며 뉴스위크지의 표지인물이 되기도 했다.

롤라팔: 어쨌든 빅 브라더의 매력과 코즈믹 블루스의 강점이 어우러져 세 번째 밴드 ‘풀 틸트 부기’의 눈부신 활약으로 이어졌다고는 생각한다. 그런데 잦은 설왕설래는 코즈믹 블루스에 국한된 건 아니었다. 펄의 독특한 목소리와 창법에 대해서도 폄하가 없지 않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당신이 제대로 발성의 노하우를 갖추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소리를 질러댔다고 여긴다. 펄은 언젠가 스테이플즈 싱어즈와 동시에 한 무대에 서는 걸 거절하기도 했다. 자신감 부족이었는가?제니스: 솔직히 비난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나는 원래 대중 앞에서 노래하는 게 힘겨울 만큼 숫기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었다. 나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는데, 어느 화가의 작품을 본 뒤 그림을 포기했다. 어떤 친구들은 내가 “최고가 될 수 없다면 어떤 분야든 하지 않았다”고 했다더라.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해두겠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특유의 신음과 비명조차도 사전에 충분히 계획했다. 당신은 내 보컬에 어떤 면모에 가장 신경이 쏠리나?

롤라팔: 당연히 그 탁성이 아니겠는가. 한국에 박경림이라는 방송인이 있다. 거의 음치에 가까운 노래로 가끔 사람들을 웃겨 놓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당신과 좀 비슷하다. 시간나면 검색해 보기 바란다. 나는 개인적으로 박경림씨가 펄의 <Summer Time>을 방송에서 카피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제니스: 대학 밴드 시절부터 빅 브라더 입단 전까지, 내게는 맑은 목소리도 있었다. 내가 죽었을 때도 목구멍에는 별 이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지? 나는 관중의 호응도에 따라 스타일을 바꿨다. 청승맞게 부르기도 하고, 쥐어짜듯 부르기도 했다. 하루는 내게 조안 바에즈와 같은 목소리를 기대한 관중들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나머지 반은 환호했던 적도 있다. 그런 식으로 톤을 잡아가다 보니 이렇게 됐다. 한편으로는, 독한 술을 많이 마셔서 위스키 같은 목소리가 되었다는 농반진반의 이야기도 있다.


박경림씨에게 이 노래를 권한다.


롤라팔
: 펄은 역시 '풀 틸트 부기' 시절 목소리가 더 풍성했고 샤우팅과 읊조림도 탁월하게 어우러졌던 것 같다. 노력의 결과이겠지만, 당신이 처음 음악을 접하던 어린 시절부터 조화에 쓰일 만한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으리라는 느낌도 받았다.
제니스: 고향인 텍사스와 그 부근의 루이지애나는 민속음악이 풍부한 곳이었다. 여기에 컨트리, 블루스, 멕시코 음악까지 흘러 들어왔으니... 나는 1962년 텍사스 나콕도체스 은행의 CF 송을 불렀다. 내 인생에서 최초로 녹음한 이 노래는 포크의 거장 우디 거스리의 <This is your land>를 편곡한 것이었다. 또 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백인 가스펠 음악인들과도 교류했었다. 음악 뿐 아니라 내 성장기에도 다양한 요소가 깃들어 있다. 나는 똑똑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이해받고 사랑받지는 못했다. 외로웠다.

롤라팔: 당신의 고립과 쓸쓸함에는....... 외모 콤플렉스도 있었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 뿐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학 시절 ‘캠퍼스에서 가장 못생긴 남자’로 지목되었던 데에는 당신이 학생단체들의 비위를 거스른 측면이 있었을 것이니까.
제니스: 뭐, 그랬다. 그랬었다....... 범생이들이 나를 미워했던 게지. 나도 그들을 자극했었고. 하지만 남들이 나를 못생긴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나는 그 사건 이후 샌프란시스코로 떠나기도 했고, 고향에 돌아오기도 했다. 고향에 들어와서는 결혼하려고 했다. 실패했지만. 결혼의 실패는 내가 노래에 몰두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후로도 죽기 전까지 나는 몇차례 결혼을 간절히 원했고 추진했다. 참 우스운 이야기지만...... 내가 죽은 해인 1970년도에 난 1년 뒤에 아이를 가질 생각도 했었다.

