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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에 해당되는 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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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1997년

Free Speech | 2009. 6. 12. 16:18 | Posted by 김수민

중학교 졸업여행길에 올랐던 날은 아마도 대선을 이틀인가 사흘인가를 앞둔 시점이었다.

A: 이번엔 바까야 돼. IMF도 터졌고 하니까.
B: 지랄 바꾸긴. 김종필이 국무총리되는 게 바뀌는 거냐.
A: 그럼 이번에 또 정권을 연장시켜줘야 되는 거야?
B: 김대중-김종필보단 이회창-조순이 차라리 낫겠다.

나는 둘 중 어느 쪽일까?

C: 그럼 넌 누굴 지지하는데?
B: 권영길이 사람은 젤 낫지.
C: 암튼 전두환이가 김대중을 완전히 쫓아냈어야 했는데...

A, B: 조까고 있네. 넌 빠져 임마.

2000년에 나는 유시민이 쓴 <1997 대선, 게임의 법칙>을 읽었다.
내가 1997년에 가진 생각도 유시민이랑 거의 비슷한 생각이었다.

통합민주당 후원회장이었던 박형규 목사가 "DJ나 JP가 되는 것보다 김영삼 대통령이 개혁적인 인물을 미는 게 낫다"라고 발언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김덕룡이나 이인제 등등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았다.
여기엔 이회창도 들어간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분명
1990년대 중반의 상황에서 이회창은 김대중보다 더 개혁을 대변했다.

언젠가 국민학교 6학년 시절 쓴 일기를 들춰보니 이회창에 대한 구절이 나왔다. 
나는 머리속에 '쓰면 지는 거다'에 해당하는 어휘를 모은 수첩이 있다. 
그 첫줄에 씌어 있는 건 '융통성'. 
내가 본 어른들이란,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그것을 저지하는 남에게는 '융통성이 없다'고 내뱉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래서 '융통성'이라는 말을 매우 싫어하는 동시에 그게 없다는 말을 듣는 사람에게 호감이 갔다. 
내가 이회창에게 가졌던 호감이란 것도 그런 것이었다. 
1995년경에는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기억하건대 주변의 어른들은 원래 이회창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내 고향 구미 사람들은 김영삼 다음은 김윤환이라고 착각하고 살았다.
박정희 다음에 대통령이 구미에서 한명 더 나온다나?
(박정희가 대통령되기 전에 구미에서 대통령 나온다는 말은 없었을 것이다.)
다시 돌아봐도 바보 같은 태도였다. 김윤환이 어딜 봐서? 이런 수준이니, "노무혀이는 절대 안 된다"는 장담 덕에
노무현이 당선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구경북 민심은 이회창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이는 몇년간 계속되었다. 
나는 이회창이 통합민주당이 아니라 신한국당을 택하면서, 그리고 민정계 김윤환의 후원을 받기 시작하면서
존경심을 조금씩 거두어들였다.

내 주변 어른들이 "세력이 없어서 안 된다"던 이회창은 결국 신한국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한보사태로 김영삼의 역할이 줄어들고 최형우가 쓰러진 뒤 민주계에게는 힘이 없었던 것이다.
민주계는 이인제, 김덕룡, 이수성을 향해 뿔뿔이 흩어졌다.
당시에는 이수성이 후보가 되리라는 관측이 유력했다. 1차투표에서는 이회창이 이기더라도
당내 반대자가 많아서 결선에서 뒤집힌다는 시나리오였다.
그해 나온 고원정의 소설도 이수성의 출마를 예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인물이 정치에서 성공하기는 어렵다. 전국에 형님아우하는 사람이 몇만몇천명이라도 소용없다.
김영삼에게 "독단적인 인물에게 미래 없다"라는 말을 듣고도
"비민주적 정당에게 미래 없다"라고 받아친 이회창 정도의 깡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어 국민회의 경선에서는 김대중이 정대철을 꼬마다루듯 가뿐하게 꺾고 승리했다.
정계은퇴로 가슴을 찡하게 했던 김대중은 선언을 번복하고 복귀했다.
그가 다시 돌아오는 게 맞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다.
뉴스를 보던 삼촌은 "다시 하는 게 맞지. 그럼 누가 하노?"라고 밝혔다.
몇달 전 그는 <김대중 죽이기>라는 책을 읽은 터이기도 했다.

그러나 공갈협박하듯 당권을 내놓으라 하더니 제1야당을 깨버린 처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1996년 총선은 철저히 삼김의 지역분할로 진행되었다. 김대중씨는 그때 내게 '구악'의 일원으로 여겨졌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조순 지지는 유시민의 조순 지지와는 조금 달랐다.
유시민은 당선가능성을 주된 잣대로 삼았겠지만, 나는 민주화나 정권교체에 더해, 지역주의와 보스정치를
반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물론 배움이 많지 않고 지금보다도 열 서너살이 어린 나였기에 좌우 구도나 이런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최종확정된 대선 후보 중 권영길이 제일 낫다고 한 것도,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감화되어서가 아니라
그가 도덕적인 흠결이 없는 후보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보니 노무현이 당시에 "조순, 권영길 후보만 도덕적이다"라는 발언도 했었다 한다.

