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신당
우라사와 나오키
근현대사2 백넘버 27
촛불
미친 놈, 돈 놈, 얼빠진 놈들
내한공연
위닝 11
라디오 스타
청춘의 십자로
2009
12월 26일 7차까지 치닫는 술자리 도중에 안경을 잃어 버렸다. 덕분에 나는 게으른 몸을 이끌고 진작에 했어야 할 새 안경 맞추기에 성공했다. 다소의 감기 기운을 단 채 12월 28일 또 거센 술자리를 가진 뒤, 29일과 30일 몸살로 앓아 누웠다. 그 덕택에 나는 집에 머물며 한 해를 조용하고 성실하게 정리할 시간을 가졌다.
12월 26일 7차까지 치닫는 술자리 도중에 안경을 잃어 버렸다. 덕분에 나는 게으른 몸을 이끌고 진작에 했어야 할 새 안경 맞추기에 성공했다. 다소의 감기 기운을 단 채 12월 28일 또 거센 술자리를 가진 뒤, 29일과 30일 몸살로 앓아 누웠다. 그 덕택에 나는 집에 머물며 한 해를 조용하고 성실하게 정리할 시간을 가졌다.
1. 진보신당
28일에는 다름아닌 민주노동당내에서 신당 창당을 풀무질했던 몇몇 분들을 만났다. 우리는 회고하였다. 올 초는 정말 하루가 일주일 같았다고. 그때가 '올해'의 범주 안에 든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나는 민주노동당에 입당할 적부터 운동권정파의 연합으로 탄생한 이 당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깨져야 한다는 지론을 품고 있었다. 사실 2006년 가을, 북핵사태와 일심회사건을 기점으로 갈라섰어야 했다. 유예된 분열은 2007년 대선을 계기로 눈앞에 성큼 다가왔다. 이른바 신당파는 종북주의 청산과 당내 패권주의 심판, 대기업정규직노조 중심성 타파를 역설하였고, 한편 심상정 비대위를 중심으로 한 혁신파는 이 문제의식을 부분적으로 떠안고 민주노동당을 손질하고자 하였다. 양쪽의 괴리는 벌어지기 시작했지만, 결국 신당파가 탈당을 가시화하고 혁신파는 2.3당대회에서 좌절하면서 양쪽은 함께 민주노동당을 탈당했다. 여기에 당밖에 있던 진보적 대중이 합세하면서 진보신당이 탄생했다.
총선 투표일 아침, 집을 나서는 내 뇌리에는 '2.9'라는 숫자가 둥실 떠 있었다. 서대문지역에서 선거운동에 결합하면서 진보신당의 낮은 인지도와 정치 자체에 대한 유권자들의 철저한 무관심을, 2004년 총선과는 전혀 다른 정치환경을 절감했던 차였다. 이내 그 생각을 떨쳐 버렸지만, 실제로 정당명부 득표율은 2.94%에 그쳤고 지역구 생환자는 전무했다. 나는 이것이 자당의 실력이며 세인들의 선택임을 인정하고 유감 없이 받아들였다. 2000년 총선에서 만일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출했다면 내분과 자충수, 무능으로 단명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하고 있었다. 어쩌면 진보신당이 걸어갈 원외의 가시밭길은 축복일 수도 있다.
나는 민주노동당을 떠나 진보신당으로 가면서 비단 자주파만이 아니라 여러 '경향'들과 헤어지고 싶었고 그 뜻을 이루었지만, 반대급부로 민주노동당 전력이 없는 새내기 당원들 몇몇의 입에서 나오는 희한하다 못해 폭력적인 언사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지금도 나는 그들이 성찰하고 공부하면서 성향을 바꾸거나, 당을 떠나야 한다고 확신한다.
오래 전부터 2008년 총선을 기점으로 정치참여를 줄이기로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보다 한결 나에게 더 가까워진, 더구나 어려움에 처한 당을 전혀 모른체할 수는 없었고, 죽을 때까지 아마추어 시민으로서 작게나마 한 가지의 일은 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현재 서울시당 교육위원이다.
2. 우라사와 나오키
<20세기 소년>을 시작으로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에 빠져들었다. 일단 그의 그림체가 보기 편하고 마음에 쏙 들었다. 나오키의 특징은 일본에 머무르기를 거부한다는 데 있다. <20세기 소년>은 그나마 덜한 편이고, 이외의 여러 만화들이 서유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평자들은 그의 작품이 서구지향적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몬스터>는 서구지향성을 마지막에 반전시킨다. 유럽을 배회하던 인물들이 시골마을에 모여들어 '끝장'을 보는 설정에 나는 매료되었다. <20세기 소년>의 전권을 구입한 나는 곧 <몬스터>를 사들일 예정이다.
