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진행자로서의 명성을 드높이려는 프로스트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닉슨. 둘의 동상이몽은 대놓고 부딪히며 인터뷰 기회를 만들어낸다. 영화 <프로스트 vs. 닉슨>이다. 세번에 걸친 인터뷰에서 프로스트는 형편없이 밀리고, 다음의 마지막 기회를 노리게 되는데...
영화는 프로스트의 역전극을 다루고 있으나 나의 판정으로는 프로스트의 패배, 정확히는 4전 전패다. 그중 가장 끔찍한 패배는 바로 프로스트가 이겼다고 여겨지는 마지막 인터뷰에서 벌어졌다.
마지막인 네번째 인터뷰의 주제는 워터 게이트 사건. 닉슨의 패배가 절반은 예견된 것이었다. 아니나다를까 감정을 이기지 못한 닉슨은 대통령이 자기멋대로 하는 것이 잘못이냐며 들끓게 되었고, 그의 참모진은 당황해 인터뷰를 끊어버린다. 재개된 인터뷰에서 결국 닉슨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사과하기에 이르고, 프로스트의 인기는 그후 하늘을 찌르게 된다.
그러나 나는 닉슨의 곡진한 참회를 보면서 그를 동정하게 되었다. 그는 단지 궁지에 몰려 용서를 구한 것이 아니다. 제 스스로의 이상을 배신하였다는 자책감까지도 내비쳤다. 나는 닉슨이 정치인생에서 겪어왔을 숱한 굴절과 그로 인한 가책 그리고 회한을 읽었다. 심지어, 부시 2세 이전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이었다던 닉슨이 잘못 이상의 죄를 뒤집어 쓰지 않았나 하는 의문까지 들었다. 베트남전쟁은 원래 민주당 정부가 일으켰던 것이고, 그는 종전을 하고 나아가 소련, 중국과 데탕트 외교를 펼치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의 입에서 "우리는 모두 케인즈주의자다"라는 유명한 선언까지나오지 않았나. 혹 워터게이트 역풍에서 가장 크게 환호한 세력은 민주당이나 진보운동진영이 아니라 공화당, CIA, 국방부의 매파는 아니었을까? IMF사태를 초래한 책임을 김영삼이 다 뒤집어 쓰고 나머지 재벌, 언론, 박정희후계자들은 다음 시즌을 준비했듯, 그렇게 닉슨은 정치판의 희생양이 된 것은 아닐까?
프로스트는 닉슨의 사과만을 받아냈을 뿐, 외교, 전쟁 등 나머지 이슈에서는 제대로 공박하지 못했다. 도리어 촬영하던 카메라맨들이 자기는 닉슨을 찍지 않았었지만 다시 나오면 찍어주고 싶다고 빈정댈 정도였다. 프로스트의 성과는? 어차피 가능성도 희박했던 닉슨의 재기를 막은 것밖에 없다. 그는 나중에 영국 정부에게 기사작위까지 받은 모양이다. 그것은 오지도 않을 태풍을 미리 잠재웠다는 이유로 왕에게 하사받은 선물이다.
아, 물론, 프로스트가 완승했다고 판정할 수도 있다. 그를 연예인으로만 바라본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의 승리는 패배자 상대가 없는 승리일 뿐이다. 사과하는 것이 닉슨에게 최악의 사태일 수는 있었으나, 닉슨은 상대방을 활용해 최악 중에서는 최선의 길로 당당히 걸어갔다(닉슨은 어차피 처음부터 탄핵되지도 않았고, 후에도 전두환, 노태우와는 달리 투옥되지 않았다). 닉슨이 보이지 않는 손의 꼭둑각시였다면, 프로스트는 닉슨쇼의 MC에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