강준만은 옛 정권 출신인 조순을 어떻게 밀 수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나야말로 되묻고 싶었다.
박정희 추모행사인가에, 김대중이 참석해 재평가 발언을 늘어놓았고,
조순만이 참석하지 않은 것은 어떻게 볼 것인가?
역시나, 김대중은 대통령 재직 도중 박정희기념관 국고보조를 선언했고,
조순은 박정희기념관반대운동에 가담했다.
오늘날 김대중은 한미FTA 찬성론자이고 조순은 반대론자이다.
사회경제적 좌우 구도가 머리속에 자리잡지 않은 점은 그때의 강준만도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조순은 드디어 서울시장직을 사퇴하며 민주당 후보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내가 '단안'이라는 낱말을 처음 주워들은 게 이때였다.
다소 연로하다는 단점은 있었으나 그는 김대중, 김종필보다 젊거니와, 나이보다 젊은 이미지를 가졌다.
거기에 노무현 등 통추 그룹이 붙어주면 보완이 될 터였다.
지금도 기억나건대, 조순은 등장하자마자 여론조사에서 24%를 얻어 김대중에 1% 뒤진 2위를 했다.
이인제가 떴을 때 지지율이 토막났지만 둘이 단일화를 할 경우 이긴다는 조사도 나온 적이 있었다.

한편 이인제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별 감흥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박정희 흉내를 내면서 지랄한다고 생각했다.
이만큼 '박정희'라는 것은 내게 중요한 준거였다. 내가 김종필과 손잡은 김대중을 지지 못했던 까닭도 거기 있다.

김대중이 통일과 경제분야에 식견이 있는 정치인임은 분명했다.
조순은 TV토론에서 그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보수적인 발언도 꽤 많았던 것 같다.
나는 김대중과 조순이 단일화하길, 그래서 민주연합이 성사되길 바랐다. 하지만 결과는 DJP의 연합이었다.
그때 나는 그룹과외를 하고 있었는데 과외선생이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나는 "후세들에게 부끄러운 짓"이라고 했다.

1997년 당시에 내가 성인이라 투표권이 있었다면 누굴 찍었을까?
김대중이나 이인제는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표 버리는 심정으로 권영길을 찍었거나, 차라리 이회창을 찍었을 것이다.

1997년 대선 내게 마지막 변수는 노무현이었다. 갑자기 그가 대선출마를 시사해 버린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통추의 이인제 지지 흐름을 차단하기 위한 방책이었지만,
그때 난 저 사람이 다음에는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했다.

노무현은 아마 한동안 조순을 지지했겠지만 조순은 이회창에게 후보직을 양보했다.
나는 노무현이 낄 데가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김대중을 지지하고 나섰다.
내 눈에는 오히려 권영길을 지지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였는데 말이다.

나는 그때 왜 노무현이 김대중을 지지했는지 시간이 지나서야 이해했다.
삼김을 청산하는 것보다는 일단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 새 인물들의 등장에 이로웠다.
그리고 DJP연합은, 너무나 적절한 시점에서 깨진 덕분에,
예상과는 달리 한국정치사에 큰 해악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술수와 초심을 겸비한 김대중이라는 인물의 능력이었다고 본다.

신한국당의 대선 주자들을 두고 구룡이니 팔룡이니 말이 많았다.
대선 후보가 아니라 대통령이 그들 중에 나오리라는 관측이 유력했다.
그러나 '준비된 대통령'+'정권교체'라는, 저변에 흐르던 도도한 흐름을 이길 수는 없었다.
대구경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김대중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말들이 30대 사이에서 돌고 있었다.
박태준까지 지지한다니 예전처럼 색깔을 의심하지 않아도 되었다.

대선 당일, 아버지는 밤 11시경 "에이, 마 끝났다. TV 끄자"라는 말을 남기고 주무시더니
다음날 아침 신문 1면을 자고 있는 어머니 눈앞에서 흔들었다.
1987년과 1992년 김대중을 찍으려고 했던 어머니는 1997년에는 전혀 김대중 지지의사가 없었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나까지 욕하는데 찍을 명분을 찾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선거 직후 나는 친구들과 고등학교 합격자 오리엔테이션(?)을 다녀왔다.
시내와 버스 안의 분위기는 촥 가라앉아 있었다. 특히 노인들 표정은 넋이 나간 듯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다른 감회를 가진 사람들은 있었다.

