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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르자
한국현대사 OST # 4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영화 <품행제로>의 한 장면. 롤러장에서 마주친 공효진네 패거리와 임은경과 그 친구들이 한쪽은 김승진의 <스잔>을, 다른 한쪽은 박혜성의 <경아>를 신청하며 신경전을 벌인다. 당시는 쾌활하고 맹랑한 남성상에 열광하던 이들은 김승진에, 자상하고 부드러운 남자에 이끌리던 이들은 박혜성에 환호하는 분위기였다. 여성 스타의 경우 김완선과 이지연이 각자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라이벌 승부를 펼쳤었다.

  ‘운동권’에서도 각자 ‘미는’ 노래가 달랐다. 그들이 부르는 민중가요의 가사가 정치적 이념을 담기 마련이었으므로 제목에서부터 취향은 확연히 갈렸다. 반미와 통일, 민족해방을 추구한 계열은 한반도 남반부에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했고 김대중을 ‘비판적 지지’했는데, 그들이 불렀던 <아 민주정부>의 가사는 이렇다: “한순간을 살아도 산맥처럼 당당하게 침묵의 거리를 박차고 투쟁하는 삶이라면. (중략) 아 아 민주정부 사천만의 희망이여 죽어도 다시 살아도 세우리라 꽃피우리라.” 

  반면 자본주의 극복과 노동해방을 목적으로 삼았던 계열 가운데 일부는 독자적인 진보정당을 선택했다. 13, 14대 대선에서 백기완 선본을 구성하고 이들은 <민중권력쟁취가>를 불렀다. “독재와 독점의 땅에 빼앗기고 짓밟힌 노동형제여 (중략) 역사 위에 피어 만발한 해방의 불꽃으로 투쟁하리라 노동해방 그날을 위해 민중권력쟁취투쟁.” PD(민중민주계열)라고 불려진 이들은 진보세력의 만국공통 투쟁가였던 <인터내셔널가>도 즐겨 불렀다. 하지만 NL(민족해방계열)은 그렇지 않았다.

박기순과 윤상원의 영혼결혼식에서 울려 퍼지다

  <인터내셔널가>조차 같은 나라에 사는 양측을 묶어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한국 진보진영이 두루 공유하는 몇 가지 노래들이 있기는 하고, 지금은 진보진영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들도 심심하면 열창하는 노래도 있다. 4년 전 총선에서 탄핵역풍을 업고 당선된 열린우리당 국회의원들이 청와대에 입성하여 불렀던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79년 노동운동을 하던 가운데 사망한 고 박기순과 그 이듬해 광주 시민군으로 죽어간 고 윤상원의 영혼결혼식에서 탄생한 노래다. 두 사람은 광주에서 야학활동을 하며 서로 알고 지냈던 사이다. 박기순이 죽던 날 윤상원은 일기를 썼다. “(···) 모닥불이 탄다./ 기순의 육신이 탄다./ 훨훨 타는 그 불꽃 속에/ 기순의 넋은 한 송이 꽃이 되어/ 우리의 가슴 속에서 피어난다.” 광주의 문화운동가인 김종률이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에서 가사를 따와 작곡한 이 노래는 <넋풀이-빛의 결혼식>이라는 음반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진보정당의 행사에 가면 으레 ‘민중의례’라는 것을 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먼저 간 열사들을 묵념으로써 추도한다. 민주·민족·민중운동에 있어 <임을 위한 행진곡>이 가지는 의미는, <애국가>가 일반 국민들에게 가지는 위상과 비견될 만하다. 나아가 이것은 아시아판 ‘인터내셔널가’라고도 할 수 있다. 중국이나 필리핀 등지에서도 이 노래는 알려져 있고, 꽤나 자주 입에 올려진다고 한다.

  1980년대 <님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했던 사람들의 운명은 이리저리 갈라졌다. 자유주의 성향의 노무현과 일부 학생운동가들은 국민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쳐 한국사회의 ‘신주류’가 되었다. ‘백기완 선본’이 만들어낸 흐름은 진보정치추진위, 진보정치연합, 국민승리21을 경유해 민주노동당으로 이어졌고, 김대중을 밀던 민족해방계열도 민주노동당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아 민주정부>와 <민중권력쟁취가> 간의 갈등과 분열은 진보정당 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북정책의 주요 목적은 (연방제)통일인가 평화(체제구축)인가. 북한 인권 문제에는 침묵해야 하는가. ‘민주노총당’으로 노동자들을 대변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을 두고 민주노동당은 분당에 이르렀다. 이른바 평등파(신문기사는 이들을 PD라고 부르지만 정확한 설명은 아니다)와 박승옥, 진중권 등 민주노동당 바깥의 진보주의자들이 모이고, 스타의원인 노회찬·심상정까지 신당창당을 결단함으로써 ‘진보신당’이 출현하게 되었다.

‘민중의례’에 대한 진보신당의 문제제기

  진보신당이 처음 태동할 무렵 한 토론회에서, ‘만화논평’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이창우는 “행사를 할 때마다 반드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야만 하느냐”며 문제제기를 했다. 일부 당원들도 지나치게 상시적으로 이뤄지는 ‘민중의례’를 도마로 올렸다. 마술사, 비보이, 율동패, 통기타가 어우러진 3월 16일 진보신당 창당대회는 그런 고민의 결과였다. 

   
▲ 엄숙주의에 대한 거부에 도전했던 진보신당 창당대회. 의자 마술이 약간 허술했던 모양인지 무대로 동원(?)된 언론인 홍세화와 김석준 부산대 교수는 괴로워 했다.

  만나서 반갑게 인사하다가 행사 초반 갑자기 얼굴빛이 달라지며 묵념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풍경은 아니다. 지금의 통합민주당이나 노무현 계열까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도, 그들의 정치노선이 옳든 그르든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그만큼 그 노래는 빛바래고 변질되었다. 그러나 어찌 그런 이유로 버릴 수 있을까.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낀다지만, 이제는 깃발을 뽑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러보자. 4.3 항쟁기념일을 무심히 지나친 이명박 대통령이, 왕년엔 운동권이었다지만, 다음달에 새삼 이 노래를 외울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 김수민



:

조봉암과 변절한 후예들 그리고 김대환 
김수민의 한국현대사 OST #3
대나무산에 내린 검은비
 
 2008년 03월 22일 (토) 16:11:47 김수민  woodstocksm@naver.com 
 
 
 악극단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 방랑생활을 보다 못한 외삼촌이 나를 경찰학교에 들여보낸 것이다. 경찰은 의외로 적성에 맞아 그럭저럭 견뎌낼 수 있었다. 31기로 졸업한 뒤 초대 농림부장관을 지낸 조봉암씨의 호위경관을 맡았다. 그분이 외숙모의 친오빠였기 때문이다. 2년 정도 그분을 호위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정신, 옥고와 갖은 고문을 치른 뒤 5개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으로 글씨를 기막히게 써 내려가는 모습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그림자처럼 그분을 따라다니며 나는 늘 그 생각에 골몰했다. 훗날 쌀 한톨에 반야심경 200여 자를 새겨 넣는 '미친 짓'도 나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 흑우 김대환, <<연습은 장엄한 구도의 길이었다>>, 현암사, 2005, 31-32쪽.


 
▲ 김대환이 쌀 한톨에 새긴 반야심경. 그 역사적 배후에는 조봉암과 '다섯개의 손가락'이 있었다.


   전향했지만 변절하지 않았던 대나무산

 일제 시대 옥고를 치루면서 다섯 개의 손가락을 잃은 죽산(竹山) 조봉암은 해방을 앞둔 몇해동안 비교적 안온한 나날을 보냈다. 사실상 전향을 선언하고 독립운동을 떠난 결과였다. 이는 그가 해방공간에서 활발하고 주도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원인이기도 했다. 조봉암은 공산당의 지도자인 박헌영과 결별하면서 결국 공산주의자 노릇을 그만두겠다는 제2의 전향을 선언했다.