롤라팔: 아이 이야기는 의외다. 결혼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물론 달리 고려하면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다. 결혼제도가 강제하는 1부1처제는 얼마간의 평등을 담보해준다. 결혼이 유구하게 이어져 오고 있는 것도 섹스 상대를 최소한 1명 정해둘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다.
제니스: 외모 콤플렉스와 결혼시도의 실패는 내가 대중들의 인기를 갈망하는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그렇지만 나의 모습이 왜곡되거나 부풀려진 것도 많다. 남우세스러운 사연을 고백하자면, 나는 남자들과 잠자리를 가지거나 하는 일들을 좀 과장해서 주변에 말하곤 했다. 난 툭하면 일탈을 일삼고 다 뒤엎길 좋아하는 겁 없는 반항아는 아니었다. 나는 부모님과 한 번도 연락을 단절한 적 없다. 죽을 무렵 친하게 지냈던 폭주족 친구 하나는, 내가 죽은 직후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음, 그인, 참으로, 유순, 한 사, 사람이, 었다.

롤라팔: 펄에게는 허세가 어려 있다. 하지만 그 허세가 얼마나 진실했던 것인지 조금은 알게 될 것 같다. 잠시 숨을 돌리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지막 화제로 나가보자.
제니스: 당신은 인터뷰를 제의하면서 마약과 이성 이야기는 오늘 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지나버린 전생의 일이라 개의치 않았는데, 지금은 당신의 제의가 새삼 고맙다. 이쯤 하자.

롤라팔: 당신은 1960년대 후반 한창 활동한 뮤지션이다. 당시 미국 청년들은 유럽 청년들에 비해 훨씬 개인적이고 사적이었기는 했으나, 히피들은 마리화나나 LSD에 못잖게 ‘러브 앤 피스’에 미쳐 있었고, 반전운동, 민권운동에도 열심이었다. 그 시기 유럽의 절정이 1968년이었다면 미국의 절정은 이듬해인 1969년 우드스탁이었을 것이다. 펄도 그 무대에 섰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정치적 지향에 대해서 잠깐 코멘트해줄 수 있는가?
제니스: 코멘트를 ‘잠깐’ 해달라는 부탁은 당신의 탁월한 선택이다. 왜냐면 나는 정치에는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1968년 그해 여름, 일련의 정치적 흐름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나는 책깨나 읽었던 반면, 신문과 잡지는 거의 접하지 않았다. ‘개인적이고 사적’이었다는 특징만 나와 관련 있다.

롤라팔: 당신은 1969년 11월 16일 확성기를 들고 관중들에게 명령하는 경찰에게 항의하다가 체포되고 기소되었다. 이는 마이애미에서 짐 모리슨이 성기노출을 한 혐의로 체포된 사건과 맞물리면서, 상황이 악화됐다. 두 사건은 청년문화의 좌초 그리고 기득권세력의 반격을 상징한다.
제니스: 실제 나의 죽음은 록계의 전반적 쇠락이라는 흐름에 실려 찾아오기도 했다. 우드스탁 다음에 열린 페스티벌은 개판으로 점철되었고, 심지어 알타몬트에서는 흑인 참여자가 살해 당했다. 돌아보면, 화무십일홍이었다. 어른들은 강했다.

롤라팔: ‘어른’이라. 그렇다. 당신이 죽고 10년이 지나, 당신의 조국의 대통령이 된 그 양반만 봐도 그렇더라. MTV 이래 화려하고 시끌벅적한 시대가 왔지만, 강한 놈들은 늘 음흉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예술은 아무리 슬프고 아파도 그들의 웃음보다 더 길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끝으로 한 말씀.
제니스: 한국에서는 제사라는 풍습이 있다지? 10월 4일, 내 기일을 챙겨달라. 마음으로.
롤라팔: 알겠다. 그 하루 전날이 한국 민족 대다수가 자신들의 공통 조상이라고 착각하는 어떤 이가 나라를 세운 것을 기리는 날이다. 그날보다 펄의 생일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더 의미 있다. 오늘 인터뷰 고마웠다. 한 잔하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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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

Listen to the 무직 | 2009. 2. 24. 12:29 | Posted by 김수민

사상 최강의 남자 아이돌. SM과 DSP가 싸워서 YG가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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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완과 철수

Listen to the 무직 | 2009. 2. 3. 19:08 | Posted by 김수민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김창완밴드가 나와 배철수가 데뷔할 무렵 발표되었다는 <내 마음의 주단을 깔고>를 첫곡으로 연주했다. 둘의 조우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배: 활주로랑 블랙 테트라가 산울림 오프닝 밴드로 섰었어요. (...)
     산울림, 연주는 진짜 못했어요.ㅎㅎ
(이 말이 어떤 늬앙스였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김: 밥 딜런이 많은 가수들에게 희망을 줬다지 않습니까. 우리도 밴드에게 희망을 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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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과 재즈, 내게 있어

Listen to the 무직 | 2009. 2. 2. 12:27 | Posted by 김수민
록은 내가 청력을 잃어도 머물러 있을 음악이고, 재즈는 오로지 들려옴으로써만 존재하는 음악이다. 대체로 록은 한결 같고 재즈는 때마다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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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한국 최고 댄스음악

Listen to the 무직 | 2009. 1. 2. 04:47 | Posted by 김수민
2008년에 대중음악이 좀 살아났다고들 하는데, 가장 실속 있는 강세를 과시한 쪽은 댄스라고 생각한다. (댄스가 범람을 했지만 속만 울렁거렸던 해로는 1995년을 꼽을 수 있다. 별로 돌아보고 싶지 않은 해다.)

