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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수라는 운동가

史의 찬미 | 2009. 3. 24. 01:07 | Posted by 김수민
1970년대 학생운동사를 이야기하며 그를 빼놓는다면 그것은 정확한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그를 이야기하지 않고 1970년대 학생운동을 논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는 모든 것이며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니다.
당대의 학생운동은 그를 통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그의 활동반경은 무변광대했다. (...) 그런데 그것뿐이다. 더 이상 그의 이름은 오르내리지 않는다. 정작 따지고 들면 그가 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사건에도 직접 연루되는 법이 없다. 그래서 더욱 존재가 신비롭고 행적이 전설적이다.
그가 4년이나 늦게 대학에 진학한 것은 생계 때문이었다. (...) 대학 진학을 못하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던 시절, 그는 군대조차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징집 영장을 받은 그는 병무청을 찾아가 "집안 사정으로 기피를 해야겠다"고 말하고는 소집에 불응했다. 
장선우(영화감독, 본명 장민철, 고고인류학과 71학번)로 하여금 10.2데모에 가담토록 움직인 사람도 그였다. (...) 하지만 10.2데모로 구속 제적된 장선우와 달리 그를 움직인 신동수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는다.

"참고인으로 불려다닐 때 동수형이 그걸 알고 미리 몇 시에 어느 다방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해 놓았다. 잡혀간 나는 그걸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상황까지 궤뚫고 있었다. 그가 정확히 약속 시간에 다방에 전화를 걸어 나를 바꿔달라고 하면 기관원들은 허탕을 치지만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게 확인되는 것이다."
 
그의 숨은 행적은 더 있다. 그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기나긴 도피생활을 하며 그
와중에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를 숨겼다.
1978년 완성된 김민기의 노래굿 '공장의 불빛'의 실질적인 제작자도 그다. 1980년대 원혜영이 일으킨 '풀무원'의 성공 스토리 뒤에도 그의 아이디어와 노력이 숨어 있다

스스로는 치열하게 학생운동을 한 것도,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을 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냥 어두운 시절을 좌표 없이 표류해왔을 뿐이라는 얘기다. 그는 "이런저런 인연으로 후배들한테 코 꿰여 같이 좀 다녔을 뿐"이라며 최근에는 "집안이 어려워 특별한 인생설계 없이 도피적으로 학생운동에 관여한 측면도 있다"는 말도 했다.

"그를 보면 호치민이 생각난다. (...) 홑점퍼 하나를 몇 년씩 입으며 프롤레타리아적 삶을 사는 사람이다. (...) 그의 장점 중 하나가 공연이든 선언문이든 비평문이든 거기에 대한 미학적 조예가 깊다는 점이었다. 그의 말을 들으면 자극이 되고 혼란스러운 것이 잘 정리됐다.(...)" (장선우)
그는 지금도 드러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1980년대 풀무원 사업에 참여했다가 식품업을 시작한 그는 지금껏 그 일을 하고 있다. 평범한 생활인으로 돌아간 것일까. 좀처럼 인터뷰에 응하지 않는 그가 겨우 내놓는 대답 또한 그의 학생운동 전력처럼 난해하다. "농업 쪽에 제대로 기여했으면 했는데, 장사가 워낙 힘드니까..."
 신동호 (2007), <70년대 캠퍼스> 1권(환경재단 도요새)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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