그 다음에는 <마스터 키튼>, <해피>, <야와라!>, <파인애플 아미>는 물론 단편선인 <지고로!>, <나사>, <춤추는 경찰관>까지 섭렵했다. 단편의 서사는 허술하거나 허무한 감이 있었지만, 예술가의 초기작을 통해 후일에 나올 걸작의 맹아를 엿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사흘 전에는 <플루토> 6권을 읽었다. 그간 나오키의 만화에 대해 영웅주의적이거나 결말이 전개에 비해 약하다는 느낌을 가졌다. <플루토>에서도 영웅은 등장하지만 그들은 한낱(!) 로봇에 지나지 않는다. <플루토>는 <몬스터> 이상으로 충격적이었다.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고 또 궁금하다.
3. 근현대사2 백넘버 27
5월 모교에서 교생실습을 했다. 똥개도 자기네집 앞마당에서는 점수를 따고 시작한다고 한다. 매우 편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졸업하지 않은 학부 재학생이 학원이 아닌 학교의 교단에 서는 방법은 교생실습밖에 없다. 나는 한시적인 특권을 마음껏 누렸다. 나와 함께 실습한 두 선생님은 교육학과 학생인 나와 달리 사범대에서 공부한 분들이이라 나보다 이론과 실전 양면에서 교수법에 더 익숙했다. 물론 나도 무대 체질(?)이고, 중고교 시절 친구들이 밝힌 '교사는 이래야 한다'는 의견을 여지껏 기억하고 명심하고 있는 터라 강의를 곧잘하는 편이었다. 우리는 서로 많이 배웠다.
교육현장은 많이 변했고 특히 학생들의 면모가 크게 달라졌다. 나는 이 활달한 학생들과 5월의 학교축제, 체육대회를 함께했다. 2학년 5반 학생들은 내게도 유니폼을 맞춰 주었다. 등짝에는 이름대신 '근현대사2'라고 적혀 있었고 백넘버는 27번이었다. 자기네 담임 선생님 겸 근현대사 담당선생님에게는 '근현대사'와 '35'가 적힌 유니폼을 드렸다. 담임 선생님은 '35'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계시다가 체육대회가 끝난 뒤 회식자리에서 내 유니폼을 보시고서야 "아니 이 녀석들이!"라며 뒤늦게 탄식하셨다.
교생실습에 막 들어가기 직전 서울에서 촛불시위가 터졌다. 구미역에서도 주말에 집회가 있었다. 축제를 맞아 펴낸 교지의 만화에도 '이명밥'이라는 등장인물이 등장했다. 대통령이나 정부 정책을 비난하는 만화가 아니었음에도 교장 교감 선생님은 그 이름을 지우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수업 중 시중 근현대사 교과서들의 차이점을 잠깐 학생들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어떤 교과서든 fact에 어긋나는 것은 없거나 별로 없다고, 오히려 진보색이 뚜렷하다는 평을 받는 교과서일수록 더 사실에 충실하다고 부연해주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각자의 시각과 가치관에 달려 있다는 이야기를 했으며, 내친 김에 민족사관, 계급사관, 젠더사관 등을 두루 살피면서 '개인'의 삶을 규명하고 추구하는 것이 옳다는 견해를 피력혔다. 물론 나는 학생들에게 어른들 이야기에, 또 자신의 역사교과 성적에 괘념치 말고 각자가 관심있는 시대와 분야를 정해 역사에 관심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지금 그들은 근현대사교과서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고 있는 갈등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교생실습을 마치고 나는 한때 교사임용을 준비하기로 작심한다. 교직이 내 적성에 잘 맞을 것 같았다. 이 순간에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내게 맞는 일이 있음을, 있을 수 있음을 알아차리면서 나는 변심하였다.
4. 촛불
교생실습을 마치고 6월 초 상경한 나는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린 6월 10일 처음으로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나는 꿈보다 더 좋은 해몽에 끼기 보다는 깊은 꿈에 빠지는 길을 택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나의 요구는 어청수 파면이나 강만수 해임이 아니라, 이명박 퇴진이었다. 집회에서는 새롭게 다가오는 뭔가가 있다고 착각하기보다는 그동안 미뤄지고 유보되었던 것들이 다시 모이고 있을 뿐이라고 느꼈다.
