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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 Speech'에 해당되는 글 156

  1. 2009.05.27 고백
  2. 2009.05.13 이건희를 이건희라 부르지 못하고 2
  3. 2009.05.12 "그땐 어려서 그랬다"는 말 4
  4. 2009.05.11 Become A Legend
  5. 2009.05.07 이렇게 된 이상
  6. 2009.05.02 불자로서 올리는 말씀
  7. 2009.04.29 오해 1
  8. 2009.04.24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9. 2009.04.10 대통령의 아들내미 2
  10. 2009.04.05 달력도 안 보는 남자 2
  11. 2009.04.04 비상구가 없다
  12. 2009.04.03 Dong
 

고백

Free Speech | 2009. 5. 27. 23:42 | Posted by 김수민

애도 논평 가운데 딴 건 그저 그랬고
가장 와닿았던 구절은 "자유로운 이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2001년 11월부터 2002년 6월까지 기숙사자치회 부회장을 했었다.
러닝메이트를 해달라고 등떠미는 형들하고 함께 단선으로 나가 당선되었고
사실 그후 일도 제대로 못했다.
그래도 책임자는 책임자다.

부회장이 되기 전 처음 자치회원이 되어서 한 것이 MT다.
동강에 레프팅하러 떠났다.
물이 좀 더러워졌다는 설명을 들었는데
그게 다름아닌 레프팅 때문이었음은 나중에야 알았다.

MT 후 총무 형의 한마디는 이랬다.
"MT 비용을 아무도 모르게 하라."
100만원이 넘어갔다. 

내가 부회장이 된 뒤 떠난 MT 장소는 스키장이었다.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일정도 2박 3일로 더 길었으니
비용은 아마 레프팅할 때보다 더 나왔을 거다.

기숙사 자치회 예산은 연간 1800만원 가량된다.
쓸 일이 별로 없었다.
돈이 크게 들어가는 행사는 체육대회와 오픈하우스 등 1년에 두 번이다.
그래서 이월금이 3, 400여만원이나 나왔다.

오히려 그래서인지 MT비가 많이 들어가는 데에
별 가책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예산 내역을 공개하지 못했던 것은
원래 관행이기도 했겠지만
그러한 사실들을 밖에 알려서 좋을 게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테다.  
떳떳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자주 계열 학생회가 한총련 납부금 액수를 공개하지 않고
예산집행도 투명하지 못하다는 걸 매우 못마땅해 했다.
도둑이 제 발 저려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고소득 전문직부터 영세자영업자까지 소득신고를 거짓으로 하는 등
이 나라에는 삥땅과 가라가 만연해 있다.
그런 문화가 하수처리장격인 정치권까지 흘러간 것인데도,
공범도 아닌 주범들은 정치인들을 손가락질한다.

나는 권력형 비리사건에는 별 관심이 없는 편이다.
옷로비 사건 때도 그랬고 근래의 박연차 게이트도 그렇다.
가치판단에 앞서서 팩트의 규명이 중요하고,
사실이 밝혀지면 나 아니라도 욕할 사람이 쌨으니까.

그런데 한편으로는 비리로 잡혀가는 정치인들을 보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 사람이 저럴려고 정치한 게 아닐 텐데,
어렸을 때는 맑고 원대한 이상이 있었을 텐데...

한 손으로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등 뒤에 감춘
더러운 다른 한손에 합세하는 게 찔렸다.

이제 나와 사람들이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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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를 이건희라 부르지 못하고

Free Speech | 2009. 5. 13. 12:32 | Posted by 김수민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 이사간 아파트에서 큰일이 났었다. MBC <오변호사 배변호사>의 현장중계차까지 왔다.
아파트 바로 뒷편의 폐수종말처리장 때문이었다. 악취가 나 여름에도 문을 닫아야 했고 소음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하야 주민들은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어느 회사의 노조위원장이던 아저씨가 앞장섰고,
노조라면 혀를 차는 우리 아버지도, 그런 우리 아버지가 노조위원장이라고 잘못 소문을 낸 부녀회장 아줌마도,
다함께 머리띠를 맸다.
투쟁상대는 아파트를 지은 건설업체와 허가를 내준 시 당국 그리고 폐수종말처리장을 낀 회사였다.
주민들은 그 회사 정문까지 갔다가 덩치 좋은 경비 앞에서 등을 보이는가 하면,
공장을 향해 크고 작은 플랭들을 내걸기도 했다. 그중의 하나가 이거였다.

"근이야, 이러다 우리 다 죽겠데이!"

