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롭 핼포드가 '본좌'고 로니 제임스 디오가 '킹왕짱'이라면, 데이빗 커버데일(David Coverdale)은 '완소(완전소중)'에, '캐간지'다. 보컬열전에서 세 번째로 소개하고 있으나, 데이빗 커버데일은 내가 핼포드 이상으로, 디오 못지 않게 좋아하는 보컬리스트이다. 나는 록팬이라는 사람과 만났을 때 상대가 데이빗 커버데일의 목소리가 왜 좋은지를 모르겠다거나 혹은 아예 그를 모른다고 하면 대화를 길게 나누지 않는다. 인터넷 블로그를 검색했더니 그를 추종하는 팬들이 적지 않게 나온다. 하지만 한국에서 대중 일반은 물론이고 록매니아를 자처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그는 제 자리를 잡지 못했다. 이건 뭐 캐간지랄 수밖에...
새내기 시절 록음악을 크게 틀어주는 신촌 한 구석의 술집에 출입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 발길을 끊고 이듬해 '우드스탁'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하루는 내가 Impellitteri의 곡을 신청했다. 주인장은 죄송하지만 음반이 없어 못 틀어주겠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Loudness의 곡을 주문했다.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주크박스나 스트리밍 서비스를 쓰지 않고 음반만으로 레파토리를 채우는 술집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고심 끝에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했던 whitesnake의 <Here, I go again>을 청했다. 그러자 볼멘소리가 돌아왔다. "없는 곡만 신청하시니 난감하네요. 요즘 누가 화이트 스네이크를 들어요?" 내가 되묻고 싶었다. 1970년대에 나온 레드 제플린은 틀어주면서, 1980년대에 나온 걸 가지고, 뭐? 누가 듣냐고?
그러나 일말의 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화이트 스네이크는 동시대의 다른 유명 밴드들에 비해 한국에서 큰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당장에 일본과 견줘도 그렇다. 바로 이 화이트 스네이크의 보컬리스트이자 리더가 데이빗 커버데일이다. 물론 데이빗 커버데일은 1970년대 최강의 밴드 Deep Purple의 멤버이기도 했다. 화이트 스네이크를 전혀 접한 적 없더라도, 기타 아르페지오가 애잔하게 흐르는 <Sodier of fortune>을 들어본 이들은 꽤 있을 것이다. 그 목소리가 데이빗 커버데일의 목소리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에서 Deep Purple은 <Highway Star>, <Smoke on the water>로 더 유명하다. 이곡들은 데이빗 커버데일이 입단하기 이전, 이안 길런이 마이크를 잡고 있던 2기 시절의 노래들이다.
데이빗 커버데일은 딥 퍼플에 가입할 때만해도 상점 종업원을 전전하던 무명의 가수지망생이었다. 게다가 촌뜨기였다. 심지어는 사팔뜨기였는데 리치 블랙모어(딥 퍼플의 리더, 기타리스트)한테 고치라는 경고를 받고 수술도 없이 자가교정에 성공했다는 일설도 전해진다. 커버데일의 음성은 전임자 이안 길런과는 상이했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지역별, 계급별, 인종별로 향유하는 장르가 크게 달라서, 어디서 무엇으로 태어나느냐에 따라 특정한 장르에 깊숙하게 빠져들게 된다. 커버데일은 백인이지만 어릴 적 내내 오티스 레딩과 같은 블루지하고 소울풀한 음악을 라디오로 듣고 자라며 꽤 흑인에 근접한 필을 가지게 되었다. 이안 길런이 날카롭게 찔러대는 창법으로 한 시절을 풍미했다면, 커버데일은 굵직하게 울부짖는 흉성으로써 딥 퍼플의 3기를 장식했다. 그때의 대표곡이 <Burn>, <Stormbringer>.
