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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일

Free Speech | 2009. 9. 17. 11:17 | Posted by 김수민
1.
고3이었던 2000년 이맘때, 나는 입사원서를 썼다. 가세가 급격히 기울고 나도 대학에 들어갈 의지가 줄어들면서 바로 사회로 나가야겠다는 궁리를 했다. 내가 응모한 곳은 모 음악잡지사였다. 나는 음악 기자가 되려고 했다. 학력에 관계없이 음악과 영어 중 하나만 능하면 자격요건이 충족되었다. 실은 둘 중 하나도 갖추지 못했음에도 무식해서 용감한 나는 원서를 썼고, 그쪽에서 요구하는 장문의 평론을 썼다. 모집인원은 미정이었고 결과는 0명 선발이었다. 하지만 나의 당돌함(?)을 높이 산 편집부는 전문을 잡지에 게재했다. 그 직전에 아버지가 병석에서 일어나 일터로 나갔고, 그 다음날 나는 대학에 붙었다. 사실 문학 때문이 아니라 음악 때문에 대학에 간 셈이다. 내가 당시 쓴 글은 대부분은 주제가 록음악이었다.

조금 더 마음을 굳게 먹었다면 대학생이 되어 상경한 뒤 그 잡지사와 교류를 하면서 음악평론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 '평론'이라는 건 컴플렉스였다. 자존심이 상했다. 더구나 상대는 음악이었다. 고교 시절 내게 음악평론은 밴드가 해체되고 난 뒤의 소일에 불과했다. 그리고 나는 특정 장르만 반복해서 들었고, 2000년대 초반은 내 귀를 잡아끌지 못하는 음악들이 유행했다. 1990년대 중후반에 대학생활을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답도 안 나오는 한탄만 되풀이했다. 그러면서 나는 음악평론과 멀어졌다. 10년이면 사람이 크게 바뀐다. 요즘 들어서는 다양한 음악을 들으려 애를 쓰고 공부도 하지만 평론은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다만 '록 보컬 평론'에는 아직 관심이 많다. 또 한국사회는 노래방이 아무래 성행해봤자 여전히 보컬의 불모지니까. 그런데 최근 '보컬 열전'을 블로그에 못 쓰고 있어서 갑갑하다.

2.
내가 대학에서 운동을 할 거라고는 내 고교 친구들도 몰랐고 대학 동기들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짜증나도록 무료한 시절이 다가온 신입생 봄날, 나는 달리 할 일이 없어서 <조선바보>에 들어갔다. 마침 만들던 밴드가 날아가버린 시점이었다. 이듬해에는 유뉴스에 칼럼을 연재했고 그러면서 글쓰기는 일이 되었다. 유뉴스 덕에 대학 학보사 청탁이 곧잘 들어와 돈도 짭잘하게 챙겼다. 게다가 2학년이었던 2002년은 일감이 참 많은 시기가 아니었던가.

워낙에 빈재라 군대 갔다와서도 했던 일을 이어갔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밴드 일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그랬구나. 여기서 내가 후회하는 대목이 있다. 단체활동이랑 칼럼 가운데 하나만 선택해야 했었다. 나의 선택은 사회에도 자신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 하는 말이다. 하나만 택하기가 껄끄러우면 둘 다 그만뒀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둘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 나름으로는 굉장히 최선을 다했다. 덕분에 얻은 것은 오해였다. 그 바닥에도 'FA 최대어'라는 표현이 있다. 졸업하면 여기저기에서 부름을 받을 것 같은 이를 일컫는 것이다. 누가 나더러 그런 단어를 들먹였지만 나의 처세는 그 반대였다. 돌아오자마자 유뉴스 편집부에 일러둔 일성부터가 이랬다: "무차별 폭격을 할 겁니다."(나를 전혀 통제하지 않은 편집부에 또 한번 경이를 표한다.) 유뉴스 독자 가운데는 NL 사람들이 많았는데, 버젓이 노골적으로 NL을 까대는 내 글이, 그것도 기획위원 명의로 실렸다.

2007년 초 편집진이 바뀔 때 유뉴스는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전직 편집자는 내게 서운함을 토로했다. 내가 앞으로 주도해 주리라는 기대를 가졌었다면서. 그때 나는 글쓰기 작업에 나선 걸 후회했다. 괜한 기대감을 심어주었다. 내가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내내 사나운 공격에 나선 비결 중 하나는 글쓰기를 그만둔다는 입장이 확고했던 데 있었다. 하지만 지켜 보는 사람들은 오히려 반대로 저렇게까지 하는데 영영 하지 않을까 추측했다. 교육학과 가면 선생되는 줄 알고 정외과 가면 정치인 지망생인 줄 아는 이런 사회에서는 찬물도 조심스레 마셔야 한다.