자체검열로 원안을 수정한 결과였다.
그 회사는 지금은 분립한, 당시 삼성계열의 회사였다.
그래도 한 공장의 일로 직접적 연관이 없는 재벌총수의 이름을 부를 생각을 다했다니.
집에서 공부하다 심심할 때면 창밖을 내다보면서 그 플랑의 문구를 구경하곤 했다. 
결국 그 회사는 조금 더 떨어진 곳으로 처리장을 옮겼다.

요즘, 읽고 있던 책 때문에 문득 떠오른 옛 기억이다.
1997년에 나왔는데, 나오자마자 절판됐다. 독서열이 매우 높은 어떤 회사에서 거의 다 사들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씨춘추>.

3년 전 윤종훈 회계사 강연 때, 맨 뒷편에서 씨부렁거리던 중년 사내들을 보았다.
강연회 제목은 내 작품인데, <1987년 이후: 전두환시대에서 이건희시대로>였었나?
어쩌면 그 사내들과 같은 회사 사람들이 책을 사들였는지도 모르겠다.

별 두개 달고 정치판을 엎고 나서 세상을 호령하던 자들이 겨우겨우 물러나자
이제 밤 하늘에 별 세개만 트릿하게 떠 있다.
별들에게 물어본다.
근이야, 잘 지내니?
내가 그 아파트로 이사가던 날, 내게 손 흔들던 친구 이름 끝자가 '근'이다.

근이와 내가 살던 동네는 한 기업의 사원주택단지였다.
18평짜리 작은 집이었지만 단독주택과 아파트 사이사이에 나무와 꽃이 수두룩하고
운동장마저 훤히 있었던 그 동네는 나름 멋있었다.
바야흐로, 1990년대 초반은 '정규직 근로자'의 시대가 아니었던가.
학비 혜택은 물론이고 수많은 직원들에게 집까지 주다니.

그곳은 몽땅 허물어진 뒤 지금은 대형마트가 들어서 있고
내가 네잎클로버를 따던 자리도 없어졌다.

정규직 근로자의 시대는 재벌의 시대에 얹혀 있었다.
얼마 전 어떤 어린이용 잡지의 표지가 인터넷에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작은 난리가 났다.
조또, 별로 충격받을 것도 없었다.
내가 국민학교 저학년일 때, 정주영과 김우중을 추앙하는 어린이용 저서들이 시중을 풍미하고 있었다니깐.

나는 국민학교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에
버스 안에서 우연히 박정희 욕을 하는 대학생들을 봤다.

그리고 나는 국민학교 4학년 때인가에
대학생들이 뽑은 '존경하는 기업인 1위'에 올려진
<세상을 넓고 할 일은 많다>의 김우중도 아니고, 탱크주의 배순훈도 아닌
처음 듣는 이름 석자를 들었다.

돌아보면, 어느 틈엔가 한방 먹은 셈이다. 아니 잠깐 막간에 먹은 것도 아니고
늘 먹었던 듯하다.

김영삼은 전 노를 잡아쳐넣으면서 재벌 총수들을 검찰청에 불러냈다.
8년 후 대선자금 수사가 한창일 무렵, 노무현은 이건희 회장의 불구속을 바란다고 말했다. 
며칠 뒤에, 엑스파일 항소심이 있다고 한다.

TK논리, 박정희주의, 노조혐오 등등에 찌들었을 그 아파트 주민들도
'근이'까지는 갔는데.
이게 무슨 꼴이야. 별 꼴이다.
트리플 별 꼴이다.


추신:
방문자들께 질문 드립니다.
독일에 사는 어떤 예술가들(교포인지 유학생인지)이 'SAMSUNG'이라는 작품을 만든 적이 있습니다.
별 그림도 없이, 재즈 음악이 깔려 있고, 메시지만 왔다갔다하는 건데요.
문구는 알쏭달쏭합니다. 존댓말로 되어 있구요.
'뭐뭐뭐 프로젝트'라는 팀이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 홈페이지를 못 가고 있습니다.
혹시 아시는 분, 덧글 좀 달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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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어려서 그랬다"는 말