딥 퍼플에는 사실상 한 명의 보컬리스트가 더 있었다. 그는 베이시스트 글렌 휴즈로, 데이빗 커버데일보다 고음에 능하고 라이브에서 더 안정된 면모를 과시하였다. 그런 탓에 경쟁심이나 갈등이 없진 않았을 것 같은데, 어쨌든 이 둘은 서서히 딥 퍼플의 노선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점차 밀려나던 리더 리치 블랙모어는 중세풍 취향을 공유한 엘프의 보컬리스트 로니 제임스 디오와 눈이 맞아 레인보우를 창설하며 딥 퍼플에서 나갔다. 제임스 갱 출신의 토미 블린이 후임 기타리스트로 들어왔으나 곧 딥 퍼플은 해산하였고 커버데일에게는 첫번째 위기가 닥쳐왔다. 유라이어 힙으로 영입될 뻔하다 탈락한 것도 이 시절의 일화다.
그러나 딥 퍼플에서 만난 존 로드(건반) 등과의 인연은 쭉 이어졌고 닐 머레이 등이 가담하면서 1970년대 말 화이트 스네이크가 결성되었다. 초기 화이트 스네이크의 음악은 후기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편이지만, 하드 록이나 헤비메틀보다는 블루스 록이라고 부르는 편이 적당한 이때의 음악이야말로 커버데일이 가장 편하고 능숙하게 소화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음의 굵기에 집착하는 바람에 노래를 어렵게 끌고 가는 커버데일의 나쁜 버릇도 꽤 교정되었다. 화이트 스네이크는 딥 퍼플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뻗어나온 레인보우와 경쟁하는가 하면, 존 로드가 재결성된 딥 퍼플로 향하면서 잠깐 흔들리는 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천둥 같은 드러밍으로 유명한 코지 파웰이 있었고, 씬 리지 출신의 존 사이크스가 들어오면서 1984년도 <<Slide in it>>이라는 걸작이 나왔다.
허나 두 번째 위기가 도래했다. 데이빗 커버데일의 성대 이상. 의사가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선고할 수준이었다. 존 사이크스를 대동해 메탈씬을 정복하려던 꿈은 좌절되었다. 그리하여 3년의 공백기간이 있었다. 거꾸로 말해, 커버데일은 마침내 장애를 딛고 3년만에 돌아올 수 있었다.
<<1987>>. 화이트 스네이크의 최대 히트 음반이었다. 존 사이크스의 기타에선 불꽃이 튀었고 커버데일은 더 역동적으로 거듭났다. 한결 세련된 편곡을 거쳐 재수록된 <Here I go again>은 빌보드 싱글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특별히 조금 더 빠르고 경쾌한 버전이 등장하기도 했다. 후속 발라드인 <Is this love?>도 빌보드 싱글차트 2위에 올랐다. 화이트 스네이크의 음악이 본격적인 메틀로 '여기서, 다시 나아감'으로써, 데이빗 커버데일의 '힘으로 밀어 붙이는' 성향도 더 짙어졌다. 스스로 리메이크한 <Crying in the rain>에서 그의 변천 또는 진화는 유감 없이 드러났다.
존 사이크스가 음악적 불화로 탈퇴했음에도 화이트 스네이크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탈퇴 후 블루 머더의 깃발을 꽂은 존 사이크스는 딥 퍼플 시절의 글렌 휴즈와 더불어 '데이빗 커버데일과 밴드를 같이 한 다음 보컬리스트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비비언 캠벨이 들어온지 얼마 안 되어 나가고, 더블 기타 시스템의 한 축이던 에드리언 반덴버그가 손가락을 다쳤지만, <<Slip of the tongue>>의 제작 와중에 멋진 구원투수가 들어왔다. 스티브 바이. 촌티 풀풀 날리는 블루지 넘버 <Fool for your loving>이 그의 손을 거쳐 말끔하게 번뜩이는 곡으로 탈바꿈되었다. 예전의 중후한 느낌을 더 선호하는 팬들도 많겠지만, 다시 실린 <Fool for your living>에서 감정을 눅이기보다는 폐부를 찔러대는 쪽을 택한 커버데일의 보컬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1990년대 얼터너티브 붐이 락씬을 휩쓸며 화이트 스네이크는 여느 메틀 밴드처럼 쇠락하기에 이른다. 그후 커버데일은 지미 페이지(레드 제플린의 기타리스트)와 함께 Coverdale & Page를 구성해 '꿈의 블루지 콤비'를 이루는가 하면, 화이트 스네이크를 재결성하기도 하고, 솔로 음반에서 밴드 시기 못다한 블루스, 소울, 컨트리 음악을 선보이기도 한다. 커버데일이 원초적으로 지닌 매력을 감상하려면 이 시절의 음악 역시 놓쳐서는 안 된다.
