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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연애

Free Speech | 2009. 7. 14. 18:35 | Posted by 김수민
어떤 진보적인 친구는 한나라당 지지자는 물론이고 민주당 지지자인 여자와도 사귀지 않겠다고 했다. 작년만 해도 그랬는데 나는 경악한 나머지 일장훈시를 늘어놓고 말았다. 한편 나는 일전에 어느 보수적인 친구에게 "운동권 여자와는 연애 안했다(안한다)"고 밝혔다가 '이중적인 놈'이라는 우스개 섞인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운동권 여자와 '연애해야 한다' 혹은 '연애하는 게 어울린다', 그리고 그 친구의 알 수 없는 환상, "운동권은 싫어도 왠지 운동권 여자에게 끌린다"에 답변을 했을 뿐이다. 뭐, 그렇게 살았다. 동지애와 연애가 결합하는 것이 경이롭거나 또는 편안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가급적 사적 영역이 일과 떨어지기를 바랐다. "말이 잘 통하면 좋지 않느냐"고들 하지만 운동권이라고 해서 말이 잘 통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주관이 강해 오히려 벽 보고 이야기하는 모양새가 되기 더 쉽다. 노선의 차이보다는 그것이 일상에 가져올 스트레스가 더 염려스럽다. 물론 무엇보다도 나는 사실 꾸준히 만나다가 누구를 좋아하기보다는 한눈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좋아했고 연애도 그런 식으로 해온 데다가, 특히나 내가 몸담고 있는 모임이나 정파는 다른 곳보다 여성 비율이 확연히 적어서 자연스레 연애는 '딴데'서 하기 마련이었다(요즘은 정치하고 별 관련없는 여자들이랑 잘 지낸다. 덧붙이자면 그들이라고 고민과 철학이 없는 게 아니고, 또 나름대로 정치적 소신도 있는 경우도 많다). 어제 만난 한 친구는 운동단체에서 만난 사람과는 연애를 안 할 거라고 했다. 그에게 별달리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도 알고 나도 아는 사람들 중에 여자 한명만 오면 법석을 떨고 얼굴이나 몸매가 조금이라도 눈에 들어오면 뻘닭짓을 하는 자가 있어서, 그를 타산지석으로 삼은 것이다. 운동조직 뿐이 아니다. 특정집단내에서의 연애는 언제나 발생하기 마련이고 그걸 욕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지만, 당사자 일인에게나 조직문화에게나 이롭지 못한 풍경을 자주 보았다. 사실 조직문화보다도 개인에 더 해로운 일이다. 자신이 죽치기 쉬운 집단, 제 뽄새가 먹히기 좋은 영역에 안주하면 하릴없이 딱딱해지거나 쓸데없이 물컹해진다. 내 개인적으로도, 대학 새내기 시절 다른 학교 여자를 안 만나본 게 조금 후회되어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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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민단체를 탈퇴한 이유

Free Speech | 2009. 7. 11. 16:16 | Posted by 김수민
친구가 한 시민단체에서 일을 했다. 상근자는 아니었지만 컴퓨터 앞에서 매일 오전을 꼬박 바쳐 일했다. 그는 타자를  시끄럽게 치고 백스페이스키도 엄청나게 많이 누르는 덕분에 민폐도 좀 끼쳤다. 급여는 70만원 가량이었는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 일은 그 단체의 핵심근무였고, 내가 옆에서 지켜본 바 그것은 사무실에서 공동작업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상근자들은 왜 이 일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더 큰 문제는 초과노동이었다. 툭하면 그에게 오전 오후를 가리지 않고 전화가 걸려왔다. 무슨 논평을 써달라, 논평을 썼는데 교정을 봐달라,는 청탁이었다. 나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간사들은 무얼하고 있느냐고.

요즘 '사회적 경제'가 곧잘 회자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라면 '시장 이하'의 공간이 하나 더 생길 뿐이다. 기업을 그따위로 운영했으면 벌써 탈이 났을 것이다. 만만한 사람 하나 잡히면 부려먹는 건 이 바닥의 습성인가. 부려먹기에 근태까지. (예전 책자를 하나 썼다가 고료 백만원을 떼어먹힌 기억이 되살아났다. 시간이 지나서야 털어놓는데, '조아세'라는 단체였다.)나는 근무평점을 매기기로 작심했다. 그 단체를 탈퇴했다. 만원의 응징이다. 이 만원을 보내줄 새로운 단체도 정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어디까지 탈퇴를 해야 할런지. 내 자신이 징글맞고, 사람들이 너무 징그럽다. 해결의 편을 자임한 문제의 편들. 너희 안에 이건희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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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2002년

Free Speech | 2009. 7. 10. 04:04 | Posted by 김수민

공사를 떡자르듯 나눌 수 있겠느냐마는 '대선의 기억'은 사적 체험을 적은 것이다.
그래서 이번 편은 많은 내용이 누락된다. 그해의 기억은 대부분 공적 체험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2002년 6월은 말많고 탈많은 달이었다. 월드컵 열기가 한창이던 때, 나는 동료들과 곤욕을 치렀다.
송복 교수 퇴임식 사건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보다 앞서 경찰서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이문옥 후보를 지지하는 칼럼을
쓴 것이 사전선거운동으로 신고되어 적발되었기 때문이다. 담당 형사는 자기가 봐도 선거법이 좀 무리가 있다며
기소유예가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두번째 경찰서를 찾았을 때 그의 낯빛은 좀 어두웠다.
물론 "벌금 나오면 내가 그 액수만큼 술 산다"고 하긴 했지만 말이다.
결국 나는 6월 말 검찰에게 불려갔고, 8월에 재판을 받았다. 벌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판결이 나왔다.

그때 설상가상으로 내가 지지했던 후보의 지지율이 추락하고 있었다.
새천년민주당은 정몽준과의 단일화 내지는 정몽준으로의 단일화를 추진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2000년 총선시민연대 활동부터 2004년 총선까지 개혁이 대세였지만,
2002년 6월부터 11월까지의 그 기간만큼은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암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절망 속 몸부림을 통해 개혁당이 등장한 것도 그 시기였다.