작년 최고의 한국 댄스음악을 꼽아본다. 이러쿵 저러쿵 코멘트를 붙이려다가 관둔다. 내 맘이다.

브라운 아이드 걸스 <어쩌다>
빅뱅 <마지막 인사>
쥬얼리 <모두 다 쉿>
2PM <10점 만점에 10점> (김세황이 신해철 몰래 '알바'를 뛰었었다는 후문이다.)
동방신기 <Wrong Number>

대부분 rock음악이 저장된 내 mp3에는 저 노래 중 두 곡도 끼어 있다.
내가 어쩌다 어쩌다 어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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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쪼 유로댄스 싫어

Listen to the 무직 | 2008. 12. 27. 17:05 | Posted by 김수민

한국인은 참 대단한 민족이다. 테크노도 아닌 음악에 맞춰 테크노댄스를 추고, 디스코가 아닌데 디스코춤을 춘다. 모던 토킹이든 666이든 한국인들이 디스코춤이나 테크노댄스의 배경으로 깔았던 음악들 대부분은 유로댄스 쪽이다. 2002년 월드컵 당시의 그루브한 박수가 어떻게 나왔는지 신기할 정도로 한국인들은 정박 위에서 춤추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롤라장과 디스코텍의 시대는 갔지만 나이트클럽에서 '만들어진 전통'은 지속되고 있다. 반면 펑키한 리듬에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베이시스트 정한종은 '다운타운', '레처', '알 에프 췰드런'을 거치면서 헤드뱅보다 허리 아래가 들썩거리기에 좋은 록음악을 만들었지만 대중의 반응은 다들 신통치 않았다. 

내가 미취학 아동기에 가장 좋아했던 노래는 마이클 잭슨의 <빌리 진>이었다. 하지만 그후 학원 파티나 보이스카웃 여행길 버스에서 '디스코 타임'동안 틀어준 노래들은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이었다. 나는 그 노래들이 지겨웠지만, 가족 나들이에서도 차안에서 그런 노래들을 모아놓은 테이프에 시달려야 했다. 거기서 나를 꺼낸 것이 록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는 박남정, 소방차, 김완선의 한계를 깨는 도전이기도 했으나, 나를 설레게 한 것은 전기 기타 리프였다.

하지만 ROCK은 흔든다는 뜻이고 결국 세상의 모든 음악은 댄스 뮤직이다. 에어로스미스와 런 디엠시의 합작 이래 록과 힙합이 접목해서 만들어진 곡들은 차고 넘친다. 롭 좀비나 람슈타인의 노래는 나이트 클럽에서 틀어도 손색이 없다. 나는, 나이트 클럽에 가본 적은 없지만,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그들의 노래가 들려오면 서슴없이 말한다. "이들 음악의 본질은 헤비메틀이 아니라 댄스다!" 예컨대 독일밴드 람슈타인의 <두 하스트>의 마지막 동기에 띵띵거리는 건반음은 크라프트베르크 이후 축적된 테크노 사운드의 노하우를 전달한다.

그래도 나는 유년기에 질린 유로댄스가 여전히 달갑지 않다. 아마도 키보드보다는 베이스와 드럼에 더 마음이 쏠리고, 이왕 춤출 거라면 정박보다 엇박이 좋다는 취향 탓일 것이다(내가 소녀시대보다 원더걸스를 좋아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다만 예외는 몇가지 있다. 투명한 유리창 같은 A-HA의 <Take on me> 같은, 어제 나온 신곡이라고 뻥을 쳐도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곧이 들을 만한 노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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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장르에 대한 세 가지 질문

Listen to the 무직 | 2008. 12. 20. 18:44 | Posted by 김수민
지난 달, 나는 <록음악의 X가지 표정> 이런 제목으로 작은 규모의 강연 및 음악감상회를 해달라는 부탁을 들었었다. 제의자의 개인적 사정 때문에 계속 보류되기는 했지만, 요즘 다시 공부를 하고 또 음악을 여러 방면으로 듣고 있는 중인데, 초심자 분들이 제기하는 질문 두 가지가 생각나서 적어본다.