나는 시위대오 맨 앞에 있었다. 6월 하순 폭력진압이 노골화되는 것을 '칼라TV'로 지켜본 뒤 거리에 나온 탓도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가 가장 편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대오의 중간이나 뒷쪽에 서 있으면 별의별 꼬락서니들을 많이 목격하게 된다. 아는 사람들은 안다. 이 와중에서도 일어나는 뻘짓을, 그걸 하는 이들이 누구인지를. 나는 운동권정파와 유약하고 '선량'한 시민들을 뒤로 하고, 제일 앞에서 분노자들과 '밥풀떼기'들을 만났다.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교육학 문제지를 사자마자 나는 물대포를 맞았다. 문제지는 흠뻑 젖었지만 대충 말리면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이튿날 나는 또 물대포를 맞았다. 나는 노무현이 대통령할 때도 맞았단 말이다! 두껑이 완벽하게 열려 버렸고, 교육학 문제지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교원임용 준비를 취소했다.
5. 미친 놈, 돈 놈, 얼빠진 놈들
이명박 해볼 테면 해보자는 심정으로 모처에 글을 올렸다. 천주교에서 집회를 하던 날의 시가행진을 담은 사진도 하나 첨부했다. 그런데 아마도 사진이 늦게 뜨는 현상 때문인가, 그 글을 읽고 착각하는 인간이 생겨났다. 자신을 겨냥한 줄 알았던 것이다. 낚인 놈들은 난파선의 쥐새끼들처럼 허둥지둥거리기 시작했다.
올 초에 예전에 알고 지냈던 미친 놈 하나를, 워낙 불쌍한 인간이라, 간신히 참아가면서 상대해준 적이 있었다. 그 미친 놈은 미친 짓을 하다가 도저히 수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믿고 비빌 구석이 생겨 버려서 '히트 앤 런' 작전을 펴기 시작했다. 다른 놈 하나를 물고서. 그 놈은 돈 놈이 되었다. '돈 놈'은 내 앞에서는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이면서 오바까지 해 가면서 나를 다독거리는 척하더니, 돌아서서 바로 모략을 일삼기 시작했다. 나는 그럴 줄 알았고, 돈 놈은 도망칠 수 없게 걸려든 셈이었다.
미친 놈과 돈 놈은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분별할 줄 몰랐다. 이 둘은 맥놀이를 일으키면서 거짓말을 만들어냈고, 한쪽은 그런 적 없다 다른 한쪽은 그 얘긴 저쪽이 했으니 나한테는 책임을 묻지 말라면서 2인3각모드에서 별안간 줄다리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관계된 얼빠진 놈들이 생겨났다. 그중 한 놈은 이 자리에서 욕이었던 것을 저 자리에서는 "그냥 의문을 표했던 것"이 둔갑시키고, 남에게는 "그건 이러이러하게 해석될 수도 있다"면서 막말을 뱉는 한편 자신의 언행에 대해서는 "그런 뜻으로 한 게 아니었다"고 둘러대는 완벽한 이중잣대를 세워댔다(이런 인간이 형사나 기자가 되면 생사람 여럿 잡는다).
사실 그들끼리도 침을 뱉은 셈이지만 나 하나를 공적으로 삼으려는 의도에서였는지 참으로 어이 없게 서로서로 그럭저럭 넘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퍼뜨리는 헛소리의 주인공이 된 나로서는 사적이거나 온정적인 해법은 무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허위사실이 유포된 범위와 명예훼손의 정도를 체크하기로 했고, 그 전에 사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검토하였다. 그러나 이후에 들 정신적 시간적 소모에 관해서도 같이 검토할 수밖에 없었고, 미친 놈, 돈 놈, 얼빠진 놈들이 비실비실 자취를 감추면서 일단 사건을 손에서 놓기로 결정했다.
이 사건으로 깨달은 것은 누군가가 잘못했다고 아무리 침이 튀긴들 그것을 특정한 자리에서만 몰래몰래 지껄이는 사람은 반드시 의심해야 한다는 이치였다. 정녕 진실이라면 그렇게 행동할 수는 없다. 이건 쥐새끼 같은 수작이고 공작일 뿐이다.
만에 하나 이 놈놈놈들이 여전히 숨어서 몰래 헛소문을 퍼뜨리고 있다면 나는 향후 10년간은 그 입에 내 이름을 올리지 못할 만큼의 강경책을 구사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윤리적 가치를 논하기에는 거짓말을 너무 많이 했고 심지어 '미친 놈'의 경우 공갈까지 했다. 옛말에 미친놈은 상대를 하지 말라 했는데, 이게 다 내 불찰이다. 그렇지만 내 불찰이라고 해서 내가 멍에를 다 떠안을 필요는 전혀 없다.