  그는 자본독재와 공산독재를 모두 반대하는 ‘제3전선’을 형성하는 운동에 나섰다. 남북과 좌우의 통합을 모색하던 인사들이 죽거나 현실정치에서 등을 돌릴 때, 조봉암은 제도권 안에서 견디는 쪽을 택했다. ‘일민주의’의 기치를 내걸며 정당정치에 극도의 불신을 보냈고 전략적 파트너였던 한국민주당과 불화하던 이승만은 전직 공산주의자였던 사회민주주의자 조봉암을 내각으로 불러냈고, 조봉암은 대한민국의 초대 농림부장관이 되었다.

  그의 완강한 제도정치권 참여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지만, 분명 그의 전향은 변절이 아니었다. 조봉암은 공산주의를 버리고 정립한 민주적인 사회주의와 사회적인 민주주의를 따랐다. 왕족 출신 독재자 이승만과 지주·친일파로 이루어진 보수야당에 마음을 주지 못한 인민들이 조봉암의 곁으로 모였다. 왕년에 우익깡패였던 자도 그를 보좌했다. 그는 포연 냄새가 채 가시지도 않은 1950년대에 ‘평화통일’을 제창했고, 진보당의 강령은 ‘피해대중’의 지지를 받아냈다.

  조봉암은 어찌 보면 구질구질하게 느껴질 만큼 살아남는 길을 거듭 선택했다. 그러나 그의 인기가 이승만이나 신익희, 조병옥 같은 보수 정치인을 위협하면서 그는 더 이상 생존할 수 없었다. 이승만은 조봉암의 표묶음 앞뒤에 자신의 표를 덮는 등의 대대적 부정선거로 대한민국의 세 번째 대통령이 되었고, 그 후 정권은 조봉암을 죽이는 공작에 나선다. 꾸준히 외쳐온 평화통일론 그리고 남파간첩이라고 주장·간주된 양명산과의 만남을 근거로 조봉암은 마침내 1959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사형을 당했다. 

  허영만의 명작만화 <오! 한강>은 적지 않은 분량을 주인공과 조봉암의 인연(물론 픽션이다)에 할애하고 있다. 이외에도 조봉암을 기리고 새기는 노력들은 수두룩했다. 반면 조봉암 사후 진보정당인들이 걸었던 행보는 드러내기  부끄러운 변절의 역사였다. 박정희 정권기에 통일사회당을 이끌었던 당산 김철(김한길 전 국회의원의 아버지다)은 전두환 일당이 만든 국가보위입법회의에 들어갔다. 진보당 간사장이었던 청곡 윤길중 역시, 민주사회주의자를 자처하던 남재희와 함께 제5공화국의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에서 국회의원을 지냈고, 민정당 대표와 국회 부의장까지도 역임하였다.

  이 전향과 변절의 이야기는 윤길중의 아들이 반 전두환 투쟁에 나서게 되는 또 다른 일화를 남기기도 했는데, 이것은 김소진의 소설 <혁명기념일>에도 픽션에 섞여 묘사되어 있다. 남재희의 딸도 학생운동에 가담해 아버지를 곤란케 했다고 전해진다. 남재희는 오늘날 진보정당에 애정 어린 충고를 연신 보내며 ‘진보 원로’처럼 행사하는가 하면, 운동가였던 그의 딸은 얼마 전 한미FTA를 주도한 실무진의 한명으로 나타났다.


 
 흑우 김대환의 생전 인터뷰 및 연주 동영상. 출처:T42.co.kr


  불꽃이 꺼지는 동안 검은비가 내렸다

  조봉암의 후배들이 주류 엘리트의 본연에 충실하며 ‘이너서클’로 화려하게 진입하는 동안, 조봉암의 호위경관이었던 흑우(黑雨) 김대환은 음악에 일로매진한다. 그는 ‘애드 포’가 첫 음반을 내기 직전까지 신중현과 함께 록과 블루스를 연주했고, 조용필, 최이철(훗날 ‘사랑과 평화’)을 대동하고 ‘김트리오’라는 밴드를 결성한 바 있다. 그 후 프리재즈에 투신하며 ‘드럼’이 아닌 ‘북’을 연주하였다. 즐겨 타는 할리 데이비슨을 무대에 올려 그 시동 소리를 음악으로 승화시키고, 한 손에 여러 채의 채를 끼워 절묘한 소리를 내는 모습은 김대환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위에서 인용했듯 조봉암에게 충격과 자극을 받은 그는 글씨에도 능했다. 공연 직전 물 묻힌 손가락으로 화선지에 좌우가 뒤바뀐 글씨를 써내려가는(관객들에게는 글씨가 똑바로 보인다) 퍼포먼스로도 유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압권은 쌀 한톨에 반야심경 200여자를 새긴, 이른바 ‘세서미각’이었다.

  집념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많다. 그렇지만 묵묵히 흐르고 또 흐르는 사람보다는 활활 타오르다가 꺼져버리는 사람이 더욱 많다. 조봉암을 따라다니던 청년들은 가슴 속에 불길 하나씩은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주류의식에 함몰되거나 오랜 야인 생활에 지쳐 하나둘씩 타협하고 훼절하였다. 젊음과 객기에 기대 급격히 피어오른 불꽃은 철이 들어간다는 무상한 핑계 속에서 꺼져가곤 하였다. 진정한 열정은 언제나 은근과 인내에 빚을 지는 법이다. 활화산처럼 북을 치는 김대환의 이면에 세서미각의 김대환이 있었듯 말이다. 지난 3월 1일은 김 선생의 4주기였다.

추신: 원고 마감이 끝난 3월 23일, <조봉암과 진보당>의 저자 정태영 선생이 작고하였다. 북한에게 교육받은 이론가로 조작되어 조봉암과 함께 재판을 받았던 그는 이후에도 줄곧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활동을 했다. 또 뒤늦게 대학원에 들어가 사회민주주의의 한국적 실현을 학술적으로 탐구하기도 했다. 유저로는 <한국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역사적 기원>.

/김수민 woodstocksm@naver.com


 


:

정태영 선생 별세

史의 찬미 | 2008. 3. 23. 16:23 | Posted by 김수민
건국 이후 혁신정당사를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그는 더없이 든든한 거목이었다.
진보당 사건 당시 그가 패기와 객기에 차서 남긴 메모가
조봉암에 대한 사법살인에 대한 무기로 쓰인 바 있었으니
그가 이후에 겪었던 심적 고통은 짐작할 만하다.
정 선생이 근래에 진보진영에 남긴 말들에 전부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분이 변함없이 한 길을 걸어간 것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내릴 수 없어도 늘 생각에 잠길 기회와 마주치곤 한다.
진보당계와 근민당계, 민자통과 중통련의 차이를 연구하며
한국 진보진영에게 통일은 무엇인가를 돌아봐야 하겠다는 결심을
내게 안겨준 분도 그분이다.
저승에서 조봉암 등 동지들과 반갑게 해후하시길 빈다.
공교롭게도 정태영 선생이 돌아가시기 이틀 전
나는 조봉암에 대한 원고를 작성한 바 있다.




'진보당 사건' 마지막 생존자 정태영 박사 별세
  [弔辭] 진보 정당 실천 위해 일생 바친 큰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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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yondo.net/news/articleView.html?idxno=1424

 
'박정희찬가'에 맞섰던, 대운하시대에도 듣고픈 이노래 
김수민의 한국현대사 OST #2
신중현 <아름다운 강산>
 
 2008년 03월 08일 (토) 20:37:22 김수민  woodstocksm@naver.com 
 
 
  전편에 나온 ‘시나위’의 주요 활동무대는 ‘록 월드(Rock World)’였다. 1984년 ‘라이브’라는 카페를 운영했던 신중현이 이태원의 태평극장을 개조하여 만든 이 헤비메틀 전용 공연장은, 신대철, 임재범, 김종서, 김도균, 오태호, 손무현, 서태지 등의 산실이자 숙식소였다. 신중현은 신대철, 신윤철, 신석철이라는 세 음악인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1980년대의 록씬과 1990년대 가요계를 수놓은 뮤지션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신중현은 널리 알려졌다시피 김추자, 펄 시스터즈, 김정미, 박광수, 박인수, 바니 걸스를 스타덤으로 올려놓았고, ‘더 멘’과 ‘엽전들’을 결성해 한국 록 제1의 전성기를 일구었다.   그러나 1980년대와 1990년대는 더 이상 신중현의 전성기가 될 수는 없었다. 김완선의 데뷔곡을 만들기도 했으나 그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1970년대 중후반 활동이 중단되었던 신중현을, 세월은 충분히 기다려주지 않았다.

