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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 Speech'에 해당되는 글 156

  1. 2010.01.05 올해 소망
  2. 2010.01.04 편이 생긴다는 것 1
  3. 2009.12.12 그런 인간들도
  4. 2009.09.27 빈자리
  5. 2009.09.17 글쓰는 일
  6. 2009.09.17 끼어들기를 자제하다
  7. 2009.09.16 먹고 사는 기술 2
  8. 2009.09.09 군대냐? 4
  9. 2009.09.04 개와 고양이 3
  10. 2009.08.06 주류와 비주류, 세가지 부류
  11. 2009.07.30 민간사회로 복귀 3
  12. 2009.07.15 시껍 2
 

올해 소망

Free Speech | 2010. 1. 5. 18:07 | Posted by 김수민
뭐 하나 건덕지 나오면 파블로프의 개마냥 짖어대면서 트집 잡고 베베 틀어놓는
것까지는 지 마음인데
그게 비판정신이니 예리한 지성이니 착각하는 사람은
안 봤으면 좋겠다.

만약에 보이면 한번 더 꼬아서 골치아프게 해줄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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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이 생긴다는 것

Free Speech | 2010. 1. 4. 17:33 | Posted by 김수민
2001년에는 대전 충남에 사는 친구들이 많았다. 봄날 자기네끼리는 곧잘 만나기도 했나 본데, 난리가 한번 났다. S와 통화를 했더니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K랑 L이랑 같이 살잖아. 근데 L이 연애하고나서부터 애가 너무 달라져가지고, 지금 말도 잘 안해. 걔네 학교 축제 때 가서 이야기듣는데, K가 거의 울려고 그러더라." 사연을 좀 더 자세히 듣고보니, L에게 연락하는 것도 겁이 났다. 만약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나도 L과는 관계를 끊을 수밖에 없겠다는 위기감까지 들었다. 한마디로 말해 '맛탱이가 갔다'는 것이었다. K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아니나다를까 하소연이었다. 그래도 한쪽이나 중재자 또는 관찰자만의 이야기만 들을 수 없어서 L과도 통화를 했다. "순전히 내가 잘못했지." 다행히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얼마 후 L은 여친이랑 헤어졌는데, 한참동안은 그때 이야기만 나오면 겸연쩍어 했다.  

나 또한 당시 서울에서 골치 아픈 일을 겪었고, 그 와중에 바로 그 친구들에게 타박을 듣기도 했다. 무슨 오디션에서 탈락한 직후에 그애들이랑 채팅을 하다가 내가 빈정상해 "잠수를 타버리겠다"며 대화를 끊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여자애 때문에 내가 잠적 상황을 즉시 풀어버린 걸 그들이 알게 됐다. "씨댕,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그래도 L보다는 상태가 낫지 않냐...;;" 그런데 그때 그 '작업'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보다는 제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속만 썩고 있었다. 하루는 학생회실에서 어떤 형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연애가 씨발, 그걸 해서 힘이 나고 주변에 보기도 좋아야지, 서로를 갉아먹는 그런 걸 하면 안돼." 다른 사람더러 하는 말이었지만 꼭 나더러 하는 소리 같았다. 그 덕분인지 나는 소모적인 작업에서 생각보다 빨리 벗어날 수가 있었다.

입학했을 적 과반에서 남들이 칭찬하고 높이 사는 한 누나가 있었다. 나보다 두 학번 위고 서너살 위였다. 교양 있고 지적이고 품위 있고 그런, 나무랄 데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이듬해 초 어느날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온 그날, 그가 수술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흉볼 일이 아니었고, 아무도 흉을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문제는 그 자신이 먼저 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얼마 뒤 02학번 새내기들이 들어왔는데, 그중 삼수를 했던 어떤 애와 그 누나는 사귀게 되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 새내기는 여기저기 껄떡거리다가 그 누나한테 정착했고, 비결을 묻는 다른 사람들에게 "5분간 삽질했더니 넘어오더라"는 말로 과방에 있던 그의 선배들, 특히 내 또래 여학생들의 두껑을 열어버렸다. 하지만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는 주변의 평은 틀린 걸로 판명났다. 사람이 변했는지 원래 그랬는지를 따지는 건 무망한 짓이고, 어쨌든 그 누나는 우리로부터 멀어져갔다. 나는 물론이고, 그 누나와 오래 교류해왔던 사람들조차 그 누나와 더 말을 섞지 못했다.  

3년전인가, 4년전인가의 일이다. 무슨 세미나가 끝난 다음에 뒤풀이에 갔는데, 어떤 사람이 자리에 앉아 있던, 나를 비롯한 세 사람에게 물었다. "다들 애인이 있으시죠?" 정말 그랬다. "세상에 두려운 게 없는, 참 든든하다는 그런 눈빛이라서..." 그런가 싶었다. 그는 일주일인가 이주일이 지나서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새에 솔로가 되어 있었다. 시시콜콜 그동안 어떻게 되었노라고 털어놓을 수는 없었고, '그럼 눈빛만으로 치면 나는 언제나 연애중이었다는 것인가'하고 씩 웃고 말았다. 연인이라는 존재를 바라보고 있으면 나를 시달리게 하는 조건이나 일들을 잠시 잊을 수 있다. 하지만, 돌아보면 내가 '니네가 뭐라 그러든 나는 편이 있기 때문에 꿋꿋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날이 갈수록 깨닫는 거지만 그건 나의 천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언제나 반면교사, 타산지석에 기대어 왔던 지난날로부터 배운 것이다. 저 위와 같은 사례들에서, 배울 만한 점이나 부러운 구석을 일부러 찾고 뒤지는 것도 참 고역스럽다.