앞으로, 이 놈놈놈들은 내가 가는 길 근방에 아예 나타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6. 내한공연
4월 토토가 왔다. 내가 듣는 음악들의 평균치보다 소프트하긴 하지만 그들의 연주를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9월엔 주다스 프리스트가 왔다. 내 생애 최고의 내한공연이었다.
토토와 주다스 프리스트의 내한공연 참가기는 블로그에 이미 썼으니 자세한 소감은 생략한다. 둘 다 '내한공연'이라는 태그에 속해 있다.
12월 13일 익스트림 내한공연에도 가려고 했는데 여러 일이 겹쳐서 발걸음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rocknew 자게에 올라온 후기를 읽고 후회가 막심하였다..
7. 위닝 11
취미생활을 좀 가져 보고자 취한 삶의 옵션. 고향 집에서 열심히 연습했다. 하지만 한 가지 해결 못한 게 있는데 승부근성 부족이다. 왠지 이기면 상대를 밟은 듯한 느낌이 든단 말이지. 자꾸 박빙으로 이기는 쪽으로 가려고 하는데, 그럴 때면 순식간에 두세골을 먹고, 후반에 가서 승부근성을 부랴부랴 불태우게 된다.
최근 들어 위닝방에 발걸음이 뜸했는데 어느새 위닝 2009가 도입되어 있다. 두 차례 해보고 든 느낌은 게임이 한결 빡세졌다는 것이다. 얼른 적응해야겠다.
내년엔 당구와 볼링을 배울 작정이다.
8. 라디오스타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난 TV를 적게 보지만 주요 예능프로는 가능한 챙기는 편이다. 시시껄렁하게 보기 시작했지만 그중 나를 많이 웃기게 된 것이 <라디오스타>였다. 이 프로는 함께 '황금어장'에 속해 있는 <무릎팍도사>에 기생하고 있다는 자의식을 대놓고 표출하지만, 언제부턴가 <라디오스타>가 <무릎팍도사>보다 더 재미있어졌다. 김구라와 신정환의 입담도 입담이지만, 예능계 늦둥이 윤종신과 골반춤으로 단박에 슬럼프를 만회한 김국진의 활약도 눈부셨다. 서로 갈궈대고, 게스트의 얼을 빼놓고, 급기야 게스트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상황을 연출하고, 이따금씩 '보이는 라디오'라는 음악토크의 성격을 회복하고... 때로는 <무릎팍도사> 때문에 아주 짧은 시간만 방송을 타는 굴욕을 당하기도 한다. 얼마 전 크리스마스 특집에서는 밴드연주를 소재로도 얼마든 웃길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그런 능력 때문인지 라디오스타 진행진은 음악프로를 하나 더 맡게 되었다.
2008년 9월, 노트북의 오디오 기능이 고장났다. 한 친구를 불러 대책을 강구하였지만, 그의 진단으로는 메인보드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단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나는 노트북을 고치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티비를 보지 않게 되면서, 나는 자연스레 라디오로 이동하게 되었다. 현존하는 프로의 거의 모든 컨셉트가 마음에 든다. <배철수의 음악캠프>, <격동 50년>, <최양락의 재미있는 라디오>, <두시 탈출 컬투쇼>, <세계음악기행>, <유희열의 라디오천국>, <박경림의 별이 빛나는 밤에>, <이소라의 오후의 발견>, <이정식의 올 댓 재즈> 등등을 시간나는대로 애청하고 있다. 사이버 DJ 윌슨이 진행하는 <올 댓 차트>도 무지 웃긴다.
9. 청춘의 십자로
내가 꼽은 2008 올해의 영화. 일제시대에 나온 무성영화이지만 변사 조희봉의 힘으로 부활하였다.
난... 설명 길게 하고 싶지 않고, 못본 사람만 불쌍할 뿐이고!
10. 2009
자칫 황량할 수도 있었던 올해를 2009년을 준비하면서 뜻깊고 보람있게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의 준비란 그저 마음으로 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나는 실질적인 작업으로 대비를 하였고, 조금씩 성과를 거두고 있다. 내가 준비한 이 일들이 분명 내년에 내가 써넣을 '10대 키워드'에 튼튼하게 박힐 것이다.
2008년에 돌아본 나의 2007년은 참으로 끔찍하였다. 하지만 2009년의 끝에 난 2008년을 뿌듯하게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출처: 상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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