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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

Free Speech | 2008. 7. 11. 14:44 | Posted by 김수민

생일 모임을 가져본지도 오래되었다. 작년 생일 겪은 언짢은 일이 기억난다. 그날 난 모처에 첫 출근(?)을 해서 모처럼만의 격무와 옆자리 동료 때문에 짜증이 났던 차였다. 그럼에도 6시가 되어 부푼 마음을 안고 퇴근했는데 그만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한강변에 가자고까지 했던 잉간이 언제 그랬냐는 듯 약속을 파토내 버린 것이다. (재작년 생일에도 약간은 별스러운 일을 경험했다.)

이번에 나는 세사람을 초청해 정겹게 놀기로 했다. 당분간 힘든 고향 친구들과의 만남은 뒤로 미루고, 서울에서 만난 고마운 사람들부터 불렀다. 고마운 사람이 어찌 셋뿐이랴. 다만 인원과 참석자간의 면식을 고려해 세명을 뽑았다. 자주 만나지 못하여도 또는 핏대올려 싸워도 나는 결코 당신들을 허투루 여기지 않는다는 수줍고 조용한 고백이기도 했다.  

과 선배 L. 그와의 학연은 깊지 않다. 내가 입학한 직후 그는 학교를 떠나며 학사장교로 임관했다. 나는 01학번이고, 그는 2000년도 단과대 학생회장이었다. 새내기 때의 나는 학생운동을 하는 사람과 쉽게 가까워지면서도, 처음 예상대로 생각이 다르다는 걸 깨닫고 마음 속으로 약간 거리를 두고는 했다. L형에 대해서도 얼마간 그랬다. 이후 한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이듬해 친구의 전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내 글을 두고 악평했다는 내용이었다. 뿐더러 내가 새내기 시절 썼던 글보다 나아진 것이 없다고도 했단다. 그무렵 나는 일부 독자들의 공격적인 평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그러려니 했다. 그만큼 나는 원래 L형과 별로 친화적이지 않았고, 그저 '아 형은 이러저러하니까 내 글이 당연히 고깝게 보이겠지..'하는 심정이었다.  

그와 가까워진 것은 내가 군복무 중간중간에 휴가를 나오면서부터였다. 술자리에서, 또 인터넷게시판에서 의견을 주고 받고 또 공감을 나누기도 했다. 내가 지워놓은 틀에 L형은 없었다. 그가 변한 점도 있겠지만 내가 만든 틀은 애초부터 정확하지 않았다. 내가 하는 말에 그가 동의를 표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놀랐다. 내가 복학하던 당시 L형은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는 당시 투쟁 중이었다. 민족해방투쟁, 노동해방투쟁이 아닌 제 삶의 영역에서의 투쟁. 그 원동력은 선의라기보다는 회의였고, 그는 언제 어디서나 비판하고 성찰하기를 멈추지 않는 듯하였다. 그가 운영하는 개인클럽 이름처럼 그는 '고독한 싸움꾼'이었다. 신중하고 사려 깊은 싸움꾼. 나중에 알았지만 L형은 특정 정파에서 학생운동을 할 적에도 내부에서 철저한 소수자이고 소신파였던 모양이다. 진영 논리에 찌든 세태에 염증을 느끼던 나는 그의 외로운 싸움과 비판에 몰래 환호하였고 커다란 위안을 얻었다.  

사실 그는 한때 불치병을 앓았고, 내 입대 전후즈음에는 병원에서 생활했다. 난 앞으로 그를 볼 수 없을 줄 알았지만, 다행히 그는 다시 일어났다. 그가 새 삶을 시작한 일자가 내 생일과 겹치거나 내 생일의 언저리에 있다는 이야기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잠시 기자로 활동하였던 L형은 이제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또다른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잘되었으면 좋겠다.

동료 U. 같은 학교 04학번이다. 복학하고 나서 뜻맞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다 2005년 가을경 그를 만나게 됐다. 그는 채플 출석을 거부하고 있었다. 응원하는 자는 있어도 따르는 이는 없는 고독한 운동이었다. 그와 만나고 2주일 또는 한달쯤 지나서였나, 나도 채플에 불참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와 꽤 많은 것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그중 상당 부분은 비밀에 부쳐졌었다. 학내에서 학술네트워크를 만든다거나 채플 자율화 캠페인을 함께한다거나 하는 것들은 가시적으로 드러난 움직임에 속했다. 우리는 사실, 지금에야 털어놓지만, 소위 NL도 PD도 아닌 진보적 학생들을 규합하는 일을 기획하고 있었다. 가능하면 학생회 선거까지 나서기로 하면서. 정작 후보로 내세울 적임자가 없고 역량과 자원이 달려 포기하기는 했지만 말이다(나는 집 화장실에서 학생회 구조개편안을 불태웠다). 그후로는 조금 떨어져 움직였다. U는 언론출판협의회라는, 실체는 분명하지만 잘 돌아가지 않는 기구를 맡으면서 바쁜 동시에 속이 썩어나갔다. 내가 그해 총학생회 선거를 보이콧하자는 대자보를 중앙도서관 앞에 걸었을 때도 그는 함께하지 못했다. 총학생회 선거 토론회를 관장하는 위치에서 중립을 지켜야 했으니까. 그리하여 내 이름 하나만 대자보 명의에 걸리게 됐다.