그 누나의 소식을 들은지는 한 7년쯤 됐다. 사는 게 대부분 그렇겠지만 여자 쪽이 좀 더 힘들다. 과반 커플의 경우 깨지고 나면, 남자는 다시 친구들을 찾아오고 친구들은 그를 어쨌든 받아주지만 여학생 쪽은 달랐다. 한번 멀어지면 좁히기 힘들다. 남이 받아줘도 제 스스로가 돌아가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결별 후에는 어학연수를 떠나는 여학생들이 많았다. 뭐 남학생이라고 해서 쉬운 것만도 아니다. 군으로 직행하기도 했으니. '한 편'이라는 거, 참 부질 없다. 고작 그래서 달라진 눈빛이라는 거, 상황이 역전되면 장사 없다. 그러고 보면 이와 반대로, 자기네끼리 알콩달콩 살면서도 주변 사람들 보살피고 분위기 훈훈하게 만들어주던 사람들은 갈라지고 나서도 사람 구실하면서 살았다. 지난날의 옛사람들이지만 다들 근황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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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인간들도

Free Speech | 2009. 12. 12. 20:49 | Posted by 김수민
좌파 행세를 한다니, 한국사회는 그래도 꽤 평화로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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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리

Free Speech | 2009. 9. 27. 16:56 | Posted by 김수민
빛좋은 품성보다는 어둑한 배려를. 예전 강연회를 주최할 때면 늘 뒤풀이에 관해 세운 원칙을 되새겼다. 주최자는 연사 곁에 앉지 않는다. 모두 그럴 필요는 없지만 나는 가장자리에 앉는다. "평소 참 뵙고 싶었습니다"하고 알은체하기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다. '선수'들이 아니라 손님들이 연사 곁에 앉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주최자는 그쪽 곁에 앉아 대화해야 한다. 뭐, 한번은 예외가 있었다. 단 두명이서 고전하며 준비한 강연회가 있는데, 다들 내게 고생했다며 연사와 함께 중간쪽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대신 2차에서는 연사 곁에 앉지 못한 방문자들 가까이에 있었다. 

얼마 전 촛불시민들이 마련한 어느 자리에 갔다. 말씀하시기가 불편하신 분이 계셨다. 그는 뒤풀이 자리에서 궁금한 점을물어보려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 계신 분들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다른 분들은 대화에 빠져 있을 때 다른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성격이신 것 같았다. 그러니 내가 말을 전해주었어야 했는데 뻘쭘하게 앉아 있던 터라 그러지 못한 것이다. 그분은 서너차례 그런 일을 겪다가 조금 먼저 자리를 떴다. 그가 일찍 일어난 것이 소통을 포기해서인지 다른 사정이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빈자리가 안타까웠다. 나는 마음 씀씀이가 대범치 못해 이런 기억은 두고두고 남는다.   

크게 안타깝지는 않지만 마음에 걸리는 비슷한 기억들이 더 있다. 작년 여름 경찰과 대치하다가 밤을 샜던 어느 날, 옆에 있던 어느 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하남에 사는 스무살 청년이었다. 그는 하남시민이 추진하는 주민소환투표에는 찬성하지만 화장장을 향한 반발은 집단이기주의이라고 했다. 자신의 동생이 고등학생인데 자신의 고교 시절 선생이기도 한 이가 촛불집회참여를 비하하는 발언을 해서, 친구들과 몰려가 따졌다는 일화도 들었다. 겪은 사람은 알겠지만 그런 현장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참 뒤 그와 나와 나의 일행은 귀가했는데, 지하철에 내려가기 전 설렁탕 한술이라도 같이 뜨고 헤어질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면 흔히 있는 기회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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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일

Free Speech | 2009. 9. 17. 11:17 | Posted by 김수민
1.
고3이었던 2000년 이맘때, 나는 입사원서를 썼다. 가세가 급격히 기울고 나도 대학에 들어갈 의지가 줄어들면서 바로 사회로 나가야겠다는 궁리를 했다. 내가 응모한 곳은 모 음악잡지사였다. 나는 음악 기자가 되려고 했다. 학력에 관계없이 음악과 영어 중 하나만 능하면 자격요건이 충족되었다. 실은 둘 중 하나도 갖추지 못했음에도 무식해서 용감한 나는 원서를 썼고, 그쪽에서 요구하는 장문의 평론을 썼다. 모집인원은 미정이었고 결과는 0명 선발이었다. 하지만 나의 당돌함(?)을 높이 산 편집부는 전문을 잡지에 게재했다. 그 직전에 아버지가 병석에서 일어나 일터로 나갔고, 그 다음날 나는 대학에 붙었다. 사실 문학 때문이 아니라 음악 때문에 대학에 간 셈이다. 내가 당시 쓴 글은 대부분은 주제가 록음악이었다.

조금 더 마음을 굳게 먹었다면 대학생이 되어 상경한 뒤 그 잡지사와 교류를 하면서 음악평론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 '평론'이라는 건 컴플렉스였다. 자존심이 상했다. 더구나 상대는 음악이었다. 고교 시절 내게 음악평론은 밴드가 해체되고 난 뒤의 소일에 불과했다. 그리고 나는 특정 장르만 반복해서 들었고, 2000년대 초반은 내 귀를 잡아끌지 못하는 음악들이 유행했다. 1990년대 중후반에 대학생활을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답도 안 나오는 한탄만 되풀이했다. 그러면서 나는 음악평론과 멀어졌다. 10년이면 사람이 크게 바뀐다. 요즘 들어서는 다양한 음악을 들으려 애를 쓰고 공부도 하지만 평론은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다만 '록 보컬 평론'에는 아직 관심이 많다. 또 한국사회는 노래방이 아무래 성행해봤자 여전히 보컬의 불모지니까. 그런데 최근 '보컬 열전'을 블로그에 못 쓰고 있어서 갑갑하다.