1. 하드록은 뭐고 헤비메틀은 뭔가효? 하드한 거랑 헤비한 거랑 누가 더 빡센 가엽?

하드록의 개념을 협의로 따지느냐 광의로 따지느냐에 따라 다르겠다. 광의로 따지면 헤비메틀도 하드록 하위개념이다.

흔히 하드록이 록의 '정통'이라고 착각을 하시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어찌 보면 이 록의 역사라는 것은, 1980년대 후반 사구체 논쟁을 비롯한 좌파 이론가들이 역사적으로 진행해 왔던 논쟁들과도 비슷하다. NL이 다 같은 NL이고, PD가 다 같은 PD였는가? 끊임 없이 가지가 갈라지고 변종되고 크로스오버를 일으킨다. 하드 록도 그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정통은 뭔 정통. 그건 '다함께'가 자신들이 마르크스주의와 트로츠키주의의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더 우습다.

록은 블루스, 컨트리라는 양대 축을 기본으로 1950년대 틴 팬 앨리(ex. 프랭크 시나트라)의 독재를 박살내고 로커빌리라는 형태로 일단 독자적 장르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러나 블루스는 로커빌리로 전이된 것이 아니라 그것대로 계속 뿌리를 뻗어 왔다. 그러다가 슬슬 전기 기타와 앰프 출력이 빡세지면서 1960년대 중반께에 나타난 것이 하드록. 어느 그룹의 어떤 노래를 하드록 최초의 곡으로 잡느냐는 논쟁의 소지가 있다. 킹크스의 <넌 진짜 날 가져 브렀어>와 더 후의 <내 세대> 중 하나를 정설로 꼽는 경우가 많고, 비틀즈의 <헬터스 켈터>도 소수의견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안다..

본격적으로 하드록으로 진입하던 시기를 대표하는 밴드는 단연 레드 제플린과 딥 퍼플. 레드 제플린은 야드 버즈 출신인 지미 페이지가 기타리스트로 있었던 만큼 블루스~하드록의 행로를 잘 보여주는 밴드다. 반면, 딥 퍼플은 1기 시절 다소 잡다씨구리한 음악을 하다가 2기에서 하드록 밴드로서의 가오를 정립하였다... 후대의 헤비메틀 음악에는, 적어도 형식적 측면에서는, 블루스 필이 덜했던 딥 퍼플이 끼친 영향이 더 컸을 것이다.

바로 여기서 협의에서의 하드록과 헤비메틀이 가진 중대한 차이점이 발견된다. 헤비메틀은 블루스 필이 하드록보다 훨씬 약하게 나타난다. 주다스 프리스트가 대표적인 예이다. 물론 예외도 있지만, 이들 그룹도 원래 자신들이 지닌 블루스 색채를 꽤 약화시킨 편이다. 예컨대 메탈리카에게서는, 차라리 컨트리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언정 블루스의 자취는 맡기가 힘들다. 물론 전혀 맡을 수 없다는 건 아니다. 옛말에 "블루스는 로커들의 전지"라 하였거늘. 로커들이 아무리 오만방자해도 애미애비를 몰라볼 리가 있겠는가. 겸손샤방하신 초심자들께서도 당연히 빡센 메틀 음악으로부터도 그 배후에 있는 오래된 음악사조를 발견하실 수 있을 거시다..
 
두번째 차이점은 간단하다. 어느 쪽이 더 빡센가, 그리고 기타가 더 찌그러지며 강렬한가, 이다. 무식하게 나눠 보면 송골매, 무당은 하드록, 시나위, 백두산은 헤비메틀되겠다..

세번째, 사실 이게 가장 큰 요인인데, 시기별 구분이다. 대충 말해서 196, 70년대와 1980년대로 가르는 것이다. 그러나 헤비메틀의 개척자들은 1970년대 초에 나왔음을 잊지 말자. 통상 블랙 새버스나 블루 오이스터 컬트를 헤비메틀의 선구자라고 본다. 또한 1980년대 이후라고 하드록 밴드가 나오지 않은 건 아니다. 근래에 활약하는 앤써가 그 예다. 밴 헤일런 또한 196, 70년대 고전적 하드록은 물론 로커빌리 또는 로큰롤이라 불리우는 음악의 연장선상에 있기도 하다.

끝으로 한가지 유의할 점은 '헤비 메틀'이 '하드 록'의 정통이거나 그 후계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헤비 메틀은 이름 자체가 지극히 경멸의 뜻을 품고 있었고, 하드록의 이단이라는 이미지가 초창기에 강했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 상업주의, 마초주의(혹은 거꾸로 소녀취향에 영합함)가 극에 이르면서 '얼터너티브'의 반격을 초래하고 말았다. 얼터너티브를 단순히 펑크의 후신으로 오해하는 감상자들이 많지만, 펄 잼의 경우 하드록, 컨트리, 소울, 포크, 블루스 등의 세례를 두루 받았으며, 사운드 가든과 앨리스 인 체인스는 출발할 때는 사실상 '헤비메틀에 맞서는 헤비메틀'이었다.


