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

« 2024/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버마의 국호는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당시 Union of Burma였다. 1989년부터 쓰인 Myanma는 군사정권의 개작이므로, 그 나라의 정권을 반대하는 버마와 세계의 전 인민들은 '미얀마'가 아닌 '버마'를 고수하는 것이 원칙이다.

버마의 군사독재는 1962년 아웅산과 함께 독립투쟁의 주역으로 꼽혔던 네윈이 쿠데타을 일으킨 데서부터 출발하였다. 군부가 '버마식 사회주의'를 내세우던 1974년,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한 우 탄트(1961~1971년)의 장례식을 준비하던 랭군 대학이 군부에게 습격 당했다. 그와 함께 시신탈취와 학살극이 벌어졌는데, 이로써 버마 무장투쟁의 막이 올랐다.  

1988년, 찻집에서 동네청년과 시비를 벌이던 랭군 공과대학생 세명은, 자신에게 닥쳐올 불행한 사태를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항쟁과 학살로까지 번지게 된다. 학생들은 경찰에 구타당한 끝에 희생되었고, 즉시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1988년 오늘, 궐기는 최고조에 달한다.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하고, 15000명에 이르는 인민들이 산악에 들어가 무장하였다. 9월 18일에는 쏘 마웅이 주도하는 쿠데타가 발발했다. 잠시 유화적이던 군부는 약탈과 방화를 저지르며 혼란을 부추겼고,1989년 아웅산 수지는 가택연금되었다. 그리고 1990년 5월 27일,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NLD)가 8할이 넘는 지지율을 얻었음에도 정권은 그들에게 이양되지 않았다. 도리어 의원 100명이 구속되었고, NLD 등 몇몇 정당을 뺀 단체들이 불법화되었다. 그후 아웅산 수지는 두번을 더 가택연금 당해, 총 12년동안 집에 갇혀 살았다.

8888을 계승해 1999년 9월 9일에 일어난 9999항쟁은 반정부세력 간의 연대에 실패한 채 역시 폭력진압으로 쓰러졌으며, 2003년 5월 아웅산 수지는 NLD를 재건하는 도중 피습을 겪기도 했다. 2005년 엠네스티 보고서는 버마의 양심수가 2004년 12월 기준으로 1350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UN는 이미 1987년 버마를 자원이 부족한 최빈국으로 지정하였고, 1994년부터 정치적으로도 독재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미국과 EU,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이에 동참하였다.  

버마의 노동착취 역시 2000년도에는 ILO에서 제제를 결의할 만큼의 수준이었다. 8만명 이상이 버마 군부에 동원되어 식사도 제공받지 못하고 각종 개발공사에서 12~14시간 강제노동을 하였다. 이에는 임신 여성까지도 포함되었으며, 숱한 사람들이 지뢰나 풍토병에 희생되었다. 소수민족들 또한 자원개발사업에 끌려갔다.  

이러한 가운데 8888세대는  National Recnciliation Movement를 전개하는가 하면, 독립운동가들도 '연륜 있는 정치가들의 모임'을 결성하였다. 우리는 2007년 유엔특사의 방문과 석유값 2배, 천연가스 4배 인상에 따른 생활고를 맞이해 버마에서 일어난 항쟁을 잘 알고 있다. 그해 9월 버마의 탄 쉐이 군부 정권은 총파업에 나선 전국승려연합회를 비롯한 인민들을 또다시 학살하였다. 버마국영방송은 3천명을 체포하고 2천명을 석방하였다고 주장하였지만, 민주세력은 6천명이 체포되고 5백명이 석방되었다고 밝혔다.

"뚜쩐아욱가 라욱먀욱삐, 씨쭨 아우똑역캐." 다른 국가의 노예에서 해방되었으나 군대의 노예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말만큼 버마 인민들의 삶을 극명히 드러내는 표현은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