2.
내가 대학에서 운동을 할 거라고는 내 고교 친구들도 몰랐고 대학 동기들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짜증나도록 무료한 시절이 다가온 신입생 봄날, 나는 달리 할 일이 없어서 <조선바보>에 들어갔다. 마침 만들던 밴드가 날아가버린 시점이었다. 이듬해에는 유뉴스에 칼럼을 연재했고 그러면서 글쓰기는 일이 되었다. 유뉴스 덕에 대학 학보사 청탁이 곧잘 들어와 돈도 짭잘하게 챙겼다. 게다가 2학년이었던 2002년은 일감이 참 많은 시기가 아니었던가.

워낙에 빈재라 군대 갔다와서도 했던 일을 이어갔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밴드 일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그랬구나. 여기서 내가 후회하는 대목이 있다. 단체활동이랑 칼럼 가운데 하나만 선택해야 했었다. 나의 선택은 사회에도 자신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 하는 말이다. 하나만 택하기가 껄끄러우면 둘 다 그만뒀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둘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 나름으로는 굉장히 최선을 다했다. 덕분에 얻은 것은 오해였다. 그 바닥에도 'FA 최대어'라는 표현이 있다. 졸업하면 여기저기에서 부름을 받을 것 같은 이를 일컫는 것이다. 누가 나더러 그런 단어를 들먹였지만 나의 처세는 그 반대였다. 돌아오자마자 유뉴스 편집부에 일러둔 일성부터가 이랬다: "무차별 폭격을 할 겁니다."(나를 전혀 통제하지 않은 편집부에 또 한번 경이를 표한다.) 유뉴스 독자 가운데는 NL 사람들이 많았는데, 버젓이 노골적으로 NL을 까대는 내 글이, 그것도 기획위원 명의로 실렸다.

2007년 초 편집진이 바뀔 때 유뉴스는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전직 편집자는 내게 서운함을 토로했다. 내가 앞으로 주도해 주리라는 기대를 가졌었다면서. 그때 나는 글쓰기 작업에 나선 걸 후회했다. 괜한 기대감을 심어주었다. 내가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내내 사나운 공격에 나선 비결 중 하나는 글쓰기를 그만둔다는 입장이 확고했던 데 있었다. 하지만 지켜 보는 사람들은 오히려 반대로 저렇게까지 하는데 영영 하지 않을까 추측했다. 교육학과 가면 선생되는 줄 알고 정외과 가면 정치인 지망생인 줄 아는 이런 사회에서는 찬물도 조심스레 마셔야 한다.

2006년경에는 글쓰기를 업으로 삼지 않겠다는 결심이 섰다. 하려고 해도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판단도 함께였다. 기고 청탁이 줄어든 게 무엇보다 행운이었다. 괜한 욕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었다. 누가 자꾸 추켜올리면 스스로를 읽는 눈이 흐려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기고보다는 투고가 훨씬 즐거운 작업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장정일 코드 혹은 화두>라는 책에 실린 장정일의 한 단상을 읽어보길.)

3.
대학 당국의 특기자 정책 실패의 한 사례가 바로 나다. 특기자 프로그램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진단도 있지만, 나의 경우 특기자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없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다. 성적 올리기가 버거운 나로서는 기숙사 자치회 활동으로 주어지는 근로장학금 이외에 유일하게 장학금이 나오는 건수였다. 창작 말고 필사만 해도 잘하면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문제는 마침 당시에 있었던 '문학권력' 논쟁이었다. <조선바보>는 조선일보 비판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벗어나, 학내 문제, 특히 교수권력을 타겟으로 삼고 있었던 차였고, 2002년 마광수 해임을 둘러싼 연세대 국문과 사태가 터졌다. 11명의 연구자가 대학원을 떠났고, 그 학과의 동창들끼리 벌인 알력 다툼도 극심했다. 사태의 주역인 국문과 김철 교수의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 학내 언론들은 비판을 하지 않거나 기사화했다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하여 덕분에 간 부은 <조선바보>와 내가 특종을 주워먹었다. 조금 특이한 건 그를 비판한 사람 가운데 나만 고소의 위협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함께 사태에 접근하던 <말>지 기자나 자퇴한 대학원생 모두 신기해 했다.

나는 문학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행태에 경악했다. 젊은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게시판에만 가도 꼴사나운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문학하는 사람들이랑은 되도록 어울리지 않겠다, 어울려도 한두명 개별적으로 만나지 절대 그 바닥과는 교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동시에 매우 자연스럽게 국문학을 전공하겠다는 계획도 접었다.  

새내기 시절 가을에는 참 열심히 문학평론을 읽었다. 이론보다는 문체를 탐닉했다. 평론이 소설보다 명문장이 더 많았다. 나는 백낙청보다 김현, 김병익을 훨씬 좋아했다. 과 친구들은 내가 무슨 민중문학을 하려고 한다는 오해를 했지만.("요즘 무라카미 하루키를 재밌게 읽고 있다"고 하면, 그쪽 애들은 의외라고 했다), 그때 함께 조선바보를 했던 ㅇ형은 "쟤는 창비보다는 확실히 문지야"라고 했다  내가 존경하는 조세희, 최인훈의 소설도 다 문지에서 나왔다. 물론 그 문지라는 것도 옛날 문지지 요즘을 가리키는 건 아니겠지만.