2. 컨트리와 포크는 어케 다른가엽?

헷갈리는 게 당연하다. 질문자가 한국인이라면 말이다. 컨트리는 미국의 뽕짝인 셈인데, 포크와 뽕짝을 구별 못하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장르의 생성과 분립은 미국과 다르게 진행되거나, 또는 전혀 사회적 맥락이나 음악적 계보와 무관하게 영미의 시류가 유입되면서 이뤄졌다. 

컨트리와 포크는 그냥 들어서는 양쪽을 분간하기 어려운 음악이다. 예컨대 16마디, 쓰리 코드의 형식 같은 것들은 두 장르 간의 공통점이다. 내 경험적으로는 컨트리에 기타와 베이스 말고도, 바이올린, 밴조 등등의 악기를 쓰는 경우가 좀 더 많은 것 같기는 하나, 포크에서도 그러한 특징은 곧잘 드러난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컨트리가 미국에서 흑인음악과 결합하면서 남긴 블루지 필이 있는 데 반해, 포크는 유럽 백인들의 향취가 더 짙게 풍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사에서 드러나는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 컨트리는 남부의 음악으로 남북전쟁에서 패한 쪽의 자조감을 담고 있기도 하며, 삶의 곤경을 실존적 반항이나 집단 저항이 아닌 신과 운명에 의지하려는 태도가 만연해 있다. 반대로 포크는 급진 좌파들에 의해 트래디셔널 포크가 발굴되고 그것이 모던 포크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이미 '운동가요'의 성격을 듬뿍 지니고 있었다.

음악청취로 양자를 구분해 보겠다면, 조니 캐쉬와 우디 거스리를 같이 들어보는 것도 좋다. 이웃집 아저씨가 바에서 술 마시면서 털털하게 웃는 것 같은 전자와 도시에서 대학 다니는 막내 삼촌이 광장 벤치에 앉아 사람들 모아놓고 진지한 얼굴로 메시지를 전파하는 듯한 후자.

컨트리와 포크가 록적 형태로 각각 진화된 것이 바로 컨트리 록 및 서던 록과 포크 록이다. 전자에 이글스, 레너드 스키너드, CCR 등이 후자에 밥 딜런, 더 버즈 등이 있는디... 듣다 보면 또 헷갈리며, 그럼 크로스비, 스틸, 내쉬 앤 영 같은 애들은 또 뭐냐... 이런 의문도 생길 것이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양쪽이 확연하게 갈라지는 게 아녀...  


3. 팝과 록은 구분되는 건가?

팝을 그냥 숄라숄라 영어로 부르는 노래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혼동이 더 할 것이다. 그러나 가령 가요가 영어로 뭐였냐? 물론 kayo라고 표기하기도 하지만 영영사전식으로 설명하자면 Korean Pop이다. 팝은 파퓰러한 음악, 대중음악이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클래식, 재즈 등등과 구별되어진다.

록도 팝과 구별되어졌었다. 이러한 시각은 사이먼 프리스,라는 열라 유명한 음악사회학자의 분류에 따른 것인데, 그도 나중에는 록도 팝이다! 씨바 이제 구분 안 된다!라고 선언해 버린 마당이다. 신해철은 '록은 비트가 강한 팝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니 혹시 이런 주제로 누군가와 싸움질을 하겠다면 접는 게 현명할 듯. 록을 팝과 따로 취급하는 건 완전히 오류다!라고 하는 쪽도 마찬가지다.

장르 구분에는 인위적인 잣대가 많다. 빌보드 차트에 보면, 메인 스트림 록 차트와 모던 록 차트가 있다. 이거 어케 구분하냐고? 걍, 어느 레코드사에서 나왔냐, 어느 방송채널에서 나오냐, 뭐 이런 차이밖에 없다. 정치에 비유하자면, 진보냐 보수냐 좌파냐 우파냐가 아니라 '당적'에 따라 나눈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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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스트 6집 <666 Trilogy> part 1

Listen to the 무직 | 2008. 12. 13. 13:23 | Posted by 김수민

발매 예정일인 12월 8일을 이틀 앞두고 교보문고에 예약주문해 12월 11일 받아들 수 있었다.

