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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계급관을 비판한다 (2006. 1. 20)

휴지통 | 2009. 2. 5. 02:23 | Posted by 김수민
<유뉴스> 기획위원 시절인 2006년 초 발표됐다. 박노자 교수를 비판한 내 유일한 글이었다. 지금 <우리교육>에 가 있는 김명희 <유뉴스> 상근 기자에게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았냐?"고 당시에 물었었다. 그는 "아니. 너 답다고 생각했다"라고 답했다.


지난 번 나는 이 매체의 <일즉다 다즉일>이란 칼럼에서 민주노동당 김창현 전 사무총장의 부적절한 인식을 비판했다. '대중정당을 표방한 국민정당 노선'은 대중정당과 계급정당은 서로 대치되므로 택일해야 한다는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다. 마찬가지로 '대중정당을 부정한 교조적 계급정당 노선'도 동일한 토대 위에서, 지난 역사로부터 이치를 구하지도 않고, 현실을 세밀히 분석하지도 않는, '초보적 계급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서민대중의 무관심 속에서 초반부터 철저히 정파간의 싸움으로 점철된 민주노동당 선거를 맞이하여 '다함께'는 1월 14일자 기관지의 내용을 미리 인터넷으로 끌어 올려 박노자 교수가 김인식 정책위의장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을 공개했다. 그는 "한국의 영세업자들을 보면 대자본에게는 수탈을 당하는 입장이지만, 예컨대 자그마한 구멍가게에서 자기 가족들을 초과착취한다든가, 아르바이트생 중 최하층의 노동자를 부린다든가 하는 것을 보면 이들은 중간적이다"라고 밝혔다. 나는 이 구절을 읽고 한국사회 현실에 관한 박노자의 몰이해 탓에 고개를 저었다. 가내상업에서, 동원한 이들은 기업인이라기보다 중간층 이하 노동자의 처지와 다를 바 없는 영세자영업자들에 가깝고, 동원된 이들은 노동자가 아닌 대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실업자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알바생 착취'도 프렌차이즈업계에서 극명히 드러나는 현상이지 '붕어빵 장사'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박노자는 이어서 말한다 : "지금 한국은 임금노동자가 전체 인구 중에서 65~70 퍼센트 된다. 이 각계 각층의 임금노동자를 중심으로 해서 당을 꾸려간다 해도 이미 시민 대다수의 이해관계를 표방한다고 볼 수 있는데 굳이 그 성격을 훼손시킨다는 것은 극히 올바르지 못한 판단이다." 그러나 임금노동자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가혹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더라도) "착취자이기도 하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남성 노동자는 여성을, 어른 노동자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짓누르고 있다.

계급은 지배-억압관계의 거대하고 유력한 현실을 설명하는 하나의 잣대다. 잣대는 단선적이라서, 성, 민족, 종교, 연령 등의 다른 잣대들과 어울려야 비로소 세계를 해석할 수 있으며 실천의 지렛대로 쓰인다. 노동계급을 대변한다는 것은 곧 여성과 성적 소수자를, 제국주의에 핍박받는 민족들을, 박해에 노출된 이교도들을, 청소년과 어린이들을, 노동계급과 함께 구석에 몰린 농민, 자영업자, 빈민들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자영업자의 양면성은 분석되어야 하나 그들을 내칠 이유는 없다. 만일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삼아 그 입장을 우선시하고 그것만으로도 다수를 대변한다는 자신감에 차 있다면, 박노자는 자신이 그토록 비판해왔던 민족주의, 구체적으로는 '선민의식'과 '다수결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셈이다.

세계의 진보를 이루는 힘은 노동계급의 전진이 아니라 개개인의 고뇌 어린 결단에서 나온다. 피라미드 질서에서 아랫사람을 부리고 윗사람을 동경할 것인가, 아랫사람의 모습에서 윗사람에게 당하는 스스로를 발견할 것인가. 이를 도외시하는 지식인은 파시즘과 속류 사회주의의 기로에 선, 민중의 이익을 핑계로 제 이익을 기도하는 야심가에 지나지 않는다. 진보정당은 사회 구성원들이 고립과 구속과 차별 대신 연대와 자유와 평등을 선택할 여건을 떠받치는 존재여야 한다. 진보정당은 마이너리티의 '정체성들'을 대변함으로써 '계급정당'의 의의를 살리며, 자신들이 끌어안아 중심에 세울 계급을 고집하지 않음으로써 '대중정당'의 구실을 해야 한다.

