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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가든 친가든 가풍이 학문과 그리 밀접하지 않다. 육촌 범위 내에서 보자면 한학자였던 외증조할아버지만이 예외가 될 것이다. 외증조모는 책상물림인 지아비의 경제적 무능에 환멸을 느껴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1969년경 돌아가신 나의 외할아버지는 문맹자였다.

할아버지의 일본인 담임선생은 똑똑한 제자를 일본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증조부는 반대했고, 답답하고 서글퍼진 할아버지는 마당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할아버지는 결국 중학교에도 가지 못했다. 나는 증조할아버지의 반대 사유가 단지 곤궁한 집안사정 때문인 줄로 알았는데, 얼마 전 할아버지로부터 또다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중학교 가면 빨개이가 많다 캐서." (할아버지네 마을은 한국전쟁 때 최후방어선이었던 곳과 가깝다. 그 빨갱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중학생 시절의 아버지는 라디오방송국에 엽서와 편지를 즐겨 보냈다. 그의 글은 계속해서 방송을 탔고 여학생들의 팬레터가 쌓이며 급기야 출연으로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상세히는 모르겠으나 거의 방송인이 되는 분위기 속에서 할아버지가 반대하고 나섰다. 나쁜 길로 빠질까봐서 그랬었단다. 물론, 이렇게 대물림된 억압의 근간에는 일개인의 아집과 성격보다는 시대적 배경과 사회경제적 처지가 두껍게 깔려 있었을 것이다.

나의 부모는 명문고를 다녔으나 대학에는 가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마지막 억압은 학력주의로부터 나왔다. 여기서의 학력은 學歷과 學力을 모두 포괄한다. 나는 전자의 학력주의로 인해 현실교육체제와 그 경쟁구도에 휘둘렸으며, 책상에 지긋이 앉아 있는 것이나 먹물티 내는 짓을 싫어하는 성격은 후자의 학력주의에 억눌렸다. 아예 처음부터 자녀들에게 1등을 기대하지 않는 상당수 가정의 편안함도, 명문대를 나온 일부 부모들이 자녀교육에서 보여주는 여유도, 집안에는 없었다. 대신 공부하고 좋은 학교에 가지 않으면 패자가 된다는 노파심이 가득차 있었다. 내게 자녀가 있게 될 확률은 미미하지만, 어떻게 되든 가족사에서든 전사회적 차원에서든 나는 학력주의의 억압을 끊어내려고 크고 작은 노력들을 기울일 것이다.

사실 대를 이은 노파심의 고리는 내가 대학에 들어온 이후 너덜너덜해졌다. 나의 부모는 내가 위험해지기 쉽상인 처지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나 내 주변의 사람들이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내가 위험스러운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스무 살 넘어 단 한번도 나의 덜미를 잡지 않았다. 이 역시 시대적 배경과 사회경제적 처지 때문이를 수도 있지만, 그분들의 이니셔티브가 없었다면 그런 진전은 이뤄지지 못했을 테다. 졸업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부모님께 감사한다.

오늘 상경한 어머니와의 대화. "20년 학교를 다녔는데, 역시 공부는 체질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네 동생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렇고, 공부하는 걸 체질적으로 싫어하데."  아, 전통과 관념보다 딱딱하고 굵은, 유전
의 파이프 라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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