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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공화국 전복 2

Forum | 2009. 1. 13. 03:07 | Posted by 김수민

한 정치학자가 어느 동네의 문화센터에 와서 설명한다. "중대선거구제에서는 소수정당이 약진할 가능성이 높고 어쩌고 설라무네..." 그러자 이웃집 박씨 아저씨가 손을 들고 질문한다. "근데요. 85년도 2.12총선 때는 민정당이 반은 묵고 들어갔잖아요. 그때 중선거구제였는데 어찌 된 건지..." 이때 학자는 아마추어의 질문을 대충 뭉개고 넘어갈 공산이 얼마간 있다. 박씨 아저씨가 이웃이자 동료 수강생들에게 밟힐 가능성은 그보다 더 높을 것이다. "아이고, 뭘 안다고. 네가 교수해라." 하지만 무엇보다 한국사회에서 이렇게 전문가와 일반인이 만나는 광경이 벌어질 가능성부터가 이미 낮다.

내가 요 밑에 붙여놓은 <가라공화국 전복>을 읽고, "세상이 그렇게 빡빡하면 안 굴러가는데..." "이 친구 참 골치 아픈 사람이로군"이라 느낀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가라공화국만큼 빡빡한 곳도 없다. 가라공화국은 실상보다 타이틀과 스펙에 의존한다. 그래서 거꾸로, 위의 예화에서처럼 이 곳에서는 타이틀과 스펙에서 열세인 쪽은 고전을 면치 못한다. 전문가가 독점한 영역을 인민대중의 손으로 넘기는 것은 봉쇄되어 있다.

한편 전문가는 자신이 입증해야 마땅한 것 바깥의 작업에 정신이 없다. 쌓아올린 실상은 허름한데, 다른 일에서 혹사당하고 엉뚱한 달인이 되는 것이다. 관련된 능력 하나 제대로 뽐내는 것으로 족한 게 아니라, 윗사람에게 잘 보이고 갈라먹을 때 옆자리 놈보다 더 많이 챙기느라 분주하다. 이 상황에서 잔머리 굴리기를 멈추기란 고속도로에서 시속 140km를 밟는 도중에 5초간 한눈 파는 꼴과 같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 가라 아닌 것은 없다. 얼렁뚱당 넘어간 부분이 조금도 없는 것은 만들어지지 않은 것, 선보여지지 않은 것이다. 질외사정에 의존하며 피임을 가라로 한 결과로 태어난 사람도, 내가 확인한 바는 없지만, 있을 수밖에 없다. 도무지 성에 안 차는 작품을 응모마감을 앞두고 에라 모르겠다며 대충 마무리 땜질을 하고 냈다가 등단하는 작가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든 작품이든 그런 결과로 태어나도 제 스스로 오롯하고 당당하게 서고, 또 타인과 사회에 행복과 이익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

다만 문제는, 쉽고 간단하며 피상적이게 가라로 말하자면, 그게 아닌 또는 그에 매우 못 미치는 경우라는 얘기다. 누가 가라를 먼저 시작했느냐, 누가 더 큰 가라를 자행하고 있느냐도 굉장히 중요하다. 가령 어떤 학생이 가라로 숙제를 했다. 하지 않은 채 백지를 펼칠 경우 선생에게 두들겨 맞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전복하자고 한 가라공화국의 일등시민은 학생이 아니라 선생이다. 얼마나 설득력이 없으면 매를 들어야 학생이 숙제를 해오겠는가. 그깟 숙제 좀 안 한다고 학생을 때리는 놈이 진짜 자신이 챙겨야 할 일은 제대로 챙기겠는가.

이런 가라로 잘난체하고, 남들을 딛고 올라서고, 돈까지 벌어먹는 세상에서 여유란 존재할 수 없다. 만약에, 저서 같은 건 낼 역량도 없으며 부지런을 떨기가 너무 귀찮으니까 어쩔 수 없이 이런 블로그에나 글을 쓰는 나 같은 사람에게, 치렁치렁 타이틀 걸고 무슨무슨 전문가니 하면서 돈도 짭잘히 버는 사람이 별 논리도 없이 대뜸 "조또 아닌 놈이 닥쳐"라고 말하고 그런 짓이 먹혀 드는 세상이 된다면, 가라로 딴 명예와 권력이 바로 누구나 응당 누려야 할 게으름과 여백마저도 앗아가 버리는 것이다. 엘리트 연주자가 펑크 뮤지션을 괄시한 다음 정작 자기네들끼리는 쓰리 코드로 연주하며 관중을 후리는 데가 바로 가라공화국이다.

어떤 과잉은 동시동소에서의 어떤 결핍을 상징하는 법이다. 전문가주의는 가까이에선 허술한 전문가를 낳고, 멀리 있는 DIY 정신을 부진으로 이끈다. 이를 타격하는 것이 곧 가라공화국을 전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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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공화국 전복

Forum | 2009. 1. 12. 00:22 | Posted by 김수민

1월 10일 오후 나는 <지금은 라디오시대>를 듣고 있었다. 사연을 읽다 별안간 조영남이 미네르바를 비하하기 시작했다. 그에 환호하던 사람들이 이제 망신을 당해 등을 돌리고 있다면서, 누가 뭐라고 하면 몰려가고 따르는 현상이 몹시 한심하다고 말했다. 공동진행자 최유라와 게스트 김영철은 전혀 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이견이 있어서가 아니라 진행과 상관이 없기 때문일 터이다. 하지만 조영남은 연달아 미네르바를 입에 올리며 오호통재라는 투로 한탄을 거듭했다.


조영남은 히트곡도 별로 없이, 심심하면 남의 노래를 가져다 부르고, 기껏 가사나 바꿔 불러대는 뮤지션으로 악명 높다. 그러나 대중은 늘 그에게 관대했다. 그는 예술가이고 연예인이니까.  한편으로는 성악과 출신다운 기본기가 있기도 하거니와, 중퇴했지만 서울대를 다녔다는 이력이 그를 보호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재롱이든 작품이든 예술가가 인상을 쓰고 비분강개조로 세상에 침을 뱉었을 때, 의미는 물론이고 재미마저 없으면 더는 참기 힘든 노릇이다. 그동안 '가라'로 해왔던 짓거리에 대해서 더는 관용을 베풀 수 없다. 그래서 무언가 심오하다는 듯 화투장을 그린 그림이나 서울대 성악과 학력 같은 데 아랑곳하지 않고, 얼기설기 쌓아올린 예술 세계를 가차 없이 난타하기에 이를 수도 있다.


역시나 미네르바와 조영남은 대조되는 사람들이다. 조영남은 재주와 실력에 비해 게으르게 살면서도 '가라월드' 속에서 누릴 것은 다 누렸다. 반면 미네르바에게는 단적으로 봐도 일단 학벌이 없고, 검찰조사에 따르면 그의 출중한 명문도 짜깁기의 결과라고 한다. 그러나, 미네르바는 작곡가나 소설가가 아니다. 아고라 경제칼럼으로 돈다발을 챙긴 적도 없다. 아니, 조영남식으로 애써 미화하자면, 미네르바는 페스티쉬(혼성모방)에서 일가를 세우기까지 했다. 남대문 불탄 이래 장관이 된 우리 만수는 그것도 못한다. 시침질도 못하는 놈들이 무슨 수로 짜깁기를 비난한다는 말인가.


