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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국딩 시절: 학창시절의 끝에서 5

Free Speech | 2009. 2. 22. 23:27 | Posted by 김수민

지금 내 자취방에 어머니와 동생이 잠들어 있다. 국민학교 입학을 하루 앞둔 1989년 3월 4일밤처럼 우리는 한방에 있다. 그날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와 동생은 캠핑 놀이를 하고 인디언처럼 떠들어댔다. 학교에 가면... 학교에 가면, 이런 걸 할 수 있으리라. 나는 엄청나게 들떠 있었다. 20년이 지나 학교는 지겨운 이름이 되었다. 학교체제의 문제를 떠나, 20년이면 충분히 그럴 만한 세월이다.  

첫 짝궁으로 인해 학교에 대한 환상에 처음 금이 갔다. 입학 전에 이미 대면하여 쉴 새 없이 수다를 같이 떨었던 그. 유복한 집안환경에 허여멀건하니 잘생긴 그에게 도벽이 있을 줄이야. 연필 너댓자루 중 하나는 내가 덤벙대서 잃어 버렸다지만, 집에 갈 즈음 남은 건 두세자루밖에 없었다. 몇차례 피해를 입은 나는 하루는 그에게 지우개를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먹히지 않자 그의 필통을 책상 서랍에서 끄집어냈다. 그렇게 투닥거리다 필통은 떨어져 파손되었고 혀처럼 낼름 튀어나온 필통의 일부분에 내 분실물, 아니 도난물이 들어 있었다. 지나가던 급우들은 나를 비난했다. 그리고 나는 며칠 지나 입학 이후 최초로 주먹질을 했고, 결국 국민학교 1학년 한해동안 작은 깡패가 됐다.

첫 받아쓰기 시험에서 100점을 받았다. 100점을 받은 기쁨은 며칠만에 사라지고, 다음에도 100점이어야 한다는 늪에 빠졌다. 난, 지금도 그렇지만, 산만한 아이었다. 하루는 담임 교사가 어머니를 호출했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해야 한다." 어머니는 집에서 담임 교사와 상담한 내용을 적은 쪽지를 내게 보여주었다. "다 좋은데 집중력이 떨어진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업태도가 좋은 학생이 되었고 그런 이미지는 사오년을 갔지만, 본질적으로 그 변화는 연기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떠들지 않음으로써 교사에게 책 잡힐 빌미를 제공하지 않는 법을 배웠을 뿐이었다.

어떤 여학생을 좋아했다. 외삼촌은 그걸 갖고 국민학교를 졸업하는 그날까지 날 놀렸다. (지금은 내가 그의 자제들을 놀린다. 그놈들이 이제 중학생임에도. 죽을 때까지 놀리리라.) 아뿔싸, 국민학교를 졸업하던 날, 내 졸업선물을 고르러 백화점에 들른 외삼촌은 드디어 그 여자아이와 마주쳤다. 어머니가 그앨 외삼촌에게 소개하기 전, 그러니까 멀리서 그앨 발견하자마자 나는 화장실로 튀었다. 그 아이는 5학년 때 나를 좋아했었다 한다. 그러나 1학년 때는 관계가 반대였다. 1학년 7반 남학생 열명쯤은 걜 좋아했다.

담임 교사는 내 마음을 빤히 알면서도 나를 그녀와 짝지어주지 않았다. 나의 두번째 짝궁은 반에서 가장 공부를 못하는, 뚱뚱한 여자애였다. 그녀석은 시험점수는 나빠도 꽤 조숙했다. 가요톱텐을 반드시 시청한다는 점에서는 나와 같았고, 박남정과 이승철을 좋아했다. '즐거운 생활' 시간, 종이를 찢어 붙이기 위해 가져간 잡지책의 겉표지 여자 사진을 보고, 녀석은 연극적인 말투로 짐짓 우는체했다. "흙흙, 나 말고 다른 여자를..." 당시는 정말 황당무계했지만 돌아보면 정말 재밌는 녀석이었다.