다른 글로 여러번 밝혔지만 노무현 후보를 옛날부터 지지해왔다.
중학생 시절 나는 지역주의에 맞서는 개혁파 정치인이, 적어도 내가 쉰살이 되기 전까지는
대통령이 되지 못할 줄로 알았다. 하지만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 이후 나는 노무현이 포스트 삼김으로 떠오르고 있음을
직감했고 2002년 대선에서 그가 당선되리라고 예측했다.
2001년 당시 친하게 지냈던 형들과 계속 입씨름이 이어졌다. 나의 예측은 엉터리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거꾸로 노풍이 불었을 적에는 용한 점쟁이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그도 잠시, 얼빠진 정몽준바람으로 대선판은 엉망이 되었고 나는 더이상 낙관할 수가 없었다.

결국 "후보단일화 가능성은 1%도 없다"던 노무현은 후보단일화 제의를 받아들였다.
나는 줄곧 후보단일화 반대 입장이었지만 그때부터는 맥없이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권영길을 지지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그동안 지지했던 세월이 아까워서라도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새 총학생회를 뽑는 선거에서 승리의 기쁨을 맛본 어느 선배들과 술자리를 하던 밤,
노무현이 단일화승부에서 이겼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당시 시민운동을 하면서 겪던 고충과
정치판을 바라보며 느낀 환멸이 스르르 녹기 시작했다.

그러나 낙관할 일은 못되었다. 정몽준과 함께 정권을 꾸려야 한다는 점이 신경을 거슬렀다.
그것은 개혁당을 비롯한 신개혁세력과 동교동계 및 정몽준세력과의 향후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노무현은 현대노동자들의 싸움을 거들었던 변호사였고, 정몽준은 현대재벌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성장과정은 그 이념차보다 훨씬 컸다. 인간적으로는 차라리 이회창과 노무현 간의 공통점이
더 많을 것이다.
겉으로는 웃어도 돌아서면 서로 욕할 법한 두 사람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아니, 조화를 이루면 더 문제다. 노무현 정부가 꽤 보수화되지 않겠는가?
더구나 정몽준이 국무총리라도 된다면 그 꼴을 어떻게 참고 볼 것인가?

그렇지만 한국정치의 불안정성은 나의 군걱정을 비웃었다.

2002년 12월 18일 밤, 나는 혼자 있었다.
'어차피 내일 판이 거나하게 벌어질 테니 하루만 참자.'
그래도 술 생각이 나서 고시원 방에서 캔맥주 두개를 비웠다.
그냥 자려니 뭔가 아쉬워 컴퓨터실에 들러 인터넷에 접속했다. 마침 후배 하나가 메신저에서 말을 걸어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후배가 '어 이런 일이...'라면서 대화가 멎었다. 
"무신 일?" 
"정몽준이... 단일화를 파기했대요." 

옆 TV실에서 속보 자막을 확인했다. 그즈음 TV실에 모인 고시원 사람들은 다들 대선에 관심이 있었다. 
하루는 신해철의 찬조연설을 보려고 들어갔는데 다른 채널이 나오고 있길래 조금 난감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리모콘으로 SBS를 틀었고 신해철이 등장했다.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눈치를 보아하니 거기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걸 보려고 모였다가 차마 말을 못 꺼냈고 있었던 듯했다.
아무튼 이런 사정이었으니 TV실에서 대선 관련 프로그램을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개혁당 연세대 모임 C형과 통화를 했다. 그는 최후의 명동 유세 직전까지 선거운동을 함께했었다.
그런 일이 벌어질 조짐은 전혀 눈치를 못챘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둘 사이에는 공감대가 있었다.
"이거... 우리가 이기면 대박이다. 혹 떼는 거다."

TV실을 나와 다시 컴퓨터실에 들렀다. 인터넷은 들끓고 있었다. 민주노동당 홈페이지가 다운되었고,
단일화파기 소식을 알리는 신문이나 전단이 유포되었다는 제보가 잇따랐다. 
나는 선관위 전화번호를 핸드폰에 저장해둔 뒤 스르르 고시원을 나섰다.

고시원 주변의 연희3동 일대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신촌으로 나가서 길바닥을 쏘다녔다.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녹색극장 맞은편의 조선일보 지국이 나왔다.
새벽부터 분주한 배달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전단이나 신문은 발견되지 않았고, 나는 6시경 고시원에 들어왔다. 

고시원에는 망할 놈의 <조선일보>가 들어왔다.
나는 자기 직전 사설을 확인했다.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
개혁당 연세대 모임에서 논평을 맡고 있던 나는 최후의 한편을 연세대 홈페이지에 올렸다.
"유권자들은 정몽준을, 그리고 <조선일보>를 버릴 것이다."

점심께에 일어나 연락을 받았다. 출구조사에서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몇시간 뒤에 다시 온 메시지. "이기기 시작했다."

투표마감을 기해 나는 개혁당 동료들과 함께 술집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 전에 머리를 깎으러 길을 나섰다.
그 와중에 친구와 통화를 나누었는데 "남한이 섬나라가 되면 쓰겠냐"고 한마디하는 찰나
어떤 아저씨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게 무슨 소리여! 남한이 섬나라가 된다니!"
척 보기에도 어딘가 몸이 불편하고, 이미 술이 취해 있는 아저씨였다.
나는 순간 내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길바닥에서 나는 그와 실랑이를 시작했고,
그도 나를 독하게 붙들었다.

한창 옥신각신하다가 설명을 시작했다.
"대북관계가 풀리지 않으면 남한이 섬나라처럼 된다는 겁니다."
그러자, 아저씨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래, 맞아. 젊은이 말이 맞아. 그래서 내가 지금 너무나 걱정이 돼.
나 술 한병 사가지고 집에가서 또 마실 거야. 대통령선거 결과 보고."
노무현이가 되면 좋아서 축배를 들 거고, 이회창이가 되면 쓴잔을 마실 거여.
이회창이가 되면 박정희시대가 또 온다 이 말이여. 나 그럼 한국에서 못 살아.
차라리 중국엘 가지."

이회창이 되어도 박정희시대만하겠냐는 내 응답에 그는 수긍하지 않았다.
나는 노무현이 될 거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다.