이 나라의 전 영역이 가라, 가라, 가라로 세워지고 채워져 있다. 아마 이 가라공화국에서 가장 가라와 먼 것은 촛불집회의 든든한 빽이었던 '대한민국 헌법' 정도가 아닐까. 게을러빠진 나는 3층 건물을 1층으로 짓고 끝내는 일을 함부로 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찜질방 베개를 벽돌삼아 쌓아올리는 꼴은 도저히 넘겨줄 수가 없다. 학계에서 정계까지, 기업에서 운동단체까지, 우빨에서 좌파까지 가라 아닌 곳이 별로 없다. 학계를 대표로 잡아 한놈만 패자면, 나는 교수들이 식사모임이나 술자리에서 (학교나 학과의 행정 따위 말고) 학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으리라는 추측까지도 한다. 각자의 무식이 탄로나는 걸 막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정신적으로는 반지성주의와, 실생활에서는 엘리트주의와 작은 싸움을 벌여왔는데, 이제 전문가주의와 맞짱을 뜨기로 연초에 다짐을 한다. 강력한 전문가주의에도 불구하고 진짜 전문가가 나라에 드문 것인지, 아니면 본질적으로 전문가들의 가라에 의존하는 게 전문가주의인지, 이에 대해서는 일단 결론을 생략한다. 그저 전문가 타이틀로 감싸진 실상의 거의 모두가 가라인 이 공화국과 열라게 싸워야겠다. 공적 담론 뿐만이 아니라 윤리적이면서도 효과적인 한도 내에서의 사적 위협까지 동원해서!


제 정신인 사람들끼라도 서로 "세상에 그런 놈이 한둘이냐"라고 뱉고 덮는 짓은 하지 말자. 각자의 인생에서 한둘씩의 가라쟁이들을 엿먹여도 된다. 이 분업이야말로 상부상조의 정신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발견한 "그런 놈"이 너무 많으면, 추첨, 가장 기분 나쁜 놈을 추리기, 가장 만만한 놈부터 줘패기 등 여러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를 골라 잡으면 된다.


며칠 전 친하게 지내는 형과 대화하던 도중에 그에게 어떤 영어단어의 뜻을 물었다. 그랬더니 그냥 그 단어를 되풀이하여 발음하기만 했고, 나는 윽박질렀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쇼!" 그는 대답한다. "어, 그래그래. 몰라. 그래. 몰라. 어." 이 형은 사실 결코 가라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니 나의 윽박을 절실히 기다리는 곳이 굉장히 많을 것이다. 소속 단체의 강령도 모르는 정당 실무자부터 허 찔리고 학생한테 보복하는 대학 교수 그리고 대통령 각하까지, 시간 질질 끌지 말고 모르면 모른다고 대답하는 새해가 되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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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2

Forum | 2009. 1. 10. 15:09 | Posted by 김수민

몹시 유쾌한 기분이다. 검찰발표가 사실이었으면 하는 바람까지 든다. 혹은 집단창작이라도 괜찮다. 넥타이에 힘주고 전문가입네 까불던 골드 칼라들의 코가 납작해졌다. 미네르바의 글이 신자유주의의 약한 고리를 쳤다면, 검찰에 체포된 미네르바는 신자유주의의 핵심을 타격했다.

미네르바 열풍에 가담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반미네르바적 사고를 반성해야 한다. 그 원동력의 큰 부분이 전문가주의를 향한 동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진보진영도 이런 전문가주의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그리 자유롭지 않았다. 2004년 이후 한나라당 정신에 밀려나기 시작한 뒤 진보정당에서는 '정책'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정책전문가라고 하면 껌뻑 죽는 세태가 생겨났다. '정책'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방향이나 가치판단보다 도표와 수치에 대한 숙지와 기획으로 경도되어 버린 것이다. 깨놓고 말해서, 암기의 달인들이나 쌓은 서류의 높이에 초점이 맞춰진 셈이다.

미네르바의 눈부신 활약을 진보진영은 그저 입만 벌리고 좇아갔다. "미네르바 대단하다. 우리는 저렇게 못한다. 고로 열독하고 추앙하자." 세 가지를 자문해야 할 것이다. 첫째, 어찌하여 굵직한 스케일을 가지고 메네르바를 '이용'하지 못했는가. 둘째, 전문가도 아닌 미네르바가 할 수 있는 걸 왜 하지 못했는가. 셋째, 거칠고 성긴 이념에 의지해 왔으면서도 한낱 미네르바의 전문가성에 혹하게 된 자신의 컴플렉스는 무엇이었는가.


여담: 체포된 미네르바의 거주지는 서대문구 창천동이라고 한다. 신촌에 '미네르바'라는 유서 깊은 찻집이 있다. 혹시 거기서 이름을 따왔을까. 나를 비롯해서 처음 인터넷에 미네르바 바람이 불었을 때, 그 찻집 이름을 연상한 사람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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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Forum | 2009. 1. 9. 16:17 | Posted by 김수민

정말 붙잡힌 30대 시민이 미네르바가 맞는 걸까? 영문을 소상히 알 순 없으나, 이 사건으로 깨닫는 교훈은 아무리 좋은 글을 웹상에 쓰더라도 자기 신상을 속이지 말고 명확히 밝히거나 아니면 아예 언급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물경제전문가도 아니고 전공자도 아니더라는 학벌공세가 치사하고 저열하긴 하지만, 어쨌든 거짓말을 하면 이로울 게 없다.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할 거라면 아예 철저히 보안에 부치자는 말이다.

나는 이 블로그에서 처음으로 미네르바 이야기를 한다. 나는 그동안 미네르바와 그가 만드는 현상에 별 관심이 없었다. 대충 스크롤을 읽어내리면서 훑은 적은 있지만 그의 글을 유심히 읽거나 외워둔 대목은 전혀 없다.

그의 등장 이후 정치비평의 시대가 가고 경제비평의 시대가 왔다고들 한다. 나는 이것을 말세의 증상이라고 규정한다. 정치비평의 시대가 저문 이유는 결코 그것이 본디 허황된 상층부의 놀음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경제비평의 시대의 도래 역시 서민의 살림살이를 챙기는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첫걸음은 아니다. 미네르바를 향한 열광의 8할 이상은 금융과 재테크에 쏟은 관심에서 왔다. 반면 정치비평은 제대로 이를 알아먹을 시민들의 수가 급감하면서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땅의 2, 30대는 (심지어 40대 상당수와 50대의 일부도) 6, 70대에게 정치비평의 감각과 주도권을 내준 상태임을 직시해야 한다(6, 70대는 다만 인터넷을 못해서 영향력을 배가시킬 수 없을 뿐이다). 게다가 누가누가 치고 올라오는데 어느 놈이 어떻게 해서 잘 될 것이다,라는 정치 예측이 힘을 받을 수 없는 현 정세도 정치비평의 퇴조에 한몫했다.

경제학자인 유종일 교수가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정치다"라는 쪽으로 물꼬를 돌려놓고 있다(나는 2009년 최고의 한국 훈남 후보자로 그를 올려놓고 있다). 다행한 일이다. 그럼 이제 미네르바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의 전문성 같은 데 골몰하지 말고, 그가 응당 누려야 할 시민적 권리에 대해 말할 때이다. 그리고 두말할 나위 없이, 급기야 지하벙커로 본거지를 옮겨 가면서 다 잘 될 것이라는 '진정한 괴담'을 유포하고 있는 이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 상탈 무페의 저서 제목을 빌려 말하자면, 대세는 명백히 '정치적인 것의 귀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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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um | 2008. 11. 22. 17:27 | Posted by 김수민
성노동, 성매매 문제만 나오면 진보신당 게시판이 벌집이 된다. 구도야 뻔하다. 성매매를 금지시켜야 한다는 의견과 성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의 대결이다. 나는 성노동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성산업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나는 '성은 매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보다는 성산업시스템 하에서 판매자가 겪을 여러가지 피해에 더 주목한다. 성산업의 특성상 '성노동자'가 '성자본가'나 '성관리자'에 대항할 여건을 마련할 수는 없고, 실제로 성노동자운동은 포주를 그리 거스르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성매매나 성노동에 대한 근본적 철학을 차치하고, 나는 일단 '집창촌'이나 '술3종' 등에 대해서 무조건 반대한다(그리고 비직업적, 일개인적으로 일어나는 성매매는 어차피 논쟁대상이 아니라고 본다). 나로서는 당연히 성노동자의 조직권리를 성매매금지법의 대안으로 제시할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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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선본 불출마 사건

Forum | 2008. 11. 13. 16:50 | Posted by 김수민

내가 입학하던 무렵 연세대에서는 한총련과 전학협의 각축이 한창이었다. 그뒤 몇년간 대학사회의 탈이념화는 가파르게 진행되었다. 그 때문인지 수북한 먼지 아래 어렴풋이 보이는 그때를, 나는 두 학생운동단체의 진검승부시대였다고 기억한다. 물론 소속 학교인 연세대(그리고 고려대 정도에) 한해서 하는 말이다. 2000년 전학협은 학교 사상 최초의 여성 총학생회장을 배출하며 기염을 토했다(미디어에는 '4년제 대학사상 최초'라는 수식이 돌아다녔으나, 정확한 사실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내가 입학했던 2001년도에 총학생회 권력은 한총련으로 돌아와 있었다. 세력간 경쟁이 심한 대학에서 2년 연속으로 총학생회를 맡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비운동권이면서도 2003년과 2004년 연속으로 총학을 맡은 서울대 '학교로'가 이색적인 존재인 것이다.

