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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은 PD와 작가의 분리

전파낭비 | 2009. 6. 11. 16:12 | Posted by 김수민

"라디오 진행 몇년쯤 하셨어요."
"6,7년쯤 했습니다..."
"아 그래요? 그 프로는 작가 없어도 되겠네."

요즘 도는 대화내용이다. 라디오도 풍전등화인 것 같고, 간판투수인 쇼프로는 어쩔 수 없으니 일단 시사교양부터 정리하는 모양이다. <6시 내 고향>도 작가 없이 진행중이란다. KBS 'PD집필제'가 빚어낸 풍경이다. 한국방송작가협회가 성명을 낸 이래 MBC, SBS, EBS의 프로그램에서 일하는 작가들도 연대에 동참했다. 이동이 잦은 작가들의 보이콧은 예사롭지 않다. 비정규직 및 프리랜서 노동자로서의 저항권을 실현한 셈이다. 물론 반대로, 남들이 마다한 자리 얼른 채어가야 하는 작가들도 생겨나겠지만. 그러나 이 사태를 초래한 불안정노동 말고도, 근원에 자리잡은 기성 분업체계의 한계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PD와 작가들이 함께 PD집필제를 놓고 대담한 <미디어오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원고 쓰는 PD가 반드시 유능한 것은 아니다. 훌륭한 PD라도 글 못쓰는 PD 많다. 경쟁력 있는 PD는 프로그램 보는 눈이 있고, 스텝의 역량을 최대한 이끌어낼 수 있는 PD다."
- 김주영 한국방송작가협회 KBS사태 비상대책위원


김주영씨의 지적은 현재 한국방송의 현실에는 부합한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 기능주의적 관점을 안고 있다. 방송원고는 시나 소설이 아니라 '말'을 적는 것이다. 특별한 미문을 요구받지도 않는데도 자신의 방송에 나갈 글을 쓰지 못하는 PD를 원론적으로 훌륭하다고 볼 수는 없다. 자신이 직접 쓰지는 않더라도 작가의 원고를 검토할 역량이 있다면 자신이 쓸 수 있는 역량 또한 있을 것이다. 작가들과 함께 PD집필제 반대에 나선 PD들도 PD의 집필참여 자체에는 긍정적이다.

"PD가 글 쓸 수 있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나 <풍경이 있는 여행>처럼 1인 제작 시스템도 있다. 하지만 이는 PD집필제와는 다른 차원의 얘기다. 글 쓰는 문제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가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추진하는 이른바 PD집필제를 반대하는 것이다."
- 김덕재 KBS PD협회장

"PD집필제 시행의 가장 큰 이유는 제작비 절감이다. PD들 놀면 뭐하나 이런 시각도 있다고 본다. 물론 일부 PD가 써도 무방한 프로그램이 있다. <아시아 투데이>의 연출을 맞을 때 집필을 한 적이 있는데 이 프로그램은 PD가 현장에서 부딪혀야하기 때문에 현장에 다녀온 PD가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이번 PD집필제로 PD들의 일이 많이 늘었다. 섭외부터 구성, 가원고, 자료조사까지. PD가 다 알아서 해야 한다.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누적되면 힘들 수 있다. 맡고 있는 <역사추적>도 이번 주부터 집필을 하게됐다.
장점도 있다고 본다. 사실 PD들이 게을렀던 부분도 있다. 작가한테 맡기는 경우도 많았다. 개인적으로는 PD가 모든 것을 다해야 하기 때문에 더 꼼꼼하게 보게 된 것이 사실이다."
- 나원식 <역사추적> PD 



사람들이 흔히 예상가능한 원고작성은 물론, 아이디어를 내놓고 계속해서 촬영화면을 체크하는 등 작가들은 방송에 누구보다 깊이 개입해 왔다. 시사교양프로의 경우 촬영현장에 동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PD보다 확실히 낮은 위상을 가질 수는 없다. 굳이 따지면 작가는 내근 PD고, PD는 현장작가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지상파 방송에서, 명문대 나온 사람은 취업공부해서 PD로 입사하고, 작가는 '스펙'에 관계없이 도제 시스템을 밟아 프리랜서 및 비정규직으로 활동했다. 방송 전반을 궤뚫는 두 직종은 서로 배우고 수렴함에도 양자의 과정과 결과가 판이하다. 그리고 어김없이 비정규직은 쫓아내고 정규직은 혹사시킨다는 전형적 구도는 PD집필제를 통해 관철되고야 말았다.

꼭, PD보다 훨씬 많은 작가 인력을 되도록 정규직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PD를 프리랜서화, 비정규직화하자는 이야기도 아직은 꺼낼 계제가 아니다. PD와 작가의 업무와 노동형태에 관한 기존의 관념을 잊고, 현재 프로그램에서 맡고 있는 작업과 앞으로 요청받을 임무를 따져보자는 것이다. PD와 작가는 다른 직종인가? 다른 직종이어야 하는가? PD집필제를 하려거든 PD에 작가가 포함되는 '작가의 PD화'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 (물론 여기엔 방송분야의 정규노동과 비정규노동 전체의 재편이 뒤따라야겠고.) 이런 노력이 단순무식한 인력 정리보다는 훨씬 프로그램의 질 향상에 바람직하게 작용할 터이다.  

듣자하니 남은 작가들은 자신들의 원고보다 몇시에 무슨 일정을 소화할지 계획표를 써내는 쓸데없는 데 더 골머리를 앓는다고 한다. 현 대통령은 후보 시절 선거유세에서, 참여정부를 두고 "일을 참 못해요"라고 했다. 누워서 침뱉기격임을 스스로 아는지, 그 말은 방송사 사장한테는 못하는 것 같다. PD도 원고를 쓸 수 있으면 좋다. 이점에서 나름 경영진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머리 맞대기의 창조성을 깨닫지 못한다. 재벌과 신문, 방송, 검찰과 경찰이 머리를 맞대지 않았다면 MB 버라이어티쇼도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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