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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민족주의자인가 사회주의자인가

史의 찬미 | 2008. 9. 6. 02:22 | Posted by 김수민
지난 봄 <일제시기정치사상사특강> 수업 중에 썼던 글이다.

 

성의 있는 김원봉 발제문 잘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발제자께서는 의열단의 노선변화를 설명하시면서 20개조 정강 정책을 창당 당시의 '공약 10조'와 견주어 좌경화 되었다고 평가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정치경제적 사상이 담긴 20개조 정강 정책을 행동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공약 10조'와 대조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발제문 내용만으로는 사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잘 유추하기가 어렵습니다.


김원봉에 대해서는 그가 얼마나 사회주의적이고 또 민족주의자인가,가 논의가 되는 것 같습니다. 제 예상으로는 이번 수업시간에도 그랬을 것 같은데요. 여기에 관해 준거틀을 마련하는 데 있어, 강의 초반에도 교수님께서 거론하신 바 있지만 개념정리나 구획기준을 한번 더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공산주의자가 아니면서 민족해방투쟁을 하는 이들을 민족주의자라고 통칭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좌파인데 단계론적으로 반봉건 부르조아 민주주의혁명 노선과 함께 민족독립을 추구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다만 공산주의자라는 공격에 정치적으로 대비한 결과로 '알고 보면 민족주의자(민족적이다)'라는 변명 또는 해명이 나왔던 사정은 있을 것 같지만요. 온건사회주의자와 진보적 민족주의를 구별하지 않으면 남는 건 '공산주의자냐, 민족주의자냐'는 거친 질문 뿐일 것 같습니다.


김원봉의 행적이나 타 정파와의 갈등을 보면 마르크스주의자나 공산주의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대신, '사회민주주의자'라고 적극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비-공산계열의 온건한) 사회주의자'라는 평가는 가능한 것 같습니다. 그의 지인이었다는 황용주 씨는 김원봉이 이런 말을 했었다고 증언합니다. "(...) 무산대중을 해방시키자는 데는 이의가 없다. 다만 현실적으로 무리가 따른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봉건적 구질서를 고집할 수 없다. 불평등한 계급사회는 어디까지나 타파되어야 한다." 당면과제는 반봉건 혁명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계급사회 타파를 지향하고 있는 김원봉의 지향이 드러나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건 하나의 예이겠지요.


계급독재를 지향하는 코민테른형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도 서구나 북구의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나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계급사회의 폐단을 없애 나가고 소유를 사회화하는 사회주의자가 있을 것 같은데요. 일단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김원봉은 그에 비슷한 것 같아요.


나중에 여운형이 있던 조선인민당에 참여하는 이여성과 조선노동공제회에서 노동운동의 서막을 연 김약수 등이 그의 친구였다는 것도 눈여겨 볼 만합니다. 셋은 함께 중앙학교를 다녔고 3.1운동 반년 전에 중국 남경으로 유학도 가지 않았습니까. 또 한편으로 중국으로 건너온 안광천과 1930년 전후에 교류한 것도 의미심장한 과정입니다.


물론 그의 노선은 이여성, 김약수 등과도 다른 부분이 있었고 여기서도 두드러지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운형이 신한청년당을 구성하고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로 보냈을 때 김원봉 등은 외국인에게 호소하여 동적적 처분을 기대하는 것을 못 마땅해 했습니다. '외교를 통한 독립노선'을 강하게 부정한 것이 '비-코민테른 사회주의', '민족협동전선'과 함께 그의 특성으로 꼽힐 수 있는 대목이지요. 이여성, 김약수가 3.1운동을 맞아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도 김원봉은 해외에서의 무장투쟁에 중점을 두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쑨원의 권유를 받아들여 기존의 의열단 노선을 접으면서까지 '폭력투쟁'을 '무장항쟁'으로 승화시키기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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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국 재판기록 요약

史의 찬미 | 2008. 8. 23. 00:00 | Posted by 김수민

미국측 기밀문서를 통해 실제 스파이였음이 드러나고 있는 이강국의 재판기록을 요약해 봤습니다. 물론 북조선측의 문서이고 박헌영간첩설의 신빙성이 떨어지는지라, 상당수 또는 전부 또는 일부가 조작되었을 개연성을 고려하고 읽으셔야 할 듯하군요.

어떤 역사학자들도, 제 개인적으로도 결론을 잘 못 내리고 있습니다.

궁금해 하는 지인들이 있어 노가다하며(ㅜ.ㅡ) 요약했습니다.

심지연 교수가 집필한 <이강국 연구>의 마지막 부분인 474~489쪽에 '부록 3: 이강국 관련자료'를 펴시면 전문을 접할 수 있습니다.



* 증인 리강국에 대한 신문(리강국의 진술)

- 1945년 11월 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 소집에서, 하지의 지령을 받은 박헌영이 이를 강제로 해산하려고 했음.
- 1946년 9월 박헌영의 지시를 받고 미국 500만 달라 강제 차관 반대성명서를 발표한 다음 체포령이 내려지면서 입북 지령을 받음.
- 박헌영의 비호로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직에서 간첩활동.
- 박헌영의 도움으로 비밀정보 입수하여 뻐트(미군 24사단 헌병사령관)에게 제공.
- 1950년 봄, 박헌영이 입북시킨 미국 간첩 현 애리스와 관계.

* 기소장

- 그는 1935년 미국 뉴욕에서 정탐부원인 크로리에 의해 간첩으로 고용.
- 크로리와 련계를 가지려 김수임과 련애. 김수임을 반도호텔에 취직시켜 뻐트에 접근.
- 1946년 6월 뻐트에게 협력할 것을 약속, 그후 월북하여 그의 간첩으로 가담.
- 월북 후 리강국은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으로서 공화국에 대한 각 분야의 중요 정보를 수집, 제공.
- 1950년 5월 미국에서 직접 파견된 간첩 현 애리스, 리 위리암을 평양 자택에서 두차례 만나 밀담.
- 노블의 지시에 의해 활동한 리승엽과 련결 가지기 위해 노력. 리승엽에게 김수임을 당에서 리용할 것을 소개.
- 리승엽 도당의 간첩활동에 가담한 리강국은 1952년 10월까지 수집된 군사기밀을 비롯, 4차에 걸쳐 당, 정부의 중요 비밀을 수집, 림화를 통하여 리승엽에게 제공.
- 림화는 자기 진술에서 리강국과 리승엽 간의 련락에 대해 리승엽 및 공모자들의 정체를 음폐하려는 목적이었다고 진술.

* 피심자 각 개인의 죄명

- 그(리강국)는 공산주의의 탈락자. 1935년 독일 백림대학을 마치고 조선에 귀국할 때 미국 정탐기관의 크로리를 만나 범죄적 련계를 가질 것을 밀약.
- 1946년 9월 간첩활동 서약. 1947년 1월부터 북조선 외무국장 직위 잠입. 1948년 8월까지 5차에 걸쳐 비밀을 수집하여 미국 정탐기관에 제공. 1950년 5월경에는 미국 간첩 현 에리스, 리 윌리암과 간첩행위 감행을 약속.
- 1951년 7월부터는 리승엽의 지도 하에 있는 간첩망과 련계, 1952년 10월까지 4차에 걸쳐 공화국의 군사 정치적 비밀을 수집 제공.
- 조선을 미제에 예속시키고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려는 목적에서 정치적 모략활동 감행.
(리강국의 직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무역성 조선 일반 제푸 수입상사 전 사장'으로 표기되어 있음- 간추린이 주)

* 공판심리

(경력을 말하라는 재판장의 주문)
- 저(리강국)는 진정한 맑스 레닌주의자가 아니며, 호기심과 공명심에서 맑스 레닌주의를 연구.
- 대학에서 공부한 것이 독일 계통이고 독일은 사회주의운동이 강하였기에 독일로 류학.
- 1932년 재독 공산주의자에게 지도받고, 프로레타리아 과학동맹 가담. 혁명적 아세아인 회의 참가. 1932년 10월 독일공산당 가입, 일본인 그루빠 책임자. 1935년까지 공산주의 실천활동 전개 후 학비관계와 본국에서의 운동을 이유로 11월 말 귀국.
- 마야께 교수사건 관계자로 일경에 체포, 기소유예 석방. 처남이 경영하는 증권회사의 사무원으로 일함.

- 1936년 4월 리주하와 원산 적색노조와 관계를 맺음. 1938년 10워 원산사건이 발각되었는데 이때 저는 지하로 들어가야 했음에도 피신생활을 계속하다 동년 12월 체포.
- 1941년 5월까지 감옥생활하며 동지를 팔지 않음. 1941년 5월 예심 종결 당시 "공산주의 실천운동에서 손 뗀다. 그러나 맑스주의는 포기할 수 없다"는 전향문 작성. 보석 석방. 1941년 5월 출옥 후 다시 체포, 1942년 2년 징역, 5년간 집행 유예 판결, 석방.
- 1942년 5월부터 8.15까지 대화숙 회의에 참가나 신궁 참배하지 않음. 술, 마작으로 세워을 보냄. 변절은 했으나 협력은 말자고 맹세. 조준호의 경제적 원조로 부화한 생활하며 적극적 친일파가 되지 않음.

- 일제말기에는 최용달과 같이 해방 맞이 태세. 세계정세를 약간 알았기에 민주진영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점을 리해하고 8.15와 동시에 민주주의진영에 나섬. 려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사업에 참가, 박헌영의 공산당 조직에 참가. 속죄의 정신에서 민주주의를 위하여 열성 발휘. 
- 1945년 9월 인민공화국 참가, 1946년 2월 민전 사무국장, 1946년 9월 하지 정책 규탄선언 발표하여 체포령 내리자 박헌영의 지시로 입북. 입북 후 박헌영의 신변인으로서 1946년 10월부터 1947년초까지 사업. 1947년 북조선 외무국장, 1948년 9월부터 상업성 법규국장, 1950년 12월 이후 인민군 제69호 병원장, 1951년 11월부터 체포되기 전까지 무역성 일반 제품 수입상사 사장.


(미국 간첩 활동에 대한 질문)
- 저는 자원적인 미제의 주구. 불가피적으로 간첩으로 전락한 공동피소자들보다 더 악질적이라고 자인. 세계주의 영향으로 부르죠아적 자유주의사상 잔재가 농후하였기 때문에 미국을 높이 평가.
- 독일 류학시 만난 미국인 크로리는 조선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맑스주의에 동정적. 미국인 공산주의자라는 사람 2명까지 만나 담화.
- 귀국 후 일제의 탄압과 자신의 안일 위하여 운동을 적극적으로 못하고 미국인과의 련계도 맺지 못함.
- 해방 후 남조선이 미제에 강점되었으므로 더욱 미제와의 련계 희망. 적당한 기회가 없어 하지 뻐취(미군정 사령관)와는 공적인 관계만 맺음. 김수임의 반도호텔 취직에 동의. 김수임을 통해 헌병사령관 뻐트와 상면, 협력 약속.
- 미제가 획책한 좌우합작공작에 순응. 3당합당을 표면적으로 지지하면서 내막으로는 이 사업을 지연. 미국 간첩과 련계하였으나 표면상 미군정 정책을 규탄하여서 체포령이 내려짐. 김수임의 집에 숨었다가 박헌영의 지시로 입북.
- 입북 후 미제와의 련계 그리고 38선까지 헐하게 오기 위해 뻐트 만남. 뻐트는 체포령이 하지의 명령이어서 할 수 없었다고 하면서 입북한 뒤에도 협력하자며 요구. 1. 김수임을 민주진영과 련계를 지어줄 것 2. 미군이 이북에 잠입시키는 자들을 옹호하여 줄 것 3. 우리의 필요한 자료를 보내줄 것.


- 뻐트가 소개한 미국인 차로 서울에서 개성까지 와서 개성에서 최만용의 안내로 입북. 박헌영은 미국인 차를 타고 왔음을 말할 필요 없다고 일러둠. 입북 후 남조선 출신 불평분자들을 중심으로 친우 물색. 권오직, 한병옥, 장시우, 박승원, 림화 등과 친교.
- 1946년 10워 서득은에게 김수임 리용 권고. 1946년 12월 리승엽에게 김수임을 소개하는 방법 획책. 1947년 1월~1948년 5월 5차 정보 제공. 비서 신태희->김수임->빠트. '1947년 인민경제바런계획서', '쏘미공동위원회에 대한 쏘련측과 북조선측의 태도와 북조선인민위원회 기구표', '평양학원과 금강학원의 무장상태 훈련 등이 정규군과 같다는 세밀한 내용', '1947년 인민경제계획 실천 정형', '8.25 총선거를 위한 문건들과 간부 책벌 결정을 위시한 1948년도 북조선인민위원회 결정' 등 제공. 아울러 이외에 날조문건 2건. '쏘련군사령부의 간섭이 있다는 것', '화폐개혁으로 소시민들의 재산 강탈, 인민들의 불평이 많다는 것'.
- 1948년 8월 이후 정치적 실각으로 위축, 공작 중단. 1948년 미군 간첩 현 애리스와 리 윌리암 래방. 1950년 재차 방문하여 협력 요구. 그후 그들이 오지 않아 간첩 련계 맺지 못함.
- 1951년 6월 리승엽은 전달할 자료는 림화를 통해 달라고 말함. 전달자료가 간첩자료임을 직감, 응락. 리승엽에게 김수임을 소개한 후 리승엽은 김수임을 인입했다고 말한 바 있고, 1948년 8월 후 김수임으로부터 련락이 없어 리승엽과 김수임이 직접 련계를 맺는다고 생각했고, 리승엽이 신변을 주의하라는 충고를 준 일이 있었고, 리승엽이 저를 등용하려 노력한다는 점 때문.
- 리승엽의 요구가 그리 큰 기밀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 그런데 리승엽은 제가 김수임을 소개하기 전부터 미제의 간첩이었음. 때로 저는 리승엽을 김수임에게 소개했기 때문에 리승엽이가 간첩이 되었는가 고민.
- 자료는 림화가 취사하여 리승엽에게 제공케 함.