2001년 '청년개척자'는 1996년 사태 이후 한총련계열로서는 최초로 총학선거에 당선되었다. 모처럼만의 승리만큼이나 불안한 위상에 처해 있었을 것이다. 학내에서 한총련을 보는 눈길은 여전히 곱지 않았다. 1996년도보다 더 나빴을 것이다. 한총련사태 직후 연세인 여론조사는 공안당국에 더 큰 책임을 묻고 있었다. 한총련의 승리 원인은 그 조직의 이념노선이 아니라, 등록금투쟁과 같은 구체적 사업에서 느껴지는 열의나 조직력, 대외관계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도 그해 학내에서 안티조선운동을 하며, 총학 관계자들과 예상치 못한 연을 맺었다. 활동 파트너들은 나보다 너댓살 많은 이론가나 대중활동가들이었지만, 내게 깍듯이 대했다. 자기네 후배들한테도 그렇게 했다면 좋았으련만.

2002년 총학은 다시 전학협으로 넘어갔다. 역시, 2년 연속으로 총학생회를 맡기는 힘든 법이었다. 속칭 PD계열이며 사회당에 가담했던,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통일에 대한 환상을 떨치고 민중의 이름으로 진군하자"고 외쳤던 그들은 어떻게 해서 한총련과 번갈아 가며 총학생회에 입성했을까. 내가 목도한 바 그들은 가장 세련된 표현기법을 가진, 언뜻 프랑스 68세대처럼 비쳐지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결코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없는 비결이 또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반-한총련' 캠페인이었다. 한총련이 통일과 자주의 명분을 역설하면서도 자기네들의 북한관을 솔직하게 밝히지 않는 것처럼, 전학협도 자기네식의 사회주의 성향보다는 한총련 성토를 앞에 두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총학생회에서 선거에서 승리한 후에는 절제와 여과 없이 마구 제멋에 겨운 언어를 남발하다 학생대중의 외면을 받고는 했다.

2002년 11월 선거는 양측 대결의 절정이었다. 여기서 전학협은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난다. 진짜 '비운동권' 선본이 출현한 것이었다. '연세피플'이라는 비권 선본은 부후보도 없이 혼자서 선거운동을 진행했지만, 운동권을 향한 광범위한 반감을 모아나갈 수 있었고 전학협의 '반-한총련' 캠페인은 그리 먹혀들지 않았다. 총학 선거 때 한총련을 제외한 나머지 운동권 선본은 최대한 자기네 색깔을 뺀다. 하지만 이 해, 그 전략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마치 올해 서울교육감 선거에서의 이인규 선본처럼 말이다. 깃발을 흔들고 풍물을 쳐대며 대놓고 "나 운동권"이라고 외친 한총련 선본이 당선됐다. 그리고 막강한 조직력을 과시하던 전학협쪽 선본은 단기필마의 연세필마와 에누리 없이 똑같은 표를 기록했다.

그 전년도에 꼴찌를 면했던 SAS(학생행동연대) 선본은 꼴찌에서 주저 앉았다. 그 선본의 부후보는 낙선소감에서 목격자들의 실소를 유발한 명언을 남겼다. "선거는 기만입니다!" 왜 나왔대?라는 웅성거림이 여기저기서 튀어 나왔다. SAS는 네그리주의의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조직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총학과 총학선거라는 형식에는 언제나 녹아드는 행보를 보여 왔다. 2년이 지나, 선거가 기만이라던 이는 또 부후보로 출마하였다. 그것도 남의 선본의 부후보를 낚아 채 자기네 선본의 정후보로 심은 채. 총학선거 사상 최고의 패악질이었다. 나는 그무렵 군복무 중이어서 사나운 꼴을 지켜보지 않아도 되었다.

2001, 2002년 한총련 사람들은 안티조선운동을 전폭적으로 성원했다. 그쪽에서 <조선바보>에 파견한 인물들은 고학번대의 브레인급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신문 논조에 영향을 끼치려 하지 않고, 그저 맡기로 한 기사를 썼다. 그들은 당시 학내의 대표적 자유주의자(?)였던 내게 어떠한 불편한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다. 참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조선바보>는 2002년 11월 선거에서 어느 선본도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총련 계열의 '다른 미래' 선본은 유세에서 강한 유대감을 표시했다. "XX형, 이거 반칙지않아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내년도 예산 걱정은 없겠군.' 한총련 쪽이 당선되자 학생회관은 축제분위기였다. 일방적이고 독선적인 전학협에 질린 이들이 숱했다. 나는 당선 선본이 뒤풀이를 여는 '푸른샘'에 초대되어 축사까지 했다. 휴학생이라 투표하지도 않았는데. 아마 그 자리에서 뒷날인 2006년도 총학생회장, 부총학생회장, 단과대 회장을 역임했던 이들이 '새내기 발언'을 했을 것이다.

내가 군에 가 있는 동안 학내 운동권 판도는 예측을 불허하는 쪽으로 돌아갔다. 전학협은 해체되었다. SAS는 여전히 총학생회 당선의 꿈을 불태웠다. 소위 '현장좌파'에 꼽히는 조직이 문과대 모 학과와 총여학생회를 터전으로 삼아 새로 등장했다. 손쉽게 연임에 성공한 한총련은, 놀랍게도 분열되었다. 예전 NL의 비판적 지지+전민항쟁이냐 진보정당 참여냐, 학생회중심성을 고수할 것이냐 아니냐, 한총련을 고수할 것이냐 발전적 해산하고 한대련에서 새 출발할 것이냐 등을 두고 노선투쟁을 벌인 끝에, 결국 2004년 가을 선거에서 따로 출마를 하게 되었다. 그중 한쪽은 학회 등지에 있던 좌파 성향의 학생들과 손잡고 선거에 출마했다. 학생회 구조를 대담하게 혁신하겠다는 공약이 주를 이루었고, 사상 최초로 경선을 통해 후보자를 선발하는면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경선에서 생긴 잡음을 틈 타 SAS측이 부후보로 선출된 이를 빼 갔고, 이 선본은 구운동권 선본과 반운동권 선본의 공세에 포위되어 3위에 머무르고 말았다.

2004년 11월 당선하여 2005년도 총학생회를 맡은 '탈정치 작은총학'은 단순한 비운동권 조직이 아니었다. 서울대 '학교로'와는 너무도 또렷이 구별될 수밖에 없는 노골적인 '반운동권'이었다. 1987년 대선을 방불케 하는 구도에서 그들은 꼭 노태우처럼 당선되었다. 득표율은 30퍼센트대 초반. 이 조직은 수구언론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학교로 돌아온 나에게 NL 운동권 사람들은 총학이 뉴라이트라고 했다. 근거는 없었고, 마타도어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탈정치라는 허울 하에 감춰진 수구보수 노선이 뉴라이트와 화음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운동권측이 곧 죽어라 뉴라이트와의 직접적 관계를 떠들었던 이유가 무얼까. 탈정치 작은총학의 승인은 기실 운동권측의 오류와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2005년, 반운동권은 너절했고, 운동권은 한심했다.