"정몽준이가... 약속을 깼는데 될 수 있을까?"
"아까 여론조사 보니 이기고 있답니다. 오후엔 젊은층이 투표를 더하니까 차이가 더 벌어졌을 거예요."
"진짜지? 나 중국 안가도 되는 거지?"
"그럼요. 집에서 기분 좋게 한잔하세요."

그 아저씨와 헤어지면서 깨달았다. 어휴, 이러니 이회창이 떨어질 수밖에.

그러잖아도 2001년, 2002년 택시기사들이 이회창 욕을 하는 걸 자주 목격했다.
김대중 정권에 대한 반감과 심판의지가 높아져가던 시점에도 그랬다.
예비 대통령으로 군림했던 그를 마치 심판해야 할 현직대통령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반창정서가 반DJ 정서를 압도하리라고 예상했다.  
더구나 비주류였던 노무현이 부상하면, 이회창은 김대중정권의 퇴장과 함께 밀려나기 마련이었다.

우리 일행이 들른 술집에는 대형 화면이 설치되어 있었다. 월드컵 때 재미 좀 봤겠다 싶었다.
우리는 주인에게 MBC를 요청했고 그는 흔쾌히 응했다.
투표마감 1분전이었다. 출구조사 결과를 직전에 두고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참이었다.

이겼다. 그리고 우리는 택시를 잡아 여의도 개혁당 당사로 갔다.
유시민 대표를 포함해서 당원들이 TV앞에 앉아 있었다. 각 지역별 개표 결과가 나올 때마다
유시민은 해설자처럼 한마디씩 날리고 있었다.

개표방송 시청도 월드컵응원 못지 않았다.
초반에는 뒤지고 있었는데 어차피 뒤집을 것이고, 가장 불리한 대구경북 지역이 일찍 함을 깠다는 생각에
그다지 초조하지는 않았다.
표차가 줄어들 때마다 사람들은 "으랏차차~" 함성을 질렀고,
영남 선거구 중에 '30%' 이상의 득표율이 나온 곳이 있으면 손뼉을 쳤다.

마침내, 뒤집어졌다. 맥주를 뜯으며 노무현을 연호했다. 나를 비롯해서 다들 목소리에 약간 울음이 배어나왔다.
무슨 대선이 이렇게 험난하다는 말인가. 그 파란만장했던 1년을 뒤로 하고 개혁당원들은 기차 놀이를 시작했다.
그리고 노무현 당선자가 개혁당사를 방문했을 때,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학생당원들끼리 신촌으로 다시 몰려가 밤새 술을 마셨다. 
자고 일어나서 무엇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며칠 뒤에는 안티조선 진영 활동가들이 대학로 모처에 모여 크지는 않은 송년회를 벌였는데
축제 분위기였다. 노무현 지지자인 명계남이나 민노당원인 홍세화나 다들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그해 연말은 매우 들뜬 분위기에서 보냈던,
그러나 내 개인적으로는 3개월 앞으로 다가온 군입대 탓에 다소 심경이 복잡하기도 한
시절이 되었다.





아무래도 나는 단일화하고 악연이 있는 것 같다.  
그 시작이 그해였다.

만일 노무현 정몽준이 단일화를 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노무현이 떨어졌을 것이다. 2등 아니면 간발의 차로 3등. 2등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정몽준은 지나가는 바람이었으니까.

3자구도로 끝까지 갔다면 분명 이회창이 당선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한국정치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그때 이회창이 되는 게 차라리 더 나았으리라는 웃기는 이야길 종종 듣곤 한다.
지랄 쌈싸먹는 이야기다.
노무현이 좋아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노무현 일개인으로만 치면,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는 게 나았을 것이다.
이회창 정권이 들어섰다면 노무현을 공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효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회창 정권은 실패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2007년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노무현은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는 등의 한계를 일찍부터 내보였지만
오바마와 임기를 함께하였다면 그래도 조금 더 수월하게 임기를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라크파병은 안했을 것이고, 한미FTA 가능성도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회창 정권 5년동안 한국사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회창이 되었어도 독재나 공안정국은 안 왔으리라고? 도대체 근거가 뭘까?
그건 현재의 이명박 정권을 통해 충분히 반박되었다.
김대중 정부가 무슨 박정희 정권처럼 20년 가까이 갔나?
달랑 5년했는데 이회창이 지금의 이명박보다 나았을 것 같나? 
북핵사태가 터지고 북미전쟁까지 점치는 흐름이 있었는데, 그건 어떻게 되었을까?

"이회창이 되는 게 민주화에 결과적으로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의견은
한마디로, 겉으로는 노빠 아닌 척하는  
실제로는 지극히 노무현적인 관점이다.
나는 이런 류의 좌파들이 광적인 노빠만큼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2007년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나는 문국현이 시원찮다고 생각하고 찍어줄 생각은 하나도 없었지만
이명박이 되는 건 보다는 얼마간은 낫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말을 들은 어떤 이가 "그래서? 정권 실패하고, 진보진영은 또 덤터기 쓰게?"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이 웃기는 착각이라는 걸, 그도 최소한의 기억력과 관찰력이 있다면 알 것이다.
지금 이명박 정권의 폭주 때문에 진보진영은 되레 반한나라당 담론으로 휩쓸리는 형국이다.

촛불시위 때 이명박 땜에 신난 사람들 있었을 것이다. 역전승 한판 꿈꾸면서 말이다. 
목적이야 정권퇴진이지만,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 그래라.  
노무현 정권 5년동안
김대중 노무현세력은 반한나라당 반사이득 볼 생각하지 말고 권력을 잡고 있을 때 잘했어야 했고,
진보진영은 노무현이 잘하든 못하든 멋지게 살아나갈 길을 뚫어야 했다.  
그때도 못한 놈들이 이명박 정권 때 그걸 해? 
그래도 못한 놈들이 이회창 정권을 버틸 자신이 있나? 

 
얼마 전 어떤 개새끼가 이 블로그에
허세욱의 죽음은 고귀하고, 노무현의 죽음은 눈물 한방울 나지 않을 만큼 하찮은 것이냐는
요지의 댓글을 달았다.