리뷰 쓰기 싫다. 그냥 계속 듣고만 있다. 넥스트 2집과 신해철의 모노크롬의 특색이 섞였다고 할 수 있다. 뒤이어 나올 part 2, 3을 들어봐야 2집이나 3집과 온전히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5집에 비해선 확실히 자리를 잡은 듯하다. 신해철의 보컬이나 멜로디 라인에서 별다른 특색을 발견할 수는 없으나, 예의 그 신서사이즈로 확 벌리는 사운드와 몇년 간 수행한 테크노적 접근, 헤비메틀 클리셰가 잘 어우러져 멋진 편곡이 되었다.

2005년 말 김세황이 재가입했을 때, 그와 데빈 리가 칼 말론-존 스탁턴(유타 재즈 농구선수)에 비유될 만한 콤비 플레이를 해줄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2006년 로열 팝하모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당시, 데빈의 솔로 연주 비중이 생각보다 너무 작아서 불안했었는데, 아니나다를까 비트겐슈타인 음반부터 신해철과 함께 해온 그가 탈퇴하고, 이번 음반도 결국 김세황 혼자 짐을 졌다. 이점이 참 아쉽다. 팬으로서 나는 넥스트가 키보디스트에 더블 기타 시스템까지 갖춘 6인조일 때 가장 빛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여태껏 6인조 라인업으로 녹음된 넥스트 음반은 히트곡 리메이크를 담은 6.5집 뿐이었다.

넥스트 음반과 함께 아트 블래키&더 재즈 메신저스(이 음반 커버가 참 마음에 든다)와 우디 거스리의 음반을 주문했다. 재즈나 포크 쪽으로 들으려고 말이다;;; 얼마 전엔 조니 캐쉬 베스트 음반도 하나 구입했다. 록팬으로서 블루스필에 제대로 젖기 위해 노력했는데(물론 델타 블루스 계열로는 -십자로에서 악마에게 영혼 팔았다는- 로버트 존슨의 음반을 유일하게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 컨트리&웨스턴에는 블루스만큼 익숙하지 못하니까 감상하다 이따금 벽에 부딪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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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열전 (4) 김준원

Listen to the 무직 | 2008. 12. 8. 00:36 | Posted by 김수민
지난 번 '데이빗 커버데일' 편은 무플이 되었다. 나는 왕삐졌다. 이번에도 무플이면 당분간, 짧아도 연말까지 이 포스트가 계속 초기화면에 뜰 것이다! 노래감상이라도 올리시라...

 
비교적 최근의 곡인 <이별... 하늘...>을 올린다. 묻히는 걸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서.
<안개도시>(1집 수록곡), <걱정하지 마>(2집), <오늘 나는>(3집)과
H2O가 피처링한 듀스의  <Go! Go! Go!>도 꼭 들어보기를.
 


'김준원'은 '록보컬열전'의 네 번째 편이자 한국 보컬리스트 최초 편이다(지금껏 거명된 네 명 모두가  남성이다. 록에, 그중에서도 거친 록에 기울어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필자의 경향이 반영된 결과다. 앞으로도 아마 대부분을 남성 록커들이 채우게 될 것 같다). 내가 한국 보컬리스트들 중 최초로 그를 다루는 이유는 내가 그를 역대 최고의 한국 -'록 보컬리스트'가 아니라- 보컬리스트라 느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흔히 1980년 중후반 한국 록계를 주름잡은 시나위, 부활, 백두산을 묶어 '한국 메틀의 트로이카'라고 부른다. 그런가 하면 '4인방'이라는 표현도 있다. H20를 포함해서. 미국에 살던 한국의 젊은이들이 1986년 결성한 H20는  LA메틀 본토에서 직수입된 듯한 무대매너와 패션을 과시했다,는 전설이 있다. 나는 곧잘 '파고다극장의 마지막 헤드뱅어'를 자처하지만, 파고다극장은 내가 어섯 눈뜨기도 전에 문을 닫았으니(그래서 파고다극장은 그저 꿈의 극장이다) '전설'을 전하는 걸로 만족해야겠다. H20는 김준원을 위시한 재미교포 젊은이들이 1985년에 만든 밴드 '흙'의 후신이었다. 그들은 이듬해 싱글음반 <멀리서 본 지구>를 발표하며 LA에서 들국화와 공동공연을 펼쳤고, 1987년에 1집을 내놓으며 한국 땅을 밟았다. 2003년 노바소닉에 의해 리메이크되기도 했던 불후의 명곡 <안개도시>가 H20 1집의 첫 트랙이다.