Free Speech | 2009. 5. 12. 09:29 | Posted by 김수민
3년전쯤이었나. 어떤 이와 술자리에서 언쟁이 붙은 적이 있었다. 말리는 다른 이는 내게 타일렀다. "후배인데, 좀 부족해도 봐줘야지요." 깍해야 두 살차이였고, 그가 새내기인 것도 아니었다. 청년세대의 힘이 약해진 건 88만원세대가 시작이 아니다. 386세대부터다. 88만원세대는 386의 충실한 직계 후배일 뿐이다. 혁명의 시대, 정확히는 혁명이념의 시대에서 386세대의 꼭대기에 앉은 이들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나머지 동조자나 방관자들도 마찬가지다. 민주화의 시대에 민주화를 외쳤고 세계화의 시대에 세계화에 편승했다. 그리고 그들의 적잖은 수는 지금, 한때의 객기나 여전한 순응주의를 반성하지 않고 '민주시민'을 자임한다. 어떤 열린우리당 의원은 자신을 항의방문한 대학생에게 이렇게 밝혔다고 한다. "나도, 아직 자민통이야!" 그러나, 그는 학생들이 미숙한 패기에 가득차 있다고 봤을 것이며 자신도 옛날엔 어려서 좀 과했었다 생각했을 것이다. 주사파나 스탈린주의자였던 놈들 중 일부 또는 상당수도 그렇다. 싸워서 세상을 바꾼다는 이념이, 싸워서 바꿔야 할 세상을 만들고 있었는데도, 태연자약하게 자신의 어렸음에 책임을 돌리나. 함부로 "죽여라"를 외치는 미취학기 아동과 별 차이가 없는 행위를 벌인 이들이 정녕 죽기 전에 철이 들지는 의문이다. 몇주전 나이가 마흔 넘은 어떤 분에게 "그때는 어려서 그랬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는 다름아닌 네 해전이었다. 그가 견해를 바꾼 까닭은 자신이 따르던 어떤 인물의 영향이었다. 앞으로 더 어려지실 터이니 아무 짓도 안하는 게 낫겠다. 나는 예전에 그랬듯 살면서 그따위 변명은 하지 않겠다. 내가 지금보다 어렸을 때 저지른 모든 잘못이나 실수는 나이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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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ome A Legend

Free Speech | 2009. 5. 11. 13:22 | Posted by 김수민

Winning11 2009는 컴퓨터의 PES 2009로도 즐길 수 있다. 페스 2009에는, 위닝 2009에도 있겠지만 전에 없던 메뉴가 하나 추가되었다. ‘마스터 리그’로 팀을 운영해봤던 사람들이 한번쯤 상상하고 기대했을 수도 있는 선수 일개인적 관점에서의 운영이 가능한 메뉴, ‘Become a legend'이다. 내가 여기에 빠진지 거의 한달이 다 되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패드를 잡을 생각이 전혀 없다. 점심 먹고 난 다음에 늘 하던 게임을 하지 않고 있다. 허탈감도 있다.

레전드를 처음 시작할 때는 정말 막막하기 그지없다. 선수의 이름, 국적. 외양 및 신체조건, 처음 출발할 리그까지 결정하면, 어느 팀에 배정된다. 그렇게 해서 ‘KIM SOO MIN'은 관중 하나 없는 연습경기장에서 열 일곱살 2군 선수로 출발했다.

더 막막한 것은 위닝 게임에 단련된 사람조차 적응하기 힘든 새로운 게임의 방법이다. 팀이 아니라 일개인을 조종하다 보니 위치선정에서부터 어려움을 겪어야 하고 처음에 겪는 시행착오가 만만치 않다. 또 선수의 초창기 능력은 찌질한 수준이라 위닝 좀 한다는 사람들도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2군경기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후반전 교체선수로 주전투입이 된다. 여기서 또 성과를 내면 선발출장이 되고, 최악의 경우는 다시 2군으로 내려가며 능력치가 뛰어나지 않으면 팀을 옮긴 직후에도 2군생활을 해야 한다.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로 정했다. 어느새 중하위권 팀의 주전선수으로 발탁됐고 조금 더 실력이 늘면서 팀을 옮기기 시작했다. 처음에 있던 곳은 스페인쪽 리그라 팀이나 동료선수 이름을 읽고 기억하기도 버겁다.

조금 풀리기 시작한 것은 파리 생제르망과 계약한 다음부터인데, 동료인 아드리아누가 패스를 죽어라 안해서 나폴리로 옮겨버린다. 패스 안하는 선수 타입도 입력이 되어 있는 걸까. 나폴리에 갔더니 이마뉴엘슨이란 놈이 신나게 혼자서 공을 몰고 다녀 짜증이 나던 찰나에, 드디어 팀에서 방출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그래서 한동안 네덜란드쪽 리그를 전전하다 중간에는 모스크바팀에 들어가 벤치에 앉은 채 엉겹결에 첫 리그컵우승을 경험한다. 되살아난 시점은 다시 파리 생제르망으로 복귀할 때부터다. 거기서는 선발출전선수로서 리그컵 우승을 이룩한다. 이때부터 나의 레전드 중독은 더 심해졌고, 일요일이나 공휴일은 하루 종일 집안에서 게임을 했다.

