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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에 해당되는 글 2

  1. 2008.08.23 이강국 재판기록 요약
  2. 2008.08.18 박헌영 간첩설과 이강국 간첩설 1
 

이강국 재판기록 요약

史의 찬미 | 2008. 8. 23. 00:00 | Posted by 김수민

미국측 기밀문서를 통해 실제 스파이였음이 드러나고 있는 이강국의 재판기록을 요약해 봤습니다. 물론 북조선측의 문서이고 박헌영간첩설의 신빙성이 떨어지는지라, 상당수 또는 전부 또는 일부가 조작되었을 개연성을 고려하고 읽으셔야 할 듯하군요.

어떤 역사학자들도, 제 개인적으로도 결론을 잘 못 내리고 있습니다.

궁금해 하는 지인들이 있어 노가다하며(ㅜ.ㅡ) 요약했습니다.

심지연 교수가 집필한 <이강국 연구>의 마지막 부분인 474~489쪽에 '부록 3: 이강국 관련자료'를 펴시면 전문을 접할 수 있습니다.



* 증인 리강국에 대한 신문(리강국의 진술)

- 1945년 11월 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 소집에서, 하지의 지령을 받은 박헌영이 이를 강제로 해산하려고 했음.
- 1946년 9월 박헌영의 지시를 받고 미국 500만 달라 강제 차관 반대성명서를 발표한 다음 체포령이 내려지면서 입북 지령을 받음.
- 박헌영의 비호로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직에서 간첩활동.
- 박헌영의 도움으로 비밀정보 입수하여 뻐트(미군 24사단 헌병사령관)에게 제공.
- 1950년 봄, 박헌영이 입북시킨 미국 간첩 현 애리스와 관계.

* 기소장

- 그는 1935년 미국 뉴욕에서 정탐부원인 크로리에 의해 간첩으로 고용.
- 크로리와 련계를 가지려 김수임과 련애. 김수임을 반도호텔에 취직시켜 뻐트에 접근.
- 1946년 6월 뻐트에게 협력할 것을 약속, 그후 월북하여 그의 간첩으로 가담.
- 월북 후 리강국은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으로서 공화국에 대한 각 분야의 중요 정보를 수집, 제공.
- 1950년 5월 미국에서 직접 파견된 간첩 현 애리스, 리 위리암을 평양 자택에서 두차례 만나 밀담.
- 노블의 지시에 의해 활동한 리승엽과 련결 가지기 위해 노력. 리승엽에게 김수임을 당에서 리용할 것을 소개.
- 리승엽 도당의 간첩활동에 가담한 리강국은 1952년 10월까지 수집된 군사기밀을 비롯, 4차에 걸쳐 당, 정부의 중요 비밀을 수집, 림화를 통하여 리승엽에게 제공.
- 림화는 자기 진술에서 리강국과 리승엽 간의 련락에 대해 리승엽 및 공모자들의 정체를 음폐하려는 목적이었다고 진술.

* 피심자 각 개인의 죄명

- 그(리강국)는 공산주의의 탈락자. 1935년 독일 백림대학을 마치고 조선에 귀국할 때 미국 정탐기관의 크로리를 만나 범죄적 련계를 가질 것을 밀약.
- 1946년 9월 간첩활동 서약. 1947년 1월부터 북조선 외무국장 직위 잠입. 1948년 8월까지 5차에 걸쳐 비밀을 수집하여 미국 정탐기관에 제공. 1950년 5월경에는 미국 간첩 현 에리스, 리 윌리암과 간첩행위 감행을 약속.
- 1951년 7월부터는 리승엽의 지도 하에 있는 간첩망과 련계, 1952년 10월까지 4차에 걸쳐 공화국의 군사 정치적 비밀을 수집 제공.
- 조선을 미제에 예속시키고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려는 목적에서 정치적 모략활동 감행.
(리강국의 직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무역성 조선 일반 제푸 수입상사 전 사장'으로 표기되어 있음- 간추린이 주)

* 공판심리

(경력을 말하라는 재판장의 주문)
- 저(리강국)는 진정한 맑스 레닌주의자가 아니며, 호기심과 공명심에서 맑스 레닌주의를 연구.
- 대학에서 공부한 것이 독일 계통이고 독일은 사회주의운동이 강하였기에 독일로 류학.
- 1932년 재독 공산주의자에게 지도받고, 프로레타리아 과학동맹 가담. 혁명적 아세아인 회의 참가. 1932년 10월 독일공산당 가입, 일본인 그루빠 책임자. 1935년까지 공산주의 실천활동 전개 후 학비관계와 본국에서의 운동을 이유로 11월 말 귀국.
- 마야께 교수사건 관계자로 일경에 체포, 기소유예 석방. 처남이 경영하는 증권회사의 사무원으로 일함.

