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단골 술집은 일행을 구분해서 따로 앉히지 않는다. 특히 금요일, 토요일 밤에는 손님이 꽉 들어차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의 옆에 앉을 때가 많다. 술에 취하면 남의 안주를 덥썩 집어먹기 일쑤다. 나도 다른 이들의 맥주 피처를 건드렸다. 그랬더니 옆에 앉은 외국인들이 파안대소했다. 그렇게 그들과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짧은 영어 실력 탓에 고향과 이름 정도를 물어보고 음악이나 같이 들을 줄 알았더니 일이 커졌다. 나보다는 영어를 확실히 잘하는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 친구가 '밥 돌'이라는 이름을 꺼내면서 예상에 없던 정치 이야기가 꽤나 길게 전개됐다. 아니, 중간에 잠깐 곧 내한할 밴드 '킬러스'를 입에 올린 것 외에는 죄다 정치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초등학교 영어 교사라는 M모와 R모 가운데 하나의 고향이 '캔자스'였다. 그러자 친구가 "고향이 캔자스면, 밥 돌을 압니까?"라고 물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은 밥 돌을 밥에 든 돌마냥 우지끈 씹어댔다. "하지만 우리 고향 어른들은 밥 돌을 좋아해." 영남 출신인 나는 다소 동질감을 느꼈다. 그들은 곧바로 오바마로 화제를 돌렸다. 내가 "하워드 딘 아냐?"고 묻자, R은 손을 가슴께에 올리며 '딘'하더니, 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오바마'라고 외쳤다. "딘도 좋지만 그래도 오바마가 짱이야." 흑인 대통령 오바마는 리버럴한 백인 청년인 그들에게 있어 긍지였고 애국이었다.
그들은 가차 없었다. 한나라당을 개무시하는 네티즌들처럼 공화당이라면 다 씹었다. 파월과 매케인도 씹혔다. 또 당연하게도, MB까는 사람들처럼 부시를 깠다. 이번엔 내가 손짓으로 비교했다. 손을 테이블께에 대고 "매케인"이라고 주지시킨다음 바닥으로 확 내렸다. "이게 부시!" 그러자 그들이 아주 정확한 비교라며 환호했다. 그들은 부시가 이라크전쟁으로 미국 망신을 다 시켰다며 한탄했다. 나는 "오바마의 아프간 파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을 뻔했지만, 혹시나 분위기가 깨질까봐 일단 말을 아꼈다. 실수는 중간에 친구가 했다. 순간적으로 "니거"라는 단어를 꺼낸 것이었다. 그 순간에 나는 리스닝이 제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기색을 살피건대 친구가 '니거' 아니면 '호모'라는 '정치적으로 그른' 단어를 꺼냈으리라 짐작하고, "아 그건 그냥 말실수"라고 변호했다. 그들은 "블랙"이나 "아프로-아메리칸"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우리가 자주 글줄로 익혀왔던 예의를 설명했고, 우리는 "아 그야 알고 있었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R은 화제를 중국으로 돌렸다. 뭐 한마디로 "미친 공산당 놈들"이라는 게 요지다. 친구가 "전체주의지"라고 맞장구치자 R은 제대로 말했다며 동의하더니 빨간 옷을 입은 M을 가리키며 "너는 중국!"이라며 놀린다. 나는 "중국은 공산당도 아니다"라고 말했고, 우리는 그들에게 자신을 "사회민주주의자"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그들이 명확하게 이해한 것 같지는 않았다(그들은 해박한 지식보다는 간명한 구도 정리와 확고한 신념, '무엇이 미국의 명예에 부합하느냐'는 주제 의식에 충실했다. 그러니까 그리 학구적이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나는 "장 조레스 아나?"라고 물었다. 그들이 모른다고 답변하자 이번엔 "빌리 브란트 아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여자냐?"는 질문이 들어온다. "아이 그건 메르켈이고... 동독과 서독을 통일한 사람이 있어. 그럼 혹시 프랑스의 미테랑은 아는가?"라고 또 물었다. "사르코지는 알아." "오, 사르코지. 프랑스의 부시!" R은 '그 정도 수준인가?'라고 갸우뚱했다. 열정적인 R과 달리 수줍은 M은 씨익 웃으며 "맞다, 맞아"라고 동의했다. 나는 "한국 대통령 이명박 알지? 걔는 한국의 부시"라고 첨언했다. 그들은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리얼리?"