머리, 오른발, 왼발 KIM SOO MIN의 퍼펙트 해트트릭 & 호날두에게 밀어준 어시스트. 이날 경기는 5대1


레전드에는 영국리그 팀이 없어서 현실의 프리미어리거들은 온갖 팀에 흩뿌려져 있다. 호날두와 루니, 긱스, 카를로스가 속한 팀이 보르도. 파리지앵 생활 청산하고 포도주나 마시자고 혼자 농담하면서 팀을 옮겼다. 어느새 드리블, 패스, 슈팅 능력은 엄청나게 향상되었고, KIM SOO MIN은 스트라이커보다 더 많은 골을 넣는 AMF가 되었다. 그리고 유럽챔피언컵 우승. MVP에 득점왕까지 되었다.

그리고 1주일이 지났다. 보르도는 몇번 더 유럽챔피언컵과 리그컵 우승을 달성했고 끝내 시즌 우승의 위업까지 이뤘다. KIM SOO MIN은 한국 국가대표로서 2018년 인터내셔널컵 16강, 2020년 아시아-오세아니아컵 우승을 거친 뒤, 드디어 어제, 게임 시점으로는 2022년 인터내셔널컵에서 서른살 나이로 우승컵과 MVP를 받았다. 한국팀으로는 게임이 어렵기 때문에 게임 난이도를 낮췄고 결승에서 잉글랜드를 꺾었다(레전드는 레귤러 등급으로 리그경기를 치르지만 국가대표 경기에서는 난이도 조절이 가능하다).

더이상 올라갈 데도 없고 해서 머리를 밀어버렸다.



이제 더이상 올라갈 데가 없다! 레전드에서는 은퇴선언을 할 수가 있는데 그동안 키워놓은 능력치와 실적이 아까워 아직은 보류하고 있지만, 나는 게임을 할 맛을 잃고 말았고 오늘 패드를 잡을 맛이 싹 사라진 것이다.

쉽고 빨리 달성될 수 없는 것들. 중독성은 더 강해졌고,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다시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어쨌든 한달동안 즐거웠고, 친구와 한판 붙는 것보다 열배로 재미났다.그만하면 됐다.

덧: 만일 도전하실 분들이 있다면 두 가지를 알려드리고 싶다. 그러지 않아도 눈치를 깔 수도 있지만 알아두면 초반에 헛수고하지 않을 수 있다. 일단 초창기에는 한 게임 시간을 5분으로 줄이고, 많은 게임들을 건너뛰어라(스킵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도 능력치는 저절로 올라가니까. 열 일곱 나이에 일찍 성공하겠다는 야망은 버리는 것이 좋다. 시간 지나면 알아서 크고, 국가대표도 된다. 두번째, 나 아닌 선수의 동작 중에 슈팅은 게이머가 조작할 수 있다. 이걸 활용하면 팀의 득점도 많아지고, 자신의 어시스트 실적도 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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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된 이상

Free Speech | 2009. 5. 7. 05:53 | Posted by 김수민

도대체 심판이 날려먹은 페널티킥감이 몇개냐? 3개? 4개?

교체되어 벤치에 앉아 있던 드록바는 심판에게 맹렬히 항의하다 경기 후 옐로우 카드를 받고  
급기야 카메라를 향해 퍼킹을 외치고 말았다.

한점승부보다는 추가골을 노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는데 결국
첼시는 후반 인저리 타임에서 동점골을 허용함으로써 전반 9분경 넣은 선취골을 지키지 못했다.
(1-1을 만들면 FC바르셀로나가 결승에 진출하는 상황이다)
실점 후 마지막 코너킥 기회가 왔지만 심판은 또 핸드링을 모른체...
(나는 골키퍼 체흐가 한껀 터트리게 해달라 기도했다;;)

가장 관심있는 팀은 맨유지만, 가장 좋아하는 스트라이커는 드록바고
가장 좋아하는 감독은 히딩크고 가장 좋아하는 미드필더는 램파드인지라...
결승에서 맨유랑 첼시랑 붙으면 누구를 응원할까 고심을 많이 했다.
(그동안은 두 팀이 붙으면 딱히 응원을 하지 않았다.)