사실 커버데일에게는 여러가지 단점이 있었다. 굵고 낮은 목소리는 당연하게도 고음에서의 약점을 노출시켰으며, 밀어붙이듯 고음을 올리더라도 갑자기 음성이 얇아지는 양상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야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 치더라도, 라이브에서의 고질적인 불안함 때문에 매니아들의 입길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은 그에겐 치명타였다. 그러나 그런 불안함을 지적하는 사람들마저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게 있다. '노이즈가든'의 멤버 박건이 영국에서 화이트 스네이크 공연을 보고 신해철에게 귀띔한 바, "그냥 무대 위에 서 있는 것만으로 용서된다". 그는 목소리로나 외양의 분위기로나 지극히 남성적인 동시에 당대에서 제일 섹시한, 하드록/헤비메틀 사상 '가장 완벽한 캐릭터'를 자랑하는 보컬리스트였다. 곡이 매듭지어지면서 나오는 한숨소리마저 당당히 노래의 한 영역을 차지했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멸하지 않고 입에서 코로 올라가는 특유의 바이브레이션은 그 관능미의 극치였다. "로큰롤과 섹스는, 힘들어도 끝낼 수 없다는 점에서 같다"는 명언도 커버데일쯤 되어야 발설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도 커버데일에게 막대한 영향을 받은 가수들이 있다. 김태화, 임재범, 박완규, 양원찬(전 블랙신드롬) 등은 문헌이나 방송, 입소문을 통해 그렇다는 것을 확인해준 이들이다. 신성우, 서문탁 같은 이들에게서도 커버데일과 비슷한 어프로치를 엿들을 수 있다. 한국에서 커버데일의 후예들은 어쩌면 로버트 플랜트나 프레디 머큐리(퀸)를 사숙한 이들 못지 않은 세를 형성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러한 보컬리스트들은 등장하지 않고 있다. 그나마 굵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R&B를 소몰이 창법으로 부르는 이들이 대다수이다. 7년 전, "요즘 화이트 스네이크를 누가 들어요?"라고 타박받은 나는 날이 갈수록 복고주의자로 취급받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어떤 분은 내가 주로 듣는 음악을 확인하더니 "수구세력이시네요"라고 농담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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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초슈퍼밴드의 새로운 걸작을 샀다. 속지에 적힌 비평인지 소개문인지를 보니 가슴이 막혀 온다. 10년이 지나도록 개선된 것이 없다.
우선 매니아와 음악평론가 사이의 차별점이 없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를 깔아놓고 있다. 이는 민주화나 포스트모던이 벽을 허문 귀결이 아니라, 아주 오래된 습성의 발로이다. 더 말할 나위 없이 모든 음악평론가는 음악매니아여야 하나, 매니아라고 해서 음악평론을 잘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음악을 많이 듣는 것과 음악에 대해 쓰는 것, 뮤지션의 테크닉과 장비, 계보를 읊어대는 것과 그것을 글로 푸는 것 사이에는 건너뛸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한다. 그러나 매니아적으로가 아니라 사회학적, 철학적, 문학적으로 접근하는 경우에조차, 글쓰기의 기본을 갖추지 못한 대중음악평론이 수두룩하다.
이번에 읽은 속지에서, 글쓴이는 곡별 소개를 하지 않았다면서 그 이유를 주절주절 설명하고 있다. 곡별 소개는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글쓴이의 자유이다. 그 자유는 프라이드로부터 나오며, 글솜씨의 보좌를 받는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곡별 소개가 삽입되는 것이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그 뿐이다.