김창현이 진보적 정체성을 고민하지 않고 '국민'을 중심에 세우려 고집했다면, 박노자는 '노동계급중심'이라는 늪에 발목이 잡혀 복잡한 구도로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이번 민주노동당 선거는 진보진영이 이런 초보적 패러다임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났고 또 발전했는지를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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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경향신문>은 '국가정체성을 묻는다'라는 특집의 세번째 기사로 '자유주의'를 다루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8211908045&code=210000). 한국에서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가 경합하고 있고, 자유주의는 반공주의나 시장주의의 맥락을 따라 굴절되었음을 잘 소개하고 있는 기사다. 이 기사는 그러나 도저히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여러 부류의 지식인들을 자유주의라는 한울타리에 넣어버리는 우를 범하기도 하였다.


자유주의라는 개념은 본디 폭넓은 해석이 가능하고 쓰임새가 헤프지만, 이쪽 저편을 다 자유주의자로 칭하게 되면 자유주의라는 말은 아예 무용해진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라는 말은 사실상 폐기되거나, 또는 매우 엄밀한 의미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경향의 기사처럼 자유주의의 여러 종류를 들어주는, 이를테면 박노자와 복거일을 '두 자유주의자', '다른 자유주의'로 가리킨 것은 또다른 오해를 분만할 공산을 한껏 높여준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8211859305&code=210000). 공통점이 희박한 사람들을 각기 다른 수식을 붙여가면서 굳이 엮어야 했을까.


우선, 복거일이나 공병호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그들은 박정희시대에 긍정적이다. 박정희정권이 훨씬 악독한 독재정권인 김일성정권으로부터 자유 대한을 수호했다는 취지에서다. '나쁜 자를 더 나쁜자로부터 지켜는 것이 자유주의자의 임무다'라는 복거일의 지론이 가장 돋보이는 대목이다. 나는 박정희정권보다 김일성정권이 더 독재적이라는 데 대체로 공감한다. 김일성정권으로부터 박정희정권을 지켜줄 수도 있다고 치자. 그렇지만 복거일 등은 박정희가 억누른 자유를 박정희로부터 지켜내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중에 얻을 자유를 빌미로 현재의 자유를 유보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들이 군사독재를 방어하며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건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정체도 불분명한 '국가(체제)의 자유'로, 개인의 생명보다 민족의 생명이 더 중하다는 황장엽의 사유와 동형구조를 가지고 있다.


정치학자 린츠의 발명 이래 쓰이는 권위주의-전체주의의 분류를 응용하자면, 박정희정권은 권위주의이고 김일성정권은 전체주의다. 독재들의 성격을 분별하는 기초적 잣대로써 린츠의 학설은 유용하다. 그러나 '뉴라이트'가 늘상 되내이듯 권위주의가 그나마 전체주의보다 낫다는 결론으로 치닫는 순간, 그것은 권위주의에 대한 역사적 옹호로 전락한다. 자유주의자로서 써먹을 수 있는 논리가 아니다.