- 1936년 4월 리주하와 원산 적색노조와 관계를 맺음. 1938년 10워 원산사건이 발각되었는데 이때 저는 지하로 들어가야 했음에도 피신생활을 계속하다 동년 12월 체포.
- 1941년 5월까지 감옥생활하며 동지를 팔지 않음. 1941년 5월 예심 종결 당시 "공산주의 실천운동에서 손 뗀다. 그러나 맑스주의는 포기할 수 없다"는 전향문 작성. 보석 석방. 1941년 5월 출옥 후 다시 체포, 1942년 2년 징역, 5년간 집행 유예 판결, 석방.
- 1942년 5월부터 8.15까지 대화숙 회의에 참가나 신궁 참배하지 않음. 술, 마작으로 세워을 보냄. 변절은 했으나 협력은 말자고 맹세. 조준호의 경제적 원조로 부화한 생활하며 적극적 친일파가 되지 않음.

- 일제말기에는 최용달과 같이 해방 맞이 태세. 세계정세를 약간 알았기에 민주진영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점을 리해하고 8.15와 동시에 민주주의진영에 나섬. 려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사업에 참가, 박헌영의 공산당 조직에 참가. 속죄의 정신에서 민주주의를 위하여 열성 발휘. 
- 1945년 9월 인민공화국 참가, 1946년 2월 민전 사무국장, 1946년 9월 하지 정책 규탄선언 발표하여 체포령 내리자 박헌영의 지시로 입북. 입북 후 박헌영의 신변인으로서 1946년 10월부터 1947년초까지 사업. 1947년 북조선 외무국장, 1948년 9월부터 상업성 법규국장, 1950년 12월 이후 인민군 제69호 병원장, 1951년 11월부터 체포되기 전까지 무역성 일반 제품 수입상사 사장.


(미국 간첩 활동에 대한 질문)
- 저는 자원적인 미제의 주구. 불가피적으로 간첩으로 전락한 공동피소자들보다 더 악질적이라고 자인. 세계주의 영향으로 부르죠아적 자유주의사상 잔재가 농후하였기 때문에 미국을 높이 평가.
- 독일 류학시 만난 미국인 크로리는 조선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맑스주의에 동정적. 미국인 공산주의자라는 사람 2명까지 만나 담화.
- 귀국 후 일제의 탄압과 자신의 안일 위하여 운동을 적극적으로 못하고 미국인과의 련계도 맺지 못함.
- 해방 후 남조선이 미제에 강점되었으므로 더욱 미제와의 련계 희망. 적당한 기회가 없어 하지 뻐취(미군정 사령관)와는 공적인 관계만 맺음. 김수임의 반도호텔 취직에 동의. 김수임을 통해 헌병사령관 뻐트와 상면, 협력 약속.
- 미제가 획책한 좌우합작공작에 순응. 3당합당을 표면적으로 지지하면서 내막으로는 이 사업을 지연. 미국 간첩과 련계하였으나 표면상 미군정 정책을 규탄하여서 체포령이 내려짐. 김수임의 집에 숨었다가 박헌영의 지시로 입북.
- 입북 후 미제와의 련계 그리고 38선까지 헐하게 오기 위해 뻐트 만남. 뻐트는 체포령이 하지의 명령이어서 할 수 없었다고 하면서 입북한 뒤에도 협력하자며 요구. 1. 김수임을 민주진영과 련계를 지어줄 것 2. 미군이 이북에 잠입시키는 자들을 옹호하여 줄 것 3. 우리의 필요한 자료를 보내줄 것.