그런데 글쓴이는 쓸데 없이 횡설수설하더니 어떤 대목에서는 자신이 느낀 아쉬움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음반 속지의 최대 맹점, '주제 파악의 실패'가 드러난다. 음반 속지의 글은 소위 발문이라고 불리우는 부류의 글에 해당하며, 더 노골적으로는 '주례사(적 비평)'의 성격을 품는다. 달리 말해, 비판은 저널리즘이나 출판에서 소화할 일이라는 것이다. 찬탄만을 지나치게 늘어놓아 글과 글쓴이 자신의 격을 함께 깎아내리는 것이 우려된다면, 절제해서 쓰면 된다. 그간의 소식과 음반제작 과정, 뮤지션의 옛 궤적, 신작의 장르적 특성과 주법, 창법 따위만 건조하게 늘어놓아도 훌륭한 발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음반 속지를 물들일 펜은 평론가나 기자보다는 음반사 관계자가 직접 쥐는 게 더 올바르지 않을까 싶다. 평론가의 권위를 대신해 카피라이터의 특질도 녹여낸다는 의의도 있다. 설마 음반사 직원들이 죄다 비지니스나 영어에만 능하거나, 음악애호가지만 글 한 편 깔끔하게 쓸 수 없는 사람들이겠는가.
발매 이전에 음원이 공개되는 경우라면 팬클럽 회원에게 맡기거나 네티즌들에게 공모를 해도 될 것 같다. 1980년대, 한 애호가는 '부활'의 음반에다, 두고 두고 웃음거리가 된 '라우드니스를 능가한다'류의 문구를 휘갈긴 바 있다('부활'은 훌륭한 밴드지만, 음악적으로 너무 다른 '일본 밴드'를 끌어 들이는 짓은 치기 어린 쇼비니즘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위험쯤은 음반사가 충분히 걸러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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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이 SBS로 돌아온 다음에 그의 방송을 들은 건 이번주가 처음이었다. 어제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로니 제임스 디오 특집을 했다. 선곡은 'Rainbow'의 <Temple of the king>, <Kill the king>, <Rainbow eyes>, 'Black Sabath'의 <Heaven and hell>, <Paranoid>, 'Dio'의 <Holy diver>, <We rock>. 다 아는 노래들이었고, 신해철의 설명도 다 아는 바였다. 적어도 그만큼은 내가 디오에 심취해 살았다는 뜻이다.
'크래쉬'의 안흥찬은 1997년도 <Rock It>과의 인터뷰에서 요즘 애들이 너바나는 알지만 디오 같은 건 전혀 모른다고 푸념했다. 그때 디오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당시는 P2P도 스트리밍 서비스도 없던 시점이었고, 구미 시내에서 테이프가 가장 많은 가게는 우리 집과 승용차로 20분 거리에 있었다. 나는 이듬해 구미 시내 근처의 고교로 진학해서야 디오의 테잎을 살 수 있었다. 디오는 'Elf'라는 그룹에서 무명생활을 했고, 'Rainbow'에서 스타덤에 올랐으며, 'Black Sabath'의 구원투수로 등판했다가, 제 이름을 딴 'Dio'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내가 처음 구입했던 건 Rainbow의 베스트 앨범이었고 그 다음이 Dio의 베스트 앨범이었다.
디오는 어려서부터 클래식 음악 교육을 받았다. 그가 성악으로 길을 틀었다면 혹 파바로티나 플라시도 도밍고 같은 인물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감히 상상한다. 그러나 파바로티가 록 보컬이 되었다면 로니 제임스 디오만큼 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또 나는 감히 장담한다. 디오는 역대 최강의 헤비메틀 보컬리스트 가운데 한명이다. 그 최강의 인간들을 하나씩 하나씩 탈락시키더라도 로니 제임스 디오는 최후에 남을 공산이 높다.
