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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에 해당되는 글 3

  1. 2009.03.10 왕은 우리편이다? 3
  2. 2009.03.06 왕은 우리편이다? 2 2
  3. 2009.02.11 왕은 우리편이다? 1
 

왕은 우리편이다? 3

史의 찬미 | 2009. 3. 10. 22:17 | Posted by 김수민
<미인도>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 정사 장면이 아니라(<색/계>에 비견하기에는 무리였다. 오히려 창기들이 관객들 앞에서 청나라 체위를 선보이는 씬이 더 재미있었다. 다만 김민선이 첫 섹스하는 여자의 수줍은 감격에 어울리는 연기와 표정을 가졌음은 분명하다),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설득력 있고 현실적으로 개혁군주(정조)를 묘사했다는 점이다. <신기전>에서 백성(정재영)과 세종(안성기)의 육두문자가 포개어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당쟁에 앓는 골머리를 그림으로 달래고 국가적 화가를 양성하는 왕은, 민란의 소식에 역정을 내고 마침내는 신윤복을 탄압하는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된다. 중반부 신윤복의 그림이 드러나 왕이 역정을 냈을 때 김홍도는 타락한 양반들을 풍자하였다고 변명하며 제자를 감싸지만, 신윤복은 그저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에 충실했을 뿐이다. 신윤복은 노론벽파도 민란의 가담자도 김홍도도 아니다. 영화 속 그는 남장 여자의 억압과 당대 화가들간의 경쟁을 정치가 아닌 그림으로 돌파하려고 하고, 왕은 견디지 못하여 그를 심판하고 내쫓는다. 조선조 왕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이라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왕은 우리 편이 아니다. 왕은 자유의 대척점에 있다. 기득권 신료들과 밀서를 주고받든 암투를 벌이든 그는 우리 자유민들과 같은편을 먹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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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우리편이다? 2

史의 찬미 | 2009. 3. 6. 18:04 | Posted by 김수민

현대사 버전: "각하, 우리 혁명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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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우리편이다?

史의 찬미 | 2009. 2. 11. 04:38 | Posted by 김수민
새로 공개된 정조의 어찰은 독살설을 반증하고 있지 않다. 입증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반증이람. 독살설은 당대에 '썰'로도 취급받지 못한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김조순이 벽파를 날릴 때 이용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남인 전체도 아닌 영남 구석에 있던 남인들끼리 유포한 카더라 통신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영남 남인에 합세하여 독살설을 믿거나, 혹은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정조를 추앙하는 이들은 민족자존의 얼굴을 한 서구중심주의자들이다. 절대계몽군주를 거쳐야 -시민혁명 따위를 통해- 근대를 열어제낄 수 있다는 도식에 기대고 있는 몇몇 역사학자들 말이다. 그들은 희한하게도 정조에 대해서는 절대계몽군주의 성격을 부여하면서, 붕당정치가 토리당-휘그당처럼 발전해나갈 수 있는 여지는 조금도 두지 않는다. 붕당은 형이상학적 논쟁이나 권력투쟁만 수행한 것이 아니라 여러 쟁점을 겪으며 꾸준히 진화하고 발전해 왔다는 것, 후대에 '실학자'로 일컬어진 박지원, 정약용 등이 엄연히 붕당의 소속원이라는 것, 조선은 분명 선비의 나라였다는 것 등도 고려되지 않는다. 박지원은 군주를 士 집단의 일원으로 간주하였지만, 정조는 하 은 주 시대의 관념까지 끌어와 임금과 스승의 위치를 겸할 것을 선포하고 '만천명월주인옹'을 자처했다. 이에 대해서 사회경제사적으로는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소농 중심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왕권을 강화하여 신권을 견제할 수밖에 없다는 해명이 있다. 그런데 이번의 어찰은 '정조=개혁', '붕당(노론 벽파)=수구기득권'이라는 구도를 뒤흔들었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 정조가 노론 벽파와 실은 온전히 한패거리였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정조가 격한 표현을 쓰면서 자기 측근들을 비방했다는 사실에 눈길이 간다. 정조는 붕당을 억누르기 위해 소장파들로 친위세력을 구성했지만, 그들이 서학과 북학을 선도해 나가는 것 또한 용납하지 않았다. 척사보다는 부정학이라는 부드러운 태도를 취했지만, 어쨌든 정조도 시대의 변화에 저항하는 보수주의자였던 것은 틀림 없다. 정조는 영조와 달리 각 당파의 의리론을 인정하는 의리탕평론을 폈으나 어렵사리 성취한 삼상연립정권은 균형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의왕권강화책은 공론정치의 붕괴를 가져왔고 세도정치의 씨앗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를 한사코 썩은 모리배들에 의해 좌절된 개혁군주로 묘사하는 까닭은? "왕은 우리편이다"라는, 그만은 그래도 우리편이었었다는 의식이 아닐까. 민중 봉기가 성공하거나 그 성공이 유지된 적이 없는 나라에서 '民다이'는 '君다이'와 결합해야 했던 것이 아닐까. 民으로서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을 君이 그 강력한 힘으로 추진했었다는 환상. 그러나 그 君도 臣의 음모로 주저 앉음으로써 民과 같은 약자였다는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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