- 뻐트가 소개한 미국인 차로 서울에서 개성까지 와서 개성에서 최만용의 안내로 입북. 박헌영은 미국인 차를 타고 왔음을 말할 필요 없다고 일러둠. 입북 후 남조선 출신 불평분자들을 중심으로 친우 물색. 권오직, 한병옥, 장시우, 박승원, 림화 등과 친교.
- 1946년 10워 서득은에게 김수임 리용 권고. 1946년 12월 리승엽에게 김수임을 소개하는 방법 획책. 1947년 1월~1948년 5월 5차 정보 제공. 비서 신태희->김수임->빠트. '1947년 인민경제바런계획서', '쏘미공동위원회에 대한 쏘련측과 북조선측의 태도와 북조선인민위원회 기구표', '평양학원과 금강학원의 무장상태 훈련 등이 정규군과 같다는 세밀한 내용', '1947년 인민경제계획 실천 정형', '8.25 총선거를 위한 문건들과 간부 책벌 결정을 위시한 1948년도 북조선인민위원회 결정' 등 제공. 아울러 이외에 날조문건 2건. '쏘련군사령부의 간섭이 있다는 것', '화폐개혁으로 소시민들의 재산 강탈, 인민들의 불평이 많다는 것'.
- 1948년 8월 이후 정치적 실각으로 위축, 공작 중단. 1948년 미군 간첩 현 애리스와 리 윌리암 래방. 1950년 재차 방문하여 협력 요구. 그후 그들이 오지 않아 간첩 련계 맺지 못함.
- 1951년 6월 리승엽은 전달할 자료는 림화를 통해 달라고 말함. 전달자료가 간첩자료임을 직감, 응락. 리승엽에게 김수임을 소개한 후 리승엽은 김수임을 인입했다고 말한 바 있고, 1948년 8월 후 김수임으로부터 련락이 없어 리승엽과 김수임이 직접 련계를 맺는다고 생각했고, 리승엽이 신변을 주의하라는 충고를 준 일이 있었고, 리승엽이 저를 등용하려 노력한다는 점 때문.
- 리승엽의 요구가 그리 큰 기밀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 그런데 리승엽은 제가 김수임을 소개하기 전부터 미제의 간첩이었음. 때로 저는 리승엽을 김수임에게 소개했기 때문에 리승엽이가 간첩이 되었는가 고민.
- 자료는 림화가 취사하여 리승엽에게 제공케 함.


(피소자의 길과 실지 행동의 모순을 묻는 검사에게 리강국은 모순된다고 대답. 계급적 리해, 조선혁명이 아닌 류행식 맑스주의 조류에 인입하였고, 공명심 출세주의에 의해 활동을 했다고 밝힘. 박헌영의 테제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를 지지한 리유로는 변절적 기회주의적 이데올로기, 명확한 테제를 파악하지 못한 것, 박헌영과 협력하면 출세주의적 숙망이 달성될 것을 예견했다는 것을 듦. 테제의 내용이 반당적이고 기회주의적이고 소부르죠아 정당화하는 노선임을 알면서도 무조건 지지했다고 말함.)


(이어서 검사는 리승엽에게 림화를 통해 리강국의 간첩자료를 받았느냐고 묻고, 리승엽은 인정)
(리강국은 친한 녀자의 알선으로 미국 자동차를 타고 왔다는 것을 박헌영에게 보고했고, 어떤 녀자라는 질문에 당내에서 일반적으로 리용할 수 있는 녀자라고 대답하였다고 진술)


- 1951년 7월에 와서 비로소 리승엽이 간첩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았다.
- 저는 사상적으로 다른 피소자들보다 더 악질적이고, 해방 전부터 계속된 간첩이다. 국제간첩과 련계를 맺었다는 것을 승인함. 김수임의 소식은 들었고, 내용은 그가 1950년 미국 놈들에게 학살되었다는 것. 간첩자료는 한병옥, 장시우 등에게 제공받은 게 아니라 그들과의 담화과정에서 내가 수집한 것. 미제에게 제공하기 위해 리승엽에게 자료 넘김.
- 변호인 길병옥: 뻐트와 련계 맺고 남반부에서 정보자료 제공하였나?
  리강국: 그땐 없었다
- 변호인: 김수임을 리승엽에게 소개한 리유는?
  리강국: 뻐트의 요구대로 김수임과 남로당의 련결시키려.
  변호인: 신문 끝.