2006년도 총학이 다시 한총련 쪽의 수중으로 돌아간 이유는 고장난 레코드처럼 '탈정치'를 재생하면서 학생들을 무관심층으로 돌린 반운동권측의 자업자득에도 있었고, 등록금 5% 인하를 내건 한총련계열 선본의 교육투쟁전략에도 있었다. 2005년 11월 선거는 한총련, SAS, 기존 총학의 반운동권에 보수적 기독학생들이 가세하여 엉겨붙은 싸움이었다. 우습게도 두 반권 중에 후자가 더 큰 인기를 모았다. 후보자의 인물과 호감도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SAS쪽이 선거규정 위반 누적으로 중도탈락함으로써 한총련 선본이 신승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냉정한 표정으로 판단 내리자면, 이미 한총련을 비롯해 운동권은 학내사회에서 거의 생명이 다한 상황이었다. 뇌사 끝에 거둔 판정승이랄까.

2006년 초, 학교 본부측의 12% 등록금인상안은 처음엔 한총련 총학생회에 더없는 호기를 가져다 주었다.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고 총학은 백양로 삼거리에 2천여명의 학생을 모아 학생총회를 개최했다. 다른 학교의 교육투쟁 소식도 열기를 고조시켜줬다. 허나 그때가 정점이었다. 본관 점거에 들어가는 순간 기나길지만 힘빠지는 투쟁과 한치의 변화도 없는 등록금 인상률은 시한부 인생처럼 학생사회를, 그리고 총학생회를, 운동권을 덮쳐오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오가는 길거리를 뒤덮고 있던 여론은 본관 안으로 소리 없이 빨려 들어갔다. 점거기간은 100일로 신기록이었으나 어느 쪽은 지쳐가고 어느 쪽은 짜증을 내고 어느 쪽은 기회는 이때다 싶어 운동권 총학을 성토하였다.

별 거 없는 뒷얘기지만, 나는 정파적 입장을 떠나 교육투쟁의 실패가 몰고 올 회오리를 염려하여, 고민 끝에 같이 일하던 민노당 학생위원장을 불러내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다. 학생총투표 말고 방법이 없었다. 물론, 학교 본부측이 마음을 바꿔먹게 만들 방법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실패하더라도 모처럼 모인 여론을 박살낼 수는 없었다. 나는 총투표는 휴학생을 뺀 재학생의 과반이 투표해야 성립된다는 사실에 주눅들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투표기간은 길게 잡을수록 좋았다. 고생고생해서 총학생회 성원 1/10을 모아 개최한 학생총회로는 여론의 분노를 전달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누구도 여론을 알지 못했고, 그에 대해 자신할 수 없었다. 운동권도 반운동권도 학교 본부도. 결정을 바꿀 수 없다면 뜻이라도 명확하게 전달해야 했다. 정말, 총투표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총학생회는 본관 점거 직후부터 전위단체처럼 행동했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고, 작전은 모두 짜여졌으므로 그냥 밀어붙인다는 태도였다. 다른 운동권 조직에서도 별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형, 할 얘기 있는데 잠깐 나 좀 봅시다"하면서 민노당 연세대 학생위원장을 불러냈던 나는, 약속시각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에서 "아닙니다. 그만둡시다"라고 만남을 취소했다. (어이 형, 그때 기억 납니까?) 어차피 당시 총학측이 내 말을 듣지 않을 게 뻔한 데다가, 이미 실패로 돌아가고 있는 투쟁에 더 잔소리를 얹을 만큼의 힘이 내게 남아있지 않았다.

2005년 가을부터 2006년 가을까지, 나는 학생회를 통해 정치노선을 강력하게 실현하는 기존 노선을 접으라고 강력하게 주문했다. 전략전술상 후퇴가 아니라 그것이 학생회를 학생회답게 만드는 길이라는 취지에서였다. 온갖 권한을 다 틀어쥐지 말고 과반학생회나 동아리, 부문별 네트워크, 학생복지위원회 등으로 돌리지 않으면 피돌기는 멎고 에너지는 없고 학생사회운동(학생의 사회운동말고 학생사회의 운동)은 고사한다고 말했다. 공허한 외침이었지만, 손해는 결국 그들이 보는 것이었다.

2006년도 총학생회는 심판을 받았고, 한총련 선본 하나와 반운동권 선본 하나의 대결로 치러진 2007년 11월 선거는 뒷쪽의 압승으로 막을 내렸다. 이들은 예의 그 고약한 탈정치철학과 무능을 2005년에 이어 그대로 노출하였고, 게다가 총여 폐지를 두고 쓸데없는 일을 벌여 그해 여름에 이르기도 전에 폭삭 주저 앉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학생들이 운동권 쪽으로 흐름을 돌려주지는 않았다. 작년 이맘 선거에서, 운동권 둘과 비운동권 둘이 출마했지만, 언뜻 비슷비슷해 뵈는 선본들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학생회관에 서식하는 '선수' 또는 '전문가' 뿐이었다. 단연 변수는 조직력이었다. 그래서 비운동권 선본인 '연세 36.5'가 이겼다. 운동권은 이제 조직력에서도 비운동권에 밀린다.

어제 학생회관 앞에서 이름을 그대로 걸고 자신만만하게 출마한 '연세 36.5' 선본 운동원과 마주쳤다. 내가 최근 1년간 백양로 행인으로 살았던 탓인지는 몰라도, 이 선본이 총학을 맡은 한 해동안 무리와 소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촛불시위 때는 학생들을 모아 깃발을 들고 시청앞으로 행진했고 정치토론도 정기적으로 개최했다. 어제 만난 '연세 36.5'의 운동원은, 놀랍게도 국적은 모르겠지만 외양이 외국인인 학생이었다. 나는 그에게 팸플렛을 받으며 더 놀랐다. 그는 입에 완전히 익은 한국어로 말했다. 대대로 한국에서 살았던 사람처럼 말했다. 그것도 학생회에서 활동하는 이들과 똑같은 말투로! "46대 총학생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도서관 앞에는 등록한 선본들의 이름이 게시돼 있었다. 운동권 선본은 하나도 없었다. 조직력에서 비운동권에 밀리다 못해 총학 선본을 내지 못한 것이다. 운동권 정파들은 단과대 몇군데에서 승부처를 마련했지만, '연세36.5'에서도 상당수의 단과대 선거구에서 후보를 내는 비운동권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내가 졸업하기 전에 이러한 일이 생기리라고까진 예측하지 못했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메이저 캠퍼스'라는 더러운 이름을 달고 운동권이든 비운동권, 반운동권이든 사건을 터트리면 언론의 조명을 받았던 학교에서 또 사건이 터졌지만, 운동권의 소멸해 가는 모습과 그것을 스스로 재촉하던 예전의 행보들이 나는 조금도 별스럽게 여겨지지 않았다.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인가. 어쩌면, 와야 할 것이 온 것인지도 모른다. 탈정치화, 보수화에 원인을 돌리지 마라. 나도 지긋지긋하게 겪었다만, 그래도 도서관 등지에서 진보적인 저서들을 읽고 있는 학생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고, 운동권이든 아니든 간에 학생사회의 성격을 그리 간단히 재단할 수는 없다. 학생운동권이야말로 탈정치화, 보수화의 공동정범이 아니었던가? 현재로서는, 실천적으로 나서지 않는 지독한 액션결핍만이 구체적으로 시야에 들어온 학생사회의 현상일 뿐이다. 