FC바르셀로나 가슴팍에 붙은 유니세프에겐 약간 미안하지만
(그리고 첼시 가슴팍에 붙은, 나중에 맨유 가슴팍에 붙을지도 모르는 마크는 재수없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이번 유로챔스 결승전은 맹렬히 맨유 응원이다...

아 진짜 심판 나쁜넘..
FC바르셀로나 입장에서도 공정한 심판은 아니다.
엉뚱할 때 아비달을 퇴장시키질 않나...

오죽하면 두 팀 감독이 어깨동무를 하는 장면까지 나오고, 더없이 의미심장하게 비쳐졌겠나.

그나저나 바르샤 감독은 훈남이더라. 정장빨 지대. 요한 크루이프의 제자란다.

여하튼 히딩크 지못미ㅠ 동점골 허용할 때 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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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로서 올리는 말씀

Free Speech | 2009. 5. 2. 14:45 | Posted by 김수민
유명한 일화지만 한번 더.

하루는 어느 절에서 중들이 땔감이 떨어져 추위에 떨고 있었다. 그러자 노스님 한 마디.
"밥팅아. 불상을 떼면 될 거 아니냐?"

모든 우상 숭배를 벗어나
성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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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Free Speech | 2009. 4. 29. 15:38 | Posted by 김수민


명절이 되면 아버지와 나는 같은 입장이 된다. "정치는 안한다~" "저 정치인한다는 이야기 한번도 한 적 없는데요."

얼마 전 한 카페에 진보신당 탈당의 변을 올렸다. 어느 분이 화를 억누르면서 나를 비판했다.
그럴 만했다. 탈당의 이유를 상세히 밝히는 대신, 나는 정치세력 내에서 벌어지는 인정투쟁을
쉽고 원색적인 용어로 비아냥거렸으니 말이다.

헌데 다른 내용은 이해하지만 한가지는 용납하기가 힘들었다.
"직업적 정치꾼이 되어 다시 만나면" 어쩌고 저쩌고...

내가 정치인이 되고자 했다면 다음의 두 갈래 길 중에 하나를 선택했을 것이다.

1) 철저히 이미지 관리하면서 사람들이랑 잘 지내기. 

노회찬 선본 일할 적에 한 보좌관이 "총선이 잘 되어서, 김수민씨가 일할 자리가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선거 파장나던 날에는 노회찬이 내게 "자네가 출마할 날이 오면 내가 선대본부장 해줄게"라고 했다.
하다보니 깊게 들어가 버렸고 한발 더 내디디면 완전히 몸담게 될 수도 있는 타이밍이였다.

하지만 나는 선거가 끝나는 즉시 여의도에서 줄행랑을 쳤다.
그리고 이곳 저기를 다 치받으면서 살다가 탈당을 맞이했다.

누가 나를 미워해 매장시키겠다고 덤벼봐야 그건 길가다가 축구공에 맞는 것보다 위협이 안 된다.
내가 거기 이해관계가 걸린 게 없는데 뭐 어쩌시겠다고.

내 친구 중에 지역에서 정치를 하는 애가 있다. 모 학교 비운동권 총학생회장도 했고
한때 장관이었던 열린우리당 추병직 밑에서 일했다.
중학교 때부터 그 친구를 봐왔는데, 그때부터 리더 기질이나 사교성이 있었다.
그 친구가 부족한 게 이념이나 정책이긴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런 사람이 직업정치를 하지, 나 같은 사람은 할 수 없다.


2)  현실정치 가담을 훗날로 미루고, 교수든 기자든 PD든 변호사든 벤처기업인이든 전문직종으로 진출하려고 공부하고 스펙 쌓기. 잘되면 진중권이나 조국이나 손석희처럼 말이다.

진보주의자란 사람들도 이런 쪽한테는 꼼짝을 못한다. 
또 한국의 유권자들은 선거 후보의 직업 중 '정당인'을 가장 낮게 치므로(그나마 신장식이나 정현정 같은 분들이 똘똘한 유망주로 평가받는 건 학벌이라도 있기 때문이고), 정치를 하려면 저런 길로 둘러가는 게 현명하다. 
활동을 직업적으로 하더라도 정당은 불리하다. 
(권노갑의 그림자, 이훈평은 2000년에 386 임종석과 함께 금뱃지를 달았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내가 그렇게 살 이유가 없기 때문이며,
그렇게 산다고 내가 능력을 갖춘다는 보장도 전혀 없고,   
정치인이 될 일도 없다. 