(재판장은 빠트에게 받은 임무를 입북하여 수행하였는지, 모략행위가 일상적이라는 기소사실을 승인하는지 물었고, 리강국은 승인. 리강국은 피소자의 정체를 묻는 질문에 '미제의 전형적 주구'라고 대답. 김수임은 처가 아니라 애인이라고 설명. 모략행동의 배경으로는 박헌영을 거론. 리승엽과 림화는 리강국의 진술에 이견이 없다고 밝히고 재판장은 30분간 휴정 선언)

* 국가 검사의 론고, 피소자 리강국에 대하여

"우선 그는 대지주의 출신이며"라고 시작되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하 생략. 위의 요약내용과 겹침.)

* 피소자 리강국에 대한 변호인 길병옥의 변론

(내용 생략)

변호인은 논고에 대한 반론이나 정상참작의 논거 제시 없이, 마치 논고를 발표하듯, 아니 검사보다 더 매서운 태도로 피소자들을 몰아붙였다.


* 리강국의 최후진술 (전문)

저는 조국과 인민을 배반한 극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당과 조국의 특별한 배려에 의하여 예심과 공판 심리를 통한 자기비판의 기회를 준 데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조국과 인민이 주는 벌을 감수하겟습니다.
죽기 전에 자기의 죄과를 인민 앞에 자비함으로써 옳은 사람이 되어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준 데 대하여 조국과 인민 앞에 다시금 감사를 드립니다.

공판문헌이 얼마나 사실이고 허구이건 간에, 이 지식인의 추락에 서글픔과 씁쓸함이 느껴진다.

* 판결

(생략)

* 주문

피소자 리강국에 대하여
형법 제68조에 사형, 형법 제76조 2항에 의하여 사형을 각각 량정하고 형법 제50조 1항에 의하여 형법 제68조의 사형에 처한다. 그에게 속하는 전부의 재산을 몰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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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간첩설과 이강국 간첩설

史의 찬미 | 2008. 8. 18. 01:43 | Posted by 김수민

새내기 시절, 어떤 신문을 만들면서 대여섯살 많고 공부가 깊은 선배들이랑 어울려 놀았다. 하루는 술자리에서 두 선배가 논쟁을 벌였다. 지극히 점잖았지만 두사람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아슬아슬하게 상대방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이었는가'라는 주제였다. 한쪽은 재야사학계에서도 그 문제는 결론이 난 상태이며, '김 주석(상대방의 통일주의적 정치 성향을 배려한 호칭이었으리라)의 권좌는 피로 물들어 있다'고 단언했다. 다른 한쪽은 학내 NL 운동진영의 이론가로 꼽히는 형이었는데, 그는 박헌영의 집에서 무전기 등의 물품이 나왔다고 반박했다.

그때 나는 이것이 여전히 논쟁거리라는 사실에 다소 놀랐다. 나는 제로 베이스에서 이따금 박헌영 사건을 검토해 보기로 했다. 내가 살펴본 공판문헌은 박헌영의 모든 행적이 미국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북조선은 박헌영과 미국의 연관을 표가 나게 무리해서 꿰어 맞추었다. 소설로 쓰기에도 버거울 만한 조작이었다. 젊어서 선교사 언더운드를 만나서부터 스파이로 기용되었다니(여기서의 언더우드는 원두우가 아닌, 그의 아들 원한경을 가리킨다). 그런 방식으로 태연하게 1950년대 피의 숙청을 시작한 김일성 정권은 인혁당사건을 조작해낸 박정희 정권에게 스승으로 대접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나는 박헌영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남한 좌익의 정통성을 박헌영에게서 발견하려는 시도에도 공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영수로 있던 조선공산당 뿐만 아니라 조선인민당과 남조선신민당에서도 종파주의를 휘둘러 댐으로써 여운형이나 백남운의 입지를 축소시키고 결과적으로 좌익정당의 협동을 반쪽짜리로 만들었다. 남조선노동당은 좌익3당 각각의 다수파만을 모은 것이었고, 소수파들은 사회노동당을 만들고 그것은 근로인민당으로 이어진 뒤 다시 남북으로 흩어졌다. 10월봉기가 일어났을 때 박헌영은 정작 남한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남북을 다시 잇기 위해 북조선의 부수상으로서 무리하게 전쟁을 부추기고 밀어붙였다.