이제 운동권이나 그 언저리에 있는 학생들 중에서도 예전과 같은 NL과 PD의 색깔이 짙은 학생은 찾기 힘들다. NL은 이들이 NL인가 싶고, PD는 그냥 순진무구하거나 늘어진 테잎 속에 담겨진 유일한 언더그라운드(?) 히트곡 '개량주의는 나쁘다'를 주구장창 불러 제낀다. NL도 PD도 아니면서 진보적인 학생들은, 흩어져 있거나 찌질하게 끼리끼리를 형성하고 있다. 나처럼 되는 일 없이 살다 졸업을 기다리는 학생들도 있겠지. 다음에 올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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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노동운동가의 '자유로운 세계'

Forum | 2008. 10. 24. 14:48 | Posted by 김수민
인력소개소 일에 열중하며 점점 이주노동자의 피를 빠는 존재가 되어가는 앤지에게, 그의 아버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동자들의 처우가 어떤지, 네가 하는 일이 옳은 건지 따져 묻는다. 국내 노동자의 취업문제가 거론될 때 앤지의 항변이 재밌다. "국민전선에 들어가시지 그래요?" 국가적, 국민적 차원에 접어들면 금세 내셔널리즘과 극우파를 연상하는 사고방식이 내키는대로 뱉어내는 말버릇에 그대로 묻어 나온다. 영화 <자유로운 세계>를 보고 나서, 나는 그 비슷한 버릇을 가진 어느 노동운동가의 '자유로운 세계'를 생각한다.

그를 달리 소개할 말들도 있으나 여기서는 '노동운동가'라는 단어가 적합할 듯하다. 그의 이율배반과 자기기만을 표현하기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여자 이야기가 나오면 "예쁘냐?"라고 반응하듯 활동가 이야기가 나오면 "정파가 어디냐?"는 질문이 으레 나온다. 그의 정파는 글쎄. 그룹이라고 할 만한 것은 있는데 딱히 소속정파는 없는 것 같다. 그에게 도움을 주는 쪽은 정파가 있다. 그러나 "정파가 없다"고 밝히고 다니는 모양이다. 그는 그걸 그대로 받아 옮긴다. 

그는 무척이나 독립적이다. 계보 없는 '래디컬'이라는 점에서다. 그는 앤지처럼 나오는대로 내뱉고 들어가는대로 씹는다. 그에게 한계를 극복하고 딜레마를 해결하는 길이란 없다. 한계와 딜레마가 있는 길은 가서는 안 되는 그른 길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처음 마주쳤던 순간부터 그는 늘 좌향좌를 외쳐 왔다. 그러나 이런 급진주의에 일관성이나 체계는 없다.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구석이 있으면 개량주의, 시혜주의이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다 맛이 간 것이다. 이를테면 강준만이 지역에서 '선샤인뉴스'를 만드는 일도 그에게는 이상한 짓이다. 

그는 정당정치의 한계에 대해 떠들지만 실제로 정당에 가입되어 있다.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실용주의가 매우 돋보인다. '연대사업' 말이다. 정당에 관해서도, 운동에 관해서도 초보적인 관점과 상식조차 갖추고 있지 못하다. 어떤 일을 같이 하고 있다면, 같이 할 수 있다면 가입하는 걸까?  그는 한국 실용주의의 평균적 수준을 가지고 있다. 언뜻 수완이 뛰어난 운동가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활약을 하는 분야는 뻔하다. 다독 다작 다상량 모두가 거리가 먼 그가 사상과 비전을 제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의 특기는 테이블에 앉아서 협상하고 이른바 '택'이라고 불리는 작전을 짜는 것이고, 결국은 경제투쟁이다. 협상은 사실 다그치기에 더 가깝다. 아무렇게나 주절거리는 평소완 달리 작전을 짤 때는 눈빛이 좀 달라진다. 

그는 '돈'을 따라 움직인다. 그의 운동 역시 중심화두가 '돈'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 일으키고도 남을 만큼. 분별 없는 깎아 내리기와 그것을 가능케 하는 무식과 용감, 순혈주의, 근본주의 등등은 때때로 순식간에 무너진다. 진보정당의 한계를 떠들어대는 한편 그는 재태크에 손을 댄다. 자기 돈으로 스스로 하는데 뭐가 문제냐는 식이다. 이때 그에게 급진주의, 근본주의, 순혈주의 등은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물론 그의 운동과 재테크 사이에 몇몇 공통점은 있다. 돈이 중심이라는 것, 하고 싶으면 한다는 것, 사유하지 않는다는 것. 

켄 로치는 <자유로운 세계>를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앤지는 싱글맘이고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하고 거세게 탓에 해고되었다. 그의 자기합리화가 조금만 더 세련되었다면 관객들은 그의 처지와 선택에 공감을 하였을 테고, 마지막에 가서야 선악 구도 안에 쉽사리 들어오지 않는 착취의 위력을 깨달으며 거세게 뒤통수를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켄 로치의 앤지는 초장부터 '나 나쁜 놈이 되고 있어'라고 이마빡에 써붙이고 있다. '어느 노동운동가' 정도의 단순무식한 감수성과 안목을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도 바로 알아볼 수 있게끔 말이다.  

그러나 앤지가 우리의 곁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그악스러운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만일 '어느 노동운동가'가 언젠가 노동운동을 때려 치운다면, 앤지처럼 사업을 하게 된다면 어떤 인물이 될까?  (알량한) 의식을 배반하는 재테크에 손대면서 아무 거리낌이 없는 그는, 어쩌면 자기가 유리한 걸 요구하고 떼쓰고 소리지르고 따내는 것은 당연하다는 걸 유일한 철학으로 삼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든다. 그의 태도는 사채업자들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 그가 운동가나 연대자가 아니라 사용자가 된다면? 혹시 어떤 사람들은, 유물론을 지향하는 것과 경제동물이 되는 것을 구분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입장이 바뀌면 옳고그름이 뒤집히는 걸 마치 계급투쟁의 진리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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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립금 펀드, 몇번이나 꼬여버린...

Forum | 2008. 10. 15. 14:05 | Posted by 김수민

연세대학교에서 '부자학교 펀드감시단'이 나타났다. 그동안 문제가 되었던 재단적립금이 불투명하게 펀드에 이용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의 발로인데, 실상 주요 구호는 '공개하라'다. 의도와 무관하게 이 운동은 '투명화 운동'의 성격을 가장 크게 띠고 있고, 그 이상은 바랄 수 없거나 혹은 자칫 더 악화될 여지가 크다. 사립대 펀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베베 꼬인 문제다.

'투명'과 '공개'를 요구하는 운동으로는 적립금 내역과 손익현황을 공개하는 수준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펀드는 시류를 타고, 그래서 민주주의가 개입할 여지가 적다. 아직 가동도 되지 않았긴 하지만, 학교평의회가 출범하고 운영된다고 해서 해결할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펀드에서 이득을 보면 '감시단'이 벌인 서명운동에 동참한 5000여명의 다수조차 환영할 것이다. 학교의 재정이 확충되고 등록금이 덜 오르리라는 기대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대학사회의 수준을 감안해 보자. 펀드에서 손해를 보아도 그 액수가 크지 않으면, '펀드를 잘해야 한다'는 교훈이 '펀드를 그만두거나 더 제한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제압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학교는 펀드에 손대면 안 된다'는 의견도 힘이 없을 뿐더러 그리 적절하지가 않다. 나는 일전에 '학교는 기업과 다르다'를 강변하는 지인과 논쟁을 하면서, '사립학교는 자율적인 결정에 따라 일정하게 기업의 성격을 띨 수 있다. 그걸 누가 학교에 관한 일반론을 들이대며 말리랴'고 반박했다. 이는 교육공공성을 양보할 수 있다는 취지가 아니다. 교육공공성은 공(公)의 영역에 있거나 공(共)의 원리를 따르는 학교만이 담보한다. 교육에 기업운영의 원리를 대폭 도입하겠다는 학교에 감히 기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학교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는 안 된다. 까불다 시장의 차가운 비수를 맞아도 싸다.