하지만 내가 음악평론을 대하는 태도는 문학평론에도 적용되었다. 나는 픽션을 창작하고 싶었다. 김현이 아니라 조세희처럼 되고 싶었던 것이다. 국문과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이론 공부에도 흥미를 잃었다. 그러나 이래저래 엉뚱한 글을 쓰느라,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 다 놓쳐버린 꼴이니, 만약 글쓰기를 업으로 삼겠다는 사람이면 이 전철을 조금도 따라 밟아서는 안될 것이다. 나는 글쓰기에 흥미도 떨어졌고 이걸로 뭘 해먹겠다는 계획이 없으므로 상관 없지만 말이다.

4.
아주 오래전에 소설이랑 희곡 아이템 잡아둔 게 있는데 도대체 언제 쓰나. 기약이 없다. 직업이 아니라서 겪는 현상이다.

나는 내가 보기 좋은, 그러면 그냥 그걸로 땡인 픽션문학을 쓰기를 바란다.

5.
얼마 전에 정치칼럼 중단 원칙을 한번 어겼다. 노무현 지지자들에게 한미FTA반대를 호소하면서였다. 너무 절박하고 가슴에 한이 남아서 썼다. 오늘도 버스 안에서 FTA광고를 듣고 눈깔이 뒤집혔다. 함부로 예외조항을 적용하면 안되는 걸 알지만, 눈 한번 감고 썼다.

근래 들어서 고민을 조금 했다. 블로그에 쓰나 웹진에 쓰나 별 차이가 없는데 절필이란답시고 발표를 하지 않는 게 의미가 있는가. 슬슬 다시 쓸까 저울질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첫째, 쓰기가 싫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내 공간에서 지껄이는 거랑 나름의 의무감을 갖고 기고하는 거랑은 다를 수밖에 없다. 둘째, 분명히 나는 약속을 했다. 2006년에 계획을 밝혔고 2008년에 중단을 선언했다. 셋째, 써봐야 무소용이다. 나는 내게 동의한다는 사람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칼럼니스트가 아니라 블로거와 씨부리머로 존재하는 것이 더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내게는 시장바닥이나 사랑방이라는 공간이 없으므로 불가피하게 인터넷을 택했고 어쩌다 웹진까지 갔을 뿐이었다. 평론가가 되는 순간 내것은 증발된다. 최장집 한명보다는 김수민 백명이 낫고, 유창선 열명보다는 김수민 한명이 낫다. 담론권력이 아니라 평범한 장삼이사의 발언으로 대중 속에 섞여들면 그만이다. 더구나, 칼럼으로 접근하고 끌어들인 사람보다 내 삶과 일상으로 설득한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아마 전자는 실상 0명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게 동의한다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내 글을 퍼가는 사람은 더 믿지 않는다. 자기 마음에 드는 특정 구절만 쏙 뽑아 읽고, 그걸 부각하는 짓에 질렸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폭탄을 끼워놓는다. 퍼갈이가 어떤 구절을 미치도록 이용하고 싶더라도 마음에 안 드는 구절 때문에 결국 퍼가지 못하도록.

6.
돌이켜보면 나의 글이란, 말을 앗긴 자가 임시방편으로 택한 도구였다. 정치적인 차원에서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수구꼴통, 김대중-노무현주의자, NL 정도겠지만, 비슷한 포지션에 있는 사람에게도 눈총을 받는다. 그들과 마주칠 때 항상 듣는 말은 "아, 그 글 많이 쓰는 사람?"이다. "많이"라는 말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렇게 많이 썼을까? 다름이 아니라 할 말이 많은데도, 어리다는 이유로, 볼 것 없는 외모를 가져서, 무식해 보여서 또는 직함이 없어서, 패거리를 거느리지 않아서, 발언권에 언제나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쩌다 주어진 자리, 작정하고 나간 자리, 손 들면 얼마간은 발언권이 돌아오고 공방까지 벌일 수 있는 자리에서는 언제나 '달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글을 잘 못쓰는 탓이겠지만 글 잘 쓴다는 말보다는 말 잘한다는 말을 훨씬 더 많이 들었다. 한때는 자만에 차서, 어떤 이를 달변이라는 평가하는 걸 들으면, 일일이 다 콕 찍어 지적해주면서 "저걸 달변이라고 하는 걸 봐서 당신은 언어감각에 문제가 있다"는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질러주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어딘가에서 한바탕 말을 잘하고 나면, 발언권에 더 큰 제약이 생겼다.(씨밤바들아 혹시 듣고 있다면 똑바로 들으라,고 굵은 글씨로 처리한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재갈을 물리겠다는 의지를 내가 못 읽었을 리가 없다. 심지어 한편처럼 여겨지는 이들도 그랬다. 내가 글을 쓰는 건 좋아하지만 내게 말할 기회가 돌아가는 건 꺼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의 말폭탄만큼은 해체하고 싶었던 것 같다. 대신 '글쓰는 사람'이라는 자리를 천형처럼 뒤집어 씌우려 했다. 글은 말보다 통제하기 쉽다.

내게 글은 말을 얻기 전에 참으면서 흘린 신음들이다. 이제 신음을 쓰지 않으련다. 입으로든 키보드로든 말을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안 그래도 활자가 너무 지겹다. 부득이하게 자판을 쳐야 한다면, 구어가 거리가 먼 '글쓰기'라고 할지라도, '글'을 '쓰고' 있다는 느낌이 내 자신에게는 들지 않게끔 할 것이다. 조촐히 진행하는 인터넷 라디오방송의 오프닝 원고를 쓰는 게, 아이디어 때문에 힘들기도 하지만, 아주 재미가 있다. 그것은 글이 아니라 말을 쓰는 일이다.

