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석씨의 국군의날 헤프닝이 터졌을 때, 평화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사람들조차도 많이들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는 그들의 불쾌감이 이해되지 않았다. 잡다한 '이색행보'를 소재로 그가 언론지상에 출연할 적에야 짜증이 났었지만. 아마도 강의석씨를 향한 손가락질은 질투심이라는 자원을 한껏 불태운 결과이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 20대 '사회운동' 참여자 가운데 강씨는 거의 유일무이한 유명 인사다. 해묵은 정파질서에서 대장질을 하는 자나, '88만원세대' 담론에 달떠 "우리가 못난 건 사회구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그러니까 내게도 한몫 달라"는 자나 강씨에게 질시의 감정을 가지기 쉬울 것이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추후에 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강씨가 하는 것도 명백히 평화운동이고 누구도 그것을 차단할 권리가 없는데 평화운동을 어지럽혔다는 따위의 비난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러나 오마이뉴스 지면 등에서 며칠동안 강씨를 둘러싼 논란은 지루하게(어떤 사람들에게는 흥미진진하게) 진행되었다. 나무꾼 하나에 집착하여 줄거리가 <선녀와 나무꾼>인지 <도끼와 나무꾼>인지 <나무꾼의 애정행각2: 물레부인 방아찧네>인지 분간하지 못한 꼴이다. 피곤한 언쟁에 가담하기 싫어 널리 피력하지는 않았으나 나는 지인들에게 사건을 좀 더 넓게 보기를 주문했다. 군부의 쿠데타와 독재로 점철되었던 나라에서 마침내 어떤 젊은이가 군대를 폐지하자며 국군의날(어떤 나라에서 군부의 퍼레이드는 쿠데타 시도로 비화되곤 했다) 행사에서 소동을 벌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탱크는 알몸의 강씨 앞에서 멈춰섰으며, 강씨는 국정원 취조실로 끌려가지 않고 경찰에 검거돼 경범죄 스티커를 떼고 풀려났다. 이 어찌 대단한 진전이 아니랴! 나는 이 흐름 속에서 모처럼만에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느꼈다. 이렇게, 사건 주인공 일개인의 위상은 명확해지고,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비평에서도 벗어날 길은 있는 것이다.
새내기 시절 '안티조선'운동을 하면서 나는 '부정적인 사람'으로 찍히기 일쑤였다. 조선일보 말고도 반대할 것이 많은 내게, "너는 그럼 찬성하는 게 뭐냐?"는 은근한 공세까지 뒤따랐다. 안티조선운동을 한겨레찬성운동과 등치시키려는 저질적인 시도도 그 일환이다. 이런 걸 보면 네거티브 캠페인은 참 포지티브하다. 도리어 무언가를 찬성한다고 했을 때 반대자들이 더 많아지는 일이 잦다. 내가 2002년에 노무현을 민다고 했을 때, 그후에 진보정당활동을 했을 때, 나한테 "그럼 반대하는 건 도대체 뭐냐?"라고 따져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부정적'이라고 일컬은 것의 정확한 표현은 '비판적'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비판'을 어떤 의미에서 썼든 나는 틀림없이 '비판적'이 되려고 노력했다. 매사에 비판적이려고 했다. 그래야 매사에 부정적인 것을 면할 수 있으므로. 그들이야말로 '부정적'이라고 낙인 찍은 것에 대해 매사에 부정적이었다. 비판과 부정의 다름은 그 주제를 띄웠을 때 누구나 다 수긍할 만한 것이다.
비판, 날선 언어, 종종 성을 내고 인상을 쓰는 행동. 허름할지라도 망원경과 현미경을, 왼쪽 귀와 오른쪽 귀를, 어금니와 송곳니를 겸비하려는 안간힘에서 나온 것이었다. 가장 좋은 것에서도 나쁜 것을 찾는 행위는 남들에게 불편하고 신경질적으로 비쳐졌다. 그러나 나는 똑같이 가장 나쁜 것에서 좋은 것을 찾는 애를 썼다. 위에서 예로 든 강의석씨 사건 당시의 내 관점처럼 클로즈업과 롱샷을 능란하게 구사하는 인생의 감독이 나는 되고 싶었다.
에, 그러니까, 요컨대, 그랬었다고... 그랬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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