 전쟁고아 신중현과 전쟁청년 박정희의 악연

 
 ▲ 신중현이 결성한 한국 최초의 록그룹 '애드 포'의 음반
   .
 1938년 출생한 신중현의 인생이 결정적으로 바뀐 시기는 그의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온 뒤 터졌던 한국전쟁이었다. 전쟁고아가 되어 하루 17시간씩 막일을 하며 생계를 꾸리던 중 그는 기타에 취미를 붙였고 홀로 연습하다시피하면서 연주력이 일취월장했다. 그는 ‘재키 신’이라는 별명으로 미8군쇼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주한미군은 그에게 가난을 선사했던 한국전쟁이 남긴 또 다른 유산이자 터전이었다.

  한국전쟁은 많은 청년들에게 위기이자 기회였다. 좌우익의 대결 속에 똑똑한 젊은이들이 상당수 사라졌지만, 그래도 군부의 우산 아래 있던 청년들은 목숨을 부지하고 미래를 도모할 수 있었다. 문익환이나 리영희처럼 나중에 ‘재야 인사’로 불리던 인사들조차 국군 통역장교 출신이다.

  남조선노동당의 군부 내 프락치였다가 체포된 뒤 동료들을 밀고하고 살아남은 박정희는 비공식적으로 군 업무에 복귀했던 즈음에 한국전쟁을 맞이했다. 1949년 이미 북조선의 대대적인 남침 가능성을 예측하면서 정보장교로서의 두각을 나타낸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어머니의 제사를 마치고 부대로 돌아와 그의 사상에 대한 세간의 의심을 깨끗이 씻어냈다. 동거녀와 결별한 고통을 딛고, 전쟁 중 만난 육영수와 결혼하기도 했다. 6.25는 5.16의 젖줄이었다. 신중현은 뒷날 쿠데타 이후 출현한 독재 정권과 악연을 맺는다.

 고향을 떠나온 백인 미군 병사들은 신중현에게 주로 컨트리 음악을 요구했지만, 그는 온갖 장르를 두루 소화하면서도 록을 지향했다. 1962년에는 한국 록밴드의 원조인 ‘애드 포’(Add 4)를 결성한다. 이 밴드는 영국의 비틀즈(The Beatles)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다. 기타 둘, 베이스, 드럼으로 짜여진 라인업도 같았고, 그런 형태를 보편적으로 퍼뜨렸다는 것 또한 비틀즈와 애드 포의 공통점이었다.

  ‘덩키스’, ‘퀘스천스’를 경유하여 ‘더 멘’에서 연주하던 신중현은 1972년 청와대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박정희 대통령을 찬양하는 ‘조국 찬가’를 작곡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딱히 비판적인 이념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신중현은 음악인의 자존심으로 버티며 거절한다. 그리고 반항했다. 삭발한 보컬리스트 박광수를 대동하여, 대통령 찬가 대신 작곡한 <아름다운 강산>을 방송에서 부른 것이다. 그때 영부인이었던 육영수가 쇼에 참석했다가 언짢은 표정을 하고 자리를 떠났다는 후문도 있는데, 어쨌든 그것은 박 정권으로부터 닥쳐올 박해의 서막이 되었다.

  1972년 대선에서 김대중을 꺾기 위해 무자비한 부정선거를 펼칠 만큼 박정희의 지지도는 떨어졌다. 반면 신중현은 1974년 이남이(베이스), 권용남(드럼)과 함께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하여 공전의 히트곡 <미인>을 발표했다. 신중현은 일본으로부터 귀화 제의를 받는가 하면 미국의 언론에게도 주목을 받는다. 

  같은 해 긴급조치 1호가 발표된 다음 정권의 손아귀는 록, 포크 계열의 반항적 음악인들을 더 세게 죄어가기 시작한다. 신중현의 노래 다수도 금지되었다. 김추자가 부른 <거짓말이야>는 불신풍조를 조장한다고 해서, <미인>은 퇴폐적이라는 사유로, <뭉치자>는 “북괴와도 뭉치자는 이야기냐”고 트집이 잡혀 금지곡이 되었다. 특히 <바람> 등 신중현사단의 일원인 김정미가 부른 노래들은 거의 모두가 포박당했다.


대운하시대에 듣는 <아름다운 강산>

  점차 날개가 꺾이던 신중현은 1975년 12월 4일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되었다. 박정희의 아들이 음악인들과 어울리면서 대마초파동이 시작되었다는 루머가 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우스운 건 대마관리법이 제정된 시점은 대마초파동 이후의 1976년 4월 7일이었다는 점이다. 수많은 음악인들이 발이 묶였고, 신중현도 박정희가 죽기 전까지는 노장사상을 접하면서 화를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 <아름다운 강산>을 부르는 신중현. 드럼 연주자는 신중현의 삼남인 신석철이다.


  그가 접한 노장사상은 1990년대 발표한 [무위자연], [김삿갓]에서 만개했다. 하지만 당시에 신중현을 수식한 찬사인 ‘살아있는 록의 전설’에서, 강세는 ‘살아있는’보다는 ‘전설’에 찍혔을 따름이다. 그를 재평가하는 무수한 평론이 분만되는 한편, 그의 영향력에 대한 과대평가에 볼멘소리를 내는 이들도 있었다.

  이달 5일, 필자는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신중현을 처음으로 봤다. 그는 공로상 수상자로 지명되어 무대 위로 올랐고 청중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그의 연주를 들을 수는 없었다. 2006년 11월 그의 은퇴공연에라도 가볼 걸 그랬다는 후회가 잠시 들었다.

  작년 대선에서 ‘노 브레인’이 이명박캠프 측에 로고송을 제공했을 때, 나는 조국 찬가를 거절한 신중현의 꼿꼿함을 떠올렸다. 요즘은 어마어마한 생태파괴가 예상되는 데다가 경제효과마저도 없다는 대운하를 파겠다는 이명박 정권을 경멸하면서, <아름다운 강산>을 다시 꺼내 듣는다. 역사는 어떤 측면에서는 반복되고, 또 어떤 측면에서는 후퇴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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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이한열, 6월 항쟁…그리고 시나위의 음악
[한국현대사 OST] 87년 6월10일, 항쟁속에서 울려퍼진 '새가 되어 가리'
 
김수민
한 대학생이 신촌 교정에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튿날,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은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다. 그리고 박종철고문살인규탄 및 호헌철폐국민대회가 전국적으로 번졌다. 1987년 6월 10일이다. 이날은 그 달 29일까지 진행되는 국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그 항쟁으로 생겨난 헌법은 6공화국의 골간을 이루게 된다.
 
▲ 1987년 6월 10일 발매된 시나위의 2집     ©대자보
“저 멀리 날아가는 새야/ 들판을 날아 어디로 가는지/ (중략)/ 영원토록 외쳐/ 외로이 한 없이/ 날아가는 새야/ 너 새가 되어가리/ 너 새가 되어가리.”

 
시위현장에서 젊은이들이 불러도 어울렸을 법한 이 노래의 생일 역시 1987년 6월 10일이다. 우연이겠지만 말이다. 본곡이 수록된 음반은 <Down & Up>으로 시나위의 2집인데, 시나위는 당시의 학생운동이나 재야는 물론 거리의 시위 인파와 별 연관을 가지지 않았다.
 