가뜩이나 해방 이후 지속된 사립대학의 난립과 전횡으로 국공립대의 입지가 축소되고, 자발적으로 공공성을 지키는 민영대학이 솟아날 자리는 거의 없었던 판이다. 이제 더이상 통하지도 않는, 책상물림스러운 무력한 비판으로는 왜곡된 대학구조를 바로잡기 힘들다. 나는 사립대에게 준-국립 등급의 공공성과 책무를 부여하는 게, 한국 사립대의 태생적인 기만성과 시장주의적 오만함을 은폐하고, 공공성 있는 학교를 살리고 키울 기회를 앗아간다고 감히 확신한다.  "대학이 대학다워야지", "상아탑은 여전히 우골탑, 등골탑이서야..."하는 '따뜻한 시선'은 현재 잘난체하는 사립대들에게 결코 어울리지 않으니, 그것을 법인화의 위기에 직면한 국립대나 투명성과 민주성을 지키는 학교에 돌려야 한다. 

오해가 없길 바란다. 사립대라도 이해당사자 다수가 반대한다면 펀드는 하지 말아야 한다. 사립학교의 자율성에는 해당 학교 학생들의 의사도 반영되어 있어야 하니까. 그렇다면 '펀드 감시'가 아니라 '펀드 반대'를 해야 할 일이다. 그게 아니라면, 펀드로 폭싹 망해야 '아 쒸, 이젠 좀 하지 말자'는 소리가 겨우 나오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방법에는 크게 두 갈래가 있는 것 같다. 공공성, 민주성과는 거리가 먼 데다가 기껏 펀드질이나 해대는 사립대엔 지원을 하지 말자고 전사회적 운동을 벌이거나, 캠퍼스운동으로는 우리 등록금 가지고 펀드하지 말라고 좀 더 강력하게 주문하거나. 이외에는 허무한 결말 또는 예상치 못한 여론형성을 초래하는 길이 있을 뿐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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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운동의 차이에 관한 대착각

Forum | 2008. 9. 23. 17:48 | Posted by 김수민
내가 올해 들었던 가장 최악의 소리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정치는 운동이 아니라서... 어쩌구 저쩌구 주절주절"

한마디로
"정치는 현실이고 타협이니 정당은 게걸스럽게 하는 거다..."
뭐 이 따위 레퍼토리 되겠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이들과는 정반대로

정치는 필사즉생이고
운동은 생존도모라고
생각한다.

설명을 하고 납득시켜야 할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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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강제이수제도에 끝내 무릎 꿇다

Forum | 2008. 9. 22. 15:49 | Posted by 김수민

3년만에 출석을 했다. 수강신청을 하긴 했지만 들어가는 데 20일이 걸린 셈이다. 어쩐지 오늘은 오르간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찬송가를 부르는 순서도 없었다. 벽에 걸린 십자가는 훨씬 더 두드러졌지만. 교목실 교수들 없이 학생들 네명이 등장했다. 이어 상영된 동영상은 오늘 현정화 선수가 등장하여 대화의 시간을 가진다는 걸 알려 주었다.

'닫힌 사회'의 모범생들은 "학교 들어올 때 채플을 한다는 걸 모르고 들어 왔냐?"는 소리를 해댔다. 나는 2001년 1학기부터 2005년 2학기까지 중간의 휴학 3년을 빼고 세번의 채플을 이수해 왔다. 그리고 나는 모든 학생들에게 채플이수조건을 강제로 부여하는 처사에 반대하였고, 그 이후부터 채플을 듣지 않았다. 내 소속집단이 어디든 틀렸다고 생각하는 제도에 대해서는 시정을 요구할 권리가 내게 있다. 유엔 헌장에도 대한민국 헌법에도 종교의 자유는 명시되어 있다. 교칙 어디에도 "채플을 보이콧하는 학생은 즉시 학교를 떠나야 한다"고 써 있지 않다. 그리고 학교측에서도 학생의 종교에 관계 없이 신입생을 뽑는다. '닫힌 사회의 모범생'들은 내 이런 재반박에 언제나 침묵해 왔다.

"기독교 학교에 들어왔으니 학교가 시키는대로 채플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은 되먹지 않은 말장난이다. 만일 하버드 대학처럼, 일본의 도시샤 대학처럼, 채플이 자율화한다면 그렇게 떠드는 인간들은 채플에 참석할 것인가? 개새꺄, 솔직하게 말하라고. 졸업이 하고 싶어서 어쩔 수 없이 그렇다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미 그리 밝히고 있다. 그런 학생들은 채플에 따분해 하고 교목실은 그런 학생들을 달래고 얼를 방책을 찾는다.

그런 가운데 절충점에 세워진 채플에 대해 진짜 종교인들은 비종교적이라고 느낀다. 개신교인 가운데서도 채플자율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종교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물론 비교인들까지 억지로 끌어들인 채플이 세레모니로서의 가치를 잃어가기 때문이다. 학교측에서는 이상한 논리를 들이민다. 채플은 종교행사이지만 예배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치자. 모든 학생들에게 강제로 X를 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명제에서, X가 종교행사든 예배든 달라지는 건 없다.


더 웃긴 건 "채플이 예배야?"라고 떠들어 제끼는, 개신교인은 아니면서 채플강제이수의 하수인이 된 학생들의 반문이다. 채플은 순우리말 아니니 영어사전 뒤져가며 한번 찾아보시길 바란다.


나는 채플 필참을 어떠한 방식으로도 합리화할 수 없었고, 그래서 대강당을 박차고 일어났던 것이다. '운동'이 아니라 내 '태도'였다. 운동으로 이어가려 했지만 참 버거웠다. 채플을 대놓고 보이콧하는 학생은 학내에서 두명. 그 두명이 하는 일에도 한계가 있었다. 둘은 다른 일도 하고 있었던 데다가, 채플자율화라는 캠페인은 이슈의 성격상 정기적이고 꾸준하게 펼쳐지기는 힘들었다. 두명의 학생 가운데 하나였던 나는 다른 학생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친구는 학생운동단위 쪽에 채플자율화에 동참하도록 강하게 권유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나는 꿈은 일찍 깨는 것이 좋다 쪽이었고. 그 친구라고 해서 자기 의견의 실현가능성을 믿지는 않았다. 그저 이야기라도 해보고 공식적으로 거절당하자는 얘기였다. 나는 그럴 가치도 없다고 판단되었다. (이 친구는 먼저 채플에 들어가게끔 내가 설득했다.)


운동이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학교측이 태도를 바꿀 공산은 제로였다. 사법부는 보수적이었고, 입법부에 기대할 수도 없었다. 학내의 대중운동은 잠꼬대 같은 일. 나는 처음부터 승산 때문에 보이콧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당국의 처사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따름이다.

학교에는 나처럼 생각하는 학생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 둘이 기억에 남는다. 한명은 신학과 학생이었고, 대광중학교 시절 류상태 목사(강의석 사건 당시 대광고 교목으로서 강의석을 지지했던)의 제자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채플에 깔린 자본의 논리와 그 증거를 일러 주었다. 또 한명은 여호와의 증인. 졸업 직전에 다국적 회사에 취직하긴 했으나 채플을 하나도 패스하지 못해 걱정이라며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오늘 대강당으로 들어가면서 그분 생각이 가장 많이 났다.

나는 채플 보이콧을 시작하고 나서 부모님에게 한번도 압력을 받은 바 없다. 반대도 찬성도 들은 바 없다. 어머니는 "그래"라고만 했고, 아버지는 내게 직접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부모님에게 지는 쪽을 선택했다. 내가 거의 내 돈으로 등록금을 내고 학교에 다녔다면 진즉에 학교를 그만뒀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에 빌붙어 다닌 학교를 마음대로 그만두지 못했다. 내 돈은 내가 우습게 보면 되지만, 부모님 돈은, '남'의 돈은 우습게 볼 수가 없다. 더욱이 부모님은 집안형편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분들이었다. 이런 식으로 상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껏 살면서 부모님과 의견이 충돌할 때, 나는 언제나 내 뜻대로 했다. 이명박의 측근인 아버지가 내 야당 짓거리에 간섭하지 않는 것도 그런 과정의 결과다. 대학에 들어서면서 나는 자유가 되었다. 부모님은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쯤의 모토를 지켰다. 이제 나는 부모님이 나를 위해 '폭력적 종교교육을 불사하는 사립대학'에 쏟아부은 돈이 아까워 채플에 들어가고자 한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지는 알 수가 없다. 이미 10학기째 다니고 있거니와 강의실 안에서 쌓은 것은 빈약하고, 그나마 내가 가진 능력은 대학과는 별 상관 없이 결정되었다. 그냥 졸업할 때 마음 편한 부모님을 모시고 학사복이나 입혀드리고 싶다. 어차피 그 이후의 내 인생은 내 마음이다.