(피소자의 길과 실지 행동의 모순을 묻는 검사에게 리강국은 모순된다고 대답. 계급적 리해, 조선혁명이 아닌 류행식 맑스주의 조류에 인입하였고, 공명심 출세주의에 의해 활동을 했다고 밝힘. 박헌영의 테제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를 지지한 리유로는 변절적 기회주의적 이데올로기, 명확한 테제를 파악하지 못한 것, 박헌영과 협력하면 출세주의적 숙망이 달성될 것을 예견했다는 것을 듦. 테제의 내용이 반당적이고 기회주의적이고 소부르죠아 정당화하는 노선임을 알면서도 무조건 지지했다고 말함.)


(이어서 검사는 리승엽에게 림화를 통해 리강국의 간첩자료를 받았느냐고 묻고, 리승엽은 인정)
(리강국은 친한 녀자의 알선으로 미국 자동차를 타고 왔다는 것을 박헌영에게 보고했고, 어떤 녀자라는 질문에 당내에서 일반적으로 리용할 수 있는 녀자라고 대답하였다고 진술)


- 1951년 7월에 와서 비로소 리승엽이 간첩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았다.
- 저는 사상적으로 다른 피소자들보다 더 악질적이고, 해방 전부터 계속된 간첩이다. 국제간첩과 련계를 맺었다는 것을 승인함. 김수임의 소식은 들었고, 내용은 그가 1950년 미국 놈들에게 학살되었다는 것. 간첩자료는 한병옥, 장시우 등에게 제공받은 게 아니라 그들과의 담화과정에서 내가 수집한 것. 미제에게 제공하기 위해 리승엽에게 자료 넘김.
- 변호인 길병옥: 뻐트와 련계 맺고 남반부에서 정보자료 제공하였나?
  리강국: 그땐 없었다
- 변호인: 김수임을 리승엽에게 소개한 리유는?
  리강국: 뻐트의 요구대로 김수임과 남로당의 련결시키려.
  변호인: 신문 끝.


(재판장은 빠트에게 받은 임무를 입북하여 수행하였는지, 모략행위가 일상적이라는 기소사실을 승인하는지 물었고, 리강국은 승인. 리강국은 피소자의 정체를 묻는 질문에 '미제의 전형적 주구'라고 대답. 김수임은 처가 아니라 애인이라고 설명. 모략행동의 배경으로는 박헌영을 거론. 리승엽과 림화는 리강국의 진술에 이견이 없다고 밝히고 재판장은 30분간 휴정 선언)

* 국가 검사의 론고, 피소자 리강국에 대하여

"우선 그는 대지주의 출신이며"라고 시작되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하 생략. 위의 요약내용과 겹침.)

* 피소자 리강국에 대한 변호인 길병옥의 변론

(내용 생략)

변호인은 논고에 대한 반론이나 정상참작의 논거 제시 없이, 마치 논고를 발표하듯, 아니 검사보다 더 매서운 태도로 피소자들을 몰아붙였다.


* 리강국의 최후진술 (전문)

저는 조국과 인민을 배반한 극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당과 조국의 특별한 배려에 의하여 예심과 공판 심리를 통한 자기비판의 기회를 준 데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조국과 인민이 주는 벌을 감수하겟습니다.
죽기 전에 자기의 죄과를 인민 앞에 자비함으로써 옳은 사람이 되어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준 데 대하여 조국과 인민 앞에 다시금 감사를 드립니다.

공판문헌이 얼마나 사실이고 허구이건 간에, 이 지식인의 추락에 서글픔과 씁쓸함이 느껴진다.

* 판결

(생략)

* 주문

피소자 리강국에 대하여
형법 제68조에 사형, 형법 제76조 2항에 의하여 사형을 각각 량정하고 형법 제50조 1항에 의하여 형법 제68조의 사형에 처한다. 그에게 속하는 전부의 재산을 몰수한다.


:

박헌영 간첩설과 이강국 간첩설

史의 찬미 | 2008. 8. 18. 01:43 | Posted by 김수민

새내기 시절, 어떤 신문을 만들면서 대여섯살 많고 공부가 깊은 선배들이랑 어울려 놀았다. 하루는 술자리에서 두 선배가 논쟁을 벌였다. 지극히 점잖았지만 두사람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아슬아슬하게 상대방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이었는가'라는 주제였다. 한쪽은 재야사학계에서도 그 문제는 결론이 난 상태이며, '김 주석(상대방의 통일주의적 정치 성향을 배려한 호칭이었으리라)의 권좌는 피로 물들어 있다'고 단언했다. 다른 한쪽은 학내 NL 운동진영의 이론가로 꼽히는 형이었는데, 그는 박헌영의 집에서 무전기 등의 물품이 나왔다고 반박했다.

그때 나는 이것이 여전히 논쟁거리라는 사실에 다소 놀랐다. 나는 제로 베이스에서 이따금 박헌영 사건을 검토해 보기로 했다. 내가 살펴본 공판문헌은 박헌영의 모든 행적이 미국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북조선은 박헌영과 미국의 연관을 표가 나게 무리해서 꿰어 맞추었다. 소설로 쓰기에도 버거울 만한 조작이었다. 젊어서 선교사 언더운드를 만나서부터 스파이로 기용되었다니(여기서의 언더우드는 원두우가 아닌, 그의 아들 원한경을 가리킨다). 그런 방식으로 태연하게 1950년대 피의 숙청을 시작한 김일성 정권은 인혁당사건을 조작해낸 박정희 정권에게 스승으로 대접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나는 박헌영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남한 좌익의 정통성을 박헌영에게서 발견하려는 시도에도 공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영수로 있던 조선공산당 뿐만 아니라 조선인민당과 남조선신민당에서도 종파주의를 휘둘러 댐으로써 여운형이나 백남운의 입지를 축소시키고 결과적으로 좌익정당의 협동을 반쪽짜리로 만들었다. 남조선노동당은 좌익3당 각각의 다수파만을 모은 것이었고, 소수파들은 사회노동당을 만들고 그것은 근로인민당으로 이어진 뒤 다시 남북으로 흩어졌다. 10월봉기가 일어났을 때 박헌영은 정작 남한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남북을 다시 잇기 위해 북조선의 부수상으로서 무리하게 전쟁을 부추기고 밀어붙였다.

한데, 이러한 박헌영의 전쟁책임까지 변호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김일성이 박헌영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결과라는 것이다. 당연히 이는 진실이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의 진격으로 망명생활을 하던 도중, 김일성이 박헌영을 몰아세우며 잉크병을 벽에 집어던졌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박헌영 너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이야기렸다. 물론 김일성이 원래 반전파였던 것도 아니었지만, 전쟁 개시에 가장 공 들인 사람은 박헌영이다. 강정구 교수는 파문을 일으켰던 '통일전쟁' 발언을 하면서, 북조선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사회주의연합정권'이 들어섰으리라는 가정을 던진 바 있다. 아마 그런 정권이 태어났다면 박헌영이 가장 유리한 위치를 점했을 것이다. 남한에 있던 남로당 인맥을 되찾을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한국전쟁에서 '국토완정'의 꿈은 박살났고, 박헌영은 결국 김일성에게 졌다. 이로 인해 한국 좌파들 사이에서 박헌영에 대한 존경과 애틋함이 더 강해진 것 같다. 나는 어느 대학생 단체의 회의에 처음 나갔을 때, 박헌영 때문에 뒤풀이 술자리에서 약간의 곤경에 처했던 적이 있다. 박헌영에 대한 나의 비판이 일제 말기 지도적 위상에도 불구하고 똥짐지고 손수 일했던(벽돌공장에 숨어 살던 시절의 이야기인데, 그 같은 인텔리가 과연 일을 했을지, 또는 해도 제대로 했을지는 나는 좀 의문이다) 그의 헌신을 간과하고 있으며, '당신이 박헌영보다 존경한다는 여운형은 쓸모가 없어 은도끼라는 별명도 있지 않았냐'는 요지였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박헌영에 대한 호평이 근근이 전해 내려져오던 전설에도 있었지만, 남한으로 귀순한 그의 측근 박갑동에 상당히 기대고 있었다는 점이다. 박갑동이 옛날 신문에 썼던 연재는 상당히 반공주의적이었는데 이를 두고 당대의 상황 때문에 불가피한 처사였다고 이해해주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박갑동은 이철승과의 대담에서 해방정국기를 정리하면서 사정없이 밀리는가 하면, 심지어 김일성 가짜설을 뒷받침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그때도 독재정권기였던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그것까지 이해해줄 수는 없다.  나는 박헌영의 추앙자들에게 박갑동 씨의 진술에 의존하지 말 것을 언제나 당부하고는 한다.

그런데 내가 박헌영의 추앙자들과 대화하면서, 입밖에 반쯤만 끄집어내던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남조선노동당 사건이 완벽한 조작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박헌영간첩설은 조작이겠지만, 이승엽이나 이강국을 향한 의심까지 거두어들일 수는 없다. 재미 사학자 방선주 씨의 노력으로 공개된 비밀문서에서 이강국이 CIC(미군방첩대) 요원이라는 새로운 사실도 드러났던 차였다. 거칠게 말해 나는 남로당계열이 예의 버릇대로 천방지축 잘난체하다가 북조선에서 호되게 당했다고, 또한 그중에서 실제 미국간첩도 있었고 덕분에 더 꼴사나워졌다고 생각한다.

박헌영의 추앙자들은 이재유, 이현상, 이강국의 추앙자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 말기 노동현장의 활동가들과 권력을 잡으며 승승장구하던 남로당계 인텔리그룹은, 설령 그 둘의 노선이 같다고 치더라도 생활이나 사고의 방식에서 나오는 차이를 준거로 다소 분리해서 바라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이강국과 박헌영도 분리되어야 할 것 같다. AP통신은 여간첩으로 마녀사냥 당한 김수임의 아들, 김원일이 꾸준히 어머니의 누명을 벗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면서 이강국이 CIA의 스파이였음도, 그러니까 이강국이 김수임을 북조선의 간첩이 아닌 미국과의 연결고리로서 이용했음도 더욱 또렷해지는 것 같다.

김일성이 정당하게 스파이를 처단했을 뿐이라고 믿는 이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강국이 간첩이라는 것이 박헌영이 간첩이라는 것을 곧바로 입증하지는 않는다. 박헌영 간첩설을 거두든지 제대로 된 실증을 하든지 할 일이다. 일설에는 김일성이 죽기 얼마 전 박헌영의 복권을 주문한 적도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에 관해서도 입장표명이 필요할 것이다. 남로당계열에 지나치게 편향된 쪽도 조금 더 사려깊은 역사인식을 가져야 한다. 북조선에서 불운하게 스러진 사회주의자들을 기리고 싶다면, 남로당계열 말고도 김원봉이나 옌안파도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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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의 국호는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당시 Union of Burma였다. 1989년부터 쓰인 Myanma는 군사정권의 개작이므로, 그 나라의 정권을 반대하는 버마와 세계의 전 인민들은 '미얀마'가 아닌 '버마'를 고수하는 것이 원칙이다.

버마의 군사독재는 1962년 아웅산과 함께 독립투쟁의 주역으로 꼽혔던 네윈이 쿠데타을 일으킨 데서부터 출발하였다. 군부가 '버마식 사회주의'를 내세우던 1974년,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한 우 탄트(1961~1971년)의 장례식을 준비하던 랭군 대학이 군부에게 습격 당했다. 그와 함께 시신탈취와 학살극이 벌어졌는데, 이로써 버마 무장투쟁의 막이 올랐다.  

1988년, 찻집에서 동네청년과 시비를 벌이던 랭군 공과대학생 세명은, 자신에게 닥쳐올 불행한 사태를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항쟁과 학살로까지 번지게 된다. 학생들은 경찰에 구타당한 끝에 희생되었고, 즉시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1988년 오늘, 궐기는 최고조에 달한다.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하고, 15000명에 이르는 인민들이 산악에 들어가 무장하였다. 9월 18일에는 쏘 마웅이 주도하는 쿠데타가 발발했다. 잠시 유화적이던 군부는 약탈과 방화를 저지르며 혼란을 부추겼고,1989년 아웅산 수지는 가택연금되었다. 그리고 1990년 5월 27일,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NLD)가 8할이 넘는 지지율을 얻었음에도 정권은 그들에게 이양되지 않았다. 도리어 의원 100명이 구속되었고, NLD 등 몇몇 정당을 뺀 단체들이 불법화되었다. 그후 아웅산 수지는 두번을 더 가택연금 당해, 총 12년동안 집에 갇혀 살았다.

8888을 계승해 1999년 9월 9일에 일어난 9999항쟁은 반정부세력 간의 연대에 실패한 채 역시 폭력진압으로 쓰러졌으며, 2003년 5월 아웅산 수지는 NLD를 재건하는 도중 피습을 겪기도 했다. 2005년 엠네스티 보고서는 버마의 양심수가 2004년 12월 기준으로 1350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UN는 이미 1987년 버마를 자원이 부족한 최빈국으로 지정하였고, 1994년부터 정치적으로도 독재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미국과 EU,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이에 동참하였다.  