무엇보다 그는 가장 완벽한 발성을 자랑한다. 디오는 흔히 롭 핼포드와 함께 양대산맥으로 소개되는데, 핼포드와는 판이한 발성을 가지고 있다. 제일 크게 도드라지는 부분이 바로 흉성이다. 악을 썼을 때 머리가 울린다고 두성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되듯, 낮고 굵은 소리를 낼 때 가슴이 울린다고 흉성은 아니다. 흉성은 혀를 이용한다. '이'발음에서 명확히 드러나며, 흉식 바이브레이션과 어우러지기도 한다. 금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는 주저하지 않고 디오의 노래를 들어보라고 권한다. 흉성은 중음역에서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하며 디오의 노래도 이 법칙을 따르고 있다. 물론 디오의 흉성에는 허스키까지 곁들여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성량과 파워를 과시한다.
고음 샤우팅에 귀가 길들여진 이들은 디오의 노래를 쉽게 보기 마련이다. 하지만 따라 부르다 보면 어느새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음을 맞추는 대신 발성을 싱겁게 하거나, 발성을 카피하면서 힘겹게 부르거나. 디오의 보컬이 지닌 최대 약점은 고음에서 중음에서만큼의 파워가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점에서는 흉성을 쓰지 않는 롭 핼포드보다 디오가 뒤떨어진다. 인체의 특성상 굵직한 흉성은 높은 소리에서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에, 흉성을 구사하는 보컬리스트 대부분이 이런 난점에 시달린다. 그나마 디오는 저-중-고음역에 두루 노련한 보컬이고 덕분에 역대 최정상의 위치에 선 것이다. 보통의 사람은 흉성을 구사하면서 음을 이동하는 데조차 불편함을 느낀다. 노래방에는 디오가 부른 노래가 몇곡 있지만, 거의 모두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고, 버텨낸 이들조차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방송에서 김경호나 박완규 등이 곧잘 영미의 메틀 명곡을 부르지만, 언제 디오의 노래를 부르던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못 봤다. 아, 어디선가 누가 디오가 레인보우 시절에 부른 <Man on the silver mountain>을 부르는 걸 들은 것 같기는 하다. 흉성이 거의 없어진 채로 말이다.
디오 말고 흉성에 능한 보컬리스트로는 데이빗 커버데일과 그레험 보넷이 있다. 데이빗 커버데일은 블루스와 소울에 기반한 음색과 어프로치로 유명하다. 디오와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게다가 그는 디오와는 달리, 외모가 받쳐준다. 레인보우의 후임 보컬인 그레험 보넷은 디오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레인보우 탈퇴 이후 '임펠리테리'에서 선보인 그 막강한 성대! 그렇지만 이 둘은 결정적으로 라이브에서의 안정성이 디오에 비해 떨어진다. 더욱이 디오는 스티븐 타일러(에어로스미스)처럼 특이한 음계를 가지지 않았다. 딱딱 음이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디오의 외양은 여러모로 카리스마를 내뿜기에 적절치 않다. 그의 홈페이지 디오넷은 키는 '프라이버시'라며 밝히지 않고 있으며, 덕분에 그의 신장이 150대인지 160대인지는 아직도 안개에 휩싸여 있다. 키에 비해 머리는 큰 느낌이고 머리칼에는 윤기가 없다. 허나 그는 이 모든 걸 극복해 내고 중세풍 헤비메틀의 대표 주자로 올랐다. 그 첫번째 비결은 '모션'이다. 그 어려운 노래를 무대 위에서 힘들이지 않고 소화하면서도 그는 전 세계의 레크레이션 강사들을 뺨치는 모션을 구사한다.
그가 보컬리스트일 뿐만 아니라 키보디스트이고, 완성도 높은 뮤지션이라는 점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여기에는 비단 음악적인 요소 뿐만이 아니라 문학적인 배경도 있다. 그가 내뿜는 중세풍의 아우라는 얄팍한 의상이나 소품을 활용한 결과가 아니다. 그는 중세문학에 정통해 있고 이는 그의 가사쓰기에 오롯이 다 반영된다. 심지어 그는 흑마술에도 일가견이 있다. 이런 그가 'king of rock'n roll'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면, 이 세상은 스스로 '기회의 평등'이 얼어 죽었음을 선언하는 꼴이었을 테다.