3.1 운동 이후 조선총독부가 ‘문화통치’로 우회하였듯 전두환 정권도 1980년 광주의 피륙을 난자한 뒤 ‘3S(섹스, 스크린, 스포츠) 정책’을 기획했다. 자로 치마 길이를 재고 가위로 장발을 자르는 대신, 청년들에게 신나게 놀며 정치적 억압은 잊으라는 주문을 외운 것이다. 그 첫 작품은 <국풍 81>이었다. 신군부 핵심인 허문도까지 제 대학 후배들을 설득하러 다니는 등 당국은 대학생들의 광범위한 참가를 유도하는 데 분주하였고 실제로 축제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 들었다. 그러나 국풍은 거대한 쓰레기 더미와 함께 끝나고 말았으며, 당일 가요제에 출전한 이들은 대학사회에서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새가 되어 가리>도 6월 10일에 태어났건만...
 
서울대에서 사건이 터졌다. 국풍에서 대상을 받은 ‘갤럭시’의 공연 소식을 듣고 성난 학생들이 학생회관 라운지의 무대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청중은 별안간 애국가를 요구했다(반정부 성향을 가진 사람들조차 열심히 국가를 연주하고 태극기를 들고 다녔던 것도 그야말로 ‘한국적 민주주의’의 특징이었다). 기타 연주자가 급한 대로 떠듬떠듬 애국가를 연주하자 학생들은 무대를 부수어 버렸다. 이어 대운동장에서 열린 ‘옥슨(81)’의 콘서트에도 학생들은 각목을 들고 나타나 공연을 무산시켰다. 밴드들의 수모는 이어진다. ‘옥슨(82)’ 역시 공연 도중 학생들의 막걸리 세례를 받았고, 유명 그룹 ‘산울림’도 대학축제 중 앰프의 플러그가 뽑혀지는 봉변을 당했었다. 1980년대, 록 밴드와 학생운동권의 관계는 불화 그 자체였다.
 
학생운동권이 록음악을 경멸한 까닭은 크게 두가지다. 첫째, 향락적 서구음악이자 제국주의의 피조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록의 주역이 노동계급이었음을 알거나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둘째, 그 무렵 대학가의 ‘대세’는 풍물패나 탈춤반이었고 대중음악에서도 1970년대 이후 포크에 경도되어 있었다. ‘록밴드’는 그다지 대학친화적이지 않았다. 1988년 대학가요제 대상을 차지한 ‘무한궤도’의 신해철은 서울대, 서강대 재학 중인 멤버로 채워진 밴드를 유별나게 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고 회고한 바 있다.
 
1980년대 중반 ‘하드록’에서 ‘헤비메틀’로 유행이 옮겨가면서 대학가와 밴드 사이의 괴리는 더 커진 감이 있다. ‘마그마’, ‘무당’, ‘이수만과 365일’에서 언뜻 보였던 헤비메틀은 국내 음반사상 최초로 시나위의 1집에서 만개했다. 그리고 ‘백두산’, ‘부활’, ‘H2O' 등 메틀 밴드들이 속속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캠퍼스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았으며, 당연히 저항적 학생운동과도 멀찍이 떨어져서 걸어갔다. 



▲한강변에서 열린 축제에 나타난 시나위. 김종서(보컬), 신대철(기타), 강기영(베이스, 현 DJ달파란), 김민기(드럼)의 모습이 보인다.

정작 메틀 밴드들을 반긴 건 중·고등학생들이었다. 해적판 외국 음반에 익숙하던 그들은 시나위 1집에서 “한국인도 메틀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신대철의 기타와 임재범의 보컬에 열광했다. <새가 되어가리>가 들어간 2집의 반응은 더 좋았다. 고교생용 잡지 <하이틴>에서 발표한 인기가요순위에서 <새가 되어 가리>가 1위를 차지했고, 같은 음반에 실린 <빈 하늘>, <해 저문 길에서>, <들리는 노래>, <시나위>, <마음의 춤>이 2위에서 6위까지도 석권해 버린 것이다.
 
시나위가 대학가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0년대 중반이었다. 1990년대 초입 국내 메틀밴드는 하나둘씩 해산을 결정했고, 시나위도 1991년 활동중단을 선언했다. 1990년대 다시 록은 강산에, 넥스트, 크라잉 넛의 출현과 함께 부흥기를 맞이했다. 그때는 더 이상 제국주의의 첨병이라는 비난이 없었다. 도리어 록에 호의적인 비평가들에 의해 록은 비판과 저항의 음악으로 격상되었다. 학생회 선거에 나온 어떤 운동정파는 “서태지, 넥스트와의 제휴”까지 거론했다.    
 
항쟁 기념식에서 그 노래를 듣고 싶다
 
1995년, 메틀이 아닌 얼터너티브 사운드에 기초하여 사회적인 가사를 들고 돌아온 시나위도 환영의 대상이었다. 대학가에 초대되는 어엿한 단골 뮤지션이 되었고, 1997년에는 연세대사태 직후 위기에 처해 있던 한총련의 출범식에도 초대된다. NL(민족해방계열)이 주도하던 한총련과 ‘한국 메틀의 원조’ 시나위의 만남이었다. 그 만남은 정치적인 동맹도 아니었고, 문화적 취향에 이끌린 교감도 아니었다. 젊음과 젊음의, 뒤늦은 만남이었다.
 
1987년 이후 정치적 민주화는 엎어지지 않고 더디게나마 진전된 반면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 발육부진에 가까웠다. 나는 그에 보태어 정치적인 올바름과 문화적인 생동감, 세련됨이 좀처럼 어우러지지 못한 것도 ‘1987년 체제’의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90년대 중반께 ‘인디(독립) 음반’이 80년대 금서를 조달하던 사회과학서점에서 유통된 상징적인 사건이 있었지만, 향후 대학가의 문화지형은 단순화되고 대학생들은 탈정치화되었다. 록을 제국주의라고 손가락질하던 학생운동권은 그 이외에도 여러가지 경직성을 안고 있었고, 이를 극복하지 못해 오늘날 소멸의 코스를 밟아가고 있다. 그럼 록은? 홍대앞의 빛과 그림자 속으로 빨려드는 분위기다.    
 
1987년 6월 우연히 함께 나온 해방의 운동과 자유의 노래는, 당시에는 조우하지 못했다. 그러나 역사는 기억되고, 예술은 길다. 언젠가 6월 항쟁 기념행사에서 시나위의 <새가 되어 가리>가 연주되는 풍경을 상상한다. 새가 되어 날아갔을 박종철과 이한열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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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ft 1848~2000

史의 찬미 | 2008. 3. 3. 09:48 | Posted by 김수민

며칠 전 산 둔기 <The Left>를 읽고 있다. 첫장 '민주주의의 사회화'는 의외로 어느 사회민주연맹 회원 둘의 '자유연애 결합' 사건으로부터 출발한다.

책장을 넘기다 이렇게 두꺼운 작품을 완성한 건 학구열이 아니라 예술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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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와 베른슈타인

史의 찬미 | 2008. 3. 1. 14:27 | Posted by 김수민
룩: 그러니까 네 말은 그거한답시고 원래 해야 하는 걸 덮는 거 아녀?
베: 무슨 소릴하능겨. 어차피 우회하는 건 날로 먹는 거라고.
룩: 에, 그거 하면서 은근슬쩍 훼방놓고 원칙 박살내는 거잖아~
베: 아 거... 한다고 해도 문제, 안한다고 해도 문제...

따지고 보면 그런 이야기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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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북평통

史의 찬미 | 2008. 2. 21. 16:31 | Posted by 김수민

“북으로 간 조소앙·안재홍 50년대 독자적 통일운동” (한겨레)

학부생이 북한사를 다루면 얼마나 다루겠는가? 재작년 수강했던 북한현대사 수업에서 나는 처음에 '8월 전원회의 사건'으로 보고서를 쓰겠다고 했다가 교수에게 퇴짜를 맞았다. 너댓명이 같은 주제를 신청한 것이다. 7.4공동성명이나 주체사상의 형성도 마찬가지였다. 고민 끝에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이후 조소앙, 김규식, 안재홍이 걸은 길을 공부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이 주제조차 한명의 신청자가 더 있었다.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경쟁자'보다 앞서 나가려 급히 도서관에를 갔으나, 내가 없는 사이 교수가 수업에서 주제에 관련해 추천했다는 이신철 박사의 박사논문은 학교 도서관에 없었다. 다만 북측 당국자였다가 탈북한 신경완의 증언을 담은 <압록강변의 겨울>이라는 책을 찾았다. 상세한 회고였다. 그러나 겨우 그 한권을 손에 넣고 보고서를 쓸 수는 없었다.

