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되면 아버지와 나는 같은 입장이 된다. "정치는 안한다~" "저 정치인한다는 이야기 한번도 한 적 없는데요."
얼마 전 한 카페에 진보신당 탈당의 변을 올렸다. 어느 분이 화를 억누르면서 나를 비판했다.
그럴 만했다. 탈당의 이유를 상세히 밝히는 대신, 나는 정치세력 내에서 벌어지는 인정투쟁을
쉽고 원색적인 용어로 비아냥거렸으니 말이다.
헌데 다른 내용은 이해하지만 한가지는 용납하기가 힘들었다.
"직업적 정치꾼이 되어 다시 만나면" 어쩌고 저쩌고...
내가 정치인이 되고자 했다면 다음의 두 갈래 길 중에 하나를 선택했을 것이다.
1) 철저히 이미지 관리하면서 사람들이랑 잘 지내기.
노회찬 선본 일할 적에 한 보좌관이 "총선이 잘 되어서, 김수민씨가 일할 자리가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선거 파장나던 날에는 노회찬이 내게 "자네가 출마할 날이 오면 내가 선대본부장 해줄게"라고 했다.
하다보니 깊게 들어가 버렸고 한발 더 내디디면 완전히 몸담게 될 수도 있는 타이밍이였다.
하지만 나는 선거가 끝나는 즉시 여의도에서 줄행랑을 쳤다.
그리고 이곳 저기를 다 치받으면서 살다가 탈당을 맞이했다.
누가 나를 미워해 매장시키겠다고 덤벼봐야 그건 길가다가 축구공에 맞는 것보다 위협이 안 된다.
내가 거기 이해관계가 걸린 게 없는데 뭐 어쩌시겠다고.
내 친구 중에 지역에서 정치를 하는 애가 있다. 모 학교 비운동권 총학생회장도 했고
한때 장관이었던 열린우리당 추병직 밑에서 일했다.
중학교 때부터 그 친구를 봐왔는데, 그때부터 리더 기질이나 사교성이 있었다.
그 친구가 부족한 게 이념이나 정책이긴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런 사람이 직업정치를 하지, 나 같은 사람은 할 수 없다.
2) 현실정치 가담을 훗날로 미루고, 교수든 기자든 PD든 변호사든 벤처기업인이든 전문직종으로 진출하려고 공부하고 스펙 쌓기. 잘되면 진중권이나 조국이나 손석희처럼 말이다.
진보주의자란 사람들도 이런 쪽한테는 꼼짝을 못한다.
또 한국의 유권자들은 선거 후보의 직업 중 '정당인'을 가장 낮게 치므로(그나마 신장식이나 정현정 같은 분들이 똘똘한 유망주로 평가받는 건 학벌이라도 있기 때문이고), 정치를 하려면 저런 길로 둘러가는 게 현명하다.
활동을 직업적으로 하더라도 정당은 불리하다.
(권노갑의 그림자, 이훈평은 2000년에 386 임종석과 함께 금뱃지를 달았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내가 그렇게 살 이유가 없기 때문이며,
그렇게 산다고 내가 능력을 갖춘다는 보장도 전혀 없고,
정치인이 될 일도 없다.
직업정치꾼 운운한 분께 묻고 싶다. 내가 그걸 하려고 한다고 해도, 과연 되겠느냐고.
좁은 집단에서도 씨알이 먹히지 않는 인간이 어디 가서 그걸해.
내가 명색이 좌파집권연구라는 걸 하는 컨설턴트인데 그걸 모를까봐.
버마 같은 데 가서 게릴라활동을 하고 돌아오지 않는 한 말빨이 먹히지 않을 것이다. ㅋ
내가 해온 일들은 한국사회에서 딱 오해를 받기가 좋긴 했다.
고3때 노사모에 가입해서 대2때 개혁당 해보고
제대 후에 민노당에 들어갔다가 졸업반일 때 진보신당 만들었다.