너는 허세욱씨를 한번이라도 애도한 적 있니?
라고 묻는 건 너무나 사치스럽고,
너는 지금 우는 게 자랑스럽니? 지금 그럴 때니?
라고 되묻고 싶다.

노무현은 아직 있다.

노무현은
스승이자
적이고
경쟁자이다.

나는 진보진영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이명박을 적수로 생각하지 마라."
"김근태에게 경쟁의식을 느끼지 마라."

"우리가 넘어서야 할 것은 노무현이다."

그것은 양쪽 모두가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다.

여기 끼어들어 망치는 놈들을 내쫓을 때까지
감상적 슬픔은 보류한다. 
 

오늘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49재다.
나는 예전 오랫동안 그를 열성적으로 지지했으며, 
그가 오른쪽으로 내가 왼쪽으로 가면서 그를 규탄하던 시절이 최근에 있었다.
그를 지지한 대가로 나는 진보와 개혁의 낙관주의를 잃어버렸고,
그는 대통령이 된 대가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생각하면 마음만 복잡하고 아플 뿐이다.
노무현을 한번도 지지하지 않았던 좌파나
지지한 이후 무조건 그를 따랐던 사람들보다
나 같은 사람이 더 한 것 같다.

2008년 초, 노무현 정권기 죽고 다친 분들과 그 친지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정치칼럼 연재를 끝맺은 내가
노무현이 다치고 죽는 꼴까지 봐야만 했던 것이다.

노무현시대, 노무현 정부보다 더 나은 
시대와 정부가 오기 전까지
나의 상처는 씻기지 않을 것 같다.


2007년 대선은 쓸 만한 사적인 이야기가 별로 없다.
이걸로 대선의 기억을 다룬 잡글은 마무리한다. 


추신: 
그의 비문으로는 '대통령 노무현'이 아니라
'정치가 노무현' 또는 그냥 '노무현'이 더 바람직하다.
비문 작업에는 황지우, 유홍준씨가 참여했다는데
이들도 이젠  예술행정가일 뿐, 예술가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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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명  (2) 2009.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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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Free Speech | 2009. 7. 4. 03:19 | Posted by 김수민
"모두가 숙련노동자이자
단순노동자이자
농민이길 바랍니다."

얼마 전 'PD와 작가의 분리'를 따져든 이유도
크게는 저기에 답이 있다.
세상 전체가 공장이나 시장은 아니다.
잘못된 분업은 흐트러뜨리고 지워야 한다.
내가 지닌 어떤 다른 지향보다도 더 먼 길을 가야 이뤄질 테지만
이건 유토피아를 향한 몽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억압과 차별을 깨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래서 변함없이 그려본다.
모두가 숙련된 노동자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누군가는 해야 할 단순노동을 모두가 즐겁게 나눠지고 
죽어가는 농촌에 드나들며 우리 모두 소농이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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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1997년

Free Speech | 2009. 6. 12. 16:18 | Posted by 김수민

중학교 졸업여행길에 올랐던 날은 아마도 대선을 이틀인가 사흘인가를 앞둔 시점이었다.

A: 이번엔 바까야 돼. IMF도 터졌고 하니까.
B: 지랄 바꾸긴. 김종필이 국무총리되는 게 바뀌는 거냐.
A: 그럼 이번에 또 정권을 연장시켜줘야 되는 거야?
B: 김대중-김종필보단 이회창-조순이 차라리 낫겠다.

나는 둘 중 어느 쪽일까?

C: 그럼 넌 누굴 지지하는데?
B: 권영길이 사람은 젤 낫지.
C: 암튼 전두환이가 김대중을 완전히 쫓아냈어야 했는데...

A, B: 조까고 있네. 넌 빠져 임마.

2000년에 나는 유시민이 쓴 <1997 대선, 게임의 법칙>을 읽었다.
내가 1997년에 가진 생각도 유시민이랑 거의 비슷한 생각이었다.

통합민주당 후원회장이었던 박형규 목사가 "DJ나 JP가 되는 것보다 김영삼 대통령이 개혁적인 인물을 미는 게 낫다"라고 발언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김덕룡이나 이인제 등등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았다.
여기엔 이회창도 들어간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분명
1990년대 중반의 상황에서 이회창은 김대중보다 더 개혁을 대변했다.

언젠가 국민학교 6학년 시절 쓴 일기를 들춰보니 이회창에 대한 구절이 나왔다. 
나는 머리속에 '쓰면 지는 거다'에 해당하는 어휘를 모은 수첩이 있다. 
그 첫줄에 씌어 있는 건 '융통성'. 
내가 본 어른들이란,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그것을 저지하는 남에게는 '융통성이 없다'고 내뱉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래서 '융통성'이라는 말을 매우 싫어하는 동시에 그게 없다는 말을 듣는 사람에게 호감이 갔다. 
내가 이회창에게 가졌던 호감이란 것도 그런 것이었다. 
1995년경에는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기억하건대 주변의 어른들은 원래 이회창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내 고향 구미 사람들은 김영삼 다음은 김윤환이라고 착각하고 살았다.
박정희 다음에 대통령이 구미에서 한명 더 나온다나?
(박정희가 대통령되기 전에 구미에서 대통령 나온다는 말은 없었을 것이다.)
다시 돌아봐도 바보 같은 태도였다. 김윤환이 어딜 봐서? 이런 수준이니, "노무혀이는 절대 안 된다"는 장담 덕에
노무현이 당선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구경북 민심은 이회창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이는 몇년간 계속되었다. 
나는 이회창이 통합민주당이 아니라 신한국당을 택하면서, 그리고 민정계 김윤환의 후원을 받기 시작하면서
존경심을 조금씩 거두어들였다.