항간에서는 복거일, 공병호가 정부의 경제적 간섭을 존중하는 (칼 포퍼적) 자유주의자(liberalist)는 아닐지라도 (하이에크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지상주의자(libertarian)라는 점을 인정하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개념과 용어의 사치다. 자유지상주의자의 길이 권위주의자나 보수주의자와 다르다면, 정치적으로도 국가의 간섭을 극력 배제해야 하고, 박정희의 정치적 독재를 가차 없이 비난해야 마땅하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박정희를 옹호할 수 없을 것이다. 복거일과 공병호, 뉴라이트 등등은 조갑제 같은 국가주의자들과는 다르게 재벌의 능동성에 더 비중을 두는 입장이지만, 재벌이 누린 자율성도 국가가 부여하였으며 독재정권기의 경제성장은 명백히 국가주도형 개발독재에 따라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보적인, 그리고 경제적 측면보다는 사상적, 정치적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진중권, 박노자, 고종석 등은 자유주의자일까? 박노자는 경향과의 인터뷰에서 "사회주의의 기본 원칙은 인간의 해방과 진정한 자유의 실천이므로 저도 ‘광의의 자유주의자’입니다. 궁극적으로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의 기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밝혔다. 자유주의자이면서도 사회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근거로 그를 자유주의자라 지명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박노자가 언급한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자도 중시하는 자유주의이자 사회주의자가 아닌자도 얼마간 또는 전적으로 따라야 할 자유주의이다. 거기 기초해 자유주의자를 가려낸다면 극단주의자와 교조주의자들을 뺀 좌우의 모두가 자유주의자로 지목되어야 할 것이다.


진중권의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는 한국 자유주의의 명랑한 성취이기는 하나, 저자 자신이 자유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진중권은 자칭 자유주의자들에게 '영업의 자유'만을 떠들지 말라고 일갈하면서, 사상적이고 정치적인 자유주의를 사회적 '상식'으로 심으려는 노력을 기울여왔을 따름이다.


특집 기사에서 자유주의자로 거명된 또다른 인물들, 강준만, 고종석, 최장집의 경우, 상대적으로 자유주의자의 면모가 짙기는 하나 이들도 노무현정부 5년동안 민주정부의 신자유주의와 그로 인한 빈부격차의 심화를 겪으며 좌파 쪽으로, 사회민주주의 쪽으로, 다소 사회주의적으로 기울었다. 고종석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떤 자유주의자는 보수주의자에 가깝고, 또다른 자유주의자는 사회민주주의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은 명백히 후자이고, 나아가서는 자유주의자에서 탈피해 사회민주주의자가 되어가는 편이다. 그들은 그럼으로써 자연스레 자유주의라는 스펙트럼 자체를 형해화시킨다. 복거일, 공병호 등 역시, 비록 반대편에서지만, 같은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절대권력의 대항마로 등장한 자유주의는 자유의 확산과 함께 독자적인 이념으로서의 생명력이 되레 줄어드는 아이러니한 귀결을 맞이한다. 신체, 사상, 집회, 결사, 언론, 프라이버시 등의 자유가 보편화된 세상에서, '자유'에 관한 논쟁은 경제적인 자유, 그러니까 사유재산권과 생존권을 둘러싼 투쟁에 국한되어가며 치밀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다. 


현재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자유주의운동도 사회복지의 요구 및 그것을 가능케하는 사상과 언론의 자유로부터, 사유재산권을 사수하려는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다. 뉴라이트의 '뉴'는 그저 '수구'라는 공세에 포위된 조갑제, 김용갑 등과 자신을 차별화하려는 홍보전략이고, 그들의 자유주의는 경향이 지적한대로 사상적이고 정치적인 자유와는 거리가 있다. 특집기사는 그러한 사이비 자유주의들이, 자유주의자는 물론 참다운 사회주의자나 진정한 보수주의자까지도 견지해야 할 가치를 버리고 배반하는 현실을 분석하는 방향성을 띠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복거일, 공병호 등이 자유주의자가 아님을 명토박고, 박노자, 진중권 등을 자유주의자는 아니지만 누구보다 '리버럴'한 진보 지식인으로 등장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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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Free Speech | 2008. 8. 13. 01:25 | Posted by 김수민
어쩌다 보니 2000년 이후 출현한 일군의 논객들과 교류할 기회가 있었다. 특히 <아웃사이더>에 참여했던 지식인들과는 서로 이름을 알고 지내기도 했는데, 지금까지 연이 이어져 오는 분은 홍세화 그리고 박노자밖에 없다. '송복 퇴임식 사건'으로 조선 동아에게 연타를 얻어맞고 있을 때 그가 방어해준 것이 계기가 됐다. 그는 그 사건을 한국판 68운동쯤으로 보는 듯하다. 내가 그와 메일을 자주 주고받던 시기는 군복무 기간이었다. 그의 관심사와도 결부된 군대 이야기도 좀 나누었지만, 그무렵 내가 한국사를 전공하리고 결심하면서 이것저것 대화할 게 많았다.