하루는 북한현대사 담당교수가 입이 삐뚤어진 채 수업에 나타났다. 그러면서도 그는 말은 바로 했는데(캬캬), 자신이 보다시피 수업이 어렵게 됐으며 오늘은 특강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소개 받아 연단에 선 이는 놀랍게도 이신철 박사였다. 그는 북한의 역사적 흐름과 시사적 현안을 명료하고도 빼어난 입담으로 소개하면서 1시간동안 밀도 높은 강연을 했다.

나는 수업 말미에 '재북평통'의 활동을 연구하려는데 참고할 만한 서적을 하나밖에 못 찾았다며, 더 볼 만한 책이 있는지 그리고 박사논문 좀 얻을 수 없겠는지 물었다. 그날이 아마 아카라카 축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노천극장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 속에서 나는 이 박사를 뒤따라가 박사논문을 건네 받았다. 그가 말했다. "졸업하고 대학원 갈 생각 있어요? 가세요. 요즘엔 시절이 좋아져서 역사 공부해도 먹고 살아요."

이 박사의 논문은 2005년에 나온 것으로, 해방정국기의 남북협상과 김일성의 민주기지론부터 시작해서 한국전쟁의 납북 그리고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통일운동을 다루고 있다. 김규식은 납북 도중에 숨을 거두었고 자연히 재북평통의 구심은 조소앙, 안재홍이었다. 북조선은 이들의 상징적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되도록 환대하였으며, 그들도 극렬한 저항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양측은 의도를 달리 할 수밖에 없어 북조선은 재북평통을 통제하였으며 재북평통도 걸핏하면 항의단식을 실시하는 정도였다. 심지어 과부들을 요인들 곁에 배치하는 등 북조선 당국은 치밀한 작전을 펴기도 하는데, 이 과정이 <압록강변의 겨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한국전쟁 이후 재북평통은 중립화 통일방안을 제창하고, 김일성은 자신의 대남 '평화 공세'에 이를 활용하게 된다. 이것이 적화통일의 음흉한 방책이라고만 오해받는 '연방제 통일방안'의 배경이었다. 물론 전쟁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는 상황에서의 통일방안을 오늘날 덜떨어진 통일지상주의자들의 '코리아연방공화국'과 동일시하면 대략 난감하다.

순망치한이라고, 남쪽에 있을 땐 웬수였을 박헌영이 숙청 당하고 나자 남쪽 출신 인사들도 위기에 처한다(그럴 거면 뭐하러 데리고 갔는지, 원). 감시가 심해지자 그들은 김일성에게 직접 항의를 하게 되고, 이를 우연히 지켜본 김정일이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좋은 중재자가 된다는 에피소드도 <압록강변의 겨울>에 나온다. 그러나 김일성과 그들을 이간하는 당국자들의 보고는 계속되었다. 또 재북평통을 구성한 뒤 전략적 동반자로 설정된 연안파(최창익 등)마저 숙청이 되자 납북 요인들은 궁지에 몰린다.

조소앙이 자살했다는 루머가 있었으나 풍문이 굴절된 것이다. 1958년 조선노동당 창건기념일, 학질을 앓고 있던 몸으로 과음한 그가 대동강변에서 쓰러졌다는 게 진실이다. 안 그래도 기울어지던 재북평통은 그가 죽음으로써 파국을 맞이했다. 납북 요인들은 더는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심지어는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역사의 뒷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 납북된 인사들이 만든 자리를 해방정국기에 월북한 백남운과 홍명희가 새로 채웠다.

1950년 총선에서는 조소앙이 전국 최고 득표율을 올리는 등 중간파의 대약진이 있었다. 한국전쟁 때 남북 양쪽을 피해 농사꾼으로 위장했던 근로인민당 출신 장건상은 전국 득표율 2위였다. 한민당이나 이승만이나 대중적 지지도가 취약했다. 물꼬를 중도로 돌릴 수 있던 바로 그 찰나에 전쟁이 터져 버린 것이다. 전투 소식을 듣고도 버젓이 야구장에 있었던 그 국민들은 3년 후 빨갱이라면 치를 떨거나 독재자가 무서워 입을 열지 못하는 국민으로 변신했다. 중간파와 좌파는 남한에 남아 탄압받는 경우가 아니면 북으로 넘어가거나 끌려갔다. 북조선에서는 박헌영을 죽이고 최창익을 제거하였으며, 백남운은 구석에 몰렸고 홍명희는 침묵하며 살았다.

소위 국토완정은 그렇게 이승만과 김일성의 '분단 국민국가'의 기초작업이 되었다. 아마도 재북평통은 북으로 끌려가고 남에서 내쳐짐으로써 자신의 정신이 남과 북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게 된 없었던 마지막 인간들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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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개의 손가락

史의 찬미 | 2008. 2. 12. 19:40 | Posted by 김수민

악극단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 방랑생활을 보다 못한 외삼촌이 나를 경찰학교에 들여보낸 것이다. 경찰은 의외로 적성에 맞아 그럭저럭 견뎌낼 수 있었다. 31기로 졸업한 뒤 초대 농림부장관을 지낸 조봉암씨의 호위경관을 맡았다. 그분이 외숙모의 친오빠였기 때문이다. 2년 정도 그분을 호위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정신, 옥고와 갖은 고문을 치른 뒤 5개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으로 글씨를 기막히게 써 내려가는 모습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그림자처럼 그분을 따라다니며 나는 늘 그 생각에 골몰했다. 훗날 쌀 한톨에 반야심경 200여 자를 새겨 넣는 '미친 짓'도 나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 흑우 김대환, <<연습은 장엄한 구도의 길이었다>>, 현암사, 2005, 31-32쪽.


조봉암은 일제 말기 투쟁을 접으며 얼마간의 안온함과 양식을 누린 탓에 해방정국에서 소외되었다. 그때 그는 서울로 올라오지 않고 고향인 인천에서부터 '제3전선'의 형성을 위해 활동했다. 그가 이승만 정부의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참여한 사실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견해와 논평이 있다. 하지만 그는 평화통일론과 피해대중을 위한 경제를 포기하지 않았고, 이승만이나 신익희 등 보수 정객들을 능가하는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집념을 가진 사람은 많다. 그러나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은 집념이 아닌 묵묵히 흐르고 또 흐르는 집념을 가진 이는 흔치 않다. 불꽃들이 차고 넘치는 진보진영에는 그러한 사람들도 필요하다. 활화산처럼 북을 치는 김대환의 이면에 세서미각의 김대환이 있었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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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근대

史의 찬미 | 2008. 2. 1. 15:28 | Posted by 김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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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논문 기획

史의 찬미 | 2008. 1. 21. 20:16 | Posted by 김수민

'역사'는 내 얕고 좁은 공부 인생에서, 특히나 글쓰기의 길에서 뗄래야 뗄 수가 없다. 아홉살 적 만화로 된 한국사를 보고 노트에 요약하며 해설을 붙였고, 열세살에는 '고구려'에 대한 논문을 쓴답시고 20페이지의 원고지에 필체를 박아넣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 공부에 취미를 잃으면서 나의 국사, 세계사 과목 점수는 평균 점수를 티나게 웃돌지 않았다. 대학에 진학할 때에도 역사학과를 지망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한국의 고대, 중세 역사에 가진 지식이 빈한하고 다른 동양 지역이나 서양의 역사에 대해서는 부끄럽게도 사실상의 문외한이다.

교육학과 소속인 나는, 원래는 제2전공으로 신문방송학과 국어국문학을 고려했었다. 우습게도 나는 신문방송학이란 학문에 여전히 무지하지만,  중학생 때 조선일보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한때 신문방송학과로의 진학을 꿈꿨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문장의 골짜기에 푹 빠져 국어국문학에도 기웃거렸는데 당시 연대 국문과의 불미스러운 사태를 접하며 뜻을 접었다(나는 그 사태를 다룬, 학내 언론계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역사학도들과 어울릴 기회가 많았던 나는(역사학도라서 어울린 것이 아니라 마침 그들이 역사학도였다) 제대 후 학교로 돌아오자마자 한국사학입문 강의를 들었고 2006년도에 이중전공으로 한국사를 신청했다. 길게 치면 15년을 넘어가는 한국현대사에 관한 흥미 때문이었다.