버마의 노동착취 역시 2000년도에는 ILO에서 제제를 결의할 만큼의 수준이었다. 8만명 이상이 버마 군부에 동원되어 식사도 제공받지 못하고 각종 개발공사에서 12~14시간 강제노동을 하였다. 이에는 임신 여성까지도 포함되었으며, 숱한 사람들이 지뢰나 풍토병에 희생되었다. 소수민족들 또한 자원개발사업에 끌려갔다.  

이러한 가운데 8888세대는  National Recnciliation Movement를 전개하는가 하면, 독립운동가들도 '연륜 있는 정치가들의 모임'을 결성하였다. 우리는 2007년 유엔특사의 방문과 석유값 2배, 천연가스 4배 인상에 따른 생활고를 맞이해 버마에서 일어난 항쟁을 잘 알고 있다. 그해 9월 버마의 탄 쉐이 군부 정권은 총파업에 나선 전국승려연합회를 비롯한 인민들을 또다시 학살하였다. 버마국영방송은 3천명을 체포하고 2천명을 석방하였다고 주장하였지만, 민주세력은 6천명이 체포되고 5백명이 석방되었다고 밝혔다.

"뚜쩐아욱가 라욱먀욱삐, 씨쭨 아우똑역캐." 다른 국가의 노예에서 해방되었으나 군대의 노예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말만큼 버마 인민들의 삶을 극명히 드러내는 표현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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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에게 애국은 반전평화였다

그는 급박한 시기에 죽었다. 독일과 벨기에의 사회주의자들은 평화 노선을 포기하고 있었다. 프랑스 사회당은 전당대회를 소집하여 모든 국가에서의 동시적인 총파업을 결행함으로써 전쟁을 막자고 결의했다. 프랑스 노동단체 CGT는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내며 전쟁 분위기가 급물살을 타던 1914년 7월 27일 반전시위를 단행하였다. 이 시위에서 노동자와 경찰은 대충돌을 일으켰다.


  장 조레스(Jean Jaurès)는 반전평화를 호소했다. 7월 30일 그는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인터내셔널 사무국에서 대중 연설을 펼치고 파리로 돌아와서 외무부를 방문했다. 7월 31일에는 <뤼마니테 L’ Humanitè>의 편집회의 일정이 잡혀 있었다. 장 조레스는 참석차 몽마르트르 부근의 신문사 거리에 있는 한 식당에 방문하였다. 그는 입구에 들어서는 찰나 극우파 청년에게 흉탄을 맞고 숨졌다.


  CGT는 독일제국주의를 비난하며 반전시위를 중단했다. 사회당은 전쟁특별예산을 통과시켰고, 지도급 인물인 게드는 전시거국내각에 입각했다.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우애는 무너져 내렸고, 제1차 세계대전의 포연이 곧 그들을 뒤덮게 된다. 혹자는 그의 죽음이 그를 보호했다고 주장한다. 만일 조레스가 살아남아 세계대전을 맞이했다면, 그때 그는 애국자로서 누구보다도 전쟁에 앞장섰을 터이며 어쩌면 전쟁광이 되길 마다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부질 없는 가정이지만 그저 모른체하기는 힘든 주장이다. 조레스 사후 서구 사회주의자들은 그대로 전쟁의 광풍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가 살아 있었다고 해서 그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힘들다.


  실제로 조레스는 조국을 중시했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운동도 민족들 안에서 거점과 표지판을 찾을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에게 조국과 헤어진 사회주의는 ‘시든 낙엽’에 지나지 않았다.3) 그러나 조레스는 사회주의적 사상 체계 안에서 조국이 차지하는 위상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조국은 사회주의의 목적이나 목표가 아니라 자유와 정의에 쓰이는 한 수단이라는 것이다.4) 자유와 인간 존재의 존엄성에서 고개를 돌리는 날 조국은 자격을 상실한다고 믿는 이를 애국주의자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오류다. 


  2008년 7월 31일, 우리는 조국의 특질과 강점을 간파하면서도 정의가 국익을 압도하고 그럼으로써 국가가 더 아름다워지길 바랐던 사회주의 정치가의 94주기를 맞이한다. 마르크스 사후에 정치활동을 시작했고,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기 전 세상을 떠났던 그는 한국의 진보진영에서 ‘혁명가들’에 비해 빛을 보지 못했다. 장 조레스는 혁명의 주역도 아니었지만 선거에서 승리한 국가원수나 내각수반도 아니었다. 당의 확고한 영수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의 묘비는 조레스를 ‘인민의 호민관’으로 프랑스 역사에 새겼다. 한국의 의회에서도 호민관이, 조레스와는 달리 생존으로써 성공하는 호민관이 속속 등장하기를 빌며, 붉은 장미를 그의 영전에 마음으로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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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화파에서 노동계급의 대변자로 

장 조레스는 1859년 프랑스 남부의 카스트르 지역에서 탄생했다. 이 지역에는 소농과 장인이 많았고, 그의 집안환경도 소부르주아적이었다. 명석했던 그는 장학생들에게 선발되어 로이 르 그랑 학교에서 입시를 준비한 끝에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해 철학을 전공한다. 베르그송, 뒤르켐 등의 저명한 철학자들이 그의 동기생이고, 이후에도 사르트르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실천적 지식인들이 이 학교를 거친다. 그는 3년간의 수학을 끝내고 알비 중학교의 교사와 투르즈대학교의 철학 강사를 지낸다.


  조레스는 해군제독인 집안 아저씨의 영향 탓인지 정치인의 꿈을 품고 있었고 1884년 도 단위 공화파 명부로 고향에 출마해 의원이 된다. 이 시기의 프랑스 공화주의는 역동적이었다. 에밀 졸라의 소설은 10만 부 이상이 팔려 나갔다. 반면 조레스의 고향은 기업과 교회의 막강한 힘에 좌우되고 있었고, 근왕주의나 복고주의 성향을 가진 지역민들도 숱했다. 1889년도에 두번째로 출마한 그는 소농과 장인들을 대변하며 지역구에서 대기업가, 대금융가들과 맞서 싸우다 패배하였다.


  그후 시장보로 근무하던 조레스는 숙련 노동자들과 접촉하면서 전환기를 맞이한다. 조레스가 사회주의자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1892년 터진 카르모 광부들의 파업이었다. 노동자의 편에서 사태를 분석한 그는 이듬해 보궐선거에서 파업 노동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사회주의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무렵 프랑스의 4개 사회주의 정당은 16석을 확보하고 있었고, 무소속 사회주의자도 21명에 달했다. 


  조레스가 시도한 거리와 의회의 접속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1893년 하원의회에서 ‘사회주의, 탄압 그리고 노동자 주동자들’이라는 명연설을 펼쳤다. 주동자 적발에 골몰한 정부를 비난한 이 연설은 무슨 일만 터지면 배후를 찾는 한국의 기득권세력에게 그대로 들려주어도 유용할 것 같다.


어디에 주동자들이 있고 어디에 사주자들이 있는지 아는가? 그들은 귀하가 은밀하게 해체하고자 하는 노조를 조직하는 노동자들, 이론가들, 사회주의 선전자들 사이에 있지 않다.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주동자들, 중요한 사주자들은 우선 자본가들 사이에 있고 여당 안에 있다.5)


  그는 1906년 1100명이 한꺼번에 사망하는 탄광 사고가 일어났을 때 참사의 원인을 자본의 논리에서 찾았다. 그는 1906년 단독 집권에 성공한 급진주의자들(클레망소 내각)이 여전히 소유를 중시하는 습관에 젖어 노동자의 현실을 간과하는 데 매우 비판적이었다.6) 또 조레스는 자본가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진 법률의 추를 주시하며 1904년 북부 샤티용 파업 때 고용주와 사법당국의 협잡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는 파업이 노동계약의 파괴를 부른다는 논법을 반동적인 의식이라고 규정했다.


  주목할 점은 노동자와의 대화와 교류를 통해 사회주의자로 거듭난 장 조레스에게 공화주의란 번데기 시절의 껍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에게 공화주의는 청산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유소년기인 동시에 영원한 젖줄이었다. 마치 록(Rock) 뮤지션들이 블루스 음악을 전지(電池)로 여기듯 말이다. 1898년 3선 실패 후 정치적 휴지기를 가지는 동안 장 조레스는 대학에 복귀하여 <프랑스혁명의 사회주의사>를 내놓는다. 프랑스의 혁명적 전통 속에서 사회주의적 가치를 찾아나선 역작이었다.



3. 각축하는 좌파‘들’ 틈에서


카르모의 노동자들과 함께 조레스에게 사회주의를 심어준 인물로는 파리고등사범학교의 도서관 사서 에르(Lucien Herr)가 있다. 그는 사회주의 이론과 독일학에 조예가 깊었고, 장 조레스와 나중에 인민전선의 내각을 지휘할 레옹 블룸의 스승이었다. 에르는 조레스에게 사회주의가 꼭 블랑끼즘이나 게디즘이지는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프랑스에서는 생시몽, 푸리에 등이 주창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Socialisme Utopique)의 자취가 남아 있었고, 프루동이 설파한 무정부주의나 혁명적 생디컬리즘(조르쥬 소렐7)), 반중앙집권적 사회주의(말롱) 등의 전통도 만만치 않았다. 1848년 선포된 공화정에서 노사정위원장으로 임명된 루이 블랑의 경우는 개혁주의적 사회주의에 해당했다. 그러나 가장 큰 위세를 떨친 흐름은 에르와 조레스가 선을 그은, 그라쿠스 바뵈프-오귀스트 블랑끼로 이어지는 혁명적 사회주의였고,8) 이는 쥘 게드9)에 의해 계승되고 있었다.(한편 블랑끼의 동지였던 바이양은 지하운동을 청산하면서 프랑스혁명당(PRF)을 창당했다.) 


  게드는 1879년 프랑스노동당(POF)의 창당을 주도하면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프랑스 노동자들은 기존의 토착 사회주의와 거리가 있는 마르크스주의를 순순히 따르지는 않았다. 1880년 전당대회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이 탈퇴하고, 개혁주의의 맥을 잇는 가능주의파(possiblilistes)도 게드가 극좌모험주의자라고 비판하며 뛰쳐 나가 사회노동연맹(FTS)을 창설하고 의회민주제를 표방하고 나섰다.


  J.알만의 노동사회혁명당(PSOR)도 파리코뮌의 전사인 동시에 루이 블랑의 개혁사회주의에 향수를 느끼는 좌파들을 모아 나갔다. 그들은 혁명적 생디칼리즘과도 연대하는 한편 파리고등사범 출신들을 영입한다. 조레스의 스승인 에르는 바로 이 당의 기관지 ‘노동자의 당’의 논객으로서, 다수의 글을 기고해 국제사회주의운동과 독일사민당, 영국 차티스트운동을 소개했다. 에르와 조레스의 가담은 지성적 사회주의(socialisme d’ intellectuels)의 신호탄이었고, 이때부터 노동자중심의 사회주의운동에 많은 지식인들이 스며 들게 된다.



4. 조레스주의, 게드를 넘어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해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정지시킬 의사였다고 상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 자체가 민주주의를 향한 광대한 운동으로부터 부상한 것인데 어떻게 그들이 그럴 수 있었겠는가? (···) 민주주의에서 태어난 하나의 계급이 민주주의의 법칙을 따르는 대신 혁명의 처음 며칠이 지나서도 자신의 독재를 연장시키게 되면 그들은 곧 국토에 진을 치고 나라의 자원을 악용하는 도당이 될 것이다.10)


  프랑스의 사회주의 연구자들은 장 조레스를 사회민주주의자로 보기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11) 그들은 대체로 조레스가 프랑스식 마르크스주의자였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어쨌든 장 조레스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강령을 따르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따라서 그는 개혁주의자로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대치할 수밖에 없었다.


  조레스는 사회주의세력 다수가 부르조아 내부의 사건으로 간주하고 외면한 드레퓌스 사건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여 죄 없는 유대인 장교를 탄원하는 데 앞장선 대가로 게드파에게 의혹을 받는다. 1899년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 정권에 참여해도 되는가를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그는 혁명주의자들과 대립하는 입장이었다. 이 사건은 게드파와 바이양파의 적극적 반대로 부르주아 정권에 불참하는 원칙을 세우면서, 다만 특별한 상황에서만큼은 장관을 파견할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을 두면서 매듭지어졌다.


  조레스의 드레퓌스 사건 투신은 사회주의의 보편적 정신을 구현하고 사회주의의 한 틀인 공화주의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정권 참여에 대한 그의 입장이 타협적이고 나이브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혁명주의자들이 도피적이고 순혈주의적이라고 해서, 정권 불참론의 정당성이 증발되는 것은 아니었다. 당대의 공화파 정권은 노동자에게 적대적이었고, 좌파들에게 정부 혁신의 여지를 열어두고 있지도 않았다. 앞장에서 언급했듯 조레스도 결국 노동투쟁 속에서 집권세력의 기만을 깨닫고 이를 규탄하는 활동을 펼쳤다.


  개혁주의와 혁명주의의 대결은 1901년 리용에서 열린 사회주의자들의 통합을 위한 3차 대회에서 절정으로 치달았다. 마침내 브루쓰파와 알망파의 연합으로 프랑스사회당(PSF)이, 게드파와 바이양파의 합작으로 프랑스의 사회당(PSDF)이 생겨났다. 조레스는 물론 PSF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1904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2차 인터내셔널 6차대회에서 개혁주의는 표싸움에서 졌고 조레스는 승복했다. 그로 인해 등장한 통합사회당이 바로 노동자인터내셔널프랑스지부(SFIO)라는 다소 희한하고도 긴 명칭을 가진 정당이다. 이 당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할 때까지 프랑스 사회민주주의의 보루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창당 당시에는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하였고, 국가를 부르주아지배의 도구로 낙인찍고 반대하였다.