한국의 진보 지식인에게는 두가지 임무가 있다. 첫째, 급진적으로 타격해 판을 흔들면서 둘째,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방책을 내놓는 것이다. 조희연의 표현처럼 비정상성을 지양하는 것과 정상성을 극복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사민주의와 아나키즘의 병행을 중요시하는데, 술자리에서 만난 홍기빈 씨가 똑같은 표현을 하는 걸 보고 무릎을 탁 친 적이 있다. 진중권도 그러한 축에 들지었만 최근 들어서는 후자에 기울어진 것 같다. 우석훈의 경우는 자신의 녹색지향과 재계와 관계를 넘나든 경력을 잘 조화시켰다.

박노자도 그런 색깔이 강하다. 그가 알려진 직후에는 사민주의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의 질적 핵심이 복지국가 예찬보다는 제국주의(및 오리엔탈리즘) 비판에 있음을 알면서는 생각이 좀 달라졌다. 마침 2002년 말 또는 2003년 초에 그가 '트로츠키주의 성향'이 있다는 질문을 긍정한 인터뷰가 나왔다. 그는 만델보다 캘리니코스, 하먼을 존경하는 듯했고, IS계열인 '다함께'와 꽤 친한 관계였다. 한때는 다함께 회원인지도 긴가민가할 만큼.

(그랬던 그가 어쩌다 다함께와 그렇게 틀어졌는지도 다소 미스테리다. 천상이 비조직적 인간이라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말씀하시는 것 같고, 다함께의 일사분란한 방침과 드디어 충돌한 것이 아닌가 한다. 게다가 '영세 극좌파'라는 별명까지 붙여주었다. '다단계', '런던연합' 따위의 조롱 어린 별명보다 점잖지만, 그만큼 충격적이기도 했다. 하하, 영세 극좌파라니... 지인들과 키득거렸다. 혹시 그 '영세'가 '영세중립국'할 때 '영세'면 그나마 덜 약올랐겠지만,하면서.)

이번 그의 블로그에 올라온 짤막한 글이 그의 사상적 지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을 '개량주의자(?)'라고 표현하면서도 진보신당이 사회주의의 원칙과 이상을 분명히 하자고 한다. 좀 억지스레 정리하자면, 진중권이나 홍세화의 입장을 '전진'과 접붙인 셈이다. 요즘 진보신당 게시판에서 '전진'이 두들겨 맞고 있는데 이게 어떤 파장을 미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나는 전진을 두둔하는 입장이었다(왠일이냐 싶지만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하지만 '사회주의'를 당 강령의 문구로 넣는 데는 반대한다. 그점에서 나는 박 선생하고 다르다. 그러나 어쨌건 내가 중요시하는 'TWO TRACK'을 잘 구사한다는 점에서 나는 그에게 이념적 친화성을 느낀다. 그의 생각은 나 같은 사람보다 조금 혹은 훨씬 마르크스주의적이긴 하지만.

근래에는 뜸하지만 예전에 자주 만나서 그런지, 화면이나 지면에서 보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자신(의 기품)을 제대로 드러내서인지, 홍 선생이 어떤 분인지는 대충 알겠다. 그런데 박 선생은, 잘 모르겠다. 그가 집에서 어떤 아버지고 남편인지 좀 궁금하기도 하다. 원체, 잘 안 보여서 더 궁금한 것이다. 강연회 뒤풀이 때 그와 함께 간 곳이 술집이 아니라 커피숍이었다는 것, 어떤 학생이 그를 찾아갔더니 빵을 드시고 계셨다는 것, 고기를 안 드신다는 후문이 있더라는 것, 정도로만 그의 사생활을 어림할 뿐이다.

아마 그가 가진 '의외의 목소리'도 베일의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얼굴은 에단 호크삘인데 말은 제2의 이다 도시? 그의 성대모사를 곧잘 하는 나도 그의 정신세계는 조금도 짐작할 수가 없다. 이상, 사실 박노자의 사상보다는 인간 박노자가 더 궁금하다,는 잡설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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