 

직업정치꾼 운운한 분께 묻고 싶다. 내가 그걸 하려고 한다고 해도, 과연 되겠느냐고.
좁은 집단에서도 씨알이 먹히지 않는 인간이 어디 가서 그걸해. 
내가 명색이 좌파집권연구라는 걸 하는 컨설턴트인데 그걸 모를까봐.
버마 같은 데 가서 게릴라활동을 하고 돌아오지 않는 한 말빨이 먹히지 않을 것이다. ㅋ

내가 해온 일들은 한국사회에서 딱 오해를 받기가 좋긴 했다.
고3때 노사모에 가입해서 대2때 개혁당 해보고
제대 후에 민노당에 들어갔다가 졸업반일 때 진보신당 만들었다.
(왜 자꾸 왼쪽으로...;; 이러다 만델주의자까지 가겠다는 생각도 가끔 들었다.
이젠 지금보다 왼쪽으로 갈 일은 없을 것 같다. 오른쪽으로 갈 일도 없을 것 같고...)

이런 정치참여는 모조리 정치지망으로 오해를 받았고
어디 당원이다, 어느 후보를 돕고 있다,고 밝히면 다 그에 맞는 근거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정치적 결단을 때때로 내리면서 변동사항도 적이 있다 보니 헷갈리는 사람도 많고,
친척 중에는 내가 아직 '노사모'인지 아는 사람도 있다.
어머니는 민주노동당에 입당한 후에도 친척에게 내가 노사모 때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런 오해를 더 부추기기도 했다. (내 말이 어디서 인용되는 걸 극히 꺼리는 성향은 가족사에 원인이 있다.)
내가 한창 칼럼니스트 활동을 할 때 내 모든 글을 스크랩하고 읽었던 아버지라고 해서
내 입장을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니다.
또 거기에 자식 자랑이 섞이다 보니, 소문이 그렇게 날 수밖에...
아버지는 내 글에 악플이 달리는 것을 좀 아시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개무시를 당하는 입장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들의 정치적 입장이 자신과 적대적이지만, 그나마 그걸 용인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들이 뭔가 대단한 위치에 서 있다고 있다고 짐작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같은 당에서 만난 사람들도 내가 정치에 깊숙하게 개입하려고 하는 줄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건 내가 얕보인 탓도 있을 것이다. "쟤가 아는 건 저거밖에 없는데 하려고 하지 않겠어?"

하지만 나 같은 감각을 가진 분들은 일반인 중에도 많다.
왜 동네에도 한명씩은 가방끈 별로 안 긴데 말 한마디 한마디에 통찰력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내 경험으로는, 이런 분들이 임노동자보다는 상인이나 장인 같은 쪽에 주로 있는 것 같다.)
나도 어려서부터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정치인이나 지식인이 아니라.
다만 고등학교 때 공부도 못했는데 무슨 특기자라 해서 어찌어찌 서울에 올라와서
가까이서 경험해 보는 귀중한 기회를 얻었을 뿐이었다.

나는 한시적이고 부분적으로, 또는 특정한 영역에서 워커홀릭 증상을 내보이는 사람인데,
내가 정치를 하려고 했다면 정말 부지런히 한시도 늘어지지 않고 했을 것이다.

그간 오해를 불사하고 활동을 해왔지만,
언제나 오해는 피곤했고 될수록 피하거나 방지하려고 애를 써왔다.

이제는, 그럴 일이 없을 것 같다.
그것 땜에 탈당한 건 아니지만.

간혹 또래의 젊은이 중에 "정치를 업으로 삼겠다" "대중활동가가 되겠다"는 지망생들을 본다. 진보신당에도 몇몇 있다.
하지만 내가 밀어주고 싶은 사람은 한명도 없다.
그들의 공통점이라면 뻔하고 속보인다는 거. (좀 교묘하게 하는 요령을 모르나?)
허나 있을 때나 떠났을 때나 이들을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요즘 어떤 일에 관한 것을 배우면서 관련자들을 만나고 있는데
세상이 참 넓다는 것을, 가까이에 있는 눈꼴시린 이들은 적도 뭐도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괜한 오해만 받으면서 의도치 않게 꼴아박아왔던 인생을 벗어나,
오히려 더 큰 싸움과 더 큰 성취를 얻는 길로 들어서게 되어 다행이다.

p.s 나는 김훈의 세계관을 무시하지만, 한가지는 비슷하다. 나는 그처럼 소통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모든 이해는, 오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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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Free Speech | 2009. 4. 24. 14:06 | Posted by 김수민
11명 가운데 넷이 퇴장 당했고 나머지는 줄줄이 경고를 먹었다. 선수교체도 끝났다. 몰수게임 일보 직전에 가까스로 동점골을 넣어 연장전으로. 상대팀은 아직 팔팔하고 연장전에 투입할 교체선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연장전은 서든데스 제도를 채택하고 있지 않다. 총력을 다해 역전골을 넣어도 재역전골을 허용하는 것은 물론 세 골차, 다섯 골차까지 벌어질 수도 있다. 우릴 기다리는 건 후반전보다 더 지옥 같은 연장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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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아들내미

Free Speech | 2009. 4. 10. 00:59 | Posted by 김수민
"너희 아버지 요즘 뉴스 많이 나오시던데."
"뭐, 아버지 일은 아버지가 알아서 하시겠지."

