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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민족주의자인가 사회주의자인가

史의 찬미 | 2008. 9. 6. 02:22 | Posted by 김수민
지난 봄 <일제시기정치사상사특강> 수업 중에 썼던 글이다.

 

성의 있는 김원봉 발제문 잘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발제자께서는 의열단의 노선변화를 설명하시면서 20개조 정강 정책을 창당 당시의 '공약 10조'와 견주어 좌경화 되었다고 평가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정치경제적 사상이 담긴 20개조 정강 정책을 행동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공약 10조'와 대조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발제문 내용만으로는 사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잘 유추하기가 어렵습니다.


김원봉에 대해서는 그가 얼마나 사회주의적이고 또 민족주의자인가,가 논의가 되는 것 같습니다. 제 예상으로는 이번 수업시간에도 그랬을 것 같은데요. 여기에 관해 준거틀을 마련하는 데 있어, 강의 초반에도 교수님께서 거론하신 바 있지만 개념정리나 구획기준을 한번 더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공산주의자가 아니면서 민족해방투쟁을 하는 이들을 민족주의자라고 통칭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좌파인데 단계론적으로 반봉건 부르조아 민주주의혁명 노선과 함께 민족독립을 추구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다만 공산주의자라는 공격에 정치적으로 대비한 결과로 '알고 보면 민족주의자(민족적이다)'라는 변명 또는 해명이 나왔던 사정은 있을 것 같지만요. 온건사회주의자와 진보적 민족주의를 구별하지 않으면 남는 건 '공산주의자냐, 민족주의자냐'는 거친 질문 뿐일 것 같습니다.


김원봉의 행적이나 타 정파와의 갈등을 보면 마르크스주의자나 공산주의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대신, '사회민주주의자'라고 적극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비-공산계열의 온건한) 사회주의자'라는 평가는 가능한 것 같습니다. 그의 지인이었다는 황용주 씨는 김원봉이 이런 말을 했었다고 증언합니다. "(...) 무산대중을 해방시키자는 데는 이의가 없다. 다만 현실적으로 무리가 따른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봉건적 구질서를 고집할 수 없다. 불평등한 계급사회는 어디까지나 타파되어야 한다." 당면과제는 반봉건 혁명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계급사회 타파를 지향하고 있는 김원봉의 지향이 드러나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건 하나의 예이겠지요.


계급독재를 지향하는 코민테른형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도 서구나 북구의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나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계급사회의 폐단을 없애 나가고 소유를 사회화하는 사회주의자가 있을 것 같은데요. 일단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김원봉은 그에 비슷한 것 같아요.


나중에 여운형이 있던 조선인민당에 참여하는 이여성과 조선노동공제회에서 노동운동의 서막을 연 김약수 등이 그의 친구였다는 것도 눈여겨 볼 만합니다. 셋은 함께 중앙학교를 다녔고 3.1운동 반년 전에 중국 남경으로 유학도 가지 않았습니까. 또 한편으로 중국으로 건너온 안광천과 1930년 전후에 교류한 것도 의미심장한 과정입니다.


물론 그의 노선은 이여성, 김약수 등과도 다른 부분이 있었고 여기서도 두드러지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운형이 신한청년당을 구성하고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로 보냈을 때 김원봉 등은 외국인에게 호소하여 동적적 처분을 기대하는 것을 못 마땅해 했습니다. '외교를 통한 독립노선'을 강하게 부정한 것이 '비-코민테른 사회주의', '민족협동전선'과 함께 그의 특성으로 꼽힐 수 있는 대목이지요. 이여성, 김약수가 3.1운동을 맞아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도 김원봉은 해외에서의 무장투쟁에 중점을 두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쑨원의 권유를 받아들여 기존의 의열단 노선을 접으면서까지 '폭력투쟁'을 '무장항쟁'으로 승화시키기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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