나는 당장에 졸업하는 것은 아니지만 향후의 일정을 고려해 교육학과 졸업논문을 미리 당겨 썼다. <해방 후 교육주도세력과 사립대학교의 형성>. 야심에 가득찬 준비에 불구하고 관점을 형성하는 것이 늦어 시간이 촉박해지면서 졸문이 되고만 그 글의 제목이다. 이 교육'사' 논문은 과학'사'를 전공한 선배의 조언을 받아가면서 씌어졌다. 나는 아마 신문방송학과에 갔어도 '언론사'를, 떨어졌던 고려대 정경학부에 붙었어도 정치외교학을 전공해 '정치사'를 연구했을 것 같다. 국어국문학과에 갔어도, <근대를 다시 읽는다>에 수록된 국문학자들의 논문처럼, 문학 작품에 드러난 일상사 연구를 했을 것 같다.

나는 이 논문을 쓰면서 논문쓰기의 맛과 고통을 알았다. 논문은 아무리 제주를 부려도 픽션이나 에세이보다 열등한 문체를 가질 수밖에 없다. 논문에 맞는 필치로 명문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서-본-결'의 줄기로부터 파생될 가지와 잎새들은 넉넉하지 않다. 니체나 비트겐슈타인의 저작들처럼 집필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런 초라함을 감내해야 할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논문쓰기가 가지는 태생적 요인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논문은 온갖 자료와 지난 연구 성과들에 대한 필기의 연장선상에 있다. 다른 장르의 글들보다는 메모와 그 집합에 가까운 글인 탓이다. 물론 여기서도 맞춤법이나 비문을 일소해야 하는 것은 물론, 어지간하면 같은 단락에 또는 원고지 10장 이내라던가 하는 가까운 범위 내에 동일한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법칙은 따르는 게 낫다. 라이터로서는 '논문도' 잘 쓰는 능력이 필요하기는 하나, 논문쓰기에서 헤어나는 법을 깨우치는 게 조금 더 절실하다. 나는 논문 집필에 들어가면서는 문체가 화사해지려는 걸 막으려고 애를 썼고, 쓰고 나서는 본래의 문투를 복원하기 위해 애를 먹었다.

하지만 요즘 또다시 논문 작업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가제는 <허정 과도정부 연구>이다. 나는 한국현대사 가운데 유신시대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가 1967~1972년 사이 남한과 북조선이 각자 유신체제와 유일체제를 성립해 나가는 과정을 비교하는 쪽으로 옮아갔다. 그 다음에는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혁신계 지식인들이 윤보선이 아닌 박정희를 지지했다는 증언을 발견하고 1960년대 초중반으로 다시 미끄러져갔다. 더구나 당시 박정희 의장의 공산주의적 언행과 남로당 전력 등은 이탈리아나 일본의 파시스트들이 처음에 좌익이었다는 점과 절묘하게 비교되었다. 거기에 당대 혁신계와 학생운동의 흐름, 사상적 혼란, 민족주의의 강화와 인민민주주의적 이념의 조용한 부상 등을 겹쳐보며, 일단은 4.19와 6.3 사이의 시대에 방점을 찍게 된 것이다.

사실 최근엔 또 초점이 이동하면서 한국전쟁에 숨은 5.16의 원인들을 찾는 데 신경이 쓰이고, 또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으로 6.3세대의 사회진출에 관한 역사사회학적 연구에도 이끌리지만, 어쨌든 1960년대 초중반 연구의 전초 작업으로 4.19 혁명 직후부터 제2공화국 수립 이전까지 짧게 존재했던 허정 과도정부를 논문 작업의 주제로 지목하게 되었다. 어차피 한국사 과정에 졸업논문 수업이 있었다면 이 주제를 두고 작업을 했을 것이다. 어렸을 때 TV에서 허정 과도정부를 다룬 역사물을 방영한 적이 있다. 우연히 프로그램의 말미만을 시청하고 느낀 짙은 아쉬움만이 '짧은 시간 존재했던 허정 과도정부는 충분한 힘이 없었다'는 결론부의 멘트와 함께 기억난다. 그것이 이 연구를 유도하였다.

허정은 근래로 치면 고건과 비슷한 인물로 한국민주당 출신이면서 이승만과도 절친한, 당대의 정치 지형에서는 이승만과 민주당의 중간께에 위치하는 인물이다. 주지하다시피 민주당이나 이승만이나 지독한 반공주의와 기득권세력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고, 그러니 허정의 정치노선에도 그 이상의 별 특이사항이 없다. 하지만 한국현대사에서 여당 실력자와 야당 투사, 그리고 그들의 쟁투가 차지하는 비중은 실제보다 과장된 면이 있다. 특히 오늘날 모피아니 교육마피아니 하며 악명을 떨치는 자들을 바라보자면 정치인(또는 군부나 재벌) 못지 않게 관료들의 행적을 좇을 필요성은 더 높아진다. 허정이든 고건이든 성난 인파의 시위를 전후하여 대통령직을 대행했지만, 그들이 -자신은 예상치 못했겠지만-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올라갔는지, 또 물러나거나 직무정지된 대통령의 임명을 받았으면서도 권력공백을 극복하고 국정을 운영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그 답 안에는 바로 봄에 한 일을 겨울에 또 할 수 있는 '관료'만의 파워가 있다.  

대학에 입학할 적보다 썩 나아진 구석이 없지만 어느새 내 나이는 20대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도 대학원 입학을 결정하지도 못하고 있다. 만일 진학하지 않는다면, 당분간은 이 논문이 마지막일 것이 뻔하다. 그간 방학과 휴학들을 거쳐왔음에도 겨우 작년의 마지막 한달 반동안 몰아서 논문을 썼는데, 대학원에 가지 않으면 내 깜냥과 의지로는 앞으로는 한편도 못 쓰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우선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에서 '許政'을 검색해 옛 신문자료들을 뒤지는 중이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번역되지 않은 영어 자료를 들여다볼 생각을 하니 대가리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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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좌파, 이젠 사회화할 차례요

史의 찬미 | 2008. 1. 18. 12:40 | Posted by 김수민

 

“벤 좌파, 이젠 사회화할 차례요.”1)

- 영국 노동당내 좌파의 대안경제전략(AES)


김수민



1. 사회주의에 무심한 노동당, 사회화를 포기한 사회주의 


영국의 근대사는 이웃한 프랑스에 비하면 격랑에서 동떨어져 있었다. 계급적 평등보다는 정치적 자유를 놓고 사유했던 앵글로색슨적 전통은 이 나라에서 사회주의운동이 독일이나 프랑스보다 덜 두드러지게 벌어진 원인이기도 했다. 영국 노동당의 특성은 이와 밀접하다. 영국 노동당은 노동운동의 제도적 진입을 위해 결성한 ‘노동자대표위원회(LRC)’의 후신이었고, 당명 그대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라기보다는 ‘노동자 정당’, 조금 더 정확하게는 ‘노조의 당’에 가까웠다. 특별히 당원제도가 없이 노동조합원들이 곧바로 집단입당한 것으로 처리되는 등의 특성은 이를 정확히 뒷받침 한다.


  영국 노동당이 비로소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서의 손색을 갖춘 것은 1918년 당 대회에서부터였다. 여기서 노동당은 “생산수단·분배·교환의 공동 소유, 민중적 경영과 산업·서비스의 통제 체계”라는 구절의 당헌 4조를 통과시킨다. 뿐더러 대회에서는 개인입당제도가 신설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로 노동당이 궁극적으로 변화되지는 않았다. 노동계급의 상층 지도자들은 자신들에게 집중된 힘으로 당을 이끌어나갔고, 여기에 하원의원들이 당의 일상활동을 주도함에 따라 당의 민주화를 저해하였다. 집권할 때는 각료들이, 그렇지 않을 때는 쉐도우 캐비넷(그림자 내각)의 구성원들이 당의 지도부 역할을 했다. 당수라는 존재도 이러한 구조를 제어할 수 없었다. 그가 의원단의 선거로 뽑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조 간부들은 원내 인사들과 기꺼이 타협하여 당의 지배권을 유지하였다.


