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세대론은 파산을 맞이했다. 아직까지 장사를 벌이려는 이들이 널렸지만 서울 지역 대학 출신 중산층들이 세대라는 이름으로 대변할 수 있는 바는 크지 않다. 88만원세대론을 정립하거나 지원한 이들 중 일부는 '계급적 접근'에 무게를 싣기는 했지만, 이쪽이든 저편이든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로는 단연 '읍소'가 꼽힌다. 우선, 실업과 경기 침체로 인해 보수화되고 정치적 대안이 없어서 탈정치화되었을 뿐이라며 곧 죽어라 변호를 해댄다. '20대가 다 똑같은 건 아니다'라는 명백한 진실 대신 '20대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외친다. "사람들을 세대로 한데 묶어 재단하지 말고, 나 역시 '20대'라는 틀로 보지 말아 달라"는 이야기는 찾기 힘들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을 것이다. 블로그와 출판계는 '20대'라는 타이틀로 좌판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에는 진보신당의 몇몇 학생들이 "비례대표 국회의원 상위 순번을 달라"며 찌질거린 사건도 있었다. 이들이 보내는 메시지의 핵심은 이거다. "옛날에는 20대들이 잘 나갔다. 딴 거 없다. 우리도 20대니까 힘을 좀 달라." 세대론의 그물코를 빠져나가지도 않거니와 새로운 세대의 논리를 쓰지도 않는다. 이들은 문필가의 경우에는 '이진경 워너비', 정치지망생의 경우에는 '김영삼 워너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자신의 성향은 이진경보다는 진중권이라고, 김영삼은 당연히 싫은 신좌파라고 밝히겠지만 말이다.
'패션 좌파'는 이렇듯 악화일로를 걸어온 88만원세대론이 죽어가는 사형수처럼 흘린 정액이다. 그것의 표층은 '폼 나게 입자'이고 핵심은 '남들이 따라하고 싶게 만들자'이다. 원작자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허지웅에게 기존의 좌파는 따라하고 싶지 않은 좌파였던 모양이다. 나 역시도 그렇다. 그런데 연유는 꽤 다른 것 같다. 내게는 남을 따라할 이유가 없었다. 나 자신 하나를 비추고 돌아보는 일만으로도 버겁고 바빴으니까. 그러나 다른 많은 분들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여기저기서 허지웅을 따라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얼마 전 한 대학생이 "안녕, 폼 나게 입자구" 투의 글귀로 독자들의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저런 글에는 늘 이런 댓글이 달린다. "글쓴이도 별로 간지 안 나는데요?" 남들이 선사한 별칭이 아닌 신문사측에서 스스로 붙인 '대기자'라는 직함이 그렇듯, 남들이 멋있다고 칭찬하기 전에 제가 먼저 설치는 꼴이 우스꽝스럽지 않을 리가 없다.
허지웅이란 이는 그의 글에 당혹감을 표했다고 한다. 자신의 패션 좌파론을 그의 패션 좌파론과 분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는 "5.17은 5.16의 동생이 아니"라는 김종필의 변명을 방불케 한다. 허지웅 그부터가 "따라하고 싶게 하자"고 뇌까렸다. 혹시 자신과 똑같이 따라하지 못해서 불만인가? 그걸 바란 쪽이 멍청이일 뿐더러 보기에 따라서는 '그놈이나 요놈이나 거의 비슷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 패션이나 요 패션이나 딛고 선 전제와 현실은 같다. 1980년대처럼 학생운동 참여자가 많은 시절에는 임종석이나 김민석 같은 얼짱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1990년대부터는 전체 참여자의 수와 함께 얼짱의 수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운동권의 인적 3요소 중 나머지 두가지, 브레인과 몸빵만 가득 남아 있다. 1 사람에게는 돈과 시간은 물론이고 열정도 다분히 제한되어 있다. 몸빵이 남의 주목을 받을 만큼, 브레인이 공부할 시간 아껴 코디한, 그런 패션과 간지를 갖추기는 어렵다. 그러나 패션 좌파 주창자들은 '운동권'이 아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새로운 조류인 줄 알았지만, 그들 역시 속물주의와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네 소비자요, 동시에 우등생 근성을 버리지 못한 '국영수 좌파'일 따름이다.