옛날 글쓰기에 쏟았던 만큼의 고민을 말을 하는 일에 쏟아 나간다면 재미 뿐이 아니라 의미까지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구조적인 병폐는 조금도 못 고치더라도,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불의에 맞서 싸우기에는 확실히 도움이 될 것이다. 그 편이, 별 쓸모도 없는 행위를 벌이면서 이미 설득된 사람을 또 설득하여 제 잇속을 챙기기보다는 훨씬 아름다운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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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어들기를 자제하다

Free Speech | 2009. 9. 17. 01:13 | Posted by 김수민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공으로 사는 길에는 일단 두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남의 인생에서 조연이나 단역을 맡지 않는 것. 두번째는 남의 인생에 끼어들어 주인공이 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깜빡이를 자주 켜는 운전자에게 안전운행은 어려운 일이다. 어디서나 자신이 주인공이 되기를 좋아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바로 표정이 바뀌고 우울해지는 사람들을 나는 싫어했다. 나는 길거리를 갈 때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본다. 그렇기에 어떤 자리에서 아무도 모르게 사람들의 반응과 감정선을 살피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 주인공병에 걸린 이들은 너무 쉽게 적발되었다. 주인공병 없이도 자연스레 타인의 이목을 모으는 능력자는 극히 희귀하다. 내 성격의 상당 부분은 타산지석을 통해 형성되었다.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끼어들기를 자제한 것이다. 잘 끼어들지 않는 또다른 이유도 있다. 비교적 최근에 생긴 것인데, 대화나 토론의 궤도가 나와는 너무나 멀 때 나는 끼어들지 않는다. 전제나 사실부터 일일이 교정해야 할 수고를 감내하기가 귀찮을 뿐더러, 그걸 해낸다고 해도 향후에 오해와 갑갑함만 남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진보진영이 한나라당의 지지자들을 끌어들여아 한다"고 했을 때, 자주 "우경화", "계략"이라는 반응을 들어 자신의 진의는커녕 생산적인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너희들끼리, 그 잘난 중소득 고학력 유권자들 표나 갈라먹다(그러면서도 민중주의적 환상에 빠져 있는 멍청함이라니) 망해라. 가까운 지지층부터 확보한다? 이미 박박 긁어 모든 게 그 수준이고 그게 전부야'라고 돌아섰다. 나는 어떤 패러다임이나 프레임을 다수에게 통용된다는 이유로 인정하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자주 소외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나는 당신(들) 인생의 엑스트라가 아니니까. 그렇지만 끼어들지 않고 그저 듣고만 있어도 좋을 때도 많다. 좋은 이야기들이 나올 때가 그렇다. 가만히 있는 내게 어떤 이들은 종종 묻는다. "재미없죠?" 거기가 술자리였고 재미가 없었다면 나는 듣지 않고 자리를 떴을 것이다. 스무살 넘어서 내가 얻은 것 중에 하나는 말을 듣는 재미였다. 물론 이 경우에도 문제가 생긴다. 내가 말수가 적고 얌전하다는 오해를 하기 때문이다. 한번 잘못 잡히면, 수십분 일장훈시를 듣는 수가 있다. 김수민이가 정말 괴팍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다감하구나, 라는 사람도 있으나, 알고 보니 진짜 괴팍하다는 사람도 앞으로 생겨날 수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남의 성격을 짐작한다. 누차 되내지만, 지레짐작은 속은 사람을 양산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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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사는 기술

Free Speech | 2009. 9. 16. 22:34 | Posted by 김수민
지난 6개월동안 먹고 사는 기술 하나를 배웠다. 교양을 쌓거나 학력(學歷)을 올리기 위한 교육이 아니라, 그야말로 직업교육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기능 하나를 추가하는 게 아니라, 탈바꿈을 넘어서 틀을 가는 괴로움도 겪었고, 수시로 찾아오는 무력감으로 애도 먹었다. 밥벌어 먹고 산다는 게 그렇다. 교육을 받는 이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고 그외에 여러 핸디캡을 안고 있는 탓에 살면서 별로 해본 적 없는 후회도 많이 했다. 기본기가 있다는 평가와 칭찬 끝에 따르는 지적 모두로 인해 후회는 좀 더 깊어졌다. 옛날에는 왜 이걸 생각 못했을까, 진작에 준비하지 않았을까. 왜냐고 묻는 사람이 많았고, 나는 몇마디를 붙이다가 결국 "그냥 너무 하고 싶어서"라고 답함으로써, 객관적 난관을 솔직한 만큼의 모호함으로 비켜나가곤 했다. 군 제대 직후로 돌아가고픈 심정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현재의 이 모든 조건을 안고 가야 한다. 당장에 돈 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는 정말로 어디론가로 나아간다는, 진출한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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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냐?

Free Speech | 2009. 9. 9. 22:30 | Posted by 김수민
지인 한분께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하였다. 기존의 종교적, 또는 근본적 평화주의에 의한 병역거부하고 약간은 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다. 그간 '국가권력'의 횡포와 부조리를 몇몇 구체적인 측면을 들어 고발했다. 조금 더 정치적인 거부인 셈이고, 대체복무 논란하고는 거리가 떨어질 것 같다. 앞으로의 싸움이 어떻게 펼쳐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물론 그 주목의 대부분은 걱정이다. 그분의 건투를 빈다.

이에 반해, 아예 세상을 군대로 만들려고 작정한 무리들도 가까이서 우연히 눈에 띈다. 해마다 이맘 때 운동장을 지나가다 보면 연고전을 준비하는 기수단의 연습을 목격할 수 있다. 소리를 질러가며 군기 잡는 모습에 피식 웃으며 지나갔는데, 그동안에는 보지 못했던, 선착순과 엎드려뻗쳐를 목격했다. 그걸 시킨 애들은 작년이나 재작년에 고개 숙이고 있던 바로 걔들일 것이다. 대학에 가서까지 그러고 싶니? 기합 주는 애들과 받는 애들 모두가 우스꽝스러웠다. 