H2O 1집 시절의 김준원 (출처 http://www.h2o4ever.net/)



'한국 메틀의 3대 보컬리스트'라는 표현도 있었다. '세계 3대 기타리스트'라는 수사처럼 공허하고 편향적이다. 에릭 클랩튼, 제프 벡, 지미 페이지가 모두 나이가 엇비슷한 영국인이며 '야드버즈'의 기타리스트 출신이었던 것처럼 임재범, 김종서, 김성헌 역시 다들 시나위의 노래꾼들이었다. 대중성, 매니아들 사이에서의 카리스마, 영향력, 생명력 등등을 고려하고 특정밴드에 대한 편중 위험까지 덜어내자면, 그나마 임재범, 김종서, 이승철로 1980년대 '3대 메틀 보컬리스트' 를 구성하는 것이 조금 더 온당할 듯하다. 아니, 아니다. 다 무르자. 김준원이 빠졌으니까.

임재범, 김종서, 이승철이 1990년대 들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들 발라드 솔로이스트로 전향하던 무렵, 김준원은 H2O 2기의 멤버들과 메틀의 시대를 접고 있었다. 하기야 이것도 전향이리라. 그러나 그후에 그와 그들이 연 것은 가요의 발전이 아닌 또 다른 록의 시대였다. 1992년 발매된 2집에서 롤링 스톤즈로 회귀한 듯한 복고성과 같은 시기 영국과 미국의 록에서 만개하던 모던함은 그럴싸한 수준을 넘어 온전히 내면화된 채 구현되었다. 노래방에도 있는 <걱정하지 마>가 그 2집의 수록곡이다. 펄 잼이나 앨리스 인 체인스 같은 그런지 스타일의 그룹이 거의 없었던, 그래서 신대철 같은 메틀 밴드 출신들이 결국 1995년 시나위의 재결성에 맞춰 그런지 록을 시도했던 한국에서, H2O는 유앤미블루(방준석, 이승열)와 함께  '얼터너티브 밴드'의 구실을 톡톡히 해냈다.

김준원은 펄 잼의 보컬, 에디 베더와 곧잘 비교되었다. 메틀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점에서 H2O와 펄 잼이 유사했던 탓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진솔하고 굵직한 목소리가 닮았던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을 테다. 김준원은 고음에 약하지 않지만 '고음 교조주의'에 편승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중음, 저음, 고음에 모두 능한 가수가 되었다. 또 부활 시절 이승철이 여리고 소년적인 감성을 갖고 있는 데 반해 그는 청년의 무르익은 남성성을 구현하였으며, 그러면서도 극단적인 남성성을 추구했던 임재범과 달리 중성성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에게도 흉성과 두성은 있었으나  이따금씩은 거의 '맨소리'를 낼 만큼 목소리에 포장이 작았고 꾸미기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김준원은 연기자로 치면 나문희나 최진실에 비할 수 있을 정도의 일상성을 획득해 냈다.

1집과 2집 사이에 H2O에 가입해 김준원의 옆에 서고 뒤에 앉은 연주자들의 면면도 화려했다. 카리스마에서 베이스를 담당했던 박현준이 H20의 기타를 잡아 절제되고 감각적인 리듬 배킹으로 밴드의 새 출발을 이끌었다. 베이시스트 강기영은 시나위에서 베이스 줄로 줄넘기를 하다시피하던 용맹한 연주자였다. H2O의 해체 후 강기영은 박현준과 삐삐밴드, 삐삐롱스타킹을 거친 다음, 록의 무대에서 춤판의 한구석으로 내려가 DJ 달파란으로 더 유명해졌다. 드러머는 고등학생일 적 시나위 2집을 통해 데뷔한 김민기였다. 그는 그 앨범 이후로 한국 최고의 드러머로 군림해 오고 있었으며, 1990년대 중반 김종서와 다시 의기투합하기도 했다.

김준원은 멤버들을 아울러 밴드의 길을 잡는 일에서 발군이었다. 메틀 뮤지션이었지만, 그것도 메틀제일주의가 한창이던 무렵의 록 키드였었지만, 그의 취향은 잡식성이었다. 김준원과 H20의 이런 열린 태도는 듀스와의 합작품 <Go! Go! Go!>로 나타나기도 했다.

강기영: (...) 그는 INXS를 좋아했다.
- 박준흠, <이 땅에서 음악을 한다는 것을> 中


그러고 보니 김준원은 이니시스의 마이클 헛친스와 비슷한 내음을 풍긴다. 강기영의 증언을 계속 들어보자.

박준흠: 김준원은 어떤 사람인가?
강기영: 그는 인간적이다. 리더십도 있고 동생들을 잘 챙겨준다. 무대에서 사람들을 끄는 힘이 있었고 말도 잘했다. 그리고 편협하지 않고 여러 가지를 수용할 줄 알았다. 그래서 H20 음악이 가능했다.