그들은 대중을, 그중에서도 제 또래 젊은이, 특히 제 성적 대상이 되는 성별을 꼬일 수 없는 패인을 '못생김'에 돌린다. 제 또래 전체를 빙자해 '88만원세대'의 주창자 노릇을 한 이들의 신상을 감안하면 무리도 아니다. 최근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 번역 출간됐다. 당시의 영국에도 한국의 NL, PD 같은 교조주의자는 물론, 계급 차별을 반대한다면서도 자신의 계층계급적 특질에 쩔어있는 좌파들이 숱했나 보다. 조지 오웰은 "부르조아로 자란 유럽인은 자칭 공산주의자일지라도 몹시 애쓰지 않는 한 노동자를 동등한 사람으로 여길 수 없는 진짜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어떤 호감도 혐오감도 '몸'으로 느끼는 것만큼 근본적일 수는 없다. 인종적 혐오, 종교적 적개심, 교육이나 기질이나 지성의 차이, 심지어 도덕률의 차이도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신체적인 반감은 극복 불능이다."
오웰이 신체적인 반감의 예로 든 것은 주로 냄새였다. 냄새가 아니라 얼굴이라서인가. 얼굴로 극복 가능을 보여준 사건은 흔하다. 2002년 대선 TV찬조연설에 나선 일명 '자갈치 아지메'는 이렇게 읊었다. "아구야, 니 닮은 노무현이가 대통령이 될라꼬 한다." 요즘에는 또 유해진 씨 덕분에 연예가에 훈훈한 이목이 쏠린다. 동네 가게에 앉은 '노간지'의 옷은 패션 좌파들이 소화 불가능한 옷이다. 유해진이 <공공의 적>에서 제 캐릭터를 한껏 드러내기 위해 붉은 장미 수놓은 새하얀 옷을 입었을 때, "따라하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하지만 대세와 표준으로서의 멋을 따르지 않은 그들은 열정과 진지함, 탈권위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반면 남이 자기를 따라하게 만들고 싶게 만들겠다는 이는 좌파라고 보기도 어렵고, 따라쟁이들로는 세상이 꿈틀거리지도 않는다.
계몽도 전위도 아닌 방식으로, 저마다의 내면 속에서 몰염치와 동거 중인 정의감을 건드려야 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생각하는 멋으로부터 출발한다. 당연히 어떤 이는 패션으로 승부할 수 있고 그 태도는 존중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대놓고 '나는 간지난다'고, '너도 간지내라'고 지껄일 때 판은 박살이 난다. 타인이 질투해서가 아니다. 그건 전혀 간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멋이란, 일단은 남들에게 멋을 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지 않는, 자연스러움과 은근함이다(첫걸음이지만 너무 어렵긴 하다). 거기서 조금 더 멋있으려거든, 분명히 내가 누군가의 미감이나 정의감을 자극했는데 행동에 들어간 그 사람이 나를 스승이나 원조로 여기지 않게, 나아가서 잊어버리게 만들면 된다. 한마디 더 보태자면, 겉은 까불어도 속은 기품 있는, 속이 썪어도 겉이 의연한 그런 태도가 참으로 멋있다. 물론 멋에 대한 관점은 각기 다 다를 테고 나는 그 차이가 어지간하면 역겹지 않다.
그러나, '패션 좌파', 이것은 너무나 멋이 없다. 유사 연예인으로 자가포장해 정치사회적 신장을 도모한다는 이들이 자기 세대, 자기 부근의 잘나신 대학생 말고, 과연 절대빈곤에 내몰린 노년, 세계최강의 스트레스에 노출된 청소년에게 얼마나 진득하게 '어필'할 수 있을까? 내 고향의 공업단지 근처 신흥 시가지에는 엄청나게 옷빨나고 어여쁜 여성 노동자들이 많다. 패션 좌파들이 그 곁에 가봤자 정치적으로든 이성적으로든 어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 "이왕이면, 당신 같은 사람보다는 연예인이 낫겠지." 피력하는 강령에 어울리지 않게 뺀질하기만 한 '리무진 진보주의자'들은 우파 민중주의의 반란을 초래한다. 이 반란의 가담자들은 좌파가 (적어도 입으로나마) 모시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그렇게 해서 빼앗긴 에너지는 파시즘의 원료로 쓰인다. 자칭 패션 좌파들은 이 경로 위에서 무대책이다. '리무진 없는 리무진 진보주의자들'은 앞날을 기약할 물질적 요건도 찾지 못할 것이다. 좌파 및 진보 진영이 하도 지리멸렬이라 별의별 소리가 다 나온다지만, 이쯤 되면 확인 자살이다.
자신의 일상이든 기행의 공간이든 사건의 현장이든, 남을 따라하거나 남이 따라하게 하지 말고 제가끔의 위건 부두를 찾기를 바란다. 한국에 절실한 건 토니 블레어가 아니라 조지 오웰이다.
- 학생운동의 삼원구도를 요약한 '브레인-얼짱-몸빵'론의 원저작자는 김성원 씨라는 분임을 밝혀둔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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