아까는 늦게 저녁을 해결하러 식당에 들렀는데, 옆자리 일행의 이야기가 아주 가관이다. 무언가를 조지고자 하는 한 여학생의 앙칼진 말투부터 귀에 들어왔다. 특히나 웃긴 대화는 이 부분: "걔한테 애들이 잘해주던데, 왜 그러는 거야?" "예쁘니까. 말투도 예쁘고." "그으래? 어디 한번 손을..." 혹시 기수단 애들인가 귀동냥을 해보니, 맙소사 밴드하는 애들이란다. 신입 후배들 혼내키다가 나이가 자기보다 더 많음을 알게 되어 새로운 긴장이 조성된 사연도 나온다. 아이구, 선배라고 까분 김에 그냥 쭉 나가시지 그땐 또 나이가 걸리시나? 나는 아예 대놓고 비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듣자하니 동아리내에서 술처먹고 주먹다짐, 정확히는 폭행까지 벌어졌나 보다. 이때도 그 여학생의 반응이 가관이었다. "뭐 몇대 맞으면 어때?" 하마터면 '야이 씨댕년아, 너 내가 나온 전투경찰대로 타임머신 여행 같이 갈래?'라는 읖조림이 나올 뻔했다. (하기야 이런 애는 '년'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새끼'라고 부르는 게 정치적으로 올바를 것이다. 나는 전 모 의원 같은 이들을 욕할 때 절대 '년'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씨방새"나 "새끼"라고 하지. 맞잖아? 전 모 의원이 여성인 건 내가 알 거 없고 확실한 건 그는 마초니까.)

나는 이런 육갑쟁이들의 천적이었는데, 세월 지나니까 내 곁에도 그런 새끼들이, 남아 날 리가 없으므로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포부의 공동체'뿐만 아니라 '지역적 공동체'에서도 그렇다. 서울 지역 대학은 지방에 비해 이른바 과기(합)가 매우 드문 편이니. 세상이 바뀌어가니 지방도 마찬가지일 거다. 내 동갑내기 친구들 중에도 사관학교에서 얼차려 받은 친구를 빼면 과기를 겪은 친구는 없다. 그러나 얼마 전 <한겨레>가 연세대 음대 기합 현장을 잡아냈듯, 이 대학가에 사각지대는 남아 있다. 이런 거나 탁탁 털어버리고 나올 걸.

며칠 전 술자리에서 어떤 애가 주먹질을 벌이는 사태가 벌어졌다. 호되게 밟아 놓으려고 했는데, 뒷일(패고 나서 감당해야 할 법적 문제나 합의금 등등)이 걱정되어 딴 데로 끌고 가 졸라리 욕하고 일장훈시하고 집에 보냈다. 다음날, 결정을 내렸다. 이번 일은 함구하는 대신(물론 이렇게 해줘도 정신 못차리고 숨어서 욕하는 사람있다. 그러면 별 수 있나. 함구는 끝날 수밖에), 우리 일행, 우리 모임에서 파문시킬 것. "공적으로는 폭력을 휘두르면 안 되지만, 사적으로는 휘두를 수 있다"던 걔의 변명 때문이었다. "나는 잘못 없다. 큰 맥락을 봐야 한다"는 예전 어떤 녀석의 변명 이후 최고의 수준이었다. 공부 많이 하고 실천해봐야 속내가 이런 수준이다. 그러니 엣지 있는(?) 인간들의 병영 같은 공동체는 계속되는 것이다.

알았던 놈이든 모르는 놈이든, 하여간 근래 구타유발자들이 너무 많이 생기고 있다. 그동안 오래 참았는데 여생을 마저 참게 제발 좀 도와주라, 으잉? 그게 싫으면, 밟고 밟히는 게 세상 이치라고 우격다짐 할 거면, 이 기회에 한번 밟혀보시든가. 때리는 거 말고도 방법은 많다. "차라리 때리라"는 절규가 저절로 나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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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고양이

Free Speech | 2009. 9. 4. 15:40 | Posted by 김수민
"쟤가 저러는 거 처음 봤네. 아무래도 데려가셔야겠는데요."

강아지가 아주 난리가 났다. 연신 내 손가락을 살짝 깨물고 몸으로 내 팔을 안는다. 물론 데려오지는 못했다. 어제 만난 분들이 주신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내 집은 좁은 데다가 개판이고 나는 강아지를 키워본 적이 없다.

그래도 키우고는 싶다. 나는 어제 본 강아지(시츄였던가?)처럼 흔히 볼 수 있는 체구의 애완견보다는 큰 개를 좋아한다. 삽살개도 참 좋아한다. 다만 비글 같은 개하고는 전혀 친하지 않다. 이런 애들한테는 꼭 깨물린다. 쬐끄만 게 깽깽 짖어대는 것도 참 싫다. 인터넷 검색창에 '3대'라고 치자마자 '3대 지랄견'이 뜨는군. 슈나우저는 그나마 귀엽고, 비글이랑 코카스페니얼은 가까이하기가 싫다. 달마시안도 장난 아니람서? 사람이랑 싸우는 것도 귀찮은데 개랑 싸워야겠냐!

언젠가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에 살게 된다면 꼭 삽살개 같은 걸 키우리라고 다짐하는데, 한가지 걸리는 게 있다. 나는 닭도 키우고 싶거든. 그래서 개 키우는 아는 형에게 물었다. 개가 닭을 공격할 확률은? 개마다 너무 달라서 알 수 없다고 그는 답했다.