레인보우나 블랙 새버스에서 음악적 주도권은 기타리스트였던 리치 블랙모어, 토니 아이오미 등에게 쥐어져 있었기에 단순한 보컬리스트가 아니었던 디오는 결국 'DIO'를 결성했다. 나는 이 시절의 디오를 가장 좋아하고 높이 평가하는 편이다. 그는 기타리스트에게 발탁되는 훌륭한 보컬리스트에서, 훌륭한 기타리스트를 픽업하는 밴드 마스터로 거듭났다. 이 와중에 탄생된 디오-비비안 캠벨 조는 아더왕-렌슬롯에 비유되던 데이빗 커버데일-존 사이크스(화이트 스네이크) 조와 함께 헤비메틀 불멸의 보컬-기타 콤비로 꼽힌다. 비비안 캠벨 이후에도 'DIO'는 뛰어난 기타리스트들의 등용문이었고, 나는 개인적으로 <Wild One>에서 17세 기타리스트가 디오와 함께 튀긴 불꽃을, 디오의 베스트로 지목한다.
디오처럼 되고 싶어? 그렇다 한들 누구한테 "연락해"야 할까. 장르를 바꾸거나 자신만의 개성을 살리거나. 그래도 디오처럼 되고 싶다면, 다시 태어나라! 스래쉬메틀도 LA메틀/팝메틀도 아닌, 중앙파(?) 헤비메틀(예: 디오를 비롯, 주다스 프리스트, 아이언 메이든)은 옛날에 한물 갔으며, 디오의 전성기도 끝난지 오래. 하지만 분명 나는 디오와 동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것은 우주의 흑마술이 빚어낸 창대한 우연이다. 근래 한 1년반은 헤비메틀을 한낮에만 들었다. 어제 나는 신해철의 방송을 들으며 간만에 듣는 깊은밤의 헤비메틀에 들뜨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침대에 누워 담담히 듣던 나는, 그러나 블랙 새버스의 <Heaven and hell>을 들으면서 무너졌다. 그것은 소년 시절 밤을 설치게 만들던 헤비메틀이었고, 더구나 그는 로니 제임스 디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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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전, 주다스 프리스트를 처음 만났다.
인류의 만년 묵은 귀가 그들을 통해
금속성 기타톤과 두성 샤우팅에 익숙해졌다.
<Metal God>, <Breaking the law>, <Painkiller>, <Electric Eye>......
메탈의 황홀경에 빠져,
1시간 40분이 40분 정도로 느껴졌다.
내 생애 내한공연 중 최고였다. 2002년 오지 오스본을 능가했다.
<Before the dawn>은 '역시나' 셑 리스트에 빠져 있었다.
<Ram it down>이 빠진 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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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면의 90년대와 80년대 (2) | 2008.07.28 |
XTM에서 "서태지, 문화대통령인가, 비지니스맨인가"를 두고 토론이 벌어졌다. 그의 음반이 나올 때마다 되풀이되는 식상하고도 밑과 끝이 빤히 보이는 논란이다. 어느 측이건 쓸데없는 다변 욕구를 자제할 필요가 있다. 그가 비지니스맨에 불과하다는 쪽은 서태지가 과연 자신의 입방아에 오를 값어치가 있는지부터 따져봐야 할 것이다.
서태지가 문화대통령이라는 쪽은 우석훈의 근저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연상시킨다. 물론 '아시아 제패'라거나 '미국 진출'이라는 꿈은 물건너간지 오래고, '제국주의'보다는 '촌놈'임이 더 부각된다. 이현도 등이 지적받듯 서태지에게도 가령 'C-G-Am-Dm' 같은 전형적인, 그래서 친숙하면서도 진부한 패턴이 있다. 팬들의 열정적 환영은 진부함 대신 친숙함에 더 표를 던진 결과일 뿐이다.