  하지만 게드주의를 이겨내려는 조레스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조레스는 좌파당원 3만 5천명을 압도하는 20여만명의 조합원을 거느린 프랑스노동총동맹(CGT)에 주목했고, 혁명적 생디칼리즘과 우호적 관계를 맺는 일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그는 사회주의와 생디칼리즘의 통합을 지향하며, 1906년에는 게드주의를 반대한다고 선언하였다. 자본주의 착취가 있는 한 전쟁을 폐지할 수 없다는 게드의 입장은, 조레스에게 있어 명백한 광신적 애국주의이기도 했다. 그는 파업이 전쟁의 도구라는 관점에 반대했다.


  1908년 조레스는 사회당 전당대회에서 세가지 목표를 제시하고 설정한다. 첫째, 장기적으로 정권을 완전히 정복한다. 둘째, 단기적으로는 선거와 의회투쟁을 전개한다. 셋째, 때때로 총파업을 실시한다. 조레스는 국가는 하나의 계급이 아닌 계급들 간의 관계를 표현한다고 전제하며, 국가는 외부의 혁명이나 폭력보다는 내부에서 정복된다고 설명했다. 이것은 관철되었고 조레스는 사회당의 명실상부한 대표적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그후 클레망소 내각이 노동자를 탄압하고 노동조직은 여전히 총파업 신화에 빠져 있었으나, 사회당은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1914년 당원수는 7만 2천여명에 이르렀고, 지식인 그룹도 꾸준히 조레스주의에 합세하였다.

  


5. 개인주의와 다수혁명론의 의의 


프랑스 학자 자크 들로즈는 조레스에게 ‘통합과 종합의 천재’라는 찬사를 바친 바 있다. 조레스는 개혁주의를 지향하면서도 혁명에 관한 권리를 포기하지 말자고 당부하였다. 그의 사회주의는 혁명 대 개혁의 해묵은 대치를 불식시켰고, 혁명노선의 모험주의를 억누르는 동시에 개혁노선의 타협과 타락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이는 물론 내부의 투쟁을 무마하는 절충주의로 비쳐지기도 하고, 실제로 그러한 의심을 가지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조레스는 무엇보다 프랑스의 전통에 사상적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프랑스는 조국애가 강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 조국애는 상대적으로 혈통주의보다는 혁명을 이루었다는 자부심에 기초하고 있었고, 그래서 조레스에게 조국애는 공화주의의 다른 이름이었다. 또 한편으로 조레스는 프랑스 고유의 개인주의적 가치관을 물려 받았다. 더구나 그의 고향은 개인주의의 주역인 소농민과 소장인들로 가득했다. 장 조레스가 드레퓌스 사건을 피해가지 않았던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는 사회주의자들도 반동으로부터 공화국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개인의 인권이 계급문제보다 하위의 가치라는 다른 사회주의자들의 가치관에 동의하지 않았다.  


  조레스는 한 인간이 부당한 고통을 받을 때 그가 부르조아일지라도 하나의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는 개인주의자였다. 그는 사회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해치리라는 자유주의자들의 경계심에 예민하였고 충실히 답변하였다. 그는 아무것고 개인 위에 있지 않으며, 사회주의는 개인 권리의 최우선적 확인이라고 명토 박았다. 또 한발 더 나아가 자유주의자들의 탈집중화론이 경제 질서를 건드리지 않고 비켜갔다고 지적했다.


사회주의는 논리적이고 완전한 개인주의이다. 그것은 개인주의를 확장함으로써 혁명적 개인주의로 이어간다.12) 


자본주의 체제는 소유와 노동을 떼어놓았다. (···) 탈집중론자들은 공상만 하든가, 아니면 반동과 사회주의 사이에서 입장을 택해야만 할 것이다. 소유의 변혁 없는 탈집중화는 오래된 토지 세력의 패권을 복구시키는 것이고 과거로의 회귀이다.13)


  조레스가 ‘노동자의 사고방식은 빈곤한 일상으로 인해 단순하다’는 편견에 저항하며 노동자 교육에 심혈을 기울인 까닭은 그가 노동계급을 하나로 묶어 사고하지 않았고 노동자 개개인의 의식 발전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의 혁명적 개혁주의도 좌파 내부의 분열을 봉합하려는 얄팍한 정치공학이 아니라, 개인주의와 그로부터 유래된 다수혁명론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는 민주주의 진전과 더불어 ‘크나큰 다수(majoritè immense)’가 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 크나큰 다수는 ‘부르주아와 적대하는 프롤레타리아’로 환원되지 않는다.14) 조레스는 개인들이 자유롭게 민주주의를 토대로 구성한 ‘다수의 의지’가 계급의 독재로 뒤바뀌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런가 하면 그는 사회주의자들이 미래 사회를 세부적으로 묘사하기를 꺼리는 것을 술책이라고 비난하는 자들에게는 “다만 진화의 자유와 생의 풍요로움을 존중할 뿐”이라고 대꾸했다. 봉기에 집착하는 혁명주의를 버리고 의회정치와 현장투쟁, 정권 획득 등 모든 정당하고 합리적인 경로를 통해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달성에 나선 것도 사회주의의 그러한 ‘열린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현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철권 통치와 인권 탄압에 이어 멸망과 퇴행으로 귀결된 오늘날, 조레스는 레닌보다 더 위대한 승리자로 기록될 만하다.



6. 다시, 한국을 생각하며

 

조레스가 활동하던 즈음의 프랑스처럼 현재 한국의 진보진영에도 여러 정파가 존재하며 진보정당과 노동조직에 나타난 분열도 심각한 수준이다. 그러나 그 양상 자체보다는 이들이 한줌의 대중성도 확보하지 못하며 관념적인 이상에만 골몰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여전히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합법정당활동과 의회정치를 개량, 타협, 투항으로 치부하고 있다. 물론, 아무도 혁명에 도전하지는 않지만.


  선거에서조차 유권자들의 주목을 끌지 못하고 노동조합 조직률과 노사교섭 적용률이 현저하게 낮은 가운데 혁명이란 그저 몽상일 뿐이다. 반면, 의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천시하는 법률이 제정되고, 수구파와 보수파의 여론 점유율이 다시 오르는 현상은 명백한 현실이다. 한국의 진보진영은 조레스처럼 모든 정당한 수단과 합리적 경로에 도전해야 한다. 조레스와 같은 걸출한 리더쉽 역시 절실하다.


  한국에서 진보 정치의 리더쉽을 가로막는 첫번째 장애물은 정파구도와 종파주의이다. 내부 헤게모니투쟁에 골몰하기를 강조하는 구조 속에서, 대개 리더들은 두가지 가운데 하나의 길로 흐르기 쉽다. 하나는 분열주의적 리더쉽이다. 51을 차지한다면 100을 얻을 수 있다는 발상에 기초하고, 때로는 51이 여의치 않으면 다시 분열을 꾀해 26을 얻으려 한다. 다른 하나는 봉합적 리더쉽이다. 여기에서는 이 소리로 저기에서는 저 소리로 환심을 얻어 나가며, 최소한 적이 없는 상태를 만들어 다수에게 추대되는 길이다.


  언제까지 구조를 탓하며 실효성 없는 담론과 한탄만을 양산할 수는 없다. 필자는 우선, 기존의 구도에 아랑곳않는, 그러면서도 진보의 원칙을 대중적으로 표현하고 구사해 나가는 리더가 먼저 나타나기를 바란다. 아마도 그러한 리더는 정치적 허영심이나 교조주의와는 거리가 멀어야 할 것이고, 자연히 기성과 전통으로부터 충분히 배우면서도 자신만의 사유를 갈고 닦는 사상가적 면모를 지니고 있을 터이다. 조레스도 정치가 이전에 사상가였다. 조레스의 혁명적 개혁주의는 프랑스적 전통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조레스는 경험과 관찰 그리고 진중한 사유로 진보의 나무를 가꾸었고, 그를 통해 좌파의 분열과 정체를 타개해 나갔다.


  물론 사유와 발언만으로 훌륭한 정치 리더가 탄생하지는 않는다. 조레스는 탁월한 행동가였다. 거리와 의회에 한발씩을 디디며 양쪽이 위치는 다를지언정 똑같이 ‘투쟁’과 ‘결정’의 장이라는 점을 증명했다. 오늘 한국에서 다수의 노동자는 수구정당이나 보수정당에 투표하는데 이는 여느 선진국도 말끔히 해결하지는 못한 난제다. 사회경제적 처지와 투표 성향의 괴리는 설명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강렬할 인상을 남길 진솔한 행동만한 방책이 없다.     한국은 프랑스와 다르다. 그러나 프랑스처럼 공화주의적이거나 개인주의적인 전통이, 프랑스와 다르게든 혹은 비슷하게든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나름의 진보정치의 역사는 얼마든 쓰여질 수 있다. 나뭇잎의 모양은 달라도 어지간한 조건을 갖춘 지역이라면 나무는 어디에서나 자라기 마련이듯. 조레스와 같은-나아가 그를 뛰어넘는-사상가, 정치가의 출현 역시 결코 한국에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참고문헌]      
장 조레스 (노서경 옮김), <사회주의와 자유 외>, 책세상, 2008,
한국사회민주주의 연구회, <한국 사회민주주의 선언>, 사회와 연대, 2001.
장석준, ‘혁명적 개혁주의’라는 이상, 혹은 몽상?: 장 조레스와 프랑스 사회당, <이론과 실천>, 2002년 7월호.
노서경, 프랑스 노동계급을 위한 장 조레스의 사유와 실천(1855~1914),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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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의 기일 -그리고 정성희와 임용준

史의 찬미 | 2008. 7. 6. 07:24 | Posted by 김수민
매년 6월 9일 추모제를 열지만 이한열 열사의 기일은 7월 5일이다. 우연하게도 어제 그의 기일을 맞이하여 사상 두번째 규모의 촛불집회가 있었다. 추모제 일자는 6.10항쟁기념을 염두에 둔 일정이겠지만, 나는 앞으로 될 수 있으면 7월 5일로 무게를 옮겨 실었으면 좋겠다. 해마다 학교 도서관에 걸리는 피흘리는 그림도, 생전의 해맑던 고인의 모습으로 바뀌었으면 한다.

이한열 님 외에 연세대가 학교-전학생 차원에서 기리는 열사로 노수석 님이 있다. 그러나 연대에는 기려지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열사가 두 분 더 계신다. 둘 다 녹화사업 와중에서 의문사를 당한 분들이다. 열사력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어찌하여 추모제가 열리지 않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하 yolsa.org에서 퍼옴.

 
  정성희  
  (1961년~1982년)   당시 20세 학생열사
 
1962년 1월 출생
1981년 연세대 영독불계열 입학
1981년 11월 25일 시위관련으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음
1982년 11월 28일 강제징집됨
1982년 1월 4일 자대배치, 이후 학원소요 관련자로 지속적인 감시를 받아옴
1982년 7월 23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동지는 일차 문무대 훈련 당시 시위를 선동하고 노래를 선창하였다는 이유로 문교부 리스트에 기록된 뒤 연행되어 조사를 받다가 강제징집을 당했다. 그리고, ’82년 7월 23일 의문의 죽음을 당하여 강제징집, 녹화사업으로 인한 첫 번째 희생자가 됐다. 동지의 사망소식을 듣고 달려간 가족들은 병참모부에서 빈소를 보게 됐다. 군 당국에서는 사고 현장이 민간인 통제구역이어서 현지답사는 불가능하다며, 가족들에게 부검포기서와 화장동의서, 사인에 대해 법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았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동지는 ’81년 흥사단아카데미와 학내에 유인물을 제작·배포하는 조직에 가입해 활동하다 11월 25일 학내시위에서 연행돼 동료 14명과 함께 강제로 입영됐다. 부대생활 중 지휘계통과 보안부대의 관찰, 면담이 수시로 이루어졌다. 사망하기 전 입대동기가 사신관계로 보안사령부에 구속됐고, 학교 선배가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의 주범으로 오인되어 보안사령부에서 조사받는 과정에서 동지와 학교동료들을 언급, 경찰과 보안부대에서 조사를 받았다. 또한, 동료들에게 죽음을 예시했고, 전방실습생에게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과 장영자 사건에 대해 물었다. 군 동료들과 소대장, 중대장, 보안부대 병사 등은 휴가 전후 동지가 보안부대에 호출되어 갔다고 하나 보안부대 관계자들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임용준  
  (1962년~1984년)   당시 22세 학생열사
 
1962년 4월 21일 출생
1981년 연세대 심리학과 입학
연세방송국 기자 활동
1981년 11월 교내시위 때 연행, 훈방
1984년 4월 18일 군 입대
1984년 11월 2일 오후 5시 45분경 소총으로 목부위 관통, 의문의 죽음을 당함
 
동지는 ’81년 연세대 심리학과에 입학하여 연세방송국의 취재 기자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81년 11월 교내시위 때 서대문 경찰서에 연행되어 훈방된 후, 경찰의 특별 관리대상과 순화대상자로 선정되어 경찰에 의해 집중 관리되었다. 그리고 ’84년 4월 18일 가족과 기관원들의 종용에 의해 휴학원을 제출하고 군에 입대하였다. 그 후 11월 2일 오후 5시경 M16 소총에 의해 총탄 한 발이 목 부위에 관통하여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죽음 이후 유가족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하였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한 결과 동지가 경찰에 의해 집중 관리되었고, 기관원들의 종용에 의해 거의 강제 입영한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군 입대 이후 동지가 체격이 왜소하고 체력이 떨어져 거의 매일 고참병들에 의해 상습적인 구타와 가혹행위 등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기무사의 자료 비협조 등으로 사건의 명확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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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5월 한 달 간 교육실습생으로서 <한국근·현대사>를 가르쳤다. 공교롭게도 그때 손에 든 교과서가 금성출판사의 것이다. 국무회의 석상에서 교육과학부 장관과 국무총리의 입담 위에 오른 바로 그 교과서다. 그들이 떠든 바와는 달리, 이 교과서는 남한의 새마을운동을 균형적으로 소개하였고 북한의 천리마운동이 지닌 한계를 비추었다. 그러나 현행 역사교과서를 향한 색깔공세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앞으로도 멎지 않을 것 같다. 더욱이 금성교과서에는 일찍부터 ‘친북좌파’의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사실이 좌파적이라면, ‘우익’은 거짓말쟁이?