따지고 보면 개가 고양이보다 개성이 더 천차만별이다. 고양이가 더 유아독존적인 것 같지만, 고양이끼리의 차이는 개끼리의 차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듯하다.

고양이를 키우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아마 내가 교회나 성당에 다니게 되는 것만큼이나 가능성이 희박할 것이다. 키우게 되면 고양이 숨인이 보듯할 것 뻔하다. 친하게 지내기 힘든 사이다.

도둑고양이는 자주 만난다. 내가 현재 사는 집은 이 부근 자취, 하숙촌에서는 좀 이례적으로 마당이 있다. 이쪽으로 숱한 도둑고양이들이 지나다닌다. 지금은 적응이 되어 서로 빤히 쳐다보면서 지나가는 게 하루 일과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깜짝깜짝 자주 놀랐다. 호랑이가 왜 고양이과인지를 새삼 실감할 정도로.

그러고 보니 그 마당에 집 잃은 강아지가 며칠 임시로 묵은 적이 있다. 그 강아지도 나를 참 좋아했었다.

도둑고양이만 있는 게 아니라 주인없는 개도 골목에서 곧잘 만났었다. 이 친구들은 꼭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를 지나갔었다. 동네개들이 마실 나온 줄 알았는데 다 주인없는 개라고 해서 놀랐고, 야산 어디서 모여서 집회를 연다는 목격담에 전율했었다. 그무렵 나는 야생화되어 불어난 고양이와 개로 개판이 된 도시를 소재로, 영화 시나리오를 써볼까 잠시 고민하기도 했다.

개띠는 개 편이라고. 정말이지 나는 고양이와 개 가운데 완벽한 개 편이다. 전경 근무하던 시절 나랑 친하게 지낸 분소 개가 있었다. 이 친구가 한번은 밤중에 분소 뒷편에서 왈왈 짖어댔다. 고양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이 친구는 분소장 사모님한테 혼이 났다. 텃밭을 갈아엎었다는 누명, 그러니까 고양이가 저지른 죄를 뒤집어 쓴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도 못하는 그 친구의 변호를 서줬다. 하여간에 고양이는 괘씸하단 말이야.

개와 원숭이 중에는? 여기서는 중립이다. 원숭이를 키우고픈 생각도 많았었다. 하지만 명이 다해서 죽으면, 그놈이 사람이랑 원체 비슷하게 생긴 탓에 너무 슬플 것 같다. 예전에 <동물농장>이었나? TV에서 친구사이인 개랑 원숭이를 너무 즐겁게 지켜봤었다. 그 원숭이는 오락실에서 오락을 할 정도로 똑똑했던 반면, 개는 둔하고 멍했다. 원숭이가 개를 데리고 바나나를 사러 갔는데, 개가 중간에 뻗어버리자 바나나를 한개 먹이고 앞에서 춤을 추는 걸 보고 폭소했다. 원숭이나 돌고래를 보면, 혹시 이놈들이 인간들보다 머리가 좋은데 싸움을 못해서 당하고 사는 게 아닌지, 혹은 거꾸로 인간이 이용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 의심은 토끼가 실은 육식동물이라는 내 의심과 함께 동물에 관한 양대 의심이다.)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 일인데 어릴 적 집에서 잠깐 고양이를 키웠다. 철없고 어린 엄마는 숙고도 하지 않고 아무거나 키워보자고 덜컥 고양이를 사왔지만, 전혀 감당을 하지 못했다. 고양이는 여기저기, 사람까지 할퀴고 다녔고, 급기야 엄마는 고양이를... 버렸다.;;;; 하지만 그날 밤, 집으로 다시 찾아와 '야옹~"하는 고양이. 부모님은 소름이 돋았고 일단은 다시 거두어들여 바깥에 놓고 대충 키웠다. 그러다 증조할머니 장례를 치르고 돌아왔을 때 그는 얼어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부모님은 다시는 고양이 키울 생각을 안하셨다. 대신 새나 금붕어를 키웠다. 얘들을 키우면서도 엄마의 철없는 행동이 이어져서, 이따금 온 가족의 타박을 받기도 했다(엄마는 식물은 잘 키우고 베란다 밭도 예쁘게 가꾸신다).

고양이 하면 또 기억이 나는 게 외할머니 장례식 때다. 외가댁에서 밤새 고양이가 울어대 집안 여자들이 밤잠을 설치고 난 후, 뒷켠에서 몰래 담배를 피던 내가 목재들 틈새에서 자는 듯 죽어 있는 고양이를 발견한 것이다.

고양이 그리고 개에 관한 짠한 경험도 있다. 역시 치안현장 시절 일이다. 얼마 전 이와 관련한 다큐멘터리 영화도 나왔던 것 같다. 나는 차도에 나왔다 죽은 동물을 수도 없이 봤고 때로는 치웠다. 가장 끔찍했던 건 아예 몸이 해체되어 버린 어떤 개였다. 함께 있던 경관은 끔찍한 사람 시체도 많이 봤지만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된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그분은 알아주는 강심장에 한터프하시는 분이었다.) 수적으로는 개보다 고양이의 피해가 훨씬 컸다. 청솔모들도 떼거지로 죽곤 했고.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다큐에도 재밌는 대화가 나온다. 한담 중 이상수 장관이 동물들이 지하로 다닐 수 있는 길을 뚫어야 하지 않겠냐고 하자, 노무현 대통령이 "교육도 안 받은 놈들한테 땅밑으로 가라"면 어쩌냐며 도로를 고가화해야 한다고 웃으며 답했다.