물론 그들은 서태지가 출연한 광고의 메시저처럼, 서태지가 진부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바로 서태지가 록팬을 비롯한 음악매니아들에게 깎아 내려지는 원인이기도 하다. 표절 여부를 운운할 것도 없이, 서태지의 음반은 언제나 구미의 흐름을 추종하고 훌륭히 베껴 왔으며 이번 음반 역시 마찬가지다. 국내 최초? 얼터너티브는 그 이전에 '제이워커'나 '뮤턴트'가 시도했으며, 하드코어 혹은 뉴메틀에서도 '닥터코어 911'이나 '언루트'가, 이모코어에서는 바슬린이나 피아가 더 앞섰다.
창조성의 가늠이나 원조논쟁은 차치하고, 서태지를 '문화대통령'이라 부르는 것이 가당찮은 건 그가 지닌 '뮤지션쉽'의 현황이다. 세상에 잊을 만하면 돌아와 음반을 발표하고 그러다 다시 사라지는 대통령이 어디 있나. 서태지컴퍼니를 통해 후진을 양성하는 노력은 인정되어야 하지만, 그가 현재의 음악계에 이수만이나 박진영만큼의 영향력을 끼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이제 그냥 음악활동을 근근이 이어가는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소박한 뮤지션 겸 프로듀서일 뿐이다.
아마 그를 '대통령'으로 띄운 힘은 그가 표출한 정치사회적 메세지에 대한 먹물 비평가들의 호들갑에서도 상당 부분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무엇을 추앙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교실이데아>가 여러모로 좋은 작품이었다는 걸 뺀다면 말이다. 통일을 노래해서? 고구려 유민이 지배층으로서 말갈족을 지배한 나라를 꿈꾼다는 노래를 통해, 그리고 국기게양과 국기에 대한 경례로 막을 내리는 장대한 쇼에서, 통일지상주의와 애국주의의 메아리가 참 크게 울려 퍼지긴 하더라만. 서태지가 거둔 '저항의 성공'이 '비판적 지식인'들을 눈멀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뱀 같은 지혜'를 가지자는 교훈을 남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서태지가 보여준 비판의 수준을 보면, 욕이든 뭐든 잘난 놈이 하면 효과가 있다는, 새기나마나한 교훈만이 남을 뿐이다. 그 노선은 네가 지지하는 노선일 뿐 내가 쌍수들 노선은 아니다.
서태지 이래 그에 관해 바보 같은 글들이 너무 쏟아져 나왔다. 쓸 만한 건 6집 <울트라맨이야>가 나오던 시절에 성기완이 썼던 글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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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청소년잡지가 집계한 차트에서, 시나위는 2집에 든 노래들로 1위부터 6위까지를 휩쓸었다. 들국화나 송골매와는 달리 디스토션을 과감히 걸고 나선 메틀 밴드의 시대였다. 그러나 그들은 White Snake의 <Here, I go again>이나 Van Halen의 <Jump> 같은 대중적 히트곡을 남기지는 못했다(이 두곡을 특별히 예로 든 건 빌보드 차트 1위였기 때문이다). 1992년에야 김종서의 <대답 없는 너>와 신성우의 <내일을 향해>가 나왔다. 그리고 그 바로 직전에 서태지가 있었다.
<난 알아요>에서 회오리춤과 함께 몰아친 신서사이저 사운드는 대중가요의 판도를 바꿔 놓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록의 파수꾼으로서 침투했음을 숨기지 않는 기타 사운드였다. 초반의 랩 파트에서 브리지("난 정말 그대그대만을 사랑했어") 사이에 펼쳐진 신대철(아니면 손무현)의 기타 리프는 서태지의 정체성 그 자체이다. 2집에서 들고 나온 <하여가>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궁상박치우나 태평소 소리, 스크래칭 등은 하나의 악세사리였을 뿐이고, 곡 전반은 기타를 중심으로 하는 록 사운드가 지배하고 있다.