2006년경에는 글쓰기를 업으로 삼지 않겠다는 결심이 섰다. 하려고 해도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판단도 함께였다. 기고 청탁이 줄어든 게 무엇보다 행운이었다. 괜한 욕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었다. 누가 자꾸 추켜올리면 스스로를 읽는 눈이 흐려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기고보다는 투고가 훨씬 즐거운 작업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장정일 코드 혹은 화두>라는 책에 실린 장정일의 한 단상을 읽어보길.)

3.
대학 당국의 특기자 정책 실패의 한 사례가 바로 나다. 특기자 프로그램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진단도 있지만, 나의 경우 특기자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없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다. 성적 올리기가 버거운 나로서는 기숙사 자치회 활동으로 주어지는 근로장학금 이외에 유일하게 장학금이 나오는 건수였다. 창작 말고 필사만 해도 잘하면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문제는 마침 당시에 있었던 '문학권력' 논쟁이었다. <조선바보>는 조선일보 비판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벗어나, 학내 문제, 특히 교수권력을 타겟으로 삼고 있었던 차였고, 2002년 마광수 해임을 둘러싼 연세대 국문과 사태가 터졌다. 11명의 연구자가 대학원을 떠났고, 그 학과의 동창들끼리 벌인 알력 다툼도 극심했다. 사태의 주역인 국문과 김철 교수의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 학내 언론들은 비판을 하지 않거나 기사화했다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하여 덕분에 간 부은 <조선바보>와 내가 특종을 주워먹었다. 조금 특이한 건 그를 비판한 사람 가운데 나만 고소의 위협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함께 사태에 접근하던 <말>지 기자나 자퇴한 대학원생 모두 신기해 했다.

나는 문학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행태에 경악했다. 젊은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게시판에만 가도 꼴사나운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문학하는 사람들이랑은 되도록 어울리지 않겠다, 어울려도 한두명 개별적으로 만나지 절대 그 바닥과는 교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동시에 매우 자연스럽게 국문학을 전공하겠다는 계획도 접었다.  

새내기 시절 가을에는 참 열심히 문학평론을 읽었다. 이론보다는 문체를 탐닉했다. 평론이 소설보다 명문장이 더 많았다. 나는 백낙청보다 김현, 김병익을 훨씬 좋아했다. 과 친구들은 내가 무슨 민중문학을 하려고 한다는 오해를 했지만.("요즘 무라카미 하루키를 재밌게 읽고 있다"고 하면, 그쪽 애들은 의외라고 했다), 그때 함께 조선바보를 했던 ㅇ형은 "쟤는 창비보다는 확실히 문지야"라고 했다  내가 존경하는 조세희, 최인훈의 소설도 다 문지에서 나왔다. 물론 그 문지라는 것도 옛날 문지지 요즘을 가리키는 건 아니겠지만.

하지만 내가 음악평론을 대하는 태도는 문학평론에도 적용되었다. 나는 픽션을 창작하고 싶었다. 김현이 아니라 조세희처럼 되고 싶었던 것이다. 국문과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이론 공부에도 흥미를 잃었다. 그러나 이래저래 엉뚱한 글을 쓰느라,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 다 놓쳐버린 꼴이니, 만약 글쓰기를 업으로 삼겠다는 사람이면 이 전철을 조금도 따라 밟아서는 안될 것이다. 나는 글쓰기에 흥미도 떨어졌고 이걸로 뭘 해먹겠다는 계획이 없으므로 상관 없지만 말이다.

4.
아주 오래전에 소설이랑 희곡 아이템 잡아둔 게 있는데 도대체 언제 쓰나. 기약이 없다. 직업이 아니라서 겪는 현상이다.

나는 내가 보기 좋은, 그러면 그냥 그걸로 땡인 픽션문학을 쓰기를 바란다.

5.
얼마 전에 정치칼럼 중단 원칙을 한번 어겼다. 노무현 지지자들에게 한미FTA반대를 호소하면서였다. 너무 절박하고 가슴에 한이 남아서 썼다. 오늘도 버스 안에서 FTA광고를 듣고 눈깔이 뒤집혔다. 함부로 예외조항을 적용하면 안되는 걸 알지만, 눈 한번 감고 썼다.