내 주변 어른들이 "세력이 없어서 안 된다"던 이회창은 결국 신한국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한보사태로 김영삼의 역할이 줄어들고 최형우가 쓰러진 뒤 민주계에게는 힘이 없었던 것이다.
민주계는 이인제, 김덕룡, 이수성을 향해 뿔뿔이 흩어졌다.
당시에는 이수성이 후보가 되리라는 관측이 유력했다. 1차투표에서는 이회창이 이기더라도
당내 반대자가 많아서 결선에서 뒤집힌다는 시나리오였다.
그해 나온 고원정의 소설도 이수성의 출마를 예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인물이 정치에서 성공하기는 어렵다. 전국에 형님아우하는 사람이 몇만몇천명이라도 소용없다.
김영삼에게 "독단적인 인물에게 미래 없다"라는 말을 듣고도
"비민주적 정당에게 미래 없다"라고 받아친 이회창 정도의 깡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어 국민회의 경선에서는 김대중이 정대철을 꼬마다루듯 가뿐하게 꺾고 승리했다.
정계은퇴로 가슴을 찡하게 했던 김대중은 선언을 번복하고 복귀했다.
그가 다시 돌아오는 게 맞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다.
뉴스를 보던 삼촌은 "다시 하는 게 맞지. 그럼 누가 하노?"라고 밝혔다.
몇달 전 그는 <김대중 죽이기>라는 책을 읽은 터이기도 했다.

그러나 공갈협박하듯 당권을 내놓으라 하더니 제1야당을 깨버린 처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1996년 총선은 철저히 삼김의 지역분할로 진행되었다. 김대중씨는 그때 내게 '구악'의 일원으로 여겨졌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조순 지지는 유시민의 조순 지지와는 조금 달랐다.
유시민은 당선가능성을 주된 잣대로 삼았겠지만, 나는 민주화나 정권교체에 더해, 지역주의와 보스정치를
반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물론 배움이 많지 않고 지금보다도 열 서너살이 어린 나였기에 좌우 구도나 이런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최종확정된 대선 후보 중 권영길이 제일 낫다고 한 것도,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감화되어서가 아니라
그가 도덕적인 흠결이 없는 후보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보니 노무현이 당시에 "조순, 권영길 후보만 도덕적이다"라는 발언도 했었다 한다.

강준만은 옛 정권 출신인 조순을 어떻게 밀 수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나야말로 되묻고 싶었다.
박정희 추모행사인가에, 김대중이 참석해 재평가 발언을 늘어놓았고,
조순만이 참석하지 않은 것은 어떻게 볼 것인가?
역시나, 김대중은 대통령 재직 도중 박정희기념관 국고보조를 선언했고,
조순은 박정희기념관반대운동에 가담했다.
오늘날 김대중은 한미FTA 찬성론자이고 조순은 반대론자이다.
사회경제적 좌우 구도가 머리속에 자리잡지 않은 점은 그때의 강준만도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조순은 드디어 서울시장직을 사퇴하며 민주당 후보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내가 '단안'이라는 낱말을 처음 주워들은 게 이때였다.
다소 연로하다는 단점은 있었으나 그는 김대중, 김종필보다 젊거니와, 나이보다 젊은 이미지를 가졌다.
거기에 노무현 등 통추 그룹이 붙어주면 보완이 될 터였다.
지금도 기억나건대, 조순은 등장하자마자 여론조사에서 24%를 얻어 김대중에 1% 뒤진 2위를 했다.
이인제가 떴을 때 지지율이 토막났지만 둘이 단일화를 할 경우 이긴다는 조사도 나온 적이 있었다.

한편 이인제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별 감흥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박정희 흉내를 내면서 지랄한다고 생각했다.
이만큼 '박정희'라는 것은 내게 중요한 준거였다. 내가 김종필과 손잡은 김대중을 지지 못했던 까닭도 거기 있다.

김대중이 통일과 경제분야에 식견이 있는 정치인임은 분명했다.
조순은 TV토론에서 그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보수적인 발언도 꽤 많았던 것 같다.
나는 김대중과 조순이 단일화하길, 그래서 민주연합이 성사되길 바랐다. 하지만 결과는 DJP의 연합이었다.
그때 나는 그룹과외를 하고 있었는데 과외선생이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나는 "후세들에게 부끄러운 짓"이라고 했다.

1997년 당시에 내가 성인이라 투표권이 있었다면 누굴 찍었을까?
김대중이나 이인제는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표 버리는 심정으로 권영길을 찍었거나, 차라리 이회창을 찍었을 것이다.

1997년 대선 내게 마지막 변수는 노무현이었다. 갑자기 그가 대선출마를 시사해 버린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통추의 이인제 지지 흐름을 차단하기 위한 방책이었지만,
그때 난 저 사람이 다음에는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했다.

노무현은 아마 한동안 조순을 지지했겠지만 조순은 이회창에게 후보직을 양보했다.
나는 노무현이 낄 데가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김대중을 지지하고 나섰다.
내 눈에는 오히려 권영길을 지지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였는데 말이다.

나는 그때 왜 노무현이 김대중을 지지했는지 시간이 지나서야 이해했다.
삼김을 청산하는 것보다는 일단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 새 인물들의 등장에 이로웠다.
그리고 DJP연합은, 너무나 적절한 시점에서 깨진 덕분에,
예상과는 달리 한국정치사에 큰 해악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술수와 초심을 겸비한 김대중이라는 인물의 능력이었다고 본다.

신한국당의 대선 주자들을 두고 구룡이니 팔룡이니 말이 많았다.
대선 후보가 아니라 대통령이 그들 중에 나오리라는 관측이 유력했다.
그러나 '준비된 대통령'+'정권교체'라는, 저변에 흐르던 도도한 흐름을 이길 수는 없었다.
대구경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김대중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말들이 30대 사이에서 돌고 있었다.
박태준까지 지지한다니 예전처럼 색깔을 의심하지 않아도 되었다.

대선 당일, 아버지는 밤 11시경 "에이, 마 끝났다. TV 끄자"라는 말을 남기고 주무시더니
다음날 아침 신문 1면을 자고 있는 어머니 눈앞에서 흔들었다.
1987년과 1992년 김대중을 찍으려고 했던 어머니는 1997년에는 전혀 김대중 지지의사가 없었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나까지 욕하는데 찍을 명분을 찾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선거 직후 나는 친구들과 고등학교 합격자 오리엔테이션(?)을 다녀왔다.
시내와 버스 안의 분위기는 촥 가라앉아 있었다. 특히 노인들 표정은 넋이 나간 듯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다른 감회를 가진 사람들은 있었다.