한데, 이러한 박헌영의 전쟁책임까지 변호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김일성이 박헌영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결과라는 것이다. 당연히 이는 진실이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의 진격으로 망명생활을 하던 도중, 김일성이 박헌영을 몰아세우며 잉크병을 벽에 집어던졌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박헌영 너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이야기렸다. 물론 김일성이 원래 반전파였던 것도 아니었지만, 전쟁 개시에 가장 공 들인 사람은 박헌영이다. 강정구 교수는 파문을 일으켰던 '통일전쟁' 발언을 하면서, 북조선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사회주의연합정권'이 들어섰으리라는 가정을 던진 바 있다. 아마 그런 정권이 태어났다면 박헌영이 가장 유리한 위치를 점했을 것이다. 남한에 있던 남로당 인맥을 되찾을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한국전쟁에서 '국토완정'의 꿈은 박살났고, 박헌영은 결국 김일성에게 졌다. 이로 인해 한국 좌파들 사이에서 박헌영에 대한 존경과 애틋함이 더 강해진 것 같다. 나는 어느 대학생 단체의 회의에 처음 나갔을 때, 박헌영 때문에 뒤풀이 술자리에서 약간의 곤경에 처했던 적이 있다. 박헌영에 대한 나의 비판이 일제 말기 지도적 위상에도 불구하고 똥짐지고 손수 일했던(벽돌공장에 숨어 살던 시절의 이야기인데, 그 같은 인텔리가 과연 일을 했을지, 또는 해도 제대로 했을지는 나는 좀 의문이다) 그의 헌신을 간과하고 있으며, '당신이 박헌영보다 존경한다는 여운형은 쓸모가 없어 은도끼라는 별명도 있지 않았냐'는 요지였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박헌영에 대한 호평이 근근이 전해 내려져오던 전설에도 있었지만, 남한으로 귀순한 그의 측근 박갑동에 상당히 기대고 있었다는 점이다. 박갑동이 옛날 신문에 썼던 연재는 상당히 반공주의적이었는데 이를 두고 당대의 상황 때문에 불가피한 처사였다고 이해해주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박갑동은 이철승과의 대담에서 해방정국기를 정리하면서 사정없이 밀리는가 하면, 심지어 김일성 가짜설을 뒷받침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그때도 독재정권기였던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그것까지 이해해줄 수는 없다.  나는 박헌영의 추앙자들에게 박갑동 씨의 진술에 의존하지 말 것을 언제나 당부하고는 한다.

그런데 내가 박헌영의 추앙자들과 대화하면서, 입밖에 반쯤만 끄집어내던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남조선노동당 사건이 완벽한 조작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박헌영간첩설은 조작이겠지만, 이승엽이나 이강국을 향한 의심까지 거두어들일 수는 없다. 재미 사학자 방선주 씨의 노력으로 공개된 비밀문서에서 이강국이 CIC(미군방첩대) 요원이라는 새로운 사실도 드러났던 차였다. 거칠게 말해 나는 남로당계열이 예의 버릇대로 천방지축 잘난체하다가 북조선에서 호되게 당했다고, 또한 그중에서 실제 미국간첩도 있었고 덕분에 더 꼴사나워졌다고 생각한다.

박헌영의 추앙자들은 이재유, 이현상, 이강국의 추앙자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 말기 노동현장의 활동가들과 권력을 잡으며 승승장구하던 남로당계 인텔리그룹은, 설령 그 둘의 노선이 같다고 치더라도 생활이나 사고의 방식에서 나오는 차이를 준거로 다소 분리해서 바라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이강국과 박헌영도 분리되어야 할 것 같다. AP통신은 여간첩으로 마녀사냥 당한 김수임의 아들, 김원일이 꾸준히 어머니의 누명을 벗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면서 이강국이 CIA의 스파이였음도, 그러니까 이강국이 김수임을 북조선의 간첩이 아닌 미국과의 연결고리로서 이용했음도 더욱 또렷해지는 것 같다.

김일성이 정당하게 스파이를 처단했을 뿐이라고 믿는 이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강국이 간첩이라는 것이 박헌영이 간첩이라는 것을 곧바로 입증하지는 않는다. 박헌영 간첩설을 거두든지 제대로 된 실증을 하든지 할 일이다. 일설에는 김일성이 죽기 얼마 전 박헌영의 복권을 주문한 적도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에 관해서도 입장표명이 필요할 것이다. 남로당계열에 지나치게 편향된 쪽도 조금 더 사려깊은 역사인식을 가져야 한다. 북조선에서 불운하게 스러진 사회주의자들을 기리고 싶다면, 남로당계열 말고도 김원봉이나 옌안파도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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