(왜 자꾸 왼쪽으로...;; 이러다 만델주의자까지 가겠다는 생각도 가끔 들었다.
이젠 지금보다 왼쪽으로 갈 일은 없을 것 같다. 오른쪽으로 갈 일도 없을 것 같고...)
이런 정치참여는 모조리 정치지망으로 오해를 받았고
어디 당원이다, 어느 후보를 돕고 있다,고 밝히면 다 그에 맞는 근거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정치적 결단을 때때로 내리면서 변동사항도 적이 있다 보니 헷갈리는 사람도 많고,
친척 중에는 내가 아직 '노사모'인지 아는 사람도 있다.
어머니는 민주노동당에 입당한 후에도 친척에게 내가 노사모 때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런 오해를 더 부추기기도 했다. (내 말이 어디서 인용되는 걸 극히 꺼리는 성향은 가족사에 원인이 있다.)
내가 한창 칼럼니스트 활동을 할 때 내 모든 글을 스크랩하고 읽었던 아버지라고 해서
내 입장을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니다.
또 거기에 자식 자랑이 섞이다 보니, 소문이 그렇게 날 수밖에...
아버지는 내 글에 악플이 달리는 것을 좀 아시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개무시를 당하는 입장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들의 정치적 입장이 자신과 적대적이지만, 그나마 그걸 용인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들이 뭔가 대단한 위치에 서 있다고 있다고 짐작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같은 당에서 만난 사람들도 내가 정치에 깊숙하게 개입하려고 하는 줄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건 내가 얕보인 탓도 있을 것이다. "쟤가 아는 건 저거밖에 없는데 하려고 하지 않겠어?"
하지만 나 같은 감각을 가진 분들은 일반인 중에도 많다.
왜 동네에도 한명씩은 가방끈 별로 안 긴데 말 한마디 한마디에 통찰력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내 경험으로는, 이런 분들이 임노동자보다는 상인이나 장인 같은 쪽에 주로 있는 것 같다.)
나도 어려서부터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정치인이나 지식인이 아니라.
다만 고등학교 때 공부도 못했는데 무슨 특기자라 해서 어찌어찌 서울에 올라와서
가까이서 경험해 보는 귀중한 기회를 얻었을 뿐이었다.
나는 한시적이고 부분적으로, 또는 특정한 영역에서 워커홀릭 증상을 내보이는 사람인데,
내가 정치를 하려고 했다면 정말 부지런히 한시도 늘어지지 않고 했을 것이다.
그간 오해를 불사하고 활동을 해왔지만,
언제나 오해는 피곤했고 될수록 피하거나 방지하려고 애를 써왔다.
이제는, 그럴 일이 없을 것 같다.
그것 땜에 탈당한 건 아니지만.
간혹 또래의 젊은이 중에 "정치를 업으로 삼겠다" "대중활동가가 되겠다"는 지망생들을 본다. 진보신당에도 몇몇 있다.
하지만 내가 밀어주고 싶은 사람은 한명도 없다.
그들의 공통점이라면 뻔하고 속보인다는 거. (좀 교묘하게 하는 요령을 모르나?)
허나 있을 때나 떠났을 때나 이들을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요즘 어떤 일에 관한 것을 배우면서 관련자들을 만나고 있는데
세상이 참 넓다는 것을, 가까이에 있는 눈꼴시린 이들은 적도 뭐도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괜한 오해만 받으면서 의도치 않게 꼴아박아왔던 인생을 벗어나,
오히려 더 큰 싸움과 더 큰 성취를 얻는 길로 들어서게 되어 다행이다.
모든 이해는, 오해다.
'Free Speec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렇게 된 이상 (0) | 2009.05.07 |
---|---|
불자로서 올리는 말씀 (0) | 2009.05.02 |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0) | 2009.04.24 |
대통령의 아들내미 (2) | 2009.04.10 |
달력도 안 보는 남자 (2) | 2009.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