그 경향은 차트 상위권에는 진입하지 못했지만 두고두고 선동가로 남은 3집의 <교실 이데아>에서 완전히 만개하고 말았다. 서태지는 '아이들'과 함께 기타 사운드에 대한 거부감을 춤으로써 무력화시켰고, 록 매니아가 되는 또다른 경로를 개척하였다. 그러나 3집은 사회적 반향에 비해 음악적 호응을 이끄는 데는 실패했고, 서태지는 4집에서 록과 힙합의 분군행진의 전략을 취한다(<컴 백 홈>+<필승>). 그리고 그것을 끝으로 2년 뒤 그는 록커로 컴백한다.
솔로 데뷔 후 그의 음반에 썩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6집에서 시도한 소위 랩코어, 뉴메틀 사운드는 그의 목소리로 따라하기는 버거웠고, 그에게 맞게 재창조되는 것도 그리 용이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그는 음반과 음반 간의 장르적 격차를 좁힐 줄 몰랐고, 그가 선보인 사운드는 예전처럼 그때그때의 구미 팝의 시류를 따랐다. 그러나 청자들이 더이상 신선함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세상은 요, 빨리 돌아가고 있다."(<환상 속의 그대> 중에서)
우연히 네이버의 어느 블로그에서 새로 나온 <모아이>라는 곡을 듣고 알아차렸다. 보다 부드러워지고 멜로디컬해진 7집에서야 그는 비로소 중심을 잡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또 한번 변신을 감행했다는 것을. 트집 잡을 생각은 없다. 변신은 서태지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곡 자체도 꽤 서태지다웠다. 그에게 덧씌워진 과도한 광휘를 벗겨낸다면 더욱 흡족하게 듣고 즐길 만한 작품이다.
1980년대 메틀의 세례를 받은 수많은 뮤지션들이 1990년대 한국 팝의 찬란한 꽃을 피웠다. 이승환이나 유희열도 록커였거나 록매니아였다는 뒷이야기는 그러한 진술을 더 단단하게 받친다. 그러나 이들 뮤지션 상당수는 2000년대 들어 10대와 구별되는 20대용, 또는 20대와 구별되는 30대용의 음악인으로 머문 감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대중음악은 외화내빈의 극한에 이른 듯하다. 서태지의 팬층도 확확 넓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대신, 깊어지기는 할 터이다. 그의 팬은 아니지만, 그가 앞으로 음악을 펼쳐갈 나날이 지난 세월의 이상이 되기를 바라는 이로서, 나는 그가 어떻게 해쳐 나갈지 참 궁금하다. 그가 록 뮤지션이라서 더 궁금하다. 그것도 1980년대 메틀 키드 출신이니. 나는 문닫은지 꽤 오래된, 한번도 가본 적 없는 파고다 극장의, 마지막 헤드뱅어이다.
추신: 록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서태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댄스 가수'였을 때가 더 좋았다는 사람들에게 나는 권한다. <난 알아요>와 <하여가>를 포함하여 1집과 2집에 든 몇가지 노래를 추억 속에서 떠올리지만 말고 다시 한번 잘 들어보라. 아는 사람은 다 알았지만 모르는 사람은 정말 몰랐던, 새로운 맛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서태지의 한방은 록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 록팬으로서의 내 허장성세 섞인 호언이다. 록이 배후에 있을 때와 전면에 나왔을 때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아름다웠는지는 제가끔 느끼고 판단하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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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ON ROSE(철장미). 오른쪽 썬글라스를 낀 이가 김성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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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ger Strike>(단식투쟁) - TEMPLE OF THE DOG
타락한 주둥이에서 빵을 뺏는다면야...
하지만 내 컵은 이미 넘치는데
힘없는 자들을 삼킬 순 없잖아
그러나 그건 식탁에 있어.
불이 요리하고 노예들이 밖에서 일하는 동안
그들은 아기들을 재배하지
피는 식탁 위를 흐르고 그 입들은 질식한다
하지만 난 굶주리고 말지...
굶주리고 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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