  노동당은 사회주의의 핵심 강령인 ‘생산수단의 사회화’도 실현하지 못했다. 1945년 2차 대전 직후 노동당은 총선에서 승리하여 애틀리 정부를 출범시켰고, 국민보건서비스(NHS)를 통해 무상의료를 구현하고 주택의 공공화에서도 성과를 올리기는 했다. 하지만 노동당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자본주의에 국가가 개입하여 수정을 꾀한다는 케인즈주의적 발상에 머무르고 만다. 스웨덴이나 독일에서 그랬듯 결국 노동당은 노동자 주도의 경제, 생산수단의 사회화보다는 계획과 시장의 혼합, 조세와 재분배를 더 주창하기에 이른다. 토니 크로슬랜드 등의 이데올로그들은 그것이 사회주의의 전부인 양 여겼고, 1950년대 후반의 당지도부는 당헌 4조를 삭제하려고 시도했다. 혼합경제와 재분배를 1단계로 자주관리나 생산수단의 사화회를 2단계로 쳤을 때, 1단계에 집중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지만, 1단계가 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사회주의를 표방한다면 말이다. 




2. ‘벤 좌파’와 대안경제전략의 부상


당의 우경화를 비난하며 왼쪽 깜빡이를 켜 당수가 된 헤롤드 윌슨도 총리 재임 기간동안 핸들을 왼쪽으로 꺾는 데 실패한다. 노동당의 1964년 선거공약부터가 산업근대화와 경기확대라는 탈이념적인 내용을 구성하고 있었다. 윌슨은 사회주의 강령은 차치하고, 임금인상을 봉쇄하는 노동법 개정을 강행했다가 노동조합의 반발에 부닥치는 등 ‘노동’당답지도 않은 모습을 연출한다.


  이 시기 노동당과 윌슨 정부의 우회전에 가장 제동을 걸었던 프랭크 카즌스 기술장관이 내각을 떠나 원래 일하던 운수노조로 복귀하면서, 당내 좌파의 유력한 인물로 떠오른 이가 토니 벤이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영국의 ‘민주적 사회주의자’ 명단에서 켄 리빙스턴 현 런던시장의 윗자리에 오르지만, 처음부터 그가 꽤 진보적인 정치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상원의원을 아버지로 둔 윌슨의 1순위 후계자였다. 그런데 아버지의 죽음 뒤 상원의원직을 맏아들로서 계승하게 되면서 그는 이 구습을 타파하고자 3년동안 투쟁했고, 영국식 민주주의와 이에 무비판적인 노동당의 행태를 회의하게 되었다. 공화파로 출발하여 자본주의의 해악을 직시하며 사회주의자로 변모한 프랑스의 장 조레스와 닮은 부분이다. 


  토니 벤이 떠오르면서 노동당은 1970년대 들어 좌경화의 기회를 맞이한다. 거대 노동조합에 좌파적 성향이 뚜렷한 지도부가 들어서고, 68운동의 세례를 받은 젊은이들이 지역활동가로 자리잡았으며, 토니 벤은 전국집행위원회의 핵심인물로 급진적 정책 구상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전국집행위원회의 좌우 비율은 1964년에는 8:20이었으나 그무렵은 12:15로 좁혀져 있었다. 노동당에서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의 한계를 직시하면서 ‘국유화’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움직임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전국집행위원회는 드디어 1973년에 들어 급진적 정책들을 채택한다. 정책강령은 초반에서 “노동당은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권력과 부의 근본적이고도 불가역한 이전을 가져올 사회주의정당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선포하였다. 보수당 히드 정부에 의해 민영화된 기업들을 재국유화하며, 일반은행, 보험회사, 금융기관 그리고 제조업부문들을 국유화할 대상기업에 포함시켰다. 국민기업위원회(NEB: National Enterprise Board)는 바로 이 일련의 대안경제전략(AES: Alternative Economic Strategy)의 화룡점정이었다. NEB란, 25개 제조업을 비롯해 개별기업의 주식을 국가가 강제로 매입시키는 국가주주회사이다. 여기에 계획협약을 통해 국가가 100여개의 대기업체들로부터 가격, 이윤, 투자계획 등에 관한 정보를 확보한다는 계획이 덧붙여지면서, 국가권력을 바탕으로 기업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노리는 AES는 한결 더 색깔이 짙어졌다.    


  AES는 만약 실현될 경우 국민총생산 및 총고용의 4할을 국가가 직접 관할하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파격적인 정책이었다. 노동당이 1960년대 중후반에 실시한 산업재조직공사, 산업확대법이 자본주의의 발전을 목적으로 했다면, AES는 자본주의의 내부에서 시도되는 사회주의 실험이었던 셈이다. 노동당 좌파의 거두인 오를 후트가 “가장 훌륭한 사회주의강령”이라고 추켜세운 정책강령은 그해 말 블랙풀 전당대회에서 만장일치로 승인되었다.


  1974년 2월 파업파동 등 혼란 속에서 치러진 총선에서 노동당은 1931년 이후 가장 낮은 지지율에 불구하고 불안하게나마 집권할 수 있었다. 총리 복귀한 윌슨에 의해 토니 벤은 산업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당내에서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고 있었고, 전국집행위원회 산하의 국내정책위원회 의장이었기에 정부와 당에 걸쳐 튼튼한 권력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당내 좌파로 꼽히는 마이클 후트와 바바라 카슬도 각기 고용장관, 사회복지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윌슨은 더 튼튼한 정부를 구성키 위해 10월에 다시 총선을 실시했고, 노동당은 더 확고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3. NEB의 타락과 노동당의 패배


그러나 노동당 정부의 앞날은 밝지 않았다. 당시는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16%였고 공공부문 임금상승률은 20%에 이를 정도로 인플레이션이 심각했다. 무역수지도 악화되었고 실업자는 100만면을 넘어섰다. 스태그플레이션 앞에서 바야흐로 케인즈주의가 몰락하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벤 장관은 관료들의 집중견제를 받았다. 실무자들의 녹서에 근거해 1974년 5월 각료회의에서 논의된 <영국산업의 재건>이라는 백서2)는 선거공약보다 더 급진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산업계와 보수언론은 당연히 반발했다. 각료들도 이미 국가개입보다 만성적 저투자의 해결에 관심이 기울어진 상태였고, 벤의 제안이 정부와 산업의 신뢰관계를 파손하리라고 우려했다. 


  결국 윌슨 총리는 그 자신이 특별위원회 의장으로 앉아 노동당내 좌파를 배제하고 백서를 전면적으로 수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수정안은 “산업부문과의 공개적 제휴”를 내걸었다. 애초 계획협정은 정부 필요에 의한 사부문 기업들을 강제하도록 설계되었으나, 수정안에서는 계개별기업이 협정에 참여하지 않아도 재정지원을 받는 것을 보장하고 있다. 게다가 NEB가 25개 업체를 인수하고 제약, 은행, 보험회사를 공공으로 이전한다는 언급도 삭제되고 이는 해당기업이 동의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요컨대 사부문의 축소하겠다는 취지가 사적 기업들을 보호·유지하는 쪽으로 꺾인 셈이다. 


  윌슨 정부는 새로 만든 산업법안을 의회에 제출하여 무난히 통과시켰다. 그런데 영국산업연맹은 윌슨 총리를 면담한 자리에서 사부문이 더 침해되었다고 억지를 부리며 재수정을 요구했다. 윌슨은 이를 받아들였다. 기업이 정보를 노동조합에게 공개해야 한다는 조항마저  지워졌다. 국유화는 물론이고 산업민주주의마저 부인되고, 산업투자와 생산력 확장을 위한 재정보조가 NEB의 주요기능이 되었다. 그리고 벤 장관은 보수당, 보수언론, 경제관료들의 공세와 그에 뇌동한 총리에 의해 경질당한다.