입학했을 무렵 학교는 포화 상태였다. 1학년 7반과 8반은 오전-오후반 시스템으로 별도의 간이건물을 같이 썼다. (지난 주 외사촌동생-내가 놀린다는 바로 그들 중 하나-의 초등학교 졸업식에 갔더니, 세상에, 그 학교의 1학년 전학급은 컨테이너 교실을 쓰고 있었다. 외사촌동생은 "국내 유일"이라며 떠들었다. 20년이 지나도 이 모양이냐. ) 우리는 다른반 아이들과 마주칠 일이 적었다. 나를 포함한 네 사내아이가 낑낑거리며 급식우유를 나를 때 다른반 급식배달조와 마주쳐서 신경전을 벌이고 서로 야유를 보내던 기억이 전부다. 대신 우리는 쉬는 시간을 운동장에서 보냈다. 교실 뒤편 모래밭에서 곧잘 닭싸움을 했는데, 이상하게도 담임 선생님이 지켜보고 있으면 꼭 졌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그해 코피가 자주 터져서 담임 교사의 걱정을 산 적도 있다. 어쨌든, 가끔 쥐가 나오는 교실이었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지명제에 따라 반장, 부반장이 결정되었다. 투표로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담임 쌤은 지명하기 전 학생들에게 의사를 물어보았으니까. 나는 좋아하던 여자아이와 함께 부반장이 됐다. 반장인 친구는 나와 같은 동네에 살았고, 그의 아버님은 아버지의 직장 동료다. 그는 착실하고 속깊은 친구였다. 그러나 요즘 그는 취업란 때문에 대학 졸업을 미루어 나보다 한학기 늦게 졸업한다는 후문이다. 60명 들어가는 국민학교 교실에서 부대꼈던 우리는, 서른이 가까워진 지금껏 이 모양 이 꼴이다. 그의 어머님은 6년 전쯤 병원에서 우연히 뵌 적이 있다. 그때, 아이고, 그분이 내게 돈을 -절절한 눈빛까지 보내시며- 손에 꼬옥 쥐어주시는 게 아닌가. 명절날 만난 고모나 이모도 아니시면서. 우리는 이런 어른들, '도덕적 개인들'(?)과 함께 비도덕적 사회를 살아내고 있다.  

그때는 '포도알 붙이기'라는 게 있었다. 숙제를 잘하거나 선행을 하면 포도알 모양의 종이를 1~3알 받아 집에 있는 포도송이 그림에 붙였다. 포도송이를 완성하면 상을 받았다. 나는 간발의 차이로 2등에 그쳤다. 아쉽고 분하였고, 이를 5월 8일 어버이날에 효행 표창장을 받은 것으로 풀었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어머니 약심부름을 몇번하고, 어디서 본 건 있어서 머리에 찬수건을 올려드렸던 것이 소문이 난 귀결이었다. 지나고 나서 보면 다 쓰잘데기 없는 상들이었다. 내가 국민학교 4학년이던 해, 어머니는 포도알을 둘러싸고 몇몇 학급에서 진행되던 촌지 주고받기를 이웃 아주머니께 제보받은 직후 교감에게 항의전화를 했고, 포도알 제도는 드디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어머니는 이렇게 끝장을 보는데, 나는 대학에 들어온 후 언론운동이고 정당활동이고 좀처럼 지리멸렬을 면치 못하였다.)

사촌동생이 내달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나는 예전부터 나처럼 국민학교 입학 전야에 흥분했다가 10년, 20년을 마음고생하는 학생들이 마음에 걸렸고, 그 덕택에 대학에서는 교육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전공 성적도 시원찮고 딱히 교육운동에 참여한 적도 없다. 지난 목요일 졸업가운을 받아오면서 단과대 게시판에 붙은 명단에서 이름을 확인했다. 나 같은 놈에게 교사 자격증을 두개나 준단다. 나의 첫 담임 선생님이 어떤 분이었는지 새삼 궁금하다. 남들보다 뒤늦게 대학에 가서, 밤새서 줄넘기를 연습하는 근성을 발휘해 국민학교 교사의 길에 들어섰다는 그분. 그분이 종업식날 전근 인사하며 울던 순간, 우리는 모두 따라 울었다.

내일 졸업식은 대학생활의 마지막이 아닌 학창시절의 마지막으로서 큰 의미를 가진다. 허울 좋은 대학생활을 제쳐두고 그에 앞서 12년간 펼쳐진 국 중 고등학교 재학기간에 한없는 위로와 애정을 보낸다. 그리고 국민학교 입학 전야에 캠핑놀이를 하던 그 아이는, 내가 꿈에서나 타임머신 여행에서 만날 수 있다면, 살포시 안아주고 싶다. 마이 미안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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