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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에 해당되는 글 2

  1. 2008.08.10 서태지 논란 4
  2. 2008.07.30 서태지와 록
 

서태지 논란

Listen to the 무직 | 2008. 8. 10. 22:12 | Posted by 김수민

XTM에서 "서태지, 문화대통령인가, 비지니스맨인가"를 두고 토론이 벌어졌다. 그의 음반이 나올 때마다 되풀이되는 식상하고도 밑과 끝이 빤히 보이는 논란이다. 어느 측이건 쓸데없는 다변 욕구를 자제할 필요가 있다. 그가 비지니스맨에 불과하다는 쪽은 서태지가 과연 자신의 입방아에 오를 값어치가 있는지부터 따져봐야 할 것이다.

서태지가 문화대통령이라는 쪽은 우석훈의 근저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연상시킨다. 물론 '아시아 제패'라거나 '미국 진출'이라는 꿈은 물건너간지 오래고, '제국주의'보다는 '촌놈'임이 더 부각된다. 이현도 등이 지적받듯 서태지에게도 가령 'C-G-Am-Dm' 같은 전형적인, 그래서 친숙하면서도 진부한 패턴이 있다. 팬들의 열정적 환영은 진부함 대신 친숙함에 더 표를 던진 결과일 뿐이다.

물론 그들은 서태지가 출연한 광고의 메시저처럼, 서태지가 진부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바로 서태지가 록팬을 비롯한 음악매니아들에게 깎아 내려지는 원인이기도 하다. 표절 여부를 운운할 것도 없이, 서태지의 음반은 언제나 구미의 흐름을 추종하고 훌륭히 베껴 왔으며 이번 음반 역시 마찬가지다. 국내 최초? 얼터너티브는 그 이전에 '제이워커'나 '뮤턴트'가 시도했으며, 하드코어 혹은 뉴메틀에서도 '닥터코어 911'이나 '언루트'가, 이모코어에서는 바슬린이나 피아가 더 앞섰다.

창조성의 가늠이나 원조논쟁은 차치하고, 서태지를 '문화대통령'이라 부르는 것이 가당찮은 건 그가 지닌 '뮤지션쉽'의 현황이다. 세상에 잊을 만하면 돌아와 음반을 발표하고 그러다 다시 사라지는 대통령이 어디 있나. 서태지컴퍼니를 통해 후진을 양성하는 노력은 인정되어야 하지만, 그가 현재의 음악계에 이수만이나 박진영만큼의 영향력을 끼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이제 그냥 음악활동을 근근이 이어가는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소박한 뮤지션 겸 프로듀서일 뿐이다.

아마 그를 '대통령'으로 띄운 힘은 그가 표출한 정치사회적 메세지에 대한 먹물 비평가들의 호들갑에서도 상당 부분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무엇을 추앙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교실이데아>가 여러모로 좋은 작품이었다는 걸 뺀다면 말이다. 통일을 노래해서? 고구려 유민이 지배층으로서 말갈족을 지배한 나라를 꿈꾼다는 노래를 통해, 그리고 국기게양과 국기에 대한 경례로 막을 내리는 장대한 쇼에서, 통일지상주의와 애국주의의 메아리가 참 크게 울려 퍼지긴 하더라만. 서태지가 거둔 '저항의 성공'이 '비판적 지식인'들을 눈멀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뱀 같은 지혜'를 가지자는 교훈을 남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서태지가 보여준 비판의 수준을 보면, 욕이든 뭐든 잘난 놈이 하면 효과가 있다는, 새기나마나한 교훈만이 남을 뿐이다. 그 노선은 네가 지지하는 노선일 뿐 내가 쌍수들 노선은 아니다.

서태지 이래 그에 관해 바보 같은 글들이 너무 쏟아져 나왔다. 쓸 만한 건 6집 <울트라맨이야>가 나오던 시절에 성기완이 썼던 글 정도다.


서태지에 대한 논란은 좀 다른 단계로 넘어가야 할 것 같고, 나도 이런 포스팅을 더 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에 하나 댓글로 반박이나 질문이 들어오면 이 블로그에선 계속 이어가겠지만.)