"사회민주주의자"라는 소개를 못 알아들어 "중도 좌파"라고 다시 내 성향을 설명해줬다. 혹시 이것이 오해를 유발한 것일까? 미국에서 '레프트'는 민주당인데 거기다 '센트럴'이 붙을 경우 소위 '레이건 민주당원'에 가깝다고 해독할 수도 있겠다 싶다. 그 생각이 든 건 그들이 레이건에 대해서 물어온 다음이었다. 나는 단호히 "오바마와 루즈벨트가 같은 범주면, 레이건은 부시랑 똑같은 놈"이라고 일러뒀다. 나 또한 그들이 혹시 '레이건 민주당원'인가 싶어서 도발의 가능성을 감내한 것이었다. 내가 히어링이 잘 안 돼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그들, 특히 R이 중국과 쿠바를 논하며 '프리 마켓'을 강조하는 걸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anyway 그들은 확고한 리버럴인 듯했다. "레이거노믹스가 미국을 망쳤다"는 데 동의하면서 "잘 사는 사람은 잘 살고, 못 사는 사람은 못살게 만들었다"고 했다. 한미FTA에 대해서도 같은 의견이었다. 한미FTA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들이 먼저 물어왔다.
어쨌든 '사회민주주의자'나 '중도 좌파'라는 개념어로는 설명이 힘들 것 같아 인물론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우리는 레이거노믹스를 졸라 싫어해. 당신, 크루그먼이나 스티클리츠 알아?" R은 모른다고 했는데 M은 "크루그먼은 잘 안다"고 답했다(약간 라틴의 피가 섞인 듯한 R은 스포츠팬을 연상케 하는 열혈 (애국?) 청년이었고, 새하얀 얼굴에 검은테 안경을 걸친 M은 그보다 신중하면서 조금 더 지적인 인상을 주었다). "데니스 쿠치니치 알아?" 그들은 안다고 답하더니 테이블 위에 종이를 두 조각으로 찢어서 놓고는 가까이 붙이면서 말했다. "민주당과 공화당은 지금 거의 이렇게 비슷해. 그런데 쿠치니치는 아주 뚜렷하게 공화당과 차이가 나지."
나중에는 그들이 우리에게 지지 정당을 물었다. "뉴 프로그레시브 파티를 지지하지." 당명을 듣는 순간 그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기사 그 이름은 너무나도 무난하다. 술김이라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노회찬, 심상정의 이름을 그들에게 들려줬던 것 같기도 하다. 노무현 이야기도 했던가? 가물가물하다. "오바마가 노무현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아프간 파병은 잘못된 것이다"는 조언을 들려주려고 했는데, 내 영어실력은 생각을 못따라갔고, R과 M은 조금 먼저 자리를 떴다. 우리의 작별 인사는 "퍼킹 부시!"였다. 중간에 킬러스의 <All These Things That I've Done>이 흘러나오자 그들은 환호했었는데, 내가 그들을 위해 신청했노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4년전쯤에, 한 대학 동기의 선배의 친구인 미국인 학생 둘을 만나서 밤새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한국어를 매우 잘했다. 또 그들은 정치학도였다. 그러나 정치의 'ㅈ'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이 '제육덮밥'이란 게 매우 인상깊었다. 내 경험으로는 외국에서 온 한국 유학생들은 소박한 한식을 좋아한다. R과 M에게는 무슨 한식을 좋아하냐고 묻지 못했다. 'Favorite'이라는 단어를 많이 썼지만 그 뒤에는 'politician'이나 'band'가 붙었을 뿐. 내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 다른 이야기를 하고, 그가 돌아오면 곧바로 정치 이야기가 나와서 그리 되어 버렸다. 음악과 술이 주제인 장소에서, 어쩌면 주말 저녁 여자와 만나 대화하는 게 소망이었을지도 모를 그들이 기꺼이 열변을 토하는 모습에서 새로운 정치에 목말라 하는 청년의 자화상을 보았다. 허나 만일 또 보게 되면 다음에는 딴 이야기도 좀 하자잉... 근데 내가 스피킹이 안 된다. 인명이나 개념어로 소화가 되는 주제였으니 망정이지 다른 화제로는 (음악이 아닌 경우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건배나 하며 찌그러져 있어야 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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