레코드 가게 종업원 남녀가 나눈 대화다.
"김대중이 당선이 됐네."
"거봐요."
"그렇게 찍자고 하더니. 됐어."
"오빠도 찍었잖아요."
"이제 대통령도 바뀌었으니 장사가 잘 되겠어."
"그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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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1992년

Free Speech | 2009. 6. 5. 10:14 | Posted by 김수민

1992년은 정치적 계략이라는 걸 처음 부린 해로 기억된다.

그해 총선 이튿날 <소년한국일보>에는 민자당이 과반의석에 못 미쳤다고 나왔다.
아버지에게 '과반'이 무슨 의미냐고 물으니 '반을 초과하는 것'이었다.
총의석은 299석이었고 민자당이 획득한 의석은 149석이었다.

1990년 1월에 초유의 사건이 터졌다. 3당합당이었다. 분명히 기억하건대
대통령후보로 나섰던 사람 셋이 손을 잡아버린 기가 찬 사태였다. 쇼라고 하기에도 별난 사태였다.
그런데 그러고도 과반을 못 얻었다니... 입안이 고소했다.

나는 주변의 어른들과 친구들에게 '정주영 좋다', '정주영 될 수 있다'는 말을 퍼뜨렸다.
전자보다는 후자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내가 진짜로 지지한 후보는 김대중이었다.

내가 어린 마음에 김대중을 지지한 데는 거창한 이유가 깔려 있지는 않았다.
그 사람이 민주화운동을 했었음은 어디서 주워 들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이번이 세번째 출마인데 하늘이 무심하지 않다면 당선되는 게 세상의 순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71년 박정희와 붙어 46%씩이나 득표했고, 그마저도 부정선거가 없었다면 승패가 뒤집힐 수도 있었으며,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기까지 했으니 대통령직에 앉는 게 정당한 보상이라는 생각.

민자당이 과반을 얻지 못한 까닭은 창당 직후 총선을 치른 통일국민당의 선전에 있었고
정주영으로 표를 돌려놓으면, 정주영이 5, 600만표쯤 얻으면 김대중이 당선된다는 건 누가 봐도 명명백백했다.
박철언, 김복동이 정주영을 지지했을 때 나는 쾌재를 불렀다. 강원도 뿐 아니라 대구경북에서도 표가 깨지겠구나~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내 주변 어른들은 정주영을 지지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비방을 너무 많이 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건 정주영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가 아니라, 그 결과였을 것이다.
그때 정주영에게 표가 쏠리지 않는 원인은 두고두고 연구하고 분석할 만한 현상이다.
단지 반-김대중 정서가 김영삼으로 결집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만일 그것만이 주효했다면
정주영은 340여만표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니까.
재벌이 직접 정치에 나서는 것에 대한, 좌우를 망라한 거부감이 있었을 테고,
오랫동안 정치를 하고 고난을 겪으며 카리스마를 쌓은 양김씨를 청산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정주영이 김영삼의 표를 깎았다면, 김대중의 표를 깎는 사람도 있었다.
하루는 TV에서 한복을 두르고 나온 한 후보를 보았다.
그는 연설 도중 몸에 기름을 끼얹고 분신자살한 노동자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그가 전태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 '역사만화'를 읽어서.
그렇다. 민자당 시절에도 사회적 민주화의 흐름은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백기완 후보가 김대중 후보와 다른 편인 까닭이 궁금했다. 물론 오래 궁금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백 후보는 박찬종 후보에도 못 미치는, 꼴찌에 가까운 성적을 거둘 것 같았으므로.

친구들이랑 누가 꼴찌를 할까 내기도 했었다. 어떤 애는 이병호에, 다른 애는 백기완에, 나는 김옥선에 걸었다.
결국 이병호에 건 녀석이 과자를 먹었다.

돌아보면 3당합당으로 호남이 포위되었을 때 이미 게임은 끝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투표 당일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외숙부가 놀러와서 김영삼이 되는 판이 아니냐고 묻자 아버지는
"그래도 김대중이 이길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그 한마디가 내게는 희망이었다.

그날 MBC는 개표방송을 재밌게 한답시고 최병서의 성대모사에다가 퀴즈 코너도 개설했는데
대한민국 11대 대통령이 누구냐는 퀴즈는 아직까지도 기억난다.
10대는 최규하고, 12대는 전두환인데 11대는 누구냐는 것이다.

자고 일어나 학교에 등교하던 도중 김영삼 후보의 승리가 확정되었다는 소식이 차안 라디오로 울려 퍼졌다.
정주영은 한마디로 '조땠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수사를 받았는데, 담당검사가 나와 이름이 같아서인지
기억이 좀 또렷하다.