1993년, H2O는 한국 록 역사상 최상급의 걸작인 3집 <<오늘 나는>>을 분만하였다. 박현준의 그루브가 초절정에 이르른 가운데 강기영-김민기는 힘있고도 깔밋한 리듬 라인을 펼쳐고 김준원은 그 위에서 분방하게 놀았다. 한국 록계의 고질적 문제였던 저음질은 마크 코브린이라는 외국인 엔지니어가 해결하였고, 이정식을 비롯한 브래스 세션의 가세로 곡들은 잘 부풀어오른 프랑스빵처럼 풍성해졌다.

2집에서 창작을 주도했던 강기영이 <고백을 하고>, <짜증스러워>, <나를 돌아보게 해>를, 박현준이 <방황의 모습은>, <착각 속에서>, <그녀의 모습을>을 썼다. 작곡도 세련되었지만 가사도 색달랐고, 가사의 일상성은 김준원의 가식 없는 노래와 완벽히 어우러졌다. 이로써 H2O는 안치환, 블랙홀과 함께 록의 한국적 어법을 위해 고투한 얼마 되지 않는 뮤지션으로 지목될 수준에 도달했다. 물론 불행히도 이런 평가는 당시에 제출된 것이 아니다. 3집은 대중적 인기를 끌지 못했고 H2O는 해산을 맞이했다.

H20 3집 시절. 왼쪽부터 김민기, 김준원, 강기영, 박현준. (촬영은 김중만. 출처http://www.h2o4ever.net/)



김준원은 오랫동안 밴드 활동을 접었지만 신성우와 더블 캐스팅되었던 <ROCK 햄릿> 등 여러 뮤지컬을 통해 제2의 음악인생을 시작한다(이미 1992년 드라마 <고개숙인 남자>에 얼굴을 내비치며 미미하게나마 연기경력을 쌓은 차였다). 뮤지컬은 그에게 명확한 발음과 다채로운 음색이라는 날개를 달아주었고, 이는 2004년 발매된 4집 <<Boiling Point>>에서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예컨대 <pray>는 딱히 높은 음역에까지 닿는 곡은 아니나 어지간한 발음과 발성으로는 온전히 불러낼 수 없다.

4집은 타미 킴(기타), 김영진(베이스)라는 최고의 세션맨을 제3기의 멤버로 불러 들었음에도  '11년만의 재결성'을 언론매체들이 잠시 알렸을 뿐 폭넓은 관심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 컴백 음반을 발표한 임재범이 '다시 깨어나 달리는 전설'이라면, 김준원은 '안개에 싸인 무관의 제왕'이다. 그렇지만 결혼 이전까지 잠행과 은둔을 거듭했던 임재범과 대조적으로 김준원은 사람들 가까이에 있는 도회인이었다. 그는 극장 무대 위에 있었고, 강남에서 블랙신드롬의 박영철과 함께 운영한 카페에도 있었다.
보수적인 부친 때문에 라디오 듣는 것도 쉽지 않았다던 교포 소년은 화려한 메틀 키드로, 젠틀한 모던 록커로, 뮤지컬 배우로 -어느 인터뷰에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물 흐르듯 살아 왔다. 그 물은 주류 음악계의 시스템을 끝내 돌아 흘러, 저주 받은 걸작들을 양산해야만 했다. 그러나 많은 매니아들과 평론가들은 결코 H2O 재평가를 향한 옹골찬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이다.  

고등학생 시절에 들락거린 구미역 앞의 레코드점에는 운좋게 H20의 1집 테이프가 하나 남아 있었고 나는 곧 그 주인이 되었다. 내 행운은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H2O의 3집이 나온지 5년만에 기회가 찾아왔다. 나는 윤도현, 최정원 주연의 <하드록 카페>가 구미예술회관에 올랐을 때 작품의 음악감독이자 '타잔 아저씨'역으로 열연한 김준원의 노래를 맨 앞자리에서 들었다. 이후로 나는 아무리 좋아해 마지 않는 보컬리스트일지라도 그 목소리가 지겨워질 때면 H2O를 찾았다. 테크닉은 완벽하나 한쪽 귀로 들어와 다른 쪽 귀로 나가는 신인급 가수의 노래를 듣고난 후에도 곧잘 김준원을 켰다. 매운 음식을 먹었을 때, 탄산음료로 갈증을 달랠 수 없을 때, 물을 찾듯 말이다. 이 물은 로커빌리, 블루스, 팝 발라드, 하드 록, 재즈, 펑크, 훵크, 글램, 뉴웨이브, 그런지를 모두 녹여내는 것이 가능해 보인다. 김준원과 같은 전천후 보컬리스트는 내 생애 단 하나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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