  금성판 교과서는 좌파적인가? 일제시대 독립운동 서술에서 사회주의계열의 활동을 ‘제대로’ 비추고 있기는 하다. 이 교과서는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유입된 사회진화론의 위험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식민 지배를 (···) 인정하게 될 가능성도 컸다. 일제는 민족운동을 타협주의, 개량주의로 유도하는 데에 (···) 이런 속성을 이용하였다.”(203쪽) 이른바 ‘타협적 민족주의’ 또는 ‘민족개량주의’의 후계세력에게는 불편한 진실이다. 특히 1924년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을 게재하면서 (독립투쟁을 포기한) 자치론의 불씨를 지피고, 일제 말기에는 전쟁에 협력했던 <동아일보>에게 더욱 그럴 것이다.

  금성판은 좌파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적이다. 이 교과서는 일제의 통제가 강화된 이래 노동운동이 사회주의자들과 연결된 비합법 조직인 혁명적 노동 조합의 형태로 전개되었다고 밝히고 농민운동도 비슷하게 서술하였다. 그런가 하면 사회주의계열 민족운동가인 정종명을 여성 운동의 대모로 조명하였다(212-217쪽). ‘부르조아 민족주의자’들 다수가 훼절하거나 침묵했던 시대, 사회주의운동이 독립운동의 중추가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금성판 교과서가 과연 ‘친북’적이기는 한가? 금성판은 김일성이 이름을 떨친 ‘보천보 전투’를 거론하였다. 두산출판사의 교과서에는 없는 내용이나, 이를 두고 ‘브라보’를 외쳤다가는 한승수 총리 꼴이 될 것이다. 이어지는 문장: “그러나 국내외 학계에서는 (···) 북한의 역사 기술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비판과 논란이 있어 왔다.”(196쪽) 금성판은 또 주체사상이 “김일성 개인 숭배를 합리화하고, 반대파를 숙청하는 구실로 이용되기도 하였다”며, 주체사상이 “쇼비니즘”이고 “편협”하다는 북한 방문자들의 술회를 옮겨 실었다(302쪽).   


  아마 자칭 우익세력의 눈에 거슬린 대목은 따로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금성판은 일제의 신문 강제폐간을 다루며 “이미 친일 언론으로 변질된 동아 일보, 조선 일보마저”도 폐간되었다고 서술하여, 현존하는 막강 언론사의 과거를 짤막하게나마 들추어냈다(154쪽). ‘역사찾기’라는 별첨자료에서는 문인, 예술인, 기업인, 경찰, 교육인의 친일활동을 분야별로 다루기도 했다(164-5쪽). 


  수업시간 말미 이따금 시간이 남을 때 나는 금성판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을 학생들에게 전해주었다. 학생들이 가장 진보적이라는 또는 친북·좌파적이라는 지적을 들은 제 교과서를 새삼 들추어 보는 동안, 나는 흑판에 'Fact'라고 썼다. 동아일보가 신탁통치 소식을 왜곡 보도했다거나, 북한에서 친일파를 청산하고 토지를 개혁했다거나, 한국전쟁 이전에도 38선에서는 크고 작은 충돌이 벌어졌다거나, 베트남전쟁에서는 그 특수의 이면에 베트남인과 한국군의 큰 희생이 있었다거나 하는, 금성판 교과서의 여느 역사 서술도 모두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왼편에 몰아넣는 행위는, 오른쪽에 서 있다는 자신이 거짓의 편이라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뉴라이트의 자유민주주의와 탈민족주의는 껍데기 뿐


  금성 교과서의 대척점에는 뉴라이트단체인 교과서포럼이 낸 <대안교과서 근·현대사>가 있다. 초반부부터 조선후기사회가 근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다는 취지로 ‘소농사회론’을 꺼내어 기존 교과서가 전제하는 내재적 발전론 또는 자본주의 맹아론에 맞선다는 점이 이 교과서의 굵직한 한 특성이다. 이에 대해서는 논쟁의 소지와 필자의 지적 한계를 인정하여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동학농민운동이 ‘유교적 근왕주의’에 따른 복고적 개혁운동이라는 견해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넘어간다(참고로, 유영익 교수가 펼쳐온 이 주장은 진보 성향의 박노자 교수도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어 또 다른 논쟁을 빚어내기도 했다).


  이 책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단원은 (전체 분량의 2할에 불과한 개화기와 대조적으로) 절반에 육박하는 비중을 차지하는 해방 이후 현대사이다. 이 교과서의 현대사 서술은 곧 정치적 헤게모니 투쟁이며, 이승만이라는 아버지에 노골적으로 줄을 대고 있다. 가령 뉴라이트 교과서는 이승만 정권기의 농지개혁을 “신생 한국이 정치적으로 안정되는 데 크게 이바지”하여 농민들이 “6.25전쟁 이후 북한의 선전 공세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충실히 남아 있었다”(146쪽)며 호평하였다. 또 민주주의는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낯선 정치제도였다면서도 이승만 정권기에 민주주의 자체가 유보되거나 후퇴되는 일은 없었다고 잘라 말한다. 잘못된 것은 시대적 한계와 국민의 수준 탓이며 잘된 것은 이승만·자유당을 비롯한 위정자들의 노력에 의한 산물이라는 투다. 


  이들은 대한민국 성립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선택”(148쪽)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찾지만, 5.16 쿠데타를 설명할 때는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을 손쉽게 내팽개친다. 박정희가 한국전쟁 와중에 쿠데타를 모의했다거나 4.19로 인해 쿠데타 계획이 무산되었다는 것은 드러나지 않은 채, 결국 5.16쿠데타는 “도덕적 멍에”를 안았지만 “군인 특유의 추진력과 실용주의적 방식으로 경제발전을 추진”하였던 “근대화혁명의 출발점”(181쪽)이었다고 미화되었다.   


  특이한 점은 5.16 군정이 초창기에 실시한 부정축재 기업가에 대한 구속과 벌과금 부과를 ‘미숙한 경제정책’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기업가의 구속과 처벌로 경제사정은 오히려 악화”되었다는 이야기다(183쪽). 군사쿠데타의 역사적 의의를 지지하지만, 국가주의보다 재벌식 자유지상주의에 기울어져 있다. 조갑제보다는 복거일과 더 친화적이다. 또 이 교과서는 한국의 대표적 기업가로 이병철과 정주영을 꼽았으나(223쪽), 재벌기업가들이 직접 자행한 시장경제의 굴절은 부각시키지 않는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머리말에서 탈민족주의를 공언했음에도 통치이념으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휘둘렀던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해서는 너그럽기만 하다. 물론 뉴라이트의 민족주의는 ‘우리 민족’ 대신 ‘한국인’을 입력한 결과로, 좀 더 명확하게는 ‘국가주의’라고 부를 만하다. 흔히 민족주의가 비판받는 커다란 이유 두가지는 배타성과 획일성인데, 이는 국가주의에서도 그대로 또는 더 심하게 나타난다. 그래도 국가주의가 민족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국가주의든 민족주의든 내셔널리즘을 극복하지 않고도 탈민족주의를 외칠 수 있을까?


  이 국가주의는 호오를 떠나 북한을 국가 또는 체제로 인정하는 데에도 매우 인색하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북한 정부의 수립에 대해,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의 역할을 무시하고 스탈린의 지시만을 부각시킨다. “스탈린의 나라가 된 한반도 북부”(281쪽)라는 거친 표현에서는 과거 북한을 ‘괴뢰’라고 부르던 반공지상주의의 메아리가 들린다. 그런데 정작 주체사상에 대한 관점은 참 오묘하다. 황장엽의 주체사상은 점차 김일성의 절대권력을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주체사상의 저작권이 황장엽에게 있다고 단정 지으면서 그를 김일성으로부터 분리시킨 셈이다. 

 

   실증주의가 아니라 싫증주의


  뉴라이트 교과서는 집필진들의 ‘본분’ 탓인지 정치투쟁 뿐 아니라 학술전쟁에도 거침이 없다. 그들은 경제학자 박현채의 견해가 일부나마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으로 스며들었음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서, 박현채가 김대중에게 건넨 대중경제론이 실현불가능하거나 성급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고 비판했다. 남한 정치세력 내부의 모순과 미국 때문에 한국전쟁이 발생했다는 ‘수정설’이 설득력을 잃었다고 한 반면, 오로지 북한의 남한적화와 기습남침에만 골몰하는 ‘정통설’의 단점은 비판하지 않았다. 강만길이나 최장집처럼 민족주의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인 성향이 농후한 지식인들이 참여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혁명론에 입각했다고 소개되기도 했다.


  “철저한 실증주의를 지향”(5쪽)했다는 자부가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건 비단 이 책에 가득한 역사투쟁의 화염병 때문만이 아니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사실관계의 오류’들의 전시장이다. 비전문가인 필자도 별도의 참고문헌 없이 한번의 정독만으로 숱한 잘못을 발견했다. 고종의 즉위년도는 1863년이 아닌 1864년으로 표시되었다. 사진 속의 박영효에게 홍영식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었다(홍영식은 그 사진을 찍을 무렵 이미 세상에 없었다). 민비도 명성왕후도 명성황후도 아닌 민왕후라는 호칭이 등장했다. 1908년 공표된 사립학교령은 졸지에 두해 앞당겨졌으며, 경성제국대학은 설립 이듬해에 설립되었다. 여수·순천사건은 여주·순천사건으로 표기되었다, 두 번씩이나. 1973년부터 1992년까지 남북의 공식적 접촉은 한번도 없었으며, 공창이 성매매방지특별법이 마련되기 직전까지 있었던 걸로 처리되었다. 어쩌면 철저한 실증주의라는 머리말의 구절부터가 오류 또는 오기일지도 모른다.  


  뉴라이트 교과서의 집필자 가운데 역사학자가 없다는 일각의 지적은 올바르지 못하다. 여기엔 더러 영역을 침해당한 역사학자들의 불쾌감이나, 독자적인 가치관보다는 전공 학문에 따라 학설을 달리하는 경향이 엿보이기도 한다. 경제학자나 윤리교육학과 교수라고 해서 역사책을 쓰지 말라는 법은 없다. 다만 뉴라이트는 교과서의 독자가 상품구매자나 ‘정치업자’가 아니라 공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이라는 단순한 기본을 저버렸을 따름이다. 그들의 문제는 비전문성이 아니라 비윤리성이다. 


  교과서 집필의 출발 지점은 명료하다. 모두의 가치관을 충족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만인이 곱씹고 생각할 수는 있는 재료를 제공해야 한다. 하기야, ‘싫증주의’를 유발하는 뉴라이트 교과서도 그런 재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풍자나 해학의 소재로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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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에 관하여

史의 찬미 | 2008. 6. 19. 04:32 | Posted by 김수민
조관자의 <‘민족의 힘’을 욕망한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해방전후사의 재인식>> 1, 책세상, 2006)를 읽고,
2007년 2월 1일 학부생들의 학회인 연세사학회 세미나에서 발제한 글을
오늘 잠깐 꺼내서 다시 곱씹다가, 수정하여 블로그에 올린다.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에 관하여



1. ‘단일민족’만으로 포착할 수 없는 내셔널리즘


조관자는 “기존의 한국사 논의는 단일민족의 범주에서만 내셔널리즘을 인정”했다고 지적한다.1) 다시 말해 내셔널리즘의 범주를 하나의 민족만으로 설정하는 오류를 그동안 한국사 논의가 범했다는 이야기다. 이 자체로는 맞는 지적인데 문제는 조금 더 심각하다. 그동안 한국사에서 민족주의는 국가주의와 구별되는 이념이었고, 내셔널리즘이라는 영단어는 국가주의는 확실히 껴안되 민족주의와는 어정쩡한 포함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셔널리즘에 관한 좁은 시각이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사례는 친일을 반민족성 또는 비민족성의 죄과로 심판하는 것이다. ‘친일’이라는 단어도 제국주의 부역행위를 뚜렷하게 표현하지 못하지만, ‘반민족’ 담론 역시 구체적인 취지와 내용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역사를 정리하거나 청산하는 작업에서 ‘반민족’은 ‘반민주’와 ‘반민중’과 거의 동급 수준의 윤리적 준거가 되었음에도, ‘민족에 반하였다’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라는 뜻과 과연 같은지2), 더 나아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호하거나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이 지점에서 상기해야 할 것은 단일한 민족주권이라는 존재가 상상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민족은 실체가 있고 그것이 기반한 언어, 혈통, 지역, 문화가 있으나, 결정적으로 민족을 응고시키는 힘은 ‘상상’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저서 <상상의 공동체>에도 잘 나타나 있듯 이 ‘상상’은 단순히 ‘없는 것을 있다고 믿는 태도’는 아니지만, 유구하지 않지만 거대한 문화적 조형물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민족은 재구성될 수 있다.