일단 "서태지는 '불세출의 음악 오퍼상'"이라는 평가로, 이만 맺겠다. 총총.
:

서태지와 록

Listen to the 무직 | 2008. 7. 30. 16:33 | Posted by 김수민

1987년 청소년잡지가 집계한 차트에서, 시나위는 2집에 든 노래들로 1위부터 6위까지를 휩쓸었다. 들국화나 송골매와는 달리 디스토션을 과감히 걸고 나선 메틀 밴드의 시대였다. 그러나 그들은 White Snake의 <Here, I go again>이나 Van Halen의 <Jump> 같은 대중적 히트곡을 남기지는 못했다(이 두곡을 특별히 예로 든 건 빌보드 차트 1위였기 때문이다). 1992년에야 김종서의 <대답 없는 너>와 신성우의 <내일을 향해>가 나왔다. 그리고 그 바로 직전에 서태지가 있었다.

<난 알아요>에서 회오리춤과 함께 몰아친 신서사이저 사운드는 대중가요의 판도를 바꿔 놓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록의 파수꾼으로서 침투했음을 숨기지 않는 기타 사운드였다. 초반의 랩 파트에서 브리지("난 정말 그대그대만을 사랑했어") 사이에 펼쳐진 신대철(아니면 손무현)의 기타 리프는 서태지의 정체성 그 자체이다. 2집에서 들고 나온 <하여가>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궁상박치우나 태평소 소리, 스크래칭 등은 하나의 악세사리였을 뿐이고, 곡 전반은 기타를 중심으로 하는 록 사운드가 지배하고 있다.

그 경향은 차트 상위권에는 진입하지 못했지만 두고두고 선동가로 남은 3집의 <교실 이데아>에서 완전히 만개하고 말았다. 서태지는 '아이들'과 함께 기타 사운드에 대한 거부감을 춤으로써 무력화시켰고, 록 매니아가 되는 또다른 경로를 개척하였다. 그러나 3집은 사회적 반향에 비해 음악적 호응을 이끄는 데는 실패했고, 서태지는 4집에서 록과 힙합의 분군행진의 전략을 취한다(<컴 백 홈>+<필승>). 그리고 그것을 끝으로 2년 뒤 그는 록커로 컴백한다.

솔로 데뷔 후 그의 음반에 썩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6집에서 시도한 소위 랩코어, 뉴메틀 사운드는 그의 목소리로 따라하기는 버거웠고, 그에게 맞게 재창조되는 것도 그리 용이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그는 음반과 음반 간의 장르적 격차를 좁힐 줄 몰랐고, 그가 선보인 사운드는 예전처럼 그때그때의 구미 팝의 시류를 따랐다. 그러나 청자들이 더이상 신선함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세상은 요, 빨리 돌아가고 있다."(<환상 속의 그대> 중에서)

우연히 네이버의 어느 블로그에서 새로 나온 <모아이>라는 곡을 듣고 알아차렸다. 보다 부드러워지고 멜로디컬해진 7집에서야 그는 비로소 중심을 잡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또 한번 변신을 감행했다는 것을.
 트집 잡을 생각은 없다. 변신은 서태지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곡 자체도 꽤 서태지다웠다. 그에게 덧씌워진 과도한 광휘를 벗겨낸다면 더욱 흡족하게 듣고 즐길 만한 작품이다.

1980년대 메틀의 세례를 받은 수많은 뮤지션들이 1990년대 한국 팝의 찬란한 꽃을 피웠다. 이승환이나 유희열도 록커였거나 록매니아였다는 뒷이야기는 그러한 진술을 더 단단하게 받친다. 그러나 이들 뮤지션 상당수는 2000년대 들어 10대와 구별되는 20대용, 또는 20대와 구별되는 30대용의 음악인으로 머문 감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대중음악은 외화내빈의 극한에 이른 듯하다. 서태지의 팬층도 확확 넓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대신, 깊어지기는 할 터이다. 그의 팬은 아니지만, 그가 앞으로 음악을 펼쳐갈 나날이 지난 세월의 이상이 되기를 바라는 이로서, 나는 그가 어떻게 해쳐 나갈지 참 궁금하다. 그가 록 뮤지션이라서 더 궁금하다. 그것도 1980년대 메틀 키드 출신이니. 나는 문닫은지 꽤 오래된, 한번도 가본 적 없는 파고다 극장의, 마지막 헤드뱅어이다.

추신: 록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서태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댄스 가수'였을 때가 더 좋았다는 사람들에게 나는 권한다. <난 알아요>와 <하여가>를 포함하여 1집과 2집에 든 몇가지 노래를 추억 속에서 떠올리지만 말고 다시 한번 잘 들어보라. 아는 사람은 다 알았지만 모르는 사람은 정말 몰랐던, 새로운 맛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서태지의 한방은 록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 록팬으로서의 내 허장성세 섞인 호언이다. 록이 배후에 있을 때와 전면에 나왔을 때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아름다웠는지는 제가끔 느끼고 판단하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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