2001년 학생 식당에서 듣게 된 대화다. '쿨'해 보이는 이 젊은이는, 사람 겉으로 판단할 순 없겠지만,
있는 집 자식 같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누구길래. 얼굴이나 봐둬야겠군.'

당시 학교엔 정치인의 자녀들이 몇몇 있었다. 정몽준 의원 아들이 나랑 같은 학번인데
대화를 나눈 두 청년은 서른쯤은 되어 보였다.
기업인인가? 연예인인가?

나중에 노무현 가족사진을 보고 그가 누구의 아들인지 알았다.

노무현 정권이 이전 정권들과 두드러지게 달랐던 건
그 가족들, 특히나 자녀의 도덕성 문제였다. 지난달까진 그랬다.

나 역시 노무현 정권이 저지른 수많은 패착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아들 '노건호'가 새로운 역사를 썼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노무현 재임 중에도 그가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소식을 들을 때면
학생식당에서 어쩌다 듣게 된 대화를 떠올렸다.

이제 정권의 공과와 관계 없이 민주화의 한 성과라고 여겨졌던 것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싸이월드 댓글을 다는 수많은 네티즌들은
노무현, 유시민이 정치를 하고도 빚을 졌다며 온갖 찬사를 늘어놓고 있다.

이제 또 하나의 황우석이 태어나는 중이다.
노무현 정권을 통해 우리 사회가 나아진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황빠, 노빠, 유빠들이 인터넷에서 창궐할 기회의 창출?

라디오에서 노건호씨와 KBS 기자의 대화 육성을 들었다. 
가슴 한켠이 시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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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도 안 보는 남자

Free Speech | 2009. 4. 5. 14:06 | Posted by 김수민
24절기는 양력이 준거 아니냐, 양력날짜가 매해마다 같은 거 아니냐고 했더니
그 자리에 있던 두 사람이 음력, 구체적으로는 태음태양력이라고 했다.

뒤져봤다. 태음태양력을 보완하기 위해 태양의 운동과 위치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거란다.  

아니 해마다 청명이 식목일이랑 겹치는 걸 몰랐다는 말인가?

"이 싸람들, 달력도 안 보고 사니까 그런 거 아녀?."

아뉘 명색이 지식이라는 사람드리...
실명비판은 못하겠고
0재현, 0성원 씨는 대오각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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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구가 없다

Free Speech | 2009. 4. 4. 11:56 | Posted by 김수민
우연히 A라는 사람의 홈피에 들렀다. 여러 내용이 담겨져 있지만 눈에 띈 것은 사진이었다. 내가 아는 S 누나와 닮았다. 적어도 큰 키와 뚜렷한 눈매만큼은. A는 사진도 자주 올리고, 화장과 패션에 엄청 공을 들이며, 자신의 기술에 관한 설명도 상세하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압도하는 것이 바로 그의 안간힘. S의 홈피는 다르다. 이따금 사진을 올리는데 맨얼굴로 찍은 것이 많다. 그게 더 예쁘다. 어떤 이들이 통탄할 일이겠지만, 성형도 전혀 하지 않았다.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에 날렵한 변화가 종종 있기는 하나 본인은 말을 길게 하지 않는다. 반응은 둘로 갈린다. 첫번재는 예쁘고 멋지다는 칭찬, 두번째는 넋이 나가 아무 말도 못하는 것.(나는 후자-_-) 닮았다는 건, 닮았다는 것일 따름이다. 예전에 이런 말이 있었다. 명세빈 닮은 사람 중에 명세빈만한 사람 없다(근데 송윤아 닮은 사람 중엔 송윤아만한 사람 있더라). 오히려 닮음으로써 더 대조되기도 한다. A와 S의 홈피 사진을 보면서,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는데도(굳이 따지자면 내가 잘못?), 수없이 반복되어 관찰되는 현상임에도 가슴이 갑갑해진다. 비상구가 없다. 타고난 사람을 뒤쫓기는 정말 힘든 일인 것 같다. 자칫 출구 없는 미로에 빨려 들어 어느 순간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릴 수도 있다. A에게 마음으로라도 격려를 보내기가 참 힘든 게 그래서다. 그래도 OTL 금지. 스스로의 그 어떤 측면도, 어느 누구와 닮지 않았으면 하는 데 마음이 미친다. 경쟁에서 뒤쳐져 살며, 그렇다고 독보적인 재주도 없는 나로서는 차라리 건성건성 꼴등이 낫겠다. 물론 꼴등보다 좀 더 나은 길을 찾고는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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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g