오늘은 교목실 인사들이 보이지 않아 굴욕감이 덜했지만, 위로 아래로 옆으로 봐도 가소롭기 그지 없는 폭력적 제도에 무릎꿇은 이 낭패감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제가 주입받은 걸 절대 진리로 알며 말만 '글로벌'이지 철저히 한국식 근본주의 기독교에 젖어왔던 인간들과, 개신교인도 아니고 학교에서 시키는대로 하는 주제에 무슨 대단한 논리를 가진 양 채플강제이수제도를 옹호하던 인간들과 같은 학교를 다녔다는 비참한 사실도 기억할 것이다. 그 씨방새, 개새끼들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나중에 사회 어디선가에서 나를 마주쳤을 때 나더러 "동문"이라고 부르는 패악질 따윈 하지 마라. 턱쪼가리를 날려 버릴 테니까. 
 
채플 시간에 주다스 프리스트가 왔으면 좋겠다. 프리스트는 프리스트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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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경향신문>은 '국가정체성을 묻는다'라는 특집의 세번째 기사로 '자유주의'를 다루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8211908045&code=210000). 한국에서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가 경합하고 있고, 자유주의는 반공주의나 시장주의의 맥락을 따라 굴절되었음을 잘 소개하고 있는 기사다. 이 기사는 그러나 도저히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여러 부류의 지식인들을 자유주의라는 한울타리에 넣어버리는 우를 범하기도 하였다.


자유주의라는 개념은 본디 폭넓은 해석이 가능하고 쓰임새가 헤프지만, 이쪽 저편을 다 자유주의자로 칭하게 되면 자유주의라는 말은 아예 무용해진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라는 말은 사실상 폐기되거나, 또는 매우 엄밀한 의미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경향의 기사처럼 자유주의의 여러 종류를 들어주는, 이를테면 박노자와 복거일을 '두 자유주의자', '다른 자유주의'로 가리킨 것은 또다른 오해를 분만할 공산을 한껏 높여준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8211859305&code=210000). 공통점이 희박한 사람들을 각기 다른 수식을 붙여가면서 굳이 엮어야 했을까.


우선, 복거일이나 공병호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그들은 박정희시대에 긍정적이다. 박정희정권이 훨씬 악독한 독재정권인 김일성정권으로부터 자유 대한을 수호했다는 취지에서다. '나쁜 자를 더 나쁜자로부터 지켜는 것이 자유주의자의 임무다'라는 복거일의 지론이 가장 돋보이는 대목이다. 나는 박정희정권보다 김일성정권이 더 독재적이라는 데 대체로 공감한다. 김일성정권으로부터 박정희정권을 지켜줄 수도 있다고 치자. 그렇지만 복거일 등은 박정희가 억누른 자유를 박정희로부터 지켜내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중에 얻을 자유를 빌미로 현재의 자유를 유보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들이 군사독재를 방어하며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건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정체도 불분명한 '국가(체제)의 자유'로, 개인의 생명보다 민족의 생명이 더 중하다는 황장엽의 사유와 동형구조를 가지고 있다.


정치학자 린츠의 발명 이래 쓰이는 권위주의-전체주의의 분류를 응용하자면, 박정희정권은 권위주의이고 김일성정권은 전체주의다. 독재들의 성격을 분별하는 기초적 잣대로써 린츠의 학설은 유용하다. 그러나 '뉴라이트'가 늘상 되내이듯 권위주의가 그나마 전체주의보다 낫다는 결론으로 치닫는 순간, 그것은 권위주의에 대한 역사적 옹호로 전락한다. 자유주의자로서 써먹을 수 있는 논리가 아니다.


항간에서는 복거일, 공병호가 정부의 경제적 간섭을 존중하는 (칼 포퍼적) 자유주의자(liberalist)는 아닐지라도 (하이에크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지상주의자(libertarian)라는 점을 인정하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개념과 용어의 사치다. 자유지상주의자의 길이 권위주의자나 보수주의자와 다르다면, 정치적으로도 국가의 간섭을 극력 배제해야 하고, 박정희의 정치적 독재를 가차 없이 비난해야 마땅하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박정희를 옹호할 수 없을 것이다. 복거일과 공병호, 뉴라이트 등등은 조갑제 같은 국가주의자들과는 다르게 재벌의 능동성에 더 비중을 두는 입장이지만, 재벌이 누린 자율성도 국가가 부여하였으며 독재정권기의 경제성장은 명백히 국가주도형 개발독재에 따라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보적인, 그리고 경제적 측면보다는 사상적, 정치적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진중권, 박노자, 고종석 등은 자유주의자일까? 박노자는 경향과의 인터뷰에서 "사회주의의 기본 원칙은 인간의 해방과 진정한 자유의 실천이므로 저도 ‘광의의 자유주의자’입니다. 궁극적으로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의 기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밝혔다. 자유주의자이면서도 사회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근거로 그를 자유주의자라 지명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박노자가 언급한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자도 중시하는 자유주의이자 사회주의자가 아닌자도 얼마간 또는 전적으로 따라야 할 자유주의이다. 거기 기초해 자유주의자를 가려낸다면 극단주의자와 교조주의자들을 뺀 좌우의 모두가 자유주의자로 지목되어야 할 것이다.


진중권의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는 한국 자유주의의 명랑한 성취이기는 하나, 저자 자신이 자유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진중권은 자칭 자유주의자들에게 '영업의 자유'만을 떠들지 말라고 일갈하면서, 사상적이고 정치적인 자유주의를 사회적 '상식'으로 심으려는 노력을 기울여왔을 따름이다.


특집 기사에서 자유주의자로 거명된 또다른 인물들, 강준만, 고종석, 최장집의 경우, 상대적으로 자유주의자의 면모가 짙기는 하나 이들도 노무현정부 5년동안 민주정부의 신자유주의와 그로 인한 빈부격차의 심화를 겪으며 좌파 쪽으로, 사회민주주의 쪽으로, 다소 사회주의적으로 기울었다. 고종석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떤 자유주의자는 보수주의자에 가깝고, 또다른 자유주의자는 사회민주주의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은 명백히 후자이고, 나아가서는 자유주의자에서 탈피해 사회민주주의자가 되어가는 편이다. 그들은 그럼으로써 자연스레 자유주의라는 스펙트럼 자체를 형해화시킨다. 복거일, 공병호 등 역시, 비록 반대편에서지만, 같은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절대권력의 대항마로 등장한 자유주의는 자유의 확산과 함께 독자적인 이념으로서의 생명력이 되레 줄어드는 아이러니한 귀결을 맞이한다. 신체, 사상, 집회, 결사, 언론, 프라이버시 등의 자유가 보편화된 세상에서, '자유'에 관한 논쟁은 경제적인 자유, 그러니까 사유재산권과 생존권을 둘러싼 투쟁에 국한되어가며 치밀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다. 


