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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에 해당되는 글 1

  1. 2008.07.02 국무회의여, 문제는 금성판이 아니라 뉴라이트판이다
 

나는 지난 5월 한 달 간 교육실습생으로서 <한국근·현대사>를 가르쳤다. 공교롭게도 그때 손에 든 교과서가 금성출판사의 것이다. 국무회의 석상에서 교육과학부 장관과 국무총리의 입담 위에 오른 바로 그 교과서다. 그들이 떠든 바와는 달리, 이 교과서는 남한의 새마을운동을 균형적으로 소개하였고 북한의 천리마운동이 지닌 한계를 비추었다. 그러나 현행 역사교과서를 향한 색깔공세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앞으로도 멎지 않을 것 같다. 더욱이 금성교과서에는 일찍부터 ‘친북좌파’의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사실이 좌파적이라면, ‘우익’은 거짓말쟁이?


  금성판 교과서는 좌파적인가? 일제시대 독립운동 서술에서 사회주의계열의 활동을 ‘제대로’ 비추고 있기는 하다. 이 교과서는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유입된 사회진화론의 위험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식민 지배를 (···) 인정하게 될 가능성도 컸다. 일제는 민족운동을 타협주의, 개량주의로 유도하는 데에 (···) 이런 속성을 이용하였다.”(203쪽) 이른바 ‘타협적 민족주의’ 또는 ‘민족개량주의’의 후계세력에게는 불편한 진실이다. 특히 1924년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을 게재하면서 (독립투쟁을 포기한) 자치론의 불씨를 지피고, 일제 말기에는 전쟁에 협력했던 <동아일보>에게 더욱 그럴 것이다.

  금성판은 좌파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적이다. 이 교과서는 일제의 통제가 강화된 이래 노동운동이 사회주의자들과 연결된 비합법 조직인 혁명적 노동 조합의 형태로 전개되었다고 밝히고 농민운동도 비슷하게 서술하였다. 그런가 하면 사회주의계열 민족운동가인 정종명을 여성 운동의 대모로 조명하였다(212-217쪽). ‘부르조아 민족주의자’들 다수가 훼절하거나 침묵했던 시대, 사회주의운동이 독립운동의 중추가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금성판 교과서가 과연 ‘친북’적이기는 한가? 금성판은 김일성이 이름을 떨친 ‘보천보 전투’를 거론하였다. 두산출판사의 교과서에는 없는 내용이나, 이를 두고 ‘브라보’를 외쳤다가는 한승수 총리 꼴이 될 것이다. 이어지는 문장: “그러나 국내외 학계에서는 (···) 북한의 역사 기술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비판과 논란이 있어 왔다.”(196쪽) 금성판은 또 주체사상이 “김일성 개인 숭배를 합리화하고, 반대파를 숙청하는 구실로 이용되기도 하였다”며, 주체사상이 “쇼비니즘”이고 “편협”하다는 북한 방문자들의 술회를 옮겨 실었다(302쪽).   


  아마 자칭 우익세력의 눈에 거슬린 대목은 따로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금성판은 일제의 신문 강제폐간을 다루며 “이미 친일 언론으로 변질된 동아 일보, 조선 일보마저”도 폐간되었다고 서술하여, 현존하는 막강 언론사의 과거를 짤막하게나마 들추어냈다(154쪽). ‘역사찾기’라는 별첨자료에서는 문인, 예술인, 기업인, 경찰, 교육인의 친일활동을 분야별로 다루기도 했다(164-5쪽). 