  NEB 이사회의 의장과 부의장도 사기업측의 대표자가 맡았다. 주식을 국가로 이전할 방도를 잃은 NEB는 몰락산업의 구조자로 전락했다. NEB가 출범 초기 주식을 사들인 68개의 기업 중 정부의 지분이 절반을 넘는 기업은 19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산업계획은 점차  영국 정부와 노총, 산업연맹의 3자협상 테이블인 전국경제발전위원회(NEDC)로 이관되었다. 이로써 NEB를 위시한 실험은 “위대한 배반의 드라마”로 막을 내렸다. 


  1976년, 영국은 IMF 위기에 직면한다. 벤이 국내정책위원회에서 구제금융조건을 거부하고 국내의 자본 이동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데니스 힐리 재무장관은 IMF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수용했다. 40억 파운드의 구제금융을 받는 대신, 대공황 이후 최대의 규모로 예산을 삭감하고 금리를 15%로 인상한다는 내용이었다. 경제위기는 1979년 보수당 대처 정부를 불러 일으켰고, 그 다음 총선에서도 노동당 우파 일부가 사회민주당을 창당하는 분열이 일어나 보수당과 대처가 승리했다.


  영국 노동당의 지팡이었던 케인즈주의는 부러졌고 신자유주의의 험로가 놓인 것이다. 영국의 대처 총리는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선의의 경쟁이라도 벌이듯 자본과 시장의 원리를 관철시켰다. 훗날 노동당은 패기만만한 젊은 정치인을 내세워 정권을 잡지만, 이미 영국과 노동당은 그 사이 엄청난 변화를 겪었고, 블레어 총리는 ‘붉은 옷을 입은 대처’가 되었다.



4. 아직도 ‘벤 좌파’를 예의주시하는 이유


서·북유럽 진보정당 가운데 사회주의적 성격이 가장 묽은 영국 노동당에서 국유화 전략이 등장한 것은 이런 현상이 영국에 국한되지 않고 폭넓게 나타났다는 방증일 것이다. 1930년 대공황에 이어 또다시 민생경제를 강타한 1974년도의 불황은 진보·좌파 세력에게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하는 계기였다. 스웨덴에서는 노동자세력이 기업의 지분을 차근히 인수하여 생산수단 사회화를 달성하려는 임노동자기금 계획을 세웠고, 독일에서는 소유의 사회화를 다시 사회민주당 강령에 삽입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프랑스에서는 사회당과 공산당이 공동강령을 통해 주요 대기업의 국유화에 합의했다. 


  물론 자본주의가 고도화되고 민간기업이 성장한 가운데 국유화 전략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또한 원래 사회주의의 이상은 ‘사회화’이며, ‘국유화’는 그의 한 유력한 수단일 뿐임을 감안해야 한다. 프랑스 좌파연합은 해외자본, 보수세력의 공세에 시달리다가 우파와 동거정부를 꾸리며 ‘니니 정책(민영화도 국유화도 하지 않는다)’에 눌러 앉았다. 서·북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소유의 사회화 방안들은 무위로 돌아갔다. 이것은 이후 불어올 신자유주의의 바람의 전초현상인 셈이다. 사회화에 대한 좌파의 무기력이 원인인지, 사회화가 무리하게 꺼내든 무기인지는 조금 더 따져봐야 할 것이다. 어쨌든 국유화 테제를 자본주의 초기 국가가 시장과 자본의 힘을 유일하게 제어할 장치였다는 사실과 연결하여 이해한다면, 오늘날 좌파들은 협동소유나 자주관리 그리고 민주적 경영참여 등의 여타 사회화 전략으로 결론을 터야 할 것이다.


  서·북유럽 사회민주주의 계열 정당 내에서, 소득의 재분배나 다소의 경제계획에 우선 만족하는 편이 ‘사민주의 (내의) 우파’라고 한다면, 산업민주주의 내지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계속 시도하는 쪽은 ‘사민주의 (내의) 좌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민주의 좌파의 도전은 내외의 투쟁에서 패배하여 보수화의 바람을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국가사회주의가 파탄이 나고 좌파 정당의 주류가 ‘제3의 길’로 우경화되면서, 그들이 사회주의의 마지막 희망을 짊어진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1973년, 영국 노동당에는 노동당민주화운동(CLPD)이 결성됐고, 5년이 지나서는 노동당조정위원회(LCC)가 출범했다. 전자의 목표는 의원단의 독재를 타파하며 당의 혁신과 민주화를 달성하는 것이었고, 후자는 AES를 더 연구하고 교육·선전하는 작업에 중점을 두었다. 이 두 조직은 세를 불리며 서로 연합해 ‘풀뿌리운동위원회’(RFMC)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이 위원회는 ‘벤 좌파’ 또는 노동당 ‘신좌파’의 대표 조직이 되었다. 신좌파는 당헌 4조의 사회주의적 지향을 찬성한다는 점에서 ‘트리뷴’ 그룹과 같으나, 의원단구조를 혁파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구좌파’와 달랐다. 신좌파는 정·부당수를 의원단이 아닌 대의원 선거인단이 선출하도록 당헌을 개정시켰고, 구좌파 쪽의 마이클 푸트가 그 다음 치러진 선거에서 승리하여 당수로 취임했다.


  벤 좌파는 아쉽게도 노조단위로 투표권을 행사하는 블록투표를 개선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개별 당원들의 권익을 침해하는 제도였지만 한편으로는 의원단의 전횡을 견제하고 노동계급 중심성을 유지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대신 벤 좌파는 블록투표가 각 단위별 민주적 절차에 의거하도록 노력하고, 당구조에 직장분회를 신설하며 평당원 민주주의에 이바지한다. 또 당 바깥의 지식인들까지 초빙하여 ‘일요모임’이라는 정책집단을 만들고, 여성운동, 흑인운동, 환경운동 등과 노동운동의 교류를 추진했다. <뉴 소셜리스트>는 바로 이 같은 벤 좌파의 운동을 홍보하는 기관지였다. 


  벤 좌파는 영국 정치와 노동당내의 힘 있는 세력이 되지는 못했다. 대처 총리와 보수당에 맞서느라 노동당은 주류 우파 중심으로 굴러갔고, 블레어 시대를 맞이하면서 당은 더욱 우경화되었다. ‘제3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에 굴신하는 것을 거부한 켄 리빙스턴(런던 시장)과 같은 이들이 있으나 내각의 다수자가 되는 것은 매우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100년 전 노동당이 소집한 노동자대표위원회를, 환경·여성·소수민족까지 참여시키면서 창조적으로 복원하자는 토니 벤의 목소리는 우경화를 반대하는 영국 좌파의 표상으로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현재 유럽의 진보정치는 사민주의의 이상을 배반하며 정당의 운영 면에서도 당원중심의 대중정당 모델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벤 좌파의 정당혁신과 ‘민주적 사회주의’는 안티-테제로서 돋보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테제로서 가장 앞서 검토될 만한 가치가 있다.


1) ‘제3의 길’의 이데올로그였던 앤서니 기든스가 토니 블레어에 이어 영국 총리로 취임한 영국 노동당 당수에게 “브라운, 이젠 당신 차례요”라고 말한 것을 패러디한 문장이다.

2) 백서는 영국 정부의 공식 문서를 뜻하고, 녹서는 특정 정책영역에 대한 토론보고서이다.



[참고문헌]


고세훈, 『영국노동당의 선거전략과 국유화; 노동조합운동의 이념적 성격과  당내민주주의의 정치』, <경제와 사회> 13호, 1992.

고세훈, 『영국 노동당사: 한 노동운동의 정치화 이야기』, 나남, 1999. 

장석준, 『역사속의 진보정당들 11. 영국노동당 신좌파운동: 패배로 끝난 신자유주의와의 일회전』, <이론과 실천> 2003년 6월호.

한국 사회민주주의 연구회,『한국 사회민주주의 선언』, 도서출판 사화와 연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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