  조관자의 글은 바로 그렇게 민족을 재구성하려고 했던 한 대표적 조선 지식인을 다루고 있다. 본문은 그의 글의 여파를 살려 민족운동가 이광수가 어떻게 민족운동을 벌이다가 조선 민족이 식민지 제국 일본의 국민이 되게끔 선동하였는지를 따져보며, 식민지에서 피어난 협력의 논리가 제국주의 종주국에 뒤지지 않는 내셔널리즘의 한 형태로 발전하는지를 되짚어 본다. 나아가 민족주의가 국가주의와 깔끔히 분리될 수 없으며, ‘반민족적’이라고 여겨진 행위가 당사자의 항변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친민족’으로 해석할 수 있음을 확인할 것이다.   



2. 문명과의 일체: 민족의 오늘에서 내일의 내셔널리즘으로 


결론부터 말해 지식인 이광수의 성장기와 일제 말기를 대비해서 전향, 변절했다고 보는 시각은 단선적이다. 이광수는 일진회 유학생 시절부터 강고한 문명지향을 품고 있었는데,  이의 다른 한편에는 비루한 제 동포들에게서 엿본 절망적인 야만이 깔려 있었다. 그가 민족운동에 나선 것은 민족 계몽에 대한 결심 때문이었다. 


  그가 <동경잡신>에서 추천했다는 필독서에는 도쿠토미 소호의 선집이 수록되어 있다. 도쿠토미 소호는 원래 개인의 권리와 평민주의를 주장하였지만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아시아 진출과 국가주의를 신봉하게 된 인물이다. 우리는 이 배경이 되는 근대 일본이 어떻게 문화를 창조해내었는지에 관한 답을 후발자본주의 국가의 특수성으로부터 추출해낼 수 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 일본의 문화는 그리스문화에 기원을 두고 프랑스에 대항하여 일으킨 독일의 국수주의 문화론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독일문화가 일본문화로 유입되는 수준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뒤쳐진 자’로서 가지는 대항의식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어떤 개인이 우월감과 열등감을 동시에 높여가는 것처럼 독일과 일본은 신흥강국으로서의 자부심과 후발주자로서의 콤플렉스가 길항하는 길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후발주자에게 짓밟힌 식민지인으로서 이광수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그는 이미 ‘대동아문명’이름으로 곧 만개할 ‘아시아 문명’에 자신의 신념을 두고 있었다. 아시아민족으로서의 신문화 산출을 민족의 이상으로 삼자고 제안한 1917년 <학지광>의 글이 결정적인 증거이다.   


  그는 “의인은 어떠한 권력에 대해서도 노예가 되지 아니하거니와 오직 자기의 응낙에는 완전한 노예가 되는 것이다” 3)라고 썼다. 얼핏 누구의 간섭과 지배도 배제하고 철저히 주체적이고 실존적인 결단만을 좇는 개인주의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광수의 언설에는 결정적으로 ‘자기 반성’과 ‘자기 갱신’의 정신이 부재한다. 문학적으로 과장된 표현일지라도 “자기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무지막지한 철학의 산물이며 개인주의와는 모순되는 태도이다.


  이에 붙여 이광수는 “자유는 자기를 지도하는 지도 원리와 지도를 택하는 데 쓴다.”는 데까지 나아간다. ‘의인’으로 상징되는 ‘바람직한 개인’은 이광수에게 있어 ‘개체’로서가 아니라 또 하나의 ‘전체’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전체’는 전(全)우주적 개념은 아닌 듯하고, ‘외부’를 필연적으로 가지는 ‘아와 비아와의 싸움’이라는 역사관에도 맞닿아 있다. 그는 주체와 전체를 동일시했고, 전체의 범위는 문명 일본과 그의 식민지 조선을 중점으로 한 아시아공동체였다. 그러한 이광수로서는 자유롭기 때문에 자기를 지도하는 원리를 택한다는 논리가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자발적으로 일제의 국민 공동체에 복속되는 것은 자민족의 존엄에 저촉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개인의 자유와 전체적 위계질서, 식민지의 암울한 상황과 제국의 그릇된 욕망이라는  통할 수 없어 보이는 가치들을 이어가려 했던 셈이다. 제국주의 시대 태동한 파시즘은 일방적인 ‘자유 몰수’보다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자유 헌납’에 더욱 크게 의존하였다. 자유를 헌납하는 개인은 자신을 보호하는 전체가 든든해짐을 느끼며 그 덕분에 자신이 더욱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광수는 에리히 프롬이 해부한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정점에 서 있다. 그럼으로써 그는 개인주의자가 전체주의자로 변신하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개인에 관한 잘못된 자의식이 어떻게 전체주의로 번지는지를 입증하였다.

   


3. 민족운동으로 일제에 충성하기 


  이광수가 품은 최대의 딜레마는 '주권 없는 민족'을 대상으로 하여 '힘 있는 국민의 형성'을 목적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주권 없는 민족도 상해임시정부 등의 존재를 상기하며 민족적 의식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근대의 민족주의는 ‘국가’라는 도플갱어와 맥놀이를 일으키지 않는 한 꾸준하고 공고하게 진행될 수가 없다. 마침내 이광수를 비롯한 조선의 내셔널리스트들은 전도된 형태로 기존 민족운동을 이어가게 된다. 이 변화는 형식적으로는 전도로 보이나, 본질적으로는 굴절인지 발달인지 잘라 말하기 힘들다. 다만 ‘민족 역량 확대’라는 욕망이 더욱 뜨거워지고 확장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시아 대륙의 하늘에는 바야흐로 전운이 굼틀거린다...... 우리는 인류가 총동원 대출연하는 오늘의 무대에 일역을 맡지 못하고 막 뒤에 쭈그리고 안는 생명없는 백성이다. 우리에게 힘이 오르는 날 인류의 무대는 우리에게 정중한 출연 요구장을 보낼 것이다. 오늘은 힘을 기루는 날.”4) 이광수의 망딸리떼를 단적으로 드러낸 문장이다. 이광수는 1930년대 들어 세계대전의 기운 속에서 주역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민족의 처지를 비관하면서도 언젠가는 당당하게 힘겨루기에 나서고 말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문장에서 느껴지는 감성도 이성에 기초한 정치사상이라기보다는 맹목적인 연애나 이유 없는 결투에서나 발견될 만한 성찰 없는 정념이다. 이광수는 제국주의끼리의 싸움에 끼지 못하는 민족에게 ‘생명’조차고 없다고 말하는, ‘공포와 연민’의 지식인이다. ‘출연 요구장’을 운위하는 부분에서는 사무라이나 조직폭력배의 감성까지도 감지된다.   


  이광수는 그러나 또 한편으로 재만주동포들에게 경제와 문화를 향상할 것을 권고하면서 비폭력, 비정치 노선을 견지하기도 했다. 그는 안창호 등과 ‘수양동우회’를 할 적부터 철저히 비무장노선을 걸었는데, 이광수와 동우회가 세운 민족운동의 비전은 1930년대 전반에 나온 이광수의 <조선민족운동의 삼기초 사업>(1932), <민족운동에 관한 몇 가지 생각>(1935) 등에서 잘 나타난다. 이 논작들은 기본적으로 근대화에 걸맞게 노동생산규율을 훈련하자고 주장하면서, 공동체 윤리 의식을 배양한 생활공동체 조직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는 조선 파시즘화의 기초라고 비판당하기도 했는데, 1933년 사회주의자 박철이의 경우 동우회운동이 자본주의의 파괴력이 강해지며 나타난 국제 파시즘과 공통점이 있는 식민지 파시즘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광수의 비폭력노선에는 재만동포를 주로 겨냥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무장독립투쟁을 견제하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우리는 물론 여기서, 만주의 무장독립투쟁도 자칫 폭력의 미학에 물들며 제국주의를 닮아가거나, 또는 그 이전에 벌써 제국주의적 사고로부터 직접 힘을 얻었을 가능성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용감하게 싸우는 1등국민들-일본인’과 ‘그들을 문화와 경제로 뒷받침하는 2등국민들-조선인’을 잇는 작업은 이론적으로 무리가 없는 일이고, 따라서 재만동포의 무장투쟁은 견제하면서도 일제의 폭력을 찬미하는 노선은 근본주의적 평화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이광수가 비폭력, 비정치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된 안창호가 1938년에 병사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그는 내선일체를 위한 이데올로그로서 본격적인 활약을 시작했고, 1939년부터 1943년 사이에 130여편의 친일적인 글을 발표했다. 그는 일관되게 조선인이 일본의 문화국민이 되는 방법론과 일상생활에서 행복을 누리게 되는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특히 ‘총력전 체제’라는 전시환경은 그에게 조선민족을 위한 더할 수 없는 기회였다. 집단의 단합을 강조하는 총력전이 거세질수록 조선 민족은 차별 없는 국민생활을 약속받을 수 있다는 논리다.   


  그는 “진짜 일본인이 되기 위해선 우선 종래의 조선심을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합니다.”5) 라고 강변하며 심지어 조선인의 존재를 <일본서기>에서 구름과 안개로 표상되는 ‘죄’에 등치시키기까지 했다. 그는 또 조선인의 전향을 막는 장애로 본래의 상태에 머물게 하는 실증주의나 과학주의, 그리고 적극적인 의지를 훼방하는 자유주의나 이기주의를 거론하면서, 그 사상들로부터 혼을 빼자고 역설한다.


  그러나 내선일체는 현실적으로 꿈에 지나지 않았다. 이광수는 어느 일본인으로부터 “음험한 인간이 정말 싫다”며 조선인을 향해 ‘거짓말쟁이 혐오증’을 표출하는 발언을 듣게 되었다. 주목할 것은 이광수의 반응인데, 그는 조선인이 그렇다면 슬픈 일이라고 자책하면서 신용을 문화 국민의 표상으로 규정하였다. 한용운의 <복종>에서 나타나는 마조히즘이 더욱 거시적인 차원에서 이광수를 빌어 발휘된 셈이다. 내선일체는 결코 인종주의를 뚫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종주의와 그로 인한 차별이 강화될수록 내선일체의 집착도 함께 강해지는, 일제 말기의 비극을 이광수는 연출해내었다. 



4. 이광수와 루쉰


  영화 <한반도>에서 배우 차인표가 연기한 국정원 요원은, 친일-친미-반공적 민족주의가 얼마나 급속하게 반일-반미-용공적 민족주의로 전화될 수 있는지를 어설프게나마 보여주었다. 한데 그 반대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친일청산의 정신적, 실질적 대부인 임종국은 1960년대에 친일파의 국민문학 정신만큼은 긍정적으로 검토하자고 발언한 적이 있다. 고쿠민쇼세츠(國民小說)는 자국민을 지배하고 억압하며 식민지인에게까지 굴욕을 안겨준 데다가 오늘날에도 일본의 군국주의를 부추기는 문화적 원동력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따라 배우자는 제안이 친일청산론자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은, '반민족행위'와 일본을 배격하기는 쉬워도 진정으로 인권과 민주주의, 평화를 지키며 폭력에 맞서는 것은 지난함을 방증한다. 민족의 아픔에 고통받다가 제국의 논리에 동화된 이광수의 역사는 얼마든 재생 반복될 수 있다.


  이광수의 일제 시대 행적에서 타산지석으로 삼을 또 다른 점은 그의 엘리트주의다. 그는  누구보다도 앞서서 민족의 현실에 반응하는 예민한 지식인이었다. 그점에서 그는 <아Q정전>으로 중국인들의 몽매한 정신에 죽비를 내려친 루쉰과 닮은 점이 있다.


  루쉰은 민족주의적 시각이나 마오쩌둥주의적 시각에서 왜곡되기는 했으나 이광수처럼 ‘개인’에 민감한 지식인이었다. 그의 평전을 쓴 박홍규의 말에 따르면 영원히 비판하고 회의하는 지식인이었는데6), 바로 이점에서 그는 이광수와 달랐던 것 같다. 루쉰은 철저히 비판정신에 근거한 자신의 이념을 계속해서 의심하였고, 대중추수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중국 인민의 자유와 독립에 헌신하였다. 그가 중국 인민을 혼내고도 존경받는 인물로 남은 까닭은 중국 인민이 마조히스트라서가 아니라 남에게 내려친 죽비를 스스로에게 들 줄 아는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위에서 필자가 지적했듯 개인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개인주의는 정념이 이성을 지배하고 영혼이 정신을 통제하는 류의 과격한 낭만주의에 기초해 있었고, 독일에서의 니체철학이나 바그너의 음악이 보여주었듯 그 낭만주의는 민족주의와 귀족주의로부터 자신을 떨어뜨리지 못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 최근 또 지면에 오르내리는 한 소설가는, 자신의 분별없는 말로 인해 겪게 된 공박과 고립을 두고 예전부터 ‘예술가가 겪는 고난’쯤으로 표현해 왔다. 정서가 없는 인간의 논리적 천착도 볼썽사납지만, 틀린 논리를 들이대놓고 결정적으로 감성의 영역으로 후퇴하는(그러나 이는 예술가-열외주의라는 철저히 타산적인 이념에 머문다) 그 소설가도 여러 면에서 흉하다. 오늘, 이광수는 여전히 떠올리고 곱씹어볼 만한 인물이다.  