우리 둘을 가까이서 지켜보던 한 지인은 "두사람은 (학교) 바깥에 나가면 좀 각광을 받지만 안에만 들어오면..."이라고 한마디한 바 있다. 아마 그게 얼마 되지도 않는 역량을 축내면서도 우리 둘이 가까워진 이유일지 모르겠다. 새로 등장할 세대에 희망을 걸어야 할 만치 사유가 맞는 동료 학생을 잘 찾지 못했던 나로서는 그와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객기'는 있어도 극악단순한 사고방식을 급진주의라는 미명으로 드러내는 버릇이 없었다. 그는 실무에서나 공부에서나 노력파였고 실력파이다. 다만 비위 맞춰주지 않는 말버릇이나 현장이나 집회에 참여해 얼굴을 알리는 노력을 게을리한 것이 그를 격하시킨 요인이 되었을 뿐이다. 그가 변치 않고, 또 끊임없이 변하면서, 제 진가를 인정받게 되길 바란다.

몇달 전 나는 그에게 채플 출석을 권유하였다. 그는 수용했다. 나도 곧 뒤따라가 들어갈 작정이다. 우리는 이 열패감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바꾸고자 했던 것을 뒤늦게라도 바꿀 것이다.

K형. 나보다 두살 위고 학교는 다르다. 7년 전에 같은 활동을 하면서 만났다. 그는 동음이의어 활용 같은 썰렁개그의 달인이었다. 그래서 첫 만남은 좀 곤혹스러웠다. 또 무지막지하게 잘 외우고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박람강기가 돋보였다. 움직임도 참으로 왕성하여 그가 없으면 일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았다. 그런 덕택에 어떤 이들은 그를 부담스러워하기도 했다. 특히 일하지 않고 말만 많은, 밥상 펴면 나타났다 설거지하면 사라지는 부류의 사람들이 그랬다. 물론 그의 습성에도 다소 문제가 있었다. 학생회 활동을 하던 시기 그는 툭하면 하루에도 몇번씩 동료 간부에게 전화를 걸어대기도 했다니. K형은, 예전보다는 꽤 나아졌지만, 완급 조절이나 분위기 파악이 좀 서툴다. 몇달전 나는 그에게 "어떤 화제나 이슈를 급하게 들이대듯 꺼내서 상대방이 흥미가 떨어지게 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6년 전 내 인간관계가 좁아지면서 그와 더 가까워졌다. 불행 중 다행인 셈이다. 입대하던 나를 배웅하러 온 사람이 두명이었는데, 하나는 어머니고 다른 하나가 그였다. 내가 복무하는 동안, 그는 무려 12학기만에 학부(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과학사 협동과정)에 들어갔다. 석사과정을 4학기만에 산뜻하게 매듭지은 걸 보아하니, 이제 공부는 그에게 천업이 된 듯하다. 그의 졸업논문은 <식민지시기 조선인 생물학자 성장의 맥락>으로, 조복성이라는 곤충학자를 중심으로 쓰여졌다. 지금은 전공을 약간 틀어 STS(과학기술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방송통신기술이 주요 관심사인데, 이 분야에서 그가 일가를 이루는 모습을 난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그가 공부하는동안 시민사회운동이 입은 손실은 적지 않다,고 난 감히 장담한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그는 우리 또래에서는 단병호급, 박원순급, 최민희급이다. 머리 회전이 빠른 데다가 손발도 그만큼 빠르다. 그런 그가 활동가의 길을 당분간 접고 연구자의 길을 택한 것이다. 나는 그의 선택이 언젠가 거대한 이득으로 사회에 돌아오리라고 믿는다. 물론 그때까지 나와 그는 또 숱하게 다투어야 할 것이다. 지금껏 그는 자주 내가 언성을 높여 싸우는 맞상대가 되었다. 모름지기 사람은 싸워야 친해지는 법이다.

어젯밤 나는 L, U, K에게 참치회를 거나하게 풀었다. 사장님이 '빨갱이'인 어느 술집에 들렀다가 자리를 옮겨 중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칭따오를 마시고 양고기를 먹었다. 다음에 들른 막걸리집에서 K는 뺑끼를 쓰다가 내일 출국(볼티모어의 학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란다)을 핑계로 먼저 자리를 떴다. L형은 예전처럼 "또 언제 보냐. 잘 지내라"는 말을 남기고 택시를 탔다(그래도 생각보다는 자주 그를 만났던 편이다). U는 우리집에서 한잔 더 하고 같이 곯아떨어졌다. 그의 비밀을 하나 듣기도 하면서. 심포지움은 흔히 '향연'으로 번역되지만, 연세대 철학과에 있었던 어떤 교수는 죽어라 '잔치'라고 옮겼다. 심포지움. 잔치라. 이들과 내년에도 잔치를 벌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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