레코드 가게 종업원 남녀가 나눈 대화다.
"김대중이 당선이 됐네."
"거봐요."
"그렇게 찍자고 하더니. 됐어."
"오빠도 찍었잖아요."
"이제 대통령도 바뀌었으니 장사가 잘 되겠어."
"그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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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명

Free Speech | 2009. 6. 11. 00:57 | Posted by 김수민

내외가에 아버지가 지은 이름을 품고 사는 애들이 여덟은 된다. 아버지가 꼬박 한나절을 바쳐 작명하는 걸 몇차례 본 적이 있다. 그에게 한글 발음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독특한 작품도 별로 없다. 내 생각엔 '우찬'이 그중 가장 괜찮은 것 같다. 아이 부모들이 원래 원하던 이름들은 대체로 기각된다. 한자의 획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내 이름도 과연 그렇게 지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동학농민군 출신 의병장 金秀敏의 별명은 金守民이었다. 그의 별명이 내 이름이다. 아버지가 그를 알고 지은 이름은 아니지만, 작명의 취지는 같을 것이다. 나는 내 이름이 그야말로 별명으로나 어울릴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물론 그것을 별명으로도 쓸 생각이 없다. 나는 우리를 지키는 것보다 나를 지키는 것이, 다른 이들도 각자 그러고 사는 것이 자연스러움을 넘어 옳다고 믿는다. 그것이 우리를 지키는 일의 시작이자 곧 우리를 지키는 일이다. 수민보다는, 숨인이 바르다. 그래서 늘 너무 강한 의지가 투영되어 있는 이름이 그 발음의 여성성만큼이나 부담스러웠다.  

얼마 전 '저주'에 관해 쓴 글에 어느 분이 댓글을 달아주셨다. "사주명리학적 접근을 해보자면 '개운'이 있습니다...  흔히 하는 개명도 개운의 한 방법이죠. 저도 한자만 바꾼 경험이 있는데..." 나도 개명할 작심을 안해본 건 아니었다. 어렸을 적에는 그나마 발음이랑 얼굴이 맞아떨어지는 편이었지만 이젠 그도 아니다. 그럼에도 바꾸지 않은 건 새 전화번호 하나 정하지 못하는 내가 대안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자라도 바꾸어 볼까 싶다. 자신의 정체를 가장 명확하게 밝히는 이름을 자기가 짓지 못한다는 극단적 보수성을 안고 있다는 사실이 지겹다. (이런 생각과 표현, 어디서 읽은 듯한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참고로, '수민'이라는 단어에는 '수심하여 번민함', '뛰어나고 민첩합'(의병장의 본명이 담은 뜻이다)이라는 의미도 있다. 아, '소금쟁이'도 있지. 이게 제일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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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

Free Speech | 2009. 6. 8. 18:42 | Posted by 김수민

말에 설킨 당사자 모르게 퍼지고 있다면, 그 소문은
발설자 스스로의 처지와 컴플렉스를 실토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뻘소릴 다해놓고 자리가 나오니 말을 뒤집고 덥썩 앉는 사람
그럴싸한 핑계로 돈떼먹고 도망가려다 걸린 사람
팩트의 왜곡으로 불안해진 발밑을 이념과 이론으로 떼우고 넘어갔던 사람
이 자리에 없는 저 사람 욕하고, 이 사람 없는 저 자리에서는 이 사람 욕한 사람

이런 주제에 남의 이미지를 타격하려는 데 나서고 다니는 꼴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모형이나 그림이 아니라 실제의 자기 자신이 정조준당하고 있음을 아는지나 모르겠다. 
남의 약점을 알고 있는 게 자신을 지키기 편하다는 씁쓸한 원리를 새삼 깨우친다.  

소문을 퍼뜨릴 일이 있으면 반드시
당사자 귀에 들어가도록 온갖 노력을 다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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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1992년

Free Speech | 2009. 6. 5. 10:14 | Posted by 김수민

1992년은 정치적 계략이라는 걸 처음 부린 해로 기억된다.

그해 총선 이튿날 <소년한국일보>에는 민자당이 과반의석에 못 미쳤다고 나왔다.
아버지에게 '과반'이 무슨 의미냐고 물으니 '반을 초과하는 것'이었다.
총의석은 299석이었고 민자당이 획득한 의석은 149석이었다.

1990년 1월에 초유의 사건이 터졌다. 3당합당이었다. 분명히 기억하건대
대통령후보로 나섰던 사람 셋이 손을 잡아버린 기가 찬 사태였다. 쇼라고 하기에도 별난 사태였다.
그런데 그러고도 과반을 못 얻었다니... 입안이 고소했다.

나는 주변의 어른들과 친구들에게 '정주영 좋다', '정주영 될 수 있다'는 말을 퍼뜨렸다.
전자보다는 후자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내가 진짜로 지지한 후보는 김대중이었다.

내가 어린 마음에 김대중을 지지한 데는 거창한 이유가 깔려 있지는 않았다.
그 사람이 민주화운동을 했었음은 어디서 주워 들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이번이 세번째 출마인데 하늘이 무심하지 않다면 당선되는 게 세상의 순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71년 박정희와 붙어 46%씩이나 득표했고, 그마저도 부정선거가 없었다면 승패가 뒤집힐 수도 있었으며,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기까지 했으니 대통령직에 앉는 게 정당한 보상이라는 생각.