김대중은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기자회견장은 울음바다가 됐고 TV를 시청하던 나도 좀 찡했다.
하늘의 공평함보다는 인간세상의 세력판도가 더 세다는 걸 깨달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대통령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될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럼 나는 김영삼의 당선에 실망했었나. 그것도 아니었다.
그 역시 김대중과 더불어 박정희, 전두환에 저항했었던 정치인이었고
'정권교체'에 못지 않은, 32년만의 '문민정부'의 탄생이라는 신기원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듬해인 1993년, 김영삼의 인기는 참으로 하늘을 찔렀었다.
정주영은 찍소리 않고 바짝 엎드렸고, 김대중은 캠브리지 유학을 다녀와 아태재단을 만들었다.
4위를 했던 박찬종은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꼽혔다.

그무렵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정종식', '정권교체' 대신에 세대교체를 꿈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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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서 쓴 대선의 기억 - 1987년

Free Speech | 2009. 6. 4. 15:01 | Posted by 김수민

그해 매일처럼 TV에 아저씨 넷이 나왔다.
그들 각자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인 현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소리를 질렀다.
부모에게 물어 그것이 나라의 최고지도자를 뽑는 행사임을 알았고, 거듭된 뉴스 시청을 통해 네 후보의 이름과 소속정당을 다 외웠다.

기호 1번은 인상이 후덕해 보였다. 반면 내 눈에 2번은 불손했고, 3번은 무서웠고, 4번은 칙칙했다. 
10년이 지나서야 찌푸린 3번의 표정이 방송의 편파왜곡보도의 결과임을 깨달았다.
또 기억에 남아 있는 건 후보들의 손동작이다. 노태우 후보는 브이자를 그렸고, 김영삼은 엄지와 검지를 붙여 0을
만들고 나머지 세 손가락은 펴서 본인이 03임을 만방에 과시했다.  

호감도의 순서는, 1번, 4번, 2번, 3번 순이었다. 
나는 그래서 1번이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투표와 개표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알 리 없는 아이였기에
나는 알아서 1번이 당선되는 줄 알았다. 뿐더러 나머지 순위도 기호 순대로 정해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버이도 모두 1번을 지지했다.

2002년 대선을 지나 우리 집안에 아주 잠깐 과거사청산의 열풍이 불었다.
그해 숙부들은 노무현을 지지했고, 숙모들은 이회창을 지지했다.
막내 숙부와 숙모는 투표장에까지 가서 언성을 높이며 싸웠다. 육탄전 직전이었다.
그들은 모두 경북 지역에서 자라났으나 남자들은 정치를 생각할 시간이 있었고 여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이를 '남자의 개혁성, 여자의 수구성'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쟤들은 부부가 따로 찍는데, 당신은 그때 날 왜 말렸느냐"며 아버지에게 따졌다.

사연인즉슨, 어머니는 1987년 선거에서 김대중을 찍으려고 했었다.
물론 어머니 역시 포항에서 자란 분이고 특별히 진보적일 리가 없었다.
그는 1986년 건대 시위 화면을 보며 "학생이 공부나 할 것이지"라고 한마디해 친척 오빠들의 호응을 받기도 했었다.어머니는 직장에 취업했을 때 거듭 질문을 받았다. 성적이 좋아서 굳이 이쪽으로 오려는 이유를 회사측에서 궁금히 여겼기 때문이다. 사측은 어머니의 고향집으로 사람을 보내기도 했다. '위장취업'을 의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위장취업이란 팔자 좋은 대학생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다만 그런 어머니도 뭔가 나라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중 가장 신선하다고 느껴진 김대중에게 마음이 갔었다. 어머니가 어렸을 적 동네의 김대중 포스터는 늘 훼손되고 낙서로 뒤덮였다고 하는데, 그것이 되레 역발상을 초래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버지는 강력하게 "김대중이 되면 나라가 망한다"고 어머니를 책망했고
별다른 논리를 가지지 않은 어머니는 수긍하고야 만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은 당시 세살배기에 불과한 내 동생만을 빼고 세 명이 모두 노태우를 지지했고 두 명이 그에 표를 보탰다.
어머니가 기호 2번에 투표하기까지는 15년이라는 세월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나의 의심은 빨리 찾아왔다.

국민학교 3학년 무렵, 중립적 관점의 역사만화만 봐도 박정희가 장기집권한 독재자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전에 이미 TV에 연일 중계되던 청문회를 통해 망신당하는 전두환을 목격했다.
나는 노태우는 좀 다른 사람이라고 느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인상'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뉴스에서 "노대통령 사과해야"라는 헤드라인을 봤다.
아주 오랜 뒤에 돌아보니, 그 사건은 윤석양 이병의 안기부 사찰 폭로일 확률이 크다.
이승만만 나쁜 놈이 아니라 현 대통령도 잘못을 하고 그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어른들한테 속았을 수도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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