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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史의 찬미 | 2008. 4. 30. 17:51 | Posted by 김수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될 인물들의 명단이 발표되었다. 그 명단은 '직종'별로 분류되어 있고, '직위'를 준거로 삼고 있다. 이는 친일을 어설프게 은폐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친일파 인명사전에 등재된 이들 중 군수급의 관료를 지냈다는 사실 이외에 진정 제국주의에 부역했는지 알 수 없는 인물들도 꽤 많다. 친일의 핵심은 '민족을 배신'하고 '일본에 붙은' 데 있지 않다. 친일은 어떠한 경우에는 전쟁범죄였고 대부분 인권과 민주주의를 탄압한 것이었으며 (천황제) 파시즘에 대한 협력이었다. 이런 여러가지 측면과 층위들이 규명되지 않으면 친일파를 공개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친일파로 지목된 인물들의 이름의 순서대로 각각의 이력과 행적을 공개하는 것과 친일행위를 정리하면서 관련인물을 드러내는 것은 다르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작업 과정에 목격된 과거사 청산의 열의는 고무적인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사건은 인명 순으로 정리된 사전이 편찬되면서는 '반민특위의 복수', '뒤늦은 숙청' 이상을 넘지 못하는 것이다. '매국노'와 파쇼 군경과 행정공무원들이 친일파라는 기준 하에 그냥 뒤섞여 버린 사태에 입맛이 좀 씁쓸하다.

예전 김명인이 친일인명사전의 허점을 지적했던 글이다.


 

[정동칼럼] ‘친일인명사전’이라는 문제
 
[경향신문 2005-09-08 18:42]

〈김명인/인하대 교수·계간 ‘황해문화’ 주간〉


한 민간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예비작업으로 친일인사 3,000여명의 명단을 발표해 적지 않
은 파문이 일고 있다. ‘민족정기 회복’이라는 거창한 민족주의적 수사학을 동원할 것도 없이 해방 이후 우리
 현대사의 왜곡이 바로 친일잔재가 온존된 데서 비롯되었고, 지금도 한국사회의 수구냉전적이고 비자주적
인 보수기득권층의 헤게모니의 원류가 바로 그 친일잔재에 있기 때문에 친일잔재의 올바른 청산이 결정적
인 중요성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과연 그 방법밖에 없었나-


하지만 친일잔재를 올바로 청산하는 한 계기로서 친일인명사전의 편찬이라는 방식을 택한 데 대해서는 과
연 그 방법밖에 없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전이라는 것은 대단히 보수적인 기술방식으로 한번 사전에
 등재된 사실은 좀처럼 수정되거나 말소되기 힘든 강한 경직성을 지닌다. 즉 그 사실은 하나의 가설에서 ‘정
설’로 고정되는 것이다. 아마도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는 주체들의 입장에서는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사전이
라는 형식을 선택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워낙 한국사회에서 친일잔재와 직·간접적으로 같은 이해를 갖는 기
득권 세력의 힘이 강한 만큼 저항이 있기 때문에 차제에 비교적 명백한 친일인사들을 ‘친일파’로 명토 박아
서 친일잔재 청산의 교두보를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성을 이해 못하는 바 아니다.


그러나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친일잔재에 뿌리를 댄 현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물질적 기득권 세력
의 힘이 여전히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민주화와 남북화해, 과거청산이라는 대세 또한 돌이킬 수
없는 것이고 세대를 거듭할수록 기득권층의 세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사전 만들기 같은 유격적 전술이 아니고 친일잔재를 넓게 포위하는 헤게모니적 전술이다.


게다가 친일문제는 생각보다 간단치 않은 문제이다. 적절한 기준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설사 그런 기
준이 마련되어서 그 기준에 저촉되는 것이 확실한 인사라 할지라도 그 전후의 행적을 함께 고려하면 상대적
으로 평가가 곤란한 경우도 대단히 많다.


뒷북을 치는 감이 없지 않지만, 친일인명사전을 만들기 전에 먼저 광범한 친일행적자료를 먼저 공개하는 방
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누구 누구가 친일파라고 규정하고 사전적으로 고정시키는 대신, 그들의 친일관련
행적과 그 외의 전체 행적들을 자료집 형태로 폭넓게 수록하여 국가적 규모에서 시민들에게 배포하거나 열
람하게 하고, 그 다음에 그를 토대로 광범한 국민적 토론을 통해 친일문제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
내고, 그 결과 명백한 친일파들을 적출해 내고 엄중히 논죄하는, 그런 유연하고도 보다 견고한 방식의 친일
잔재 청산이 더 바람직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과거’ 어설픈 봉인될 수도-


그리고 기실 더 중요한 것은 친일인물이나 식민지적 유제, 혹은 그에 기반한 기득권 구조의 청산이라는 문제
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의식·무의식적으로 침전되어 있는 친일적 정신구
조의 청산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성찰해 내는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에게 오랫동안 지배당하면서 내면화
된, 강한 것에 대한 굴종과 약한 것에 대한 경멸이라는 이중적 정신구조는 일제가 남긴 어쩌면 가장 강력한
정신적 잔재이자 해방 전의 친일적 경사를 오늘날의 친미적 경사로 이어주는 가장 든든한 매개고리이며 이
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는다면 친일잔재는 새로운 형태로 언제든지 재생산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올바로 성
찰하고 극복하는 보다 본질적인 기획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오늘의 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이라는 이벤트는
미래를 열어젖히는 문고리가 아니라 과거를 서둘러 장송하는 어설픈 봉인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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