민자당이 과반을 얻지 못한 까닭은 창당 직후 총선을 치른 통일국민당의 선전에 있었고
정주영으로 표를 돌려놓으면, 정주영이 5, 600만표쯤 얻으면 김대중이 당선된다는 건 누가 봐도 명명백백했다.
박철언, 김복동이 정주영을 지지했을 때 나는 쾌재를 불렀다. 강원도 뿐 아니라 대구경북에서도 표가 깨지겠구나~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내 주변 어른들은 정주영을 지지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비방을 너무 많이 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건 정주영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가 아니라, 그 결과였을 것이다.
그때 정주영에게 표가 쏠리지 않는 원인은 두고두고 연구하고 분석할 만한 현상이다.
단지 반-김대중 정서가 김영삼으로 결집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만일 그것만이 주효했다면
정주영은 340여만표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니까.
재벌이 직접 정치에 나서는 것에 대한, 좌우를 망라한 거부감이 있었을 테고,
오랫동안 정치를 하고 고난을 겪으며 카리스마를 쌓은 양김씨를 청산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정주영이 김영삼의 표를 깎았다면, 김대중의 표를 깎는 사람도 있었다.
하루는 TV에서 한복을 두르고 나온 한 후보를 보았다.
그는 연설 도중 몸에 기름을 끼얹고 분신자살한 노동자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그가 전태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 '역사만화'를 읽어서.
그렇다. 민자당 시절에도 사회적 민주화의 흐름은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백기완 후보가 김대중 후보와 다른 편인 까닭이 궁금했다. 물론 오래 궁금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백 후보는 박찬종 후보에도 못 미치는, 꼴찌에 가까운 성적을 거둘 것 같았으므로.

친구들이랑 누가 꼴찌를 할까 내기도 했었다. 어떤 애는 이병호에, 다른 애는 백기완에, 나는 김옥선에 걸었다.
결국 이병호에 건 녀석이 과자를 먹었다.

돌아보면 3당합당으로 호남이 포위되었을 때 이미 게임은 끝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투표 당일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외숙부가 놀러와서 김영삼이 되는 판이 아니냐고 묻자 아버지는
"그래도 김대중이 이길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그 한마디가 내게는 희망이었다.

그날 MBC는 개표방송을 재밌게 한답시고 최병서의 성대모사에다가 퀴즈 코너도 개설했는데
대한민국 11대 대통령이 누구냐는 퀴즈는 아직까지도 기억난다.
10대는 최규하고, 12대는 전두환인데 11대는 누구냐는 것이다.

자고 일어나 학교에 등교하던 도중 김영삼 후보의 승리가 확정되었다는 소식이 차안 라디오로 울려 퍼졌다.
정주영은 한마디로 '조땠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수사를 받았는데, 담당검사가 나와 이름이 같아서인지
기억이 좀 또렷하다.

김대중은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기자회견장은 울음바다가 됐고 TV를 시청하던 나도 좀 찡했다.
하늘의 공평함보다는 인간세상의 세력판도가 더 세다는 걸 깨달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대통령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될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럼 나는 김영삼의 당선에 실망했었나. 그것도 아니었다.
그 역시 김대중과 더불어 박정희, 전두환에 저항했었던 정치인이었고
'정권교체'에 못지 않은, 32년만의 '문민정부'의 탄생이라는 신기원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듬해인 1993년, 김영삼의 인기는 참으로 하늘을 찔렀었다.
정주영은 찍소리 않고 바짝 엎드렸고, 김대중은 캠브리지 유학을 다녀와 아태재단을 만들었다.
4위를 했던 박찬종은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꼽혔다.

그무렵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정종식', '정권교체' 대신에 세대교체를 꿈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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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1987년

Free Speech | 2009. 6. 4. 15:01 | Posted by 김수민

그해 매일처럼 TV에 아저씨 넷이 나왔다.
그들 각자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인 현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소리를 질렀다.
부모에게 물어 그것이 나라의 최고지도자를 뽑는 행사임을 알았고, 거듭된 뉴스 시청을 통해 네 후보의 이름과 소속정당을 다 외웠다.

기호 1번은 인상이 후덕해 보였다. 반면 내 눈에 2번은 불손했고, 3번은 무서웠고, 4번은 칙칙했다. 
10년이 지나서야 찌푸린 3번의 표정이 방송의 편파왜곡보도의 결과임을 깨달았다.
또 기억에 남아 있는 건 후보들의 손동작이다. 노태우 후보는 브이자를 그렸고, 김영삼은 엄지와 검지를 붙여 0을
만들고 나머지 세 손가락은 펴서 본인이 03임을 만방에 과시했다.  

호감도의 순서는, 1번, 4번, 2번, 3번 순이었다. 
나는 그래서 1번이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투표와 개표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알 리 없는 아이였기에
나는 알아서 1번이 당선되는 줄 알았다. 뿐더러 나머지 순위도 기호 순대로 정해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버이도 모두 1번을 지지했다.

2002년 대선을 지나 우리 집안에 아주 잠깐 과거사청산의 열풍이 불었다.
그해 숙부들은 노무현을 지지했고, 숙모들은 이회창을 지지했다.
막내 숙부와 숙모는 투표장에까지 가서 언성을 높이며 싸웠다. 육탄전 직전이었다.
그들은 모두 경북 지역에서 자라났으나 남자들은 정치를 생각할 시간이 있었고 여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이를 '남자의 개혁성, 여자의 수구성'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쟤들은 부부가 따로 찍는데, 당신은 그때 날 왜 말렸느냐"며 아버지에게 따졌다.

사연인즉슨, 어머니는 1987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찍으려고 했었다.
물론 어머니 역시 포항에서 자란 분이고 특별히 진보적일 리가 없었다.
그는 1986년 건대 시위 화면을 보며 "학생이 공부나 할 것이지"라고 한마디해 친척 오빠들의 호응을 받기도 했었다.어머니는 직장에 취업했을 때 거듭 질문을 받았다. 성적이 좋아서 굳이 이쪽으로 오려는 이유를 회사측에서 궁금히 여겼기 때문이다. 사측은 어머니의 고향집으로 사람을 보내기도 했다. '위장취업'을 의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위장취업이란 팔자 좋은 대학생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다만 그런 어머니도 뭔가 나라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중 가장 신선하다고 느껴진 김대중에게 마음이 갔었다. 어머니가 어렸을 적 동네의 김대중 포스터는 늘 훼손되고 낙서로 뒤덮였다고 하는데, 그것이 되레 역발상을 초래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버지는 강력하게 "김대중이 되면 나라가 망한다"고 어머니를 책망했고
별다른 논리를 가지지 않은 어머니는 수긍하고야 만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은 당시 세살배기에 불과한 내 동생만을 빼고 세 명이 모두 노태우를 지지했고 두 명이 그에 표를 보탰다.
어머니가 기호 2번에 투표하기까지는 15년이라는 세월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나의 의심은 빨리 찾아왔다.