현재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자유주의운동도 사회복지의 요구 및 그것을 가능케하는 사상과 언론의 자유로부터, 사유재산권을 사수하려는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다. 뉴라이트의 '뉴'는 그저 '수구'라는 공세에 포위된 조갑제, 김용갑 등과 자신을 차별화하려는 홍보전략이고, 그들의 자유주의는 경향이 지적한대로 사상적이고 정치적인 자유와는 거리가 있다. 특집기사는 그러한 사이비 자유주의들이, 자유주의자는 물론 참다운 사회주의자나 진정한 보수주의자까지도 견지해야 할 가치를 버리고 배반하는 현실을 분석하는 방향성을 띠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복거일, 공병호 등이 자유주의자가 아님을 명토박고, 박노자, 진중권 등을 자유주의자는 아니지만 누구보다 '리버럴'한 진보 지식인으로 등장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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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주와 KBS노조의 진실 (펌)

Forum | 2008. 8. 8. 14:48 | Posted by 김수민
나의 친우인 '참이슬'이 쓴 글이다.
 


정연주 사장은 ‘노무현 낙하산 인사’로 사장이 된 사람이 아닙니다.


 2003년 3월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다음 노무현 선대본 고문을 맡았던 서동구씨를 사장으로 임명했을 때, 당시 제9대 KBS 노조 김영삼 위원장 이하 노조원들은 ‘낙하산 인사’를 반대하며 삭발 투쟁, 출근 저지 투쟁을 벌였습니다. 8일 간의 투쟁을 통해 서동구 사장 임명은 철회되었지요. 그 다음에 노조와 시민사회단체 인사들이 ‘사장공모추진위원회’(사추위)를 구성하였고, 이 사추위에서 선임하여 이사회에서 뽑은 사장이 바로 정연주 사장입니다.

 따라서 정연주 현 KBS 사장은 민주노조의 ‘낙하산 인사 반대’ 투쟁을 통해 시민사회의 힘으로 선임된 것입니다. 서동구 사장을 임명하려던 노무현 정권의 의도를 분쇄한 후 선임된 사장을 어떻게 ‘노무현 낙하산 인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KBS 노조라고 해서 다 같은 민주 노조가 아닙니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노조 집행부를 맡았던 제9대 김영삼 위원장은 분명히 1990년대 서기원 사장 퇴진 투쟁 등 방송 민주화 운동의 맥을 이었던 세력이었습니다. 김영삼 위원장이 민주노조의 맥을 이었다는 사실은 2003년 서동구 사장 임명 저지 투쟁을 보아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지만 KBS 노조 제10대 진종철 위원장, 제11대 박승규 위원장은 1990년대부터 전개된 방송 민주화 운동에 함께 한 민주노조의 맥을 이은 세력이 아닙니다. 2000년 “운동권 성폭력을 뿌리 뽑기 위한 100인 위원회”에서 성추행 사건으로 규탄받은 강철구 전 KBS 노조 부위원장 계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요. 이들은 ‘방송 민주화’보다는 ‘철밥통 지키기’와 ‘임금인상’에 더 관심을 가지는 어용 노조 세력입니다. 노동운동이 썩어가면서 대기업 정규직 노조에 흔히 나타나는 세력이라고 할 수 있지요.

 현재 KBS 노조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승규 집행부를 민주노조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박승규 집행부는 구조조정으로 자기네 철밥통이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는 기술직 노조원과 지방 방송국 노조원들의 힘으로 당선된 세력입니다. 이들은 방송 민주화나 방송의 정치적 독립성, 공정한 방송 보도에 아무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네 철밥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낙하산 사장’ 임명도 반길 그런 세력들입니다.

 현 KBS 노조 박승규 집행부는 자신들을 ‘어용노조’라고 비판하는 네티즌들과 시민들에게 “어용노조는 공정방송노조(위원장: 윤명식)이고, 우리는 민주노조입니다”라는 식으로 슬쩍 정체를 위장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공정방송노조(위원장: 윤명식)는 ‘올드라이트’ 노동조합이고, 박승규 집행부의 KBS 노조는 ‘뉴라이트’ 노동조합입니다.

 공정방송노조는 한나라당 성향의 KBS 간부 윤명식이 부장급 이상 사원들을 조직 대상으로 만든 노동조합입니다. 정연주 사장의 팀제 실시로 철밥통이 위협받는 데 불안을 느낀 한나라당 성향의 간부사원들을 규합하여 KBS 조직을 장악하기 위해 만든 노조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러한 윤명식이 한나라당의 정권 장악을 위해 KBS 조직 장악이 필요하다고 강동순 전 방송위 상임위원(2006-2008년 사이 한나라당 추천 방송위 상임위원)과 술자리에서 밀담을 나누었던 사실은 미디어오늘(www.mediatoday.co.kr)에 올라 있는 ‘강동순 녹취록’에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고 인터넷에서도 널리 퍼져 있으니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이 ‘강동순 녹취록’에서 윤명식이 한나라당의 KBS 조직 장악을 위해 진종철 위원장 후임으로 박승규를 노조 위원장에 앉혀야 한다고 강동순 전 방송위 상임위원에게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결국 윤명식이나 박승규나 ‘그 놈이 그놈’인, 한나라당 성향의 어용 노조 세력인 것이지요.

 그리고 KBS 노조 박승규 집행부가 네티즌들이 ‘공영방송 KBS 지키기’를 위해 촛불시위에 나선 것을 “일부 사내 정치세력의 사주”에 의해 벌어진 것처럼 왜곡하고 있는데요. 실소를 금치 않을 수 없습니다. “촛불시위의 배후에는 친북 주사파가 있다”고 떠들어 댄 조중동과 영락없이 똑같은 논리이니 말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네티즌들은 다음 아고라에서 자발적인 토론과 논의를 통해 ‘공영방송 KBS 지키기’를 위한 촛불시위에 나섰습니다. 6월 11일부터 이명박 정권이 정연주 사장을 몰아내기 위한 ‘KBS 표적 감사’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자발적으로 촛불시위에 동참한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중동과 다를 바 없는 ‘배후론’으로 네티즌들의 촛불시위를 왜곡하고 폄하하는 KBS 노동조합을 어떻게 민주노조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네티즌들이 ‘정연주 사장 지키기’에 나서는 것을 “‘노빠’들의 정연주 구하기”로 폄하하고 있는데요. 이 또한 매우 치졸하고 악의적인 음해 모략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네티즌들이 ‘정연주 사장 지키기’에 나서는 것은, 공영방송 독립성을 보장하고 ‘낙하산 인사’를 저지하기 위해 KBS 사장의 남은 임기를 보장하라는 취지에서 그러는 것입니다. 공영방송 사장 임기제가 방송의 정치적 독립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인데, 이를 이명박 정권이 훼손하면서 ‘땡박뉴스’를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비판하는 거에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연주=친노인사’로 규정한 후, ‘정연주 지키기=노빠들의 정연주 구하기’로 낙인찍어서야 되겠습니까?

 정연주 사장이 KBS에 온 다음 ‘시사투나잇’이나 ‘미디어포커스’ 같은 공정하고 민주적인 방송 프로그램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이강택 PD 같은 분이 2006년 KBS 스페셜에서 “광우병의 진실”을 파헤치는 프로그램을 방송할 수 있었던 것도 방송의 정치적 독립성과 민주화가 보장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그러나 KBS 노조 박승규 집행부는 이러한 KBS의 프로그램 편성을 ‘친북 좌파 코드방송’이라 주장하는 조중동의 논리를 그대로 베껴 정연주 사장을 비난하고 매도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정연주 사장의 ‘친북좌파 코드방송’의 실체가 ‘시사투나잇’이나 ‘미디어포커스’ 같은 좋은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방영한다는 것이지요.

 아마 어용 KBS 노조에게는 방송의 민주화와 공공성보다는 산골짜기 송신소에서 하는 일 없이 놀고 먹으면서도 연봉 1억원이 보장되는 ‘철밥통’이 더 소중한가 봅니다.

 KBS가 80년대 ‘땡전뉴스’와 같이 이명박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공영방송 지키기’를 위한 촛불 네티즌들의 행동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민의 힘으로 KBS를 지키겠다“는 네티즌들의 자발적인 행동을 “배후가 있다”라며 폄하하며 한 편으로는 호도하기 위해 온갖 얕은 꼼수를 쓰는 KBS 뉴라이트 노조의 본질을 똑똑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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