 

1) 조관자, <‘민족의 힘’을 욕망한 ‘친일 내셔널리스트’ 이광수>,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1, 책세상, 2006.

2) 가령, 가네코 후미코는 ‘친민족/반민족’으로 겨우 세워진 윤리적 잣대로, 과연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3) 이광수, “젊은 조선인의 소원”, <동아일보>, 1928.9월 4~19일자. 인용은 <<전집>> 10, 201~203쪽.

4) <<동광>> 28호(1931년 12월), 1쪽.
5) 香山光郞(이광수), <行者>, <<文學界>>(1941년 3월), 85쪽.
6) 박홍규, <<자유인 루쉰>>, 우물이있는집,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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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임, 간첩조작에서 <서울 1945>까지

[한국근현대사의 OST] 이소라, <개희의 노래>


김수민/woodstocksm@naver.com

  2001년 9월 4일, 역사학자 방선주와 정병준의 요청으로 기밀해제된 미육군 정보국의 문서파일과 미 국립문서보관소의 ‘베어드 조사보고서’가 언론에 보도되었다. 조선공산당계(박헌영계)의 주요 인물로 꼽히는 이강국과 임화(시인) 등 남로당의 일부 핵심간부들이 CIC 요원이라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아마 이 대목에서 해방정국기 한국사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라면 하나 같이 김수임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강국의 애인이자 존. E. 베어드 대령(미8군 사령부 헌병감)의 동거녀였던 김수임은 오랫동안 이강국의 기밀입수 활동에 이용되었던, 달리 말해 기밀 유출을 위해 베어드에 접근했던 ‘여간첩’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그날 미 육군부가 1950년 8월부터 석달동안 조사하여 작성한 ‘베어드 보고서’는 김수임의 혐의에 관해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베어드 대령이 거꾸로 김수임을 통해 이강국이 전하는 북한측 정보를 수집했을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1930년대말 김수임은 유학 시절 독일공산당에 참가한 바 있는 이강국을 만난다. 그는 이강국에게 공산주의 사상이나 로자 룩셈부르크의 활동을 전해 듣지만, 이념보다는 사랑에 이끌렸던 것으로 보인다. 자유분방한 성품에 지성을 겸비하고 특히 영어에 능숙해 세브란스병원에서도 일했던 그녀는, 그러나 한반도 분단의 상황에서 애정의 분열을 경험해야 하는 ‘약한 여자’가 되고 말았다.




‘미모의 여간첩’ 김수임? 만들어진 신화일 뿐


  이강국이 체포령을 피해 북한으로 도주한 후 그녀는 반도호텔에서 미군정 직원으로 근무하였다. 이때 그의 상관인 베어드 대령은 그녀에게 끈질기게 구애하였고, 그녀는 옥인동 주택에서 동거에 들어갔으며 서른 일곱 나이에 아들인 김원일을 출산한다. 1949년 6월말 주한미군은 모두 철수하지만 베어드는 경찰고문으로 남한에 잔류하였으나, 그들의 동거는 지속되지 못한다. 1950년 봄 김수임이 간첩죄로 체포된 탓이었다.


  그렇지만 21세기 벽두에 비로소 공개된 CIC의 비밀문서가 아니더라도 김수임의 간첩행위 13가지는 대부분 그 당시에 반박되고 있었다. 우선, 미군정의 체포령에 직면한 이강국을 은닉하고 월북을 도와준 것은 분단이 확정되기 이전의 일이라 간첩죄의 구성이 불가능했고, 기껏해야 범인은닉이나 도주방조와 같은 일방형법, 38도선 월경금지에 관한 법률 위반을 적용할 수 있을 뿐이었다. 미군철수나 한국경찰의 무장에 관한 기밀을 적국에 제공했다는 혐의도, 베어드가 고위전략적 정책을 잘 알지 못했고 따라서 김수임에게 기밀을 유출하지도 않았으므로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민간인이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는 것도, 공포한 흔적도 없는 국방경비법을 적용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당국은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로 특무대에 갇혀 있던 이중업을 김수임이 탈옥시켰다고 여론몰이하였다(정작 기소내용에서는 누락되었다). 김수임의 집에서 나왔다는 권총을 검사들이 증거물로 내세웠다가 혐의와 무관하다는 변호인들의 이의제기가 먹혀 채택이 보류되는 일도 벌어졌다. 심한 고문에 의해 허위사실을 자백했을 가능성은 당시나 지금이나 제기되는 것으로, 베어드 파일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김수임은 재판 시작 3일만에 한번의 공판으로 사형을 언도 받았다. 형은 한국전쟁 직전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집행되었다. 그녀는 ‘여간첩의 신화’로 남아 전해졌고, 네덜란드 출신 무용수이자 독일과 프랑스를 오가며 스파이 활동을 했던 마타하리와 곧잘 비견되었다. 프랑스 정부가 마타하리의 간첩행위를 부풀려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사실보다는 ‘미모의 여간첩’이라는 공통점이 부각되면서 말이다. 그뒤 반공주의를 지향하는 여러 저작과 방송들이 김수임을 다루었고, 비교적 최근에는 윤석화가 주연으로 출연한 <나, 김수임>(연극) 등이 개인적 고뇌에 초점을 맞추어 그녀를 변호하였다.


  2006년 KBS가 상영한 <서울 1945>도 김수임을 모델로 한 인물 김해경(어린시절의 이름은 ‘개희’)를 등장시키고 있다. 한은정이 열연한 김해경은 가난한 어린시절과 같은 성장과정이나 반도호텔에서의 근무와 같은 이력에서 김수임과 닮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강국에 참고하여 만들어진 최운혁(류수영 분)이 공산당계였던 실제 모델과는 달리 여운형(신구 분)의 동지로 나오듯, 김해경 또한 김수임과 다른 점이 많다. 김해경은 이화여전을 나온 김수임처럼 고학력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최운혁이 월북한 뒤 그녀에게 구애하는 인물도 미국인 장교가 아니라 양심적 우익이자 최운혁의 벗인 이동우(김호진 분)였다. 김해경은 간첩으로 체포되지만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의 도움으로 풀려나 최운혁과 해후한다. 그리고 끊이지 않는 포화 속에서 빨치산에 합류한다.



김해경, "당은 오류가 없나요?"


  김해경은 비정치적이면서도 정치적이다. 김수임보다 또는 김수임만큼. 김해경의 어머니(고두심 분)는 결혼을 허락하면서 최운혁에게 “정치에 손을 떼고 대학 교수 일에 전념하라”고 부탁하고, 최운혁은 ‘좌우합작까지만’이라는 단서를 달면서 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김해경의 운명은 결코 순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정치에도 이념에도 관심 없는 이 여성은 사랑 앞에서 후퇴하지 않는 열정을 타면서 해방정국으로 더욱 깊숙이 빠져 들어간다.


  극의 막바지, 조선노동당은 최운혁의 스승이자 빨치산을 지도하던 문동기(홍요섭 분)를 제거하라는 밀명을 내린다. 우연히 이를 먼저 알아챈 김해경은 냇가에서 최운혁에게 묻는다. “당(黨)은 정말... 오류가 없나요?” 김해경은 단지 김수임의 분신이 아니라 해방정국의 격동에 휘말린 ‘연약한 여성’의 대변자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비록 정치적인 학습은 깊지 않았지만 어떤 회색의 이념으로도 뭉갤 수 없는 삶의 푸르름을 갈구했다.


  구사일생으로 한국을 탈출해 일본으로 건너간 해경이 들어간 어느 교실, 액자에는 태극기도 인공기도 걸려 있지 않았다. 이것이 최종회의 마지막 장면이다. 높지 않은 시청률과 극우단체의 비난 속에 드라마가 막을 내린 후, 열성 시청자들은 이소라가 노래한 <개희의 노래>를 들으며 김해경과 김수임을 추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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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2001년 대학에 들어와서 2002년부터 교육학을 전공했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괜찮은 교육학도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학점이 너무 좋지 않았고 교육학에 관해 아는 것이 얼마 안 되기 때문이다. 필자가 졸업한 다음에 전공을 살릴 일을 맡을 지도 불분명한데, 그러나 만일 교육학과 관련된 일을 한다면 그것은 교직일 것이다. 필자가 교사라면, 사학을 이중전공하고 대학을 졸업한 역사 선생일 터이다.

교직과정 이수를 작심한 교육학도들은 3,4학년에 교생 실습을 나간다. 필자는 모교로 나가고 싶다. 졸업하면서 그렇게 속 시원할 수가 없었건만 10대의 마지막 세해를 바친 그곳을 데면데면하게 여길 수가 없었다. '학벌'이란 말만 들어도 몸서리를 치는 학연혐오론자인 것과는 별개로, 경북 구미에 있는 내 모교를 나온 학생을 우연히 만나면 반가울 것 같다. 실제로 필자는 한 인터넷 매체에 에세이를 연재하면서 어떤 독자에게 동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반가운 감정이 일었었다. 모교는 남자학교다. 남학생들로만 가득찬 학급에서 여섯해씩이나 보낸 처지에서 조금 주저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군데 가장 먼저 갈 곳이라면 그 학교를 택하겠다. 대신에, 틈틈이 제발 빠른 시일내에 그 학교가 이웃의 여고와 통합하기를 기도하겠다.

국사 교과서를 펼쳐 가장 먼저 읽는 단원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E.H.카의 물음에 부응하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경험상 대개의 교사들은 이 단원을 하루도 안 되어 독파하기 일쑤였다. 역사 교육이 교과서의 주요 대목들을 암기하여 객관식이 다수인 시험문제를 맞히기 위한 것인 탓이다. 필자는 이 단원에서 최소한 1주일동안의 수업시간을 모두 할애할 것이다. 학생들의 푸념이 들려올 지도 모른다. 잘하면 학부모의 귀에 들어가 항의가 들어올지도 모른다. 물론 학생의 장래를 걱정하는 선생으로서, 서울대제일주의를 욕하는 일도 서울대 출신들의 몫임을 목격한 인생의 선배로서, 시험 결과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는 없다. 허나 학교가 그깟 시험점수를 올리는 곳인가. 그렇다면 학교는 문을 닫고 교사들은 학원으로 들어가는 게 낫다. 역사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교과서나 문제지에 제시된 판에 박힌 답만을 남기고 빠르게 암기에 들어가는 태도에 맞서, 필자는 너 임자 만난 줄 알아라, 는 식으로 덤벼들 것이다. 입시에 쫓기는 학생들을 고려해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의 내용을 요약해 프린터로 돌리고, 첫 주의 수업에서 열띤 토론을 유도할 것이다. 필자는 토론을 벌일 때 처음에는 쭈볏쭈볏하던 학생들이 초반에 나온 발언을 곱씹다 어느새 진지한 논자로 변신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필자는 수업의 처음, 중간, 종반에 잠시 끼어들어 유명 사학자, 철학자들의 사관 및 역사철학을 소개하면서 토론의 댐을 열 것이다.

필자는 사관에 못지 않게 현대사, 특히 한국현대사에 관한 부분을 교실에서 잘 듣지 못했다. 교육과정이 기말고사 이후로 밀려나 '시험에 안 나오는 나머지 부분'으로 치부되거나, 시험 직전에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수업하여 '잘해야 한문제나 나오는 단원'으로 전락했었으니까 말이다. 요사이에는 대폭 보강되고 별도로 '한국근현대사'가 수능선택과목으로 지정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근대 이전의 역사와 이후의 역사를 이어서 생각하여 전자가 후자에 끼친 영향과 후자를 통해 전자를 읽는 지혜를 헤아리는 기회가 더 필요하다. 필자는 교단에서 김춘추의 나당연합 외교과 오늘날의 한미동맹을 견줘볼 것이다. 조선시대 훈구파와 사림파, 중상파와 중농파를 대조하면서 함께 좌우혁보의 전선을 설명할 것이다. 저널리즘을 가까이 두고 수업할 것이다. 당대의 시사문제를 직시한 사람은 나중에 역사를 바로 기억하기 용이하다.

수행평가나 방학숙제에 도입할 것은 '유적 발굴'이다. 고고학적인 탐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규모가 적거나, 중요성이 낮게 취급되었거나, 역사유적이라고 여겨지지 않은 곳을 찾아서 발굴하는 숙제다. 자기만 알거나 아예 사연을 지어내는 걸 막기 위해서 얼마나 대중들에게 가치있는지를 채점기준으로 삼을 것이다. 발굴하지 않거나 못한 학생들에게는 독서 숙제를 내줄 것이다. 그리하여, 1학기나 여름방학에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등을 과제로 하여 역사관 논쟁을 벌일 것이다. 토론장소는 인터넷과 교실을 아우른다. 2학기나 겨울방학에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와 에릭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을 통해 유구하다고 인정된 것이 실은 머지 않은 과거에 인위적으로 생겨났음을 고찰하면서, 찬반 토론을 벌일 생각이다.

아무래도 필자는 제도권 학교에서는 배겨나기가 힘들 것 같다. 학교장, 동료 교사들, 학부모, 그리고 불만을 가진 학생들의 항의가 지속되면, 살아남을 수 있어도 사표를 던져 버리는 게 필자의 성격이다. 그러나 필자는 굳이 그런 사태를 그려보지 않는다. 애초에 교육철학과 수방식이 맞아 떨어지는 대안학교 쪽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대안학교 선생님들이 박봉에 고생하는 것은 듣지 알아도 충분히 알 만하다. 돈이 문제라면 다른 일을 벗삼아 하여 생계를 꾸릴 것이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지식인 하워드 진도 미국의 교사였다. 교사는 그저 그런 직업이라느니 그래도 요즘 불경기에 인기직종이라느니 사람들은 입방아를 찧는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교사가 되고 싶지 않다. 비판적 지성인이 월급받아먹는 곳이 대학 뿐만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다. 교실에 학생과 같이 갇힌 선생이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 교실을 우주로, 우주를 교실로 만드는 선생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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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진 <연두>에 연재.