Free Speech | 2009. 4. 3. 16:09 | Posted by 김수민
하루에 두세판씩, 식사를 한 직후 시점에, 노트북과 컴퓨터용 패드로 PES2009을 한다. 이거 안 하면 머리가 뜨겁다. 현재 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이다. 밀어도 안 넘어지는 루니가 시즌 득점 1위로 잘 나가는 중이고, 박지성은 얼마 전 해트 트릭을 기록했다. (박지성을 적극적으로 투입시키는 데에 내 안에 잔존한 민족주의가 작동했음을 숨길 필요는 없겠지.) 테베즈는 꿋꿋이 뛰고 있고, 원래는 한물 가서 후보 명단에 오른 사하는 나에게 은혜를 톡톡히 갚고 있다. 우리의 호색두(애칭이니 나 미워하지마~)는 좀 부진하다. 반 데 사르야 뭐 기특한 골키퍼고... (내 동생의 회고에 따르면, 1998년 월드컵 네덜란드전 당시 내가 반 데 사르에게 "저렇게 말라서 운동은 하겠냐"고 야유했다고 한다. 미안... 그래도 니네가 오대빵으로 이겼잖니.) 이브라는 내가 수비에서 아예 레프트 미드필더로 변경시켜줬다.

선수 리스트 맨 밑에 깔린 이름 가운데 독특한 것이 눈에 띄었다. 'Dong'. 어느 나란진 몰라도 뭐 그런 이름이 있을 수도 있다 싶었는데, 검색해 보니 덩팡저우다. "누구~?" "아~ 작년에 쫓겨난 중국선수~!" 그는 중국시장을 노린 마케팅 전략에 힘입어 맨유의 유니폼을 달았으나 곧 방출되고 만 비운의 선수다. 실제로 뛰는 걸 지켜본 적은 없지만, 위닝을 하며 발견한 바 키는 185를 훌쩍 넘는 반면 움직임은 둔한, 계륵감도 안 되는 선수다.



약체팀을 만나 골차가 벌어져 있는 와중에 나는 덩팡저우를 투입시켰다. 후반 42분경 우리 진영에서 얻은 프리킥을 수비수가 멀리 차 날렸다. 공은 상대방 최후방 수비수와 골키퍼 사이에 떨어졌고, 금방 들어온 그는 재빨리 달려가 그리 쉽지 않은 각도에서 발리슛을 날려 득점에 성공했다. 그후 난 곧잘 그를 투입시켰고, 현재 통산 세 골을 기록 중이다.

나는 퍼거슨이 아니다. 나는 중국시장을 겨냥해 덩팡저우를 스카웃하지 않았다. 그는 게임에 깔려 있었을 뿐이고,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앞으로 계속 머물러 있을 뿐이고, 그런데 나는 그에게 끌리고 있고... 나는 앞으로도 가능한대로 'DONG'을 투입시킬 것이다. 또 이미 나는 모든 선수들을 그라운드에 세웠다. 나는 내 선수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이에게 기회 그리고, 기회를 가질 기회들을 주자'는 것은 '못사는 놈끼리 서로 깔보지 말자'와 함께 내 안에서 가장 오래된, 스무해 묵은 이데올로기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언제나 이 자리에 있었군.

추신: 이거, 왠지 다마고치처럼 되어 버린 것 같다. 나도 중딩 시절 한때 선풍에 가담해서 다마고치를 한 적이 있는데, 사내놈들이 곧잘 그러듯 주머니에 넣고 잊어버리다가 병아리가 죽어 버렸다. 당시 언론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게임을 다시 시작하는 청소년들에게서 생명경시풍조를 발견했는데, 아무튼 병아리가 죽고 나면 나나 친구들이나 다들 우울해 했다. 우리 선수들은, 다칠 땐 있어도(다치면 상대방 선수에게 나는 "저개쉬키씨밸@#%"하면서 욕을 퍼붓는다 그놈들이 못 들어서 한이다), 죽는 일이 없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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