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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우리편이다?

史의 찬미 | 2009. 2. 11. 04:38 | Posted by 김수민
새로 공개된 정조의 어찰은 독살설을 반증하고 있지 않다. 입증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반증이람. 독살설은 당대에 '썰'로도 취급받지 못한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김조순이 벽파를 날릴 때 이용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남인 전체도 아닌 영남 구석에 있던 남인들끼리 유포한 카더라 통신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영남 남인에 합세하여 독살설을 믿거나, 혹은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정조를 추앙하는 이들은 민족자존의 얼굴을 한 서구중심주의자들이다. 절대계몽군주를 거쳐야 -시민혁명 따위를 통해- 근대를 열어제낄 수 있다는 도식에 기대고 있는 몇몇 역사학자들 말이다. 그들은 희한하게도 정조에 대해서는 절대계몽군주의 성격을 부여하면서, 붕당정치가 토리당-휘그당처럼 발전해나갈 수 있는 여지는 조금도 두지 않는다. 붕당은 형이상학적 논쟁이나 권력투쟁만 수행한 것이 아니라 여러 쟁점을 겪으며 꾸준히 진화하고 발전해 왔다는 것, 후대에 '실학자'로 일컬어진 박지원, 정약용 등이 엄연히 붕당의 소속원이라는 것, 조선은 분명 선비의 나라였다는 것 등도 고려되지 않는다. 박지원은 군주를 士 집단의 일원으로 간주하였지만, 정조는 하 은 주 시대의 관념까지 끌어와 임금과 스승의 위치를 겸할 것을 선포하고 '만천명월주인옹'을 자처했다. 이에 대해서 사회경제사적으로는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소농 중심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왕권을 강화하여 신권을 견제할 수밖에 없다는 해명이 있다. 그런데 이번의 어찰은 '정조=개혁', '붕당(노론 벽파)=수구기득권'이라는 구도를 뒤흔들었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 정조가 노론 벽파와 실은 온전히 한패거리였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정조가 격한 표현을 쓰면서 자기 측근들을 비방했다는 사실에 눈길이 간다. 정조는 붕당을 억누르기 위해 소장파들로 친위세력을 구성했지만, 그들이 서학과 북학을 선도해 나가는 것 또한 용납하지 않았다. 척사보다는 부정학이라는 부드러운 태도를 취했지만, 어쨌든 정조도 시대의 변화에 저항하는 보수주의자였던 것은 틀림 없다. 정조는 영조와 달리 각 당파의 의리론을 인정하는 의리탕평론을 폈으나 어렵사리 성취한 삼상연립정권은 균형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의왕권강화책은 공론정치의 붕괴를 가져왔고 세도정치의 씨앗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를 한사코 썩은 모리배들에 의해 좌절된 개혁군주로 묘사하는 까닭은? "왕은 우리편이다"라는, 그만은 그래도 우리편이었었다는 의식이 아닐까. 민중 봉기가 성공하거나 그 성공이 유지된 적이 없는 나라에서 '民다이'는 '君다이'와 결합해야 했던 것이 아닐까. 民으로서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을 君이 그 강력한 힘으로 추진했었다는 환상. 그러나 그 君도 臣의 음모로 주저 앉음으로써 民과 같은 약자였다는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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