  수업시간 말미 이따금 시간이 남을 때 나는 금성판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을 학생들에게 전해주었다. 학생들이 가장 진보적이라는 또는 친북·좌파적이라는 지적을 들은 제 교과서를 새삼 들추어 보는 동안, 나는 흑판에 'Fact'라고 썼다. 동아일보가 신탁통치 소식을 왜곡 보도했다거나, 북한에서 친일파를 청산하고 토지를 개혁했다거나, 한국전쟁 이전에도 38선에서는 크고 작은 충돌이 벌어졌다거나, 베트남전쟁에서는 그 특수의 이면에 베트남인과 한국군의 큰 희생이 있었다거나 하는, 금성판 교과서의 여느 역사 서술도 모두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왼편에 몰아넣는 행위는, 오른쪽에 서 있다는 자신이 거짓의 편이라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뉴라이트의 자유민주주의와 탈민족주의는 껍데기 뿐


  금성 교과서의 대척점에는 뉴라이트단체인 교과서포럼이 낸 <대안교과서 근·현대사>가 있다. 초반부부터 조선후기사회가 근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다는 취지로 ‘소농사회론’을 꺼내어 기존 교과서가 전제하는 내재적 발전론 또는 자본주의 맹아론에 맞선다는 점이 이 교과서의 굵직한 한 특성이다. 이에 대해서는 논쟁의 소지와 필자의 지적 한계를 인정하여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동학농민운동이 ‘유교적 근왕주의’에 따른 복고적 개혁운동이라는 견해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넘어간다(참고로, 유영익 교수가 펼쳐온 이 주장은 진보 성향의 박노자 교수도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어 또 다른 논쟁을 빚어내기도 했다).


  이 책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단원은 (전체 분량의 2할에 불과한 개화기와 대조적으로) 절반에 육박하는 비중을 차지하는 해방 이후 현대사이다. 이 교과서의 현대사 서술은 곧 정치적 헤게모니 투쟁이며, 이승만이라는 아버지에 노골적으로 줄을 대고 있다. 가령 뉴라이트 교과서는 이승만 정권기의 농지개혁을 “신생 한국이 정치적으로 안정되는 데 크게 이바지”하여 농민들이 “6.25전쟁 이후 북한의 선전 공세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충실히 남아 있었다”(146쪽)며 호평하였다. 또 민주주의는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낯선 정치제도였다면서도 이승만 정권기에 민주주의 자체가 유보되거나 후퇴되는 일은 없었다고 잘라 말한다. 잘못된 것은 시대적 한계와 국민의 수준 탓이며 잘된 것은 이승만·자유당을 비롯한 위정자들의 노력에 의한 산물이라는 투다. 


  이들은 대한민국 성립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선택”(148쪽)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찾지만, 5.16 쿠데타를 설명할 때는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을 손쉽게 내팽개친다. 박정희가 한국전쟁 와중에 쿠데타를 모의했다거나 4.19로 인해 쿠데타 계획이 무산되었다는 것은 드러나지 않은 채, 결국 5.16쿠데타는 “도덕적 멍에”를 안았지만 “군인 특유의 추진력과 실용주의적 방식으로 경제발전을 추진”하였던 “근대화혁명의 출발점”(181쪽)이었다고 미화되었다.   


  특이한 점은 5.16 군정이 초창기에 실시한 부정축재 기업가에 대한 구속과 벌과금 부과를 ‘미숙한 경제정책’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기업가의 구속과 처벌로 경제사정은 오히려 악화”되었다는 이야기다(183쪽). 군사쿠데타의 역사적 의의를 지지하지만, 국가주의보다 재벌식 자유지상주의에 기울어져 있다. 조갑제보다는 복거일과 더 친화적이다. 또 이 교과서는 한국의 대표적 기업가로 이병철과 정주영을 꼽았으나(223쪽), 재벌기업가들이 직접 자행한 시장경제의 굴절은 부각시키지 않는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머리말에서 탈민족주의를 공언했음에도 통치이념으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휘둘렀던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해서는 너그럽기만 하다. 물론 뉴라이트의 민족주의는 ‘우리 민족’ 대신 ‘한국인’을 입력한 결과로, 좀 더 명확하게는 ‘국가주의’라고 부를 만하다. 흔히 민족주의가 비판받는 커다란 이유 두가지는 배타성과 획일성인데, 이는 국가주의에서도 그대로 또는 더 심하게 나타난다. 그래도 국가주의가 민족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국가주의든 민족주의든 내셔널리즘을 극복하지 않고도 탈민족주의를 외칠 수 있을까?