나는 길거리에서 죽은 동물들을 보며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반동물적임을 절실히 깨달았다. 사람들은 개나 고양이 등등을 애완동물이라며 키우고 근래 들어서는 '반려동물'이라고까지 부르지만, 이 행위는 근본이 반자연적이고 반동물적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동물을 키우지 않은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아파트에서 개를 키울 때, 성대수술을 하는 건 개한테 못할 짓이고, 개가 마구 짖어대는 것도 이웃에게 못할 짓이다. 수술을 하지 않았으면서 원래 잘 짖지 않도록 훈련된 개라고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마음껏 짖고 뛰어놀게 해주고 싶다. 앞에서 말했듯 마당 있는 집에서 키우면 좋기는 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애완'행위의 반동물성, 반자연성이 제거되거나 누그러질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이고 반려동물인 걸까.

그래도 어떻든 생물과 더불어 살고 싶다. 내 방에 생물은 나하나밖에 없다. 아, 모기도 있구나. 식물 쪽을 알아봐야겠다. 몇년전부터 계속 생각나는 게 있었다. 콩나물! 볕들지 않는 구석에서 바가지로 물을 끼얹으며 명상하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만약에 키우게 되면, 주변에 싸게 팝니다. 그러나 왠지 해장용으로 내가 다 먹을 것 같다는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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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와 비주류, 세가지 부류

Free Speech | 2009. 8. 6. 13:45 | Posted by 김수민
비주류 정서로 철두철미 포장되어 있지만 알고 보면 따먹을 과실이 눈앞에 있던 부류들. 황빠, 디빠...
주류도 아닌 걸 주류로 설정하여 까대며 자신의 정당성을 찾는 부류. 비주류의 비주류나 아웃사이더라기보다는 스따.
주류가 곧 정의라고 생각하는 부류. 졸라 대다수. 목소리만 큰 앞의 두 부류를 비웃고 살지.

세 가지'가' 아닌 세 가지'만' 있게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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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사회로 복귀

Free Speech | 2009. 7. 30. 18:39 | Posted by 김수민
아침에 가면서 "a c" 연발이었다. 그러나 가서 기분 나쁜 일은 없었다. 예비군들은 농땡이라기보다는 개그맨들이었다. 느슨한 훈련 중에도 쉴 새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이 옛날보다 계속 착해지는 건지 현역 사병들인 조교들 덜 괴롭히고 알아서 일을 빨리 끝냈다. 사실 지난해까지 3년동안 사격 농땡이를 쳐서(화장실에 갔다 오면서 사격 끝난 조에 편승하는 방법), 아주 간만에 진지하게 총을 잡았는데 탄착군이 형성된 것 자체가 신기했다. 의도하지 않은, 굳이 얻고 싶지는 않은, 하지만 얻어서 나쁠 것 없는 것들도 있었다. 근래 운동이라고는 안 하다가 북악산에도 올라가봤고, 6년만에 군대리아의 맛도 느꼈다.

지난 3년간 학생예비군으로 얼마나 큰 혜택을 입었는지 깨달았다. 나 같은 백수도 있지만, 직장인들이 2박 3일을 소화하고 갔다. 학생은 왜 하루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올해 예비군 4년차로 동원훈련은 빠이빠이라서 쉽게 하는 말인가....  (먼 산~)

악습이 많은 희한한 데서 자대 생활을 했던 탓에, 육군의 풍습 변화가 참 신기했었다. 지금도 병영은 쉼없이 바뀌고 있는 것 같았다. 지나치다 본 선후임 관계부터 화장실 가는 길에 슬쩍 엿본 내무반까지. 다들 몸 성하게 제대하길 바란다. 식당 앞에서 배치받은지 1주일도 안 되는 이등병들 여섯 명이 일렬로 선 모습을 봤는데, 거 참...ㄲㄲ

쫌 성실했다는 이유로 하나씩 지급 건빵

집에 가는 길. 실미도? 월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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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껍

Free Speech | 2009. 7. 15. 17:58 | Posted by 김수민
소리나 촉감이 아닌, 냄새 때문에 잠에서 깬 적이 있는가? 당연히 다들 있을 것이다. 아마도 상당수는 맛있는 아침 냄새가 아니었을까? 오늘 나는 코에 의해 깨어나 눈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글쎄 방안이 온통 연기로 자욱하지 뭔가. 불이 났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는 시껍하고 작은 집안을 돌아다녔다. 원인이 될 만한 건 담뱃불이 유일한데, 그것은 화장실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나는 베란다에서 전말을 깨달았다. 아랫집의 연기가 열린 창문을 통해 내 방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아랫집에 사는 원룸 주인 아줌마는 바깥 수돗가에서 생선을 태워먹은 프라이팬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화제가 아님을 확인했음에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연기는 끊이지 않아서 나는 베란다 창문을 닫았고, 방안에 들어온 연기는 반대편 화장실쪽 창문으로 나가길 거부하며 방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아랫집에서 연기가 그치길 기다렸다가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연기가 완전히 빠지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냄새를 참으려 담배를 피우면서도 헛구역질을 했다. 나는 생선비린내에 매우 취약한 사람이다. 못다한 잠을 청한 뒤, 꿈 속의 나는 넓은 집에 살고 있었는데 여기저기서 연기가 나서 끄느라 고생을 했다. 아직도 방에는 비린내가 감돈다. 황사 등 자연현상에서부터 신자유주의 금융위기 같은 인재까지... 이 나라에도 연기가 자욱하고 비린내가 진동한다. 윗집 아랫집 가릴 처지가 못 된다. 특히 연기는 위로 뜨기 마련이라는 걸 '윗것'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용산참사 유가족들의 행진이 예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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