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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품

Free Speech | 2008. 9. 30. 01:44 | Posted by 김수민

기품 또는 품위 따위의 낱말들은 다분히 귀족적으로, 기껏해야 부르조아적으로 쓰이고 있다. 이들을 폐기할 작정이 아니라면 그 뜻빛깔을 새로이 칠해야 할 것이다. 나는 얼마 전 추석연휴를 앞두고 진정한 '기품'의 한 실체를 보았다.

추석 전날 시외버스정류장은 전쟁터였다. 올 총선 서대문 진보신당의 유세차량을 위해 방문한 청계천 세운상가에 버금갔다. 곧잘 버럭버럭하지만 그보다 더 많이 어리버리 허둥지둥거리는 나로서는 발을 디디자마자 힘들었던 곳이 세운상가다. 아마 함께 간 기사 아저씨가 없었다면 낭패를 당했을 것이다. 아저씨는 널럴한 양반이었지만 -그쵸, 백승덕 씨?- 그곳에서는 거기에 걸맞는 박력과 센스를 발휘했다.

추석 연휴 직전의 시외버스정류장에서도 한껏 목소리를 높이는 기사들 때문에 그에 못지 않은 전쟁이 벌어졌다. 입구 계단에서 담배를 필 때도 여러번 고성을 들었다. 떠들썩한 생기 한편으로 불쾌함이 피어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더했으리라. 지난 몇년간 학교 편으로 한가위귀향단을 통해 내려가던 나로서는 간만의 풍경이었다.

흡연실 앞 데스크에 앉아 있던 아저씨는 무수히 많은 귀성객들에게 질문을 받고 안내를 했다. "허허 거 참, 내가 안내데스크처럼 보여요?" 아저씨의 질문에 아가씨는 그렇다고 답했다. "친절해 보이시니까." 아저씨는 약간은 의도적으로 흐뭇한 제스춰를 취한다. 아가씨의 친구가 오자 "어허, 데이트 하고 있었는데"라며 껄껄 웃는 아저씨는, "연휴 잘 보내세요"라는 인사에 "나 연휴 내내 일해요, 허허"라고 답한다. 아가씨들은 조금 미안한 기색이지만, 나는 그 순간 범접할 수 없는 '여유'를 그 아저씨로부터 느꼈다. 그는 맡지도 않은 임무를 귀찮아하지 않을 만한 위인이었다.

차에 오르기 전 천원짜리 팝콘 한봉지를 사러 갔다. 손님이 많지 않은 그 지점은 흡사 태풍의 눈이었다. 조용하지만, 이리저리 바삐 오가는 사람들 틈에 낀. 아주머니는 덤덤하게 팝콘을 요리했고, 손님이 하나 뿐이지만 마치 10초 안에 버스에 타야 할 사람에게 재촉받은 듯 재빠르게 포장을 마쳤다. 지나가던 누군가 그에게 짧은 말을 걸었고, 그는 응답하며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떠한 귀부인보다 고상하면서, 어떠한 가식도 배지 않은 웃음. 거기에 조금 깃든 피로까지. 기품이었다.

나는 노동계급적인 기품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기품일 뿐이다. 비천하고 당당한 이들의 기품. 삶을 부둥켜 안은 그 누구라도 매혹당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러나 그 누구도 제압하지 않는, 그런 '보편적 기품'이라고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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