'그리운 내 님'은 독립운동가 박헌영

[한국현대사 OST] 김정구, <눈물 젖은 두만강>


김수민 woodstocksm@naver.com

 

* 최초의 국민가수? 혹자는 그를 '그레이트 김정구 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97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건국 이후 최고의 코미디언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김국진이 1위를 차지했다. 비결은 간단했다. 그가 ‘당시에’ 가장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같은 조사를 벌이면 비슷한 원리에 따라 순위가 도출될 것이고, 구봉서나 배삼룡 같은 이들은 아무래도 제 영향력에 비해서는 뒷전에 쳐지기 쉬울 것이다. ‘가수’로 부문을 바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평론가나 저널리스트, 연구자를 빼고 일반 국민들에게만 투표를 맡긴다면 말이다.


  순위야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한국사회에서 기록과 기억은 어떤 분야에서든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이것은 ‘학술’이나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사고하는 시간이 짧아질수록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예술도 좁아질 수밖에 없다.


  최고의 스타 김정구와 민중의 희망 박헌영


  이 칼럼의 제목은 ‘한국 현대사 OST'이지만 오늘은 ‘근대사’에 있었던 음악을 끄집어 내려고 한다(왜 나는 제목을 ‘근현대사’라고 짓지 않았을까). 일제시대는 나라 없는 민족들임에도 조선인들이 ‘국민가수’를 가지기 시작했던 시점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김정구이다. 1916년 함경도 원산에서 난 김정구는 연주에 능했던 가족들의 영향을 받으며 자연스레 가수로 성장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개신교 신자로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했고, 일찍 학업을 접고 양치기나 물지게꾼을 해야 할 만큼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음악이론과 바이올린 연주를 배웠다.


   충무로 대중음악계에 뛰어든 그는 <서울감상곡>, <항구의 선술집> 등의 곡을 취입하여 장안의 스타로 떠올랐고, 제법 거금을 벌며 철마다 세벌쯤의 양복을 맞추어 경성 최고의 멋쟁이로 꼽혔다. 그렇다고 그가 ‘가오’만 한껏 잡을 줄 아는 가수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재즈의 선구자, 루이 암스트롱과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재담과 제스춰였다. 아버지의 소질을 물려 받았는지 만담에 뛰어났던 데다가 그의 노래는 대화식으로 되어 있었다. 그는 춤을 추는 것은 물론, <왕서방 연서>를 부르며 이가 빠진 중국인 복장을 하고 세태를 풍자하기도 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은 이러한 김정구를 인기연예인에서 민족의 대표 가수로 격상시킨 노래였다. 이 곡은 작곡가 이시우가 두만강 유역에서 독립군의 아내를 우연히 만나면서 만들어졌다고 전해졌었다. 그러고 나서 정소월이라는 가수가 처음 불렀다가 이시우가 정식음반으로 남기면서 김정구에게 노래를 맡겼고, 김정구가 작곡가 김용호에게 부탁해 가사를 3절까지 늘렸다는 사연이다.


  그러나 이를 뒤엎는 주장이 역사학자 임경석을 통해 소개되었다. 그는 항일운동가이자 조선 공산주의의 거두였던 박헌영의 일대기를 정리하면서 <눈물 젖은 두만강>에 얽힌 증언을 담았는데, 증언자는 원경 스님으로 박헌영의 아들이다. <동아일보>에서의 퇴사와 <조선일보>에서의 해직 등을 거치며 끊임없이 혁명운동을 해온 박헌영은 1925년 부인 주세죽과 함께 경찰에 체포됐다. 모진 고문을 당했던 박헌영은 재판정에서 정신이상 증세를 일으키며 난동을 부리는 등(이것은 의도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병세가 심화되었고, 1927년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병원에 입원한다. “눈을 뜬 채 등골이 뽑히고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섰으니, 그의 아내가 안은 것은 남편의 잔해였다.”:소설가 심훈이 묘사한 그때의 박헌영이다. 참고로 심훈의 소설 <동방의 애인>은 박헌영, 주세죽 부부를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



* 주세죽, 박헌영 부부. 아기는 딸 박 비비안나. 허나 주세죽은 나중에 사회주의 활동가 김단야와 사랑에 빠지고

둘은 결별하게 된다. 일제 말기 박헌영과 잠깐 만난 어느 처녀는 그의 아들인 원경 스님을 낳고 집으로 끌려 내려갔으며,

박헌영은 윤레나라는 여인과 결혼하게 된다.  


   1928년 8월 두 부부는 바닷길을 통해 소련으로 탈출하였다. 그때 영화촬영차 두만강에 있다 소식을 들은 작곡가 김용호가 두만강변에서 영감이 떠올라 노랫말을 썼다는 것이 원경 스님의 주장이다. 가사에 나오는 ‘그리운 내 님’은 박헌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체가 뚜렷하지 밝혀지지 않았던 작곡가 김용호는 다름아닌 김정구 친형 김용환의 다른 이름이었다. 원경 스님은 또 1963년 라디오에 출연한 김정구가 <눈물 젖은 두만강>에 얽힌 이야기를 친형으로부터 들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노래는 널리 불려지고, 박헌영은 잊혀졌다 


  <눈물 젖은 두만강>은 중·노년층 사이에서 끊임없이 불려져 왔던 국민가요이며, 강산에의 <라구요>로 또 다른 울림을 얻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노래가 ‘빨갱이 두목’을 그리워하여 작곡된 것이라니! 대반전이 따로 없다. 더구나 박헌영을 미제의 스파이로 몰아 처형한 북한에서도 이 노래에 담긴 역사성과 철학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던가.


  사실 나는 해방 이후 박헌영의 행적에 대해 지극히 비판적이다. 그는 공산당계의 헤게모니를 무리하게 관철시키기다가 좌익 내부의 협동에도 큰 지장을 주었으며, 공산당계의 신전술에 따라 민중들이 궐기했을 때는 이미 이북으로 탈출해 있었다. 남로당의 봉기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국토완정론’에 힘을 실어주었고, 그 결과 일어난 전쟁은 도리어 이승만의 권력을 더 굳건히 다져 주었다. 북한 역시 건국 때 갖고 있었던 얼마간의 다원성과 역동성을 잃어버렸고, 김일성의 독재체제가 세워지면서 그 자신부터 희생양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당시 북한은 박헌영이 연희전문 창립자 원두우의 아들 원한경을 만나 미국의 스파이가 되었다면서, 일제 말기와 해방정국기 그리고 한국전쟁기에서 보여준 행동들이 죄다 미국을 위한 작전이었다고 우겨댔다).


  그러나 우익 계열의 민족지도자들이 은둔이다 문화운동이다 심지어는 친일이다 하면서 침묵하거나 훼절하던 일제 말기에, 박헌영이 지하에서 부단히 독립투쟁을 이어가며 ‘그리운 내 님’으로서 조선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것은 엄연한 진실이다. 해방정국기에도 미군정은 그를 여운형, 이승만, 김구와 같은 반열에 선 대통령 후보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단순히 권력투쟁에 소질이 있어서 좌익계의 다른 라이벌을 제치고 또 우익의 견제와 탄압을 받았던 것만은 아니다. 그는 명망가 중심의 정치운동에 갇히지 않고 노동자, 농민의 운동을 규합하고 조직하는 탁월한 역량을 보여줬다. 조선공산당의 영수, 북한의 부수상으로 나타나 권력을 잡는 듯했으나 결국엔 숙청의 대상이 되어 사라졌지만 말이다.


  남과 북 모두에게 잊혀진 인물이 박헌영 뿐이랴. <눈물 젖은 두만강>은 그들 모두를 위한 노래이다. 나아가 제국주의와 전쟁, 가난과 독재의 고난에 부딪혀 나갔던 조선 민중의 노래인 것이다.




* <눈물 젖은 두만강>을 합창하는 사람들. 박헌영이 누구인지 아는 관객은 거의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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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史의 찬미 | 2008. 4. 30. 17:51 | Posted by 김수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될 인물들의 명단이 발표되었다. 그 명단은 '직종'별로 분류되어 있고, '직위'를 준거로 삼고 있다. 이는 친일을 어설프게 은폐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친일파 인명사전에 등재된 이들 중 군수급의 관료를 지냈다는 사실 이외에 진정 제국주의에 부역했는지 알 수 없는 인물들도 꽤 많다. 친일의 핵심은 '민족을 배신'하고 '일본에 붙은' 데 있지 않다. 친일은 어떠한 경우에는 전쟁범죄였고 대부분 인권과 민주주의를 탄압한 것이었으며 (천황제) 파시즘에 대한 협력이었다. 이런 여러가지 측면과 층위들이 규명되지 않으면 친일파를 공개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친일파로 지목된 인물들의 이름의 순서대로 각각의 이력과 행적을 공개하는 것과 친일행위를 정리하면서 관련인물을 드러내는 것은 다르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작업 과정에 목격된 과거사 청산의 열의는 고무적인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사건은 인명 순으로 정리된 사전이 편찬되면서는 '반민특위의 복수', '뒤늦은 숙청' 이상을 넘지 못하는 것이다. '매국노'와 파쇼 군경과 행정공무원들이 친일파라는 기준 하에 그냥 뒤섞여 버린 사태에 입맛이 좀 씁쓸하다.

예전 김명인이 친일인명사전의 허점을 지적했던 글이다.


 

[정동칼럼] ‘친일인명사전’이라는 문제
 
[경향신문 2005-09-08 18:42]

〈김명인/인하대 교수·계간 ‘황해문화’ 주간〉


한 민간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예비작업으로 친일인사 3,000여명의 명단을 발표해 적지 않
은 파문이 일고 있다. ‘민족정기 회복’이라는 거창한 민족주의적 수사학을 동원할 것도 없이 해방 이후 우리
 현대사의 왜곡이 바로 친일잔재가 온존된 데서 비롯되었고, 지금도 한국사회의 수구냉전적이고 비자주적
인 보수기득권층의 헤게모니의 원류가 바로 그 친일잔재에 있기 때문에 친일잔재의 올바른 청산이 결정적
인 중요성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과연 그 방법밖에 없었나-


하지만 친일잔재를 올바로 청산하는 한 계기로서 친일인명사전의 편찬이라는 방식을 택한 데 대해서는 과
연 그 방법밖에 없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전이라는 것은 대단히 보수적인 기술방식으로 한번 사전에
 등재된 사실은 좀처럼 수정되거나 말소되기 힘든 강한 경직성을 지닌다. 즉 그 사실은 하나의 가설에서 ‘정
설’로 고정되는 것이다. 아마도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는 주체들의 입장에서는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사전이
라는 형식을 선택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워낙 한국사회에서 친일잔재와 직·간접적으로 같은 이해를 갖는 기
득권 세력의 힘이 강한 만큼 저항이 있기 때문에 차제에 비교적 명백한 친일인사들을 ‘친일파’로 명토 박아
서 친일잔재 청산의 교두보를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성을 이해 못하는 바 아니다.


그러나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친일잔재에 뿌리를 댄 현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물질적 기득권 세력
의 힘이 여전히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민주화와 남북화해, 과거청산이라는 대세 또한 돌이킬 수
없는 것이고 세대를 거듭할수록 기득권층의 세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사전 만들기 같은 유격적 전술이 아니고 친일잔재를 넓게 포위하는 헤게모니적 전술이다.


게다가 친일문제는 생각보다 간단치 않은 문제이다. 적절한 기준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설사 그런 기
준이 마련되어서 그 기준에 저촉되는 것이 확실한 인사라 할지라도 그 전후의 행적을 함께 고려하면 상대적
으로 평가가 곤란한 경우도 대단히 많다.


뒷북을 치는 감이 없지 않지만, 친일인명사전을 만들기 전에 먼저 광범한 친일행적자료를 먼저 공개하는 방
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누구 누구가 친일파라고 규정하고 사전적으로 고정시키는 대신, 그들의 친일관련
행적과 그 외의 전체 행적들을 자료집 형태로 폭넓게 수록하여 국가적 규모에서 시민들에게 배포하거나 열
람하게 하고, 그 다음에 그를 토대로 광범한 국민적 토론을 통해 친일문제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
내고, 그 결과 명백한 친일파들을 적출해 내고 엄중히 논죄하는, 그런 유연하고도 보다 견고한 방식의 친일
잔재 청산이 더 바람직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과거’ 어설픈 봉인될 수도-


그리고 기실 더 중요한 것은 친일인물이나 식민지적 유제, 혹은 그에 기반한 기득권 구조의 청산이라는 문제
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의식·무의식적으로 침전되어 있는 친일적 정신구
조의 청산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성찰해 내는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에게 오랫동안 지배당하면서 내면화
된, 강한 것에 대한 굴종과 약한 것에 대한 경멸이라는 이중적 정신구조는 일제가 남긴 어쩌면 가장 강력한
정신적 잔재이자 해방 전의 친일적 경사를 오늘날의 친미적 경사로 이어주는 가장 든든한 매개고리이며 이
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는다면 친일잔재는 새로운 형태로 언제든지 재생산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올바로 성
찰하고 극복하는 보다 본질적인 기획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오늘의 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이라는 이벤트는
미래를 열어젖히는 문고리가 아니라 과거를 서둘러 장송하는 어설픈 봉인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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