  이 국가주의는 호오를 떠나 북한을 국가 또는 체제로 인정하는 데에도 매우 인색하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북한 정부의 수립에 대해,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의 역할을 무시하고 스탈린의 지시만을 부각시킨다. “스탈린의 나라가 된 한반도 북부”(281쪽)라는 거친 표현에서는 과거 북한을 ‘괴뢰’라고 부르던 반공지상주의의 메아리가 들린다. 그런데 정작 주체사상에 대한 관점은 참 오묘하다. 황장엽의 주체사상은 점차 김일성의 절대권력을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주체사상의 저작권이 황장엽에게 있다고 단정 지으면서 그를 김일성으로부터 분리시킨 셈이다. 

 

   실증주의가 아니라 싫증주의


  뉴라이트 교과서는 집필진들의 ‘본분’ 탓인지 정치투쟁 뿐 아니라 학술전쟁에도 거침이 없다. 그들은 경제학자 박현채의 견해가 일부나마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으로 스며들었음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서, 박현채가 김대중에게 건넨 대중경제론이 실현불가능하거나 성급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고 비판했다. 남한 정치세력 내부의 모순과 미국 때문에 한국전쟁이 발생했다는 ‘수정설’이 설득력을 잃었다고 한 반면, 오로지 북한의 남한적화와 기습남침에만 골몰하는 ‘정통설’의 단점은 비판하지 않았다. 강만길이나 최장집처럼 민족주의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인 성향이 농후한 지식인들이 참여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혁명론에 입각했다고 소개되기도 했다.


  “철저한 실증주의를 지향”(5쪽)했다는 자부가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건 비단 이 책에 가득한 역사투쟁의 화염병 때문만이 아니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사실관계의 오류’들의 전시장이다. 비전문가인 필자도 별도의 참고문헌 없이 한번의 정독만으로 숱한 잘못을 발견했다. 고종의 즉위년도는 1863년이 아닌 1864년으로 표시되었다. 사진 속의 박영효에게 홍영식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었다(홍영식은 그 사진을 찍을 무렵 이미 세상에 없었다). 민비도 명성왕후도 명성황후도 아닌 민왕후라는 호칭이 등장했다. 1908년 공표된 사립학교령은 졸지에 두해 앞당겨졌으며, 경성제국대학은 설립 이듬해에 설립되었다. 여수·순천사건은 여주·순천사건으로 표기되었다, 두 번씩이나. 1973년부터 1992년까지 남북의 공식적 접촉은 한번도 없었으며, 공창이 성매매방지특별법이 마련되기 직전까지 있었던 걸로 처리되었다. 어쩌면 철저한 실증주의라는 머리말의 구절부터가 오류 또는 오기일지도 모른다.  


  뉴라이트 교과서의 집필자 가운데 역사학자가 없다는 일각의 지적은 올바르지 못하다. 여기엔 더러 영역을 침해당한 역사학자들의 불쾌감이나, 독자적인 가치관보다는 전공 학문에 따라 학설을 달리하는 경향이 엿보이기도 한다. 경제학자나 윤리교육학과 교수라고 해서 역사책을 쓰지 말라는 법은 없다. 다만 뉴라이트는 교과서의 독자가 상품구매자나 ‘정치업자’가 아니라 공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이라는 단순한 기본을 저버렸을 따름이다. 그들의 문제는 비전문성이 아니라 비윤리성이다. 


  교과서 집필의 출발 지점은 명료하다. 모두의 가치관을 충족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만인이 곱씹고 생각할 수는 있는 재료를 제공해야 한다. 하기야, ‘싫증주의’를 유발하는 뉴라이트 교과서도 그런 재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풍자나 해학의 소재로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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