근래 들어서 고민을 조금 했다. 블로그에 쓰나 웹진에 쓰나 별 차이가 없는데 절필이란답시고 발표를 하지 않는 게 의미가 있는가. 슬슬 다시 쓸까 저울질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첫째, 쓰기가 싫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내 공간에서 지껄이는 거랑 나름의 의무감을 갖고 기고하는 거랑은 다를 수밖에 없다. 둘째, 분명히 나는 약속을 했다. 2006년에 계획을 밝혔고 2008년에 중단을 선언했다. 셋째, 써봐야 무소용이다. 나는 내게 동의한다는 사람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칼럼니스트가 아니라 블로거와 씨부리머로 존재하는 것이 더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내게는 시장바닥이나 사랑방이라는 공간이 없으므로 불가피하게 인터넷을 택했고 어쩌다 웹진까지 갔을 뿐이었다. 평론가가 되는 순간 내것은 증발된다. 최장집 한명보다는 김수민 백명이 낫고, 유창선 열명보다는 김수민 한명이 낫다. 담론권력이 아니라 평범한 장삼이사의 발언으로 대중 속에 섞여들면 그만이다. 더구나, 칼럼으로 접근하고 끌어들인 사람보다 내 삶과 일상으로 설득한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아마 전자는 실상 0명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게 동의한다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내 글을 퍼가는 사람은 더 믿지 않는다. 자기 마음에 드는 특정 구절만 쏙 뽑아 읽고, 그걸 부각하는 짓에 질렸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폭탄을 끼워놓는다. 퍼갈이가 어떤 구절을 미치도록 이용하고 싶더라도 마음에 안 드는 구절 때문에 결국 퍼가지 못하도록.

6.
돌이켜보면 나의 글이란, 말을 앗긴 자가 임시방편으로 택한 도구였다. 정치적인 차원에서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수구꼴통, 김대중-노무현주의자, NL 정도겠지만, 비슷한 포지션에 있는 사람에게도 눈총을 받는다. 그들과 마주칠 때 항상 듣는 말은 "아, 그 글 많이 쓰는 사람?"이다. "많이"라는 말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렇게 많이 썼을까? 다름이 아니라 할 말이 많은데도, 어리다는 이유로, 볼 것 없는 외모를 가져서, 무식해 보여서 또는 직함이 없어서, 패거리를 거느리지 않아서, 발언권에 언제나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쩌다 주어진 자리, 작정하고 나간 자리, 손 들면 얼마간은 발언권이 돌아오고 공방까지 벌일 수 있는 자리에서는 언제나 '달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글을 잘 못쓰는 탓이겠지만 글 잘 쓴다는 말보다는 말 잘한다는 말을 훨씬 더 많이 들었다. 한때는 자만에 차서, 어떤 이를 달변이라는 평가하는 걸 들으면, 일일이 다 콕 찍어 지적해주면서 "저걸 달변이라고 하는 걸 봐서 당신은 언어감각에 문제가 있다"는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질러주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어딘가에서 한바탕 말을 잘하고 나면, 발언권에 더 큰 제약이 생겼다.(씨밤바들아 혹시 듣고 있다면 똑바로 들으라,고 굵은 글씨로 처리한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재갈을 물리겠다는 의지를 내가 못 읽었을 리가 없다. 심지어 한편처럼 여겨지는 이들도 그랬다. 내가 글을 쓰는 건 좋아하지만 내게 말할 기회가 돌아가는 건 꺼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의 말폭탄만큼은 해체하고 싶었던 것 같다. 대신 '글쓰는 사람'이라는 자리를 천형처럼 뒤집어 씌우려 했다. 글은 말보다 통제하기 쉽다.

내게 글은 말을 얻기 전에 참으면서 흘린 신음들이다. 이제 신음을 쓰지 않으련다. 입으로든 키보드로든 말을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안 그래도 활자가 너무 지겹다. 부득이하게 자판을 쳐야 한다면, 구어가 거리가 먼 '글쓰기'라고 할지라도, '글'을 '쓰고' 있다는 느낌이 내 자신에게는 들지 않게끔 할 것이다. 조촐히 진행하는 인터넷 라디오방송의 오프닝 원고를 쓰는 게, 아이디어 때문에 힘들기도 하지만, 아주 재미가 있다. 그것은 글이 아니라 말을 쓰는 일이다.

옛날 글쓰기에 쏟았던 만큼의 고민을 말을 하는 일에 쏟아 나간다면 재미 뿐이 아니라 의미까지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구조적인 병폐는 조금도 못 고치더라도,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불의에 맞서 싸우기에는 확실히 도움이 될 것이다. 그 편이, 별 쓸모도 없는 행위를 벌이면서 이미 설득된 사람을 또 설득하여 제 잇속을 챙기기보다는 훨씬 아름다운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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