국민학교 3학년 무렵, 중립적 관점의 역사만화만 봐도 박정희가 장기집권한 독재자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전에 이미 TV에 연일 중계되던 청문회를 통해 망신당하는 전두환을 목격했다.
나는 노태우는 좀 다른 사람이라고 느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인상'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뉴스에서 "노대통령 사과해야"라는 헤드라인을 봤다.
아주 오랜 뒤에 돌아보니, 그 사건은 윤석양 이병의 안기부 사찰 폭로일 확률이 크다.
이승만만 나쁜 놈이 아니라 현 대통령도 잘못을 하고 그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어른들한테 속았을 수도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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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선 장사 없다

Free Speech | 2009. 6. 3. 16:34 | Posted by 김수민
"정권교체가 되면 진보정당 가겠다고, 노무현이 그런 말 한 적이 있었죠."
"노무현이 민주노동당이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대선 후보로 나왔을까?"

한마디 대답에 자리가 잠깐 뒤집혔다.

"자주파 땜에 못 나왔을 겁니다,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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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부끄럽게 하는 사람들

Free Speech | 2009. 6. 3. 04:21 | Posted by 김수민
입장은 좀 달라도, 나를 부끄럽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견결함과 투쟁성과 급진성으로 인해. 그러나 그것들이 매우 손쉬운 선택과 결행이 낳은 산물임을, 그들이 마침내는 물리학 제1의 법칙으로 굴러감을 깨달으면서부터, 그들은 나를 부끄럽게 하지 못했다. 이건 그들의 위기가 아니라 나의 위기다.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사람들을 찾아나서련다. 그들은 내게 신물과 한숨을 안겨주던 바로 그 사람들일 수도 있다. 내 경험이 가져다준 환멸은 오히려 나를 뿌리깊은 혐인으로부터 얼마간 해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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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 아닌 저주가 나를 자유롭게

Free Speech | 2009. 6. 1. 17:02 | Posted by 김수민
봉기씨가 내 생년월일시를 알아갔다. 아는 선배의 사주 실습용으로 말이다. 몇시간 뒤 들뜬(?)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 그럴 줄 알고 있었다. 예언가는 내 쪽이다. -_- 사주팔자를 볼 때 되풀이되는 경험이 있다. 그것은 나의 성격, 기질, 취미, 적성을 제대로 맞힌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못 믿을 이야기 뿐이다. 사주팔자에 따르면 나는 무지 훌륭하고 대운이 트인 사람이다. 아름드리 나무가 화려하게 타오르고 있다나? 하지만 몇년 지나서 보면 맞는 꼴을 못봤다. 일전에 타로점을 한번 봤는데 앞날을 보는 건 그게 더 정확했다. "열 개 중에 아홉 개를 이뤄도 나머지 한 개가 없다며 다 버리고 다른 길로 가버리는 성격입니다." "얼마 뒤 사귈 여자는 사람 참 정신 사납게 만들 겁니다." 등등. 

평소에 '과학 과학'하는 소리를 가소롭게 여기는 편이다. 여기엔 사연이 있다. 출발점은 현대의학에 대한 나의 불신이다. 나는 가슴이나 갈비뼈께에 형언하기 힘든 증상이 있다.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기 힘들고, 잠들 땐 팔로 갈비뼈를 눌러야 한다. 그런데 병원엘 아무리 가도 규명이 안 된다. 그래서 안 간지 꽤 오래됐다. 그러던 어느날 '묫자리'에 얽힌 설명을 들었다. 또 무슨 헛소리냐 싶어 귀부터 후볐지만 들어보니 그 증상이 시작된 시기부터 모조리 딱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그동안 무슨 일을 하려고 해도 방해를 많이 받았을 거다." 심지어 내 동생의 증상까지 맞히질 않나. 그래서 믿을 수밖에 없었다.

며칠 뒤 귀신이 찾아왔다.-0- 어느날 밤, 내 자취방 현관문의 풍경소리가 울렸다. 문 잠궈놨는데.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잤다. 누가 내 발을 들었다. 분명히 남이 들었다. 혼자 하려면 복근에 힘을 줘야 올라가는 자세였으니까. 손가락이 발바닥을 누르기 시작했다. 엄마가 마사지를.... 가만, 구미에 있는 엄마가 언제 서울로? 이 밤에? 그 순간 손톱이 내 발바닥을 찌르기 시작했고, 나는 베개를 던지며 최민식처럼 "누구냐 너"라고 외쳤다. 내 발께 밑에서 그는 고개를 숙이며 사라져갔다. 몇시간 뒤에 귀신 여섯 명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내 갈비뼈를 누르며 양쪽에 앉아 있었다. 찍소리 말고 가만히 있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당신들 누구여? 무슨 한이 있는 거요? 말 좀 해보쇼. 좀 그만 괴롭히고."  (이 얘길 들으니까 남들이 나더러 담이 참 크다고 한다. 귀신은 별로 무섭지 않다. 내가 무서워하는 건 따로 있다. UFO라고... 국민학교 새내기 때 과학책 읽고 한동안 밤외출을 못한 적이 있다.) 다음날 첫번째 귀신이 사라진 바닥을 보니 내가 옷을 개어놨더라. 귀신이 드나드는 구멍이 옷인감?

벌써 3년이 지났다. 방해, 그러니까 저주는 사주팔자보다 역시나 강했다. 갈비뼈의 증상은 그대로 남아 있다. 남은 평생동안 고칠 방도는 없을 것 같다. 그외에도 일들이 썩 잘 풀리지가 않았다. 그러나 3년동안 나는 많은 것을 얻었다. 대세에 불응했지만 운명에는 순응하기로 했다. 안되면, 그냥 안되는 거다.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중간중간에 행복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결핍과 저 훼방에도 불구하고 나처럼 살아가고 있겠지. 승승장구, 파죽지세였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망가졌을까 상상해 보기도 했다. 나는 스펙으로 남을 누르는 오만방자함 대신, 노숙을 하더라도 간직할 거만함을 얻었다. 사주를 봐주신 봉기씨의 선배님께는 죄송하지만, 나는 사주보다 저주를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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