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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논문 기획

史의 찬미 | 2008. 1. 21. 20:16 | Posted by 김수민

'역사'는 내 얕고 좁은 공부 인생에서, 특히나 글쓰기의 길에서 뗄래야 뗄 수가 없다. 아홉살 적 만화로 된 한국사를 보고 노트에 요약하며 해설을 붙였고, 열세살에는 '고구려'에 대한 논문을 쓴답시고 20페이지의 원고지에 필체를 박아넣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 공부에 취미를 잃으면서 나의 국사, 세계사 과목 점수는 평균 점수를 티나게 웃돌지 않았다. 대학에 진학할 때에도 역사학과를 지망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한국의 고대, 중세 역사에 가진 지식이 빈한하고 다른 동양 지역이나 서양의 역사에 대해서는 부끄럽게도 사실상의 문외한이다.

교육학과 소속인 나는, 원래는 제2전공으로 신문방송학과 국어국문학을 고려했었다. 우습게도 나는 신문방송학이란 학문에 여전히 무지하지만,  중학생 때 조선일보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한때 신문방송학과로의 진학을 꿈꿨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문장의 골짜기에 푹 빠져 국어국문학에도 기웃거렸는데 당시 연대 국문과의 불미스러운 사태를 접하며 뜻을 접었다(나는 그 사태를 다룬, 학내 언론계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역사학도들과 어울릴 기회가 많았던 나는(역사학도라서 어울린 것이 아니라 마침 그들이 역사학도였다) 제대 후 학교로 돌아오자마자 한국사학입문 강의를 들었고 2006년도에 이중전공으로 한국사를 신청했다. 길게 치면 15년을 넘어가는 한국현대사에 관한 흥미 때문이었다.

나는 당장에 졸업하는 것은 아니지만 향후의 일정을 고려해 교육학과 졸업논문을 미리 당겨 썼다. <해방 후 교육주도세력과 사립대학교의 형성>. 야심에 가득찬 준비에 불구하고 관점을 형성하는 것이 늦어 시간이 촉박해지면서 졸문이 되고만 그 글의 제목이다. 이 교육'사' 논문은 과학'사'를 전공한 선배의 조언을 받아가면서 씌어졌다. 나는 아마 신문방송학과에 갔어도 '언론사'를, 떨어졌던 고려대 정경학부에 붙었어도 정치외교학을 전공해 '정치사'를 연구했을 것 같다. 국어국문학과에 갔어도, <근대를 다시 읽는다>에 수록된 국문학자들의 논문처럼, 문학 작품에 드러난 일상사 연구를 했을 것 같다.

나는 이 논문을 쓰면서 논문쓰기의 맛과 고통을 알았다. 논문은 아무리 제주를 부려도 픽션이나 에세이보다 열등한 문체를 가질 수밖에 없다. 논문에 맞는 필치로 명문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서-본-결'의 줄기로부터 파생될 가지와 잎새들은 넉넉하지 않다. 니체나 비트겐슈타인의 저작들처럼 집필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런 초라함을 감내해야 할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논문쓰기가 가지는 태생적 요인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논문은 온갖 자료와 지난 연구 성과들에 대한 필기의 연장선상에 있다. 다른 장르의 글들보다는 메모와 그 집합에 가까운 글인 탓이다. 물론 여기서도 맞춤법이나 비문을 일소해야 하는 것은 물론, 어지간하면 같은 단락에 또는 원고지 10장 이내라던가 하는 가까운 범위 내에 동일한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법칙은 따르는 게 낫다. 라이터로서는 '논문도' 잘 쓰는 능력이 필요하기는 하나, 논문쓰기에서 헤어나는 법을 깨우치는 게 조금 더 절실하다. 나는 논문 집필에 들어가면서는 문체가 화사해지려는 걸 막으려고 애를 썼고, 쓰고 나서는 본래의 문투를 복원하기 위해 애를 먹었다.

하지만 요즘 또다시 논문 작업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가제는 <허정 과도정부 연구>이다. 나는 한국현대사 가운데 유신시대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가 1967~1972년 사이 남한과 북조선이 각자 유신체제와 유일체제를 성립해 나가는 과정을 비교하는 쪽으로 옮아갔다. 그 다음에는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혁신계 지식인들이 윤보선이 아닌 박정희를 지지했다는 증언을 발견하고 1960년대 초중반으로 다시 미끄러져갔다. 더구나 당시 박정희 의장의 공산주의적 언행과 남로당 전력 등은 이탈리아나 일본의 파시스트들이 처음에 좌익이었다는 점과 절묘하게 비교되었다. 거기에 당대 혁신계와 학생운동의 흐름, 사상적 혼란, 민족주의의 강화와 인민민주주의적 이념의 조용한 부상 등을 겹쳐보며, 일단은 4.19와 6.3 사이의 시대에 방점을 찍게 된 것이다.

사실 최근엔 또 초점이 이동하면서 한국전쟁에 숨은 5.16의 원인들을 찾는 데 신경이 쓰이고, 또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으로 6.3세대의 사회진출에 관한 역사사회학적 연구에도 이끌리지만, 어쨌든 1960년대 초중반 연구의 전초 작업으로 4.19 혁명 직후부터 제2공화국 수립 이전까지 짧게 존재했던 허정 과도정부를 논문 작업의 주제로 지목하게 되었다. 어차피 한국사 과정에 졸업논문 수업이 있었다면 이 주제를 두고 작업을 했을 것이다. 어렸을 때 TV에서 허정 과도정부를 다룬 역사물을 방영한 적이 있다. 우연히 프로그램의 말미만을 시청하고 느낀 짙은 아쉬움만이 '짧은 시간 존재했던 허정 과도정부는 충분한 힘이 없었다'는 결론부의 멘트와 함께 기억난다. 그것이 이 연구를 유도하였다.

허정은 근래로 치면 고건과 비슷한 인물로 한국민주당 출신이면서 이승만과도 절친한, 당대의 정치 지형에서는 이승만과 민주당의 중간께에 위치하는 인물이다. 주지하다시피 민주당이나 이승만이나 지독한 반공주의와 기득권세력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고, 그러니 허정의 정치노선에도 그 이상의 별 특이사항이 없다. 하지만 한국현대사에서 여당 실력자와 야당 투사, 그리고 그들의 쟁투가 차지하는 비중은 실제보다 과장된 면이 있다. 특히 오늘날 모피아니 교육마피아니 하며 악명을 떨치는 자들을 바라보자면 정치인(또는 군부나 재벌) 못지 않게 관료들의 행적을 좇을 필요성은 더 높아진다. 허정이든 고건이든 성난 인파의 시위를 전후하여 대통령직을 대행했지만, 그들이 -자신은 예상치 못했겠지만-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올라갔는지, 또 물러나거나 직무정지된 대통령의 임명을 받았으면서도 권력공백을 극복하고 국정을 운영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그 답 안에는 바로 봄에 한 일을 겨울에 또 할 수 있는 '관료'만의 파워가 있다.  

대학에 입학할 적보다 썩 나아진 구석이 없지만 어느새 내 나이는 20대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도 대학원 입학을 결정하지도 못하고 있다. 만일 진학하지 않는다면, 당분간은 이 논문이 마지막일 것이 뻔하다. 그간 방학과 휴학들을 거쳐왔음에도 겨우 작년의 마지막 한달 반동안 몰아서 논문을 썼는데, 대학원에 가지 않으면 내 깜냥과 의지로는 앞으로는 한편도 못 쓰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우선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에서 '許政'을 검색해 옛 신문자료들을 뒤지는 중이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번역되지 않은 영어 자료를 들여다볼 생각을 하니 대가리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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