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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 : 학창시절의 끝에서 1

Free Speech | 2009. 2. 11. 15:36 | Posted by 김수민

"대학원에 다니고 있어요."
"저는 학자입니다."
이런 말을 하게 되면,
자존심이

상할 것 같다.

내가 대학원에 가지 않는 이유, 학자가 될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첫째는 공부를 못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자존심 때문이다.

오해 없길, 학자나 공부를 우습게 보아서가 아니라 그냥
나니까, 체질이, 취향이
그렇다. 공부와 되도록이면 무관한 일을 하고, 그렇게 해도 천시당하지 않는 삶을 원한다. 독재자나 무인이 학자들의 입을 막고 책을 불태우는 것을 혐오하는 그만큼이나. 

초중등학생 시절 공부 잘하는 아이로 기억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기를 쓰고 공을 차고 배구선수로 뛰고 노래를 불러제꼈던 데에도 그런 사정이 얼마간 깃들어 있었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 성적이 떨어지자 더는 그런 평가를 듣지 않아도 되었다.

새내기 시절 어떤 형이 나의 글을 칭찬한다며 기껏 하는 말이
"얘 글을 보면 듣도보도 못한 외국 지식인들의 이론이 나오고..."
나는 그후 외국 지식인들의 이론을 인용하는 것을 자제했다.  
물론 공부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처음 유뉴스로부터 요청을 받고 칼럼을 연재했을 때
어려워서 못 알아듣겠다는 독자소감은 내게 상처가 되었다.
어렵게 쓰지 않았다는 나름의 자부심이 있기도 했고,
실제로 아무리 뜯어봐야 어려운 부분이란 찾기 힘들었다. (내 생각이겠지만...)
사유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서 생긴 문제라고 스스로 위안하고 넘어갔지만,
그 이후로도 쉽게 쓰려고, 이론 인용에 기대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했다. 

그렇게 나는 정신과 몸에 먹물이 묻을까 전전긍긍하고 살았다.
그러나 단지 어떤 대학교를 나왔다는 근거 하나만으로도
나는 내가 묶이기 싫어하는 엘리트들과 동류로 취급받아야 할 것이다.
자존심이 상한다.
그러나 결국 엘리트도 아니고 민중도 아니라는
그 지점에 이르러 나의 자존심은 기우뚱거리며 바로 선다. 

물론 공부 아닌 그 어떠한 일 역시, 나의 자존심을 떠받치지는 못할 것이다. 공부보다야 낫겠지만.  

이래저래 풀리지 않는 일에 염증과 짜증을 내다가 오히려 이 기회에 잘하면 고향에 내려가 동생과 장사를 하거나 집안 소유의 땅에서 농축산업을 할 수 있겠다는, 그것도 안 되면 마음 편하게 노숙자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를 때
우연히 술집 옆자리에서 기자라는 사람들이 잰체하고 있는 것을 '조까고 있네' 비웃고 막걸리잔을 들 때
비주류, 아웃사이더, 인디가 어쩌니 하는 말로도 포장되지 않고 유령으로 취급받을 때
얄팍한 공통점을 잡아 나를 어디다 분류하는 헛소리에 "전 그 사람들과 별 상관이 없어요"라고 할 때
입바른 소리를 하고 무시를 당했음에도 나의 이력을 밝히지 않고 그저 논리와 윤리만으로 반론하며 버틸 때(이러지 못할 때도 있어 부끄럽다) 
어제 쌓은 것을 뒤로 하고 원래 원했던 것으로 향할 때
영화제를 계기로 찾게된 마을의 어느 식당에 들어가 국밥을 시킬 때
조깅을 하다 앉아서 쉬며 놀러나온 개들을 볼 때
타인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서로 엉키며 혼선이 생길 때
자기소개를 얼버무리며 대충 하고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은 채 사람들을 구경하다 자리를 뜰 때
토요일 오후의 햇살을 받은 연두빛 나뭇잎을 바라볼 때
누워서 멍 때리고 있을 때
심심해서 길에서 주운 각목에 못질을 하고 있을 때
영양가, 칼로리는 하나도 없이 섬유질만 있는 이야기로 수다를 떨 때
라면이 익어가는 것을 볼 때
내가 라면과 가스와 냄비를 공급받게 된 사회시스템이 있지만 그것이 결코 라면을 끓여 먹는 행위 전부를 포박할 수 없음을 느끼는 순간

나의 자존심은 회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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