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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에 해당되는 글 2

  1. 2008.03.25 조봉암과 변절한 후예들 그리고 김대환 1
  2. 2008.02.12 다섯개의 손가락
 

조봉암과 변절한 후예들 그리고 김대환 
김수민의 한국현대사 OST #3
대나무산에 내린 검은비
 
 2008년 03월 22일 (토) 16:11:47 김수민  woodstocksm@naver.com 
 
 
 악극단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 방랑생활을 보다 못한 외삼촌이 나를 경찰학교에 들여보낸 것이다. 경찰은 의외로 적성에 맞아 그럭저럭 견뎌낼 수 있었다. 31기로 졸업한 뒤 초대 농림부장관을 지낸 조봉암씨의 호위경관을 맡았다. 그분이 외숙모의 친오빠였기 때문이다. 2년 정도 그분을 호위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정신, 옥고와 갖은 고문을 치른 뒤 5개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으로 글씨를 기막히게 써 내려가는 모습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그림자처럼 그분을 따라다니며 나는 늘 그 생각에 골몰했다. 훗날 쌀 한톨에 반야심경 200여 자를 새겨 넣는 '미친 짓'도 나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 흑우 김대환, <<연습은 장엄한 구도의 길이었다>>, 현암사, 2005, 31-32쪽.


 
▲ 김대환이 쌀 한톨에 새긴 반야심경. 그 역사적 배후에는 조봉암과 '다섯개의 손가락'이 있었다.


   전향했지만 변절하지 않았던 대나무산

 일제 시대 옥고를 치루면서 다섯 개의 손가락을 잃은 죽산(竹山) 조봉암은 해방을 앞둔 몇해동안 비교적 안온한 나날을 보냈다. 사실상 전향을 선언하고 독립운동을 떠난 결과였다. 이는 그가 해방공간에서 활발하고 주도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원인이기도 했다. 조봉암은 공산당의 지도자인 박헌영과 결별하면서 결국 공산주의자 노릇을 그만두겠다는 제2의 전향을 선언했다.

  그는 자본독재와 공산독재를 모두 반대하는 ‘제3전선’을 형성하는 운동에 나섰다. 남북과 좌우의 통합을 모색하던 인사들이 죽거나 현실정치에서 등을 돌릴 때, 조봉암은 제도권 안에서 견디는 쪽을 택했다. ‘일민주의’의 기치를 내걸며 정당정치에 극도의 불신을 보냈고 전략적 파트너였던 한국민주당과 불화하던 이승만은 전직 공산주의자였던 사회민주주의자 조봉암을 내각으로 불러냈고, 조봉암은 대한민국의 초대 농림부장관이 되었다.

  그의 완강한 제도정치권 참여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지만, 분명 그의 전향은 변절이 아니었다. 조봉암은 공산주의를 버리고 정립한 민주적인 사회주의와 사회적인 민주주의를 따랐다. 왕족 출신 독재자 이승만과 지주·친일파로 이루어진 보수야당에 마음을 주지 못한 인민들이 조봉암의 곁으로 모였다. 왕년에 우익깡패였던 자도 그를 보좌했다. 그는 포연 냄새가 채 가시지도 않은 1950년대에 ‘평화통일’을 제창했고, 진보당의 강령은 ‘피해대중’의 지지를 받아냈다.

  조봉암은 어찌 보면 구질구질하게 느껴질 만큼 살아남는 길을 거듭 선택했다. 그러나 그의 인기가 이승만이나 신익희, 조병옥 같은 보수 정치인을 위협하면서 그는 더 이상 생존할 수 없었다. 이승만은 조봉암의 표묶음 앞뒤에 자신의 표를 덮는 등의 대대적 부정선거로 대한민국의 세 번째 대통령이 되었고, 그 후 정권은 조봉암을 죽이는 공작에 나선다. 꾸준히 외쳐온 평화통일론 그리고 남파간첩이라고 주장·간주된 양명산과의 만남을 근거로 조봉암은 마침내 1959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사형을 당했다. 

  허영만의 명작만화 <오! 한강>은 적지 않은 분량을 주인공과 조봉암의 인연(물론 픽션이다)에 할애하고 있다. 이외에도 조봉암을 기리고 새기는 노력들은 수두룩했다. 반면 조봉암 사후 진보정당인들이 걸었던 행보는 드러내기  부끄러운 변절의 역사였다. 박정희 정권기에 통일사회당을 이끌었던 당산 김철(김한길 전 국회의원의 아버지다)은 전두환 일당이 만든 국가보위입법회의에 들어갔다. 진보당 간사장이었던 청곡 윤길중 역시, 민주사회주의자를 자처하던 남재희와 함께 제5공화국의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에서 국회의원을 지냈고, 민정당 대표와 국회 부의장까지도 역임하였다.

  이 전향과 변절의 이야기는 윤길중의 아들이 반 전두환 투쟁에 나서게 되는 또 다른 일화를 남기기도 했는데, 이것은 김소진의 소설 <혁명기념일>에도 픽션에 섞여 묘사되어 있다. 남재희의 딸도 학생운동에 가담해 아버지를 곤란케 했다고 전해진다. 남재희는 오늘날 진보정당에 애정 어린 충고를 연신 보내며 ‘진보 원로’처럼 행사하는가 하면, 운동가였던 그의 딸은 얼마 전 한미FTA를 주도한 실무진의 한명으로 나타났다.


 
 흑우 김대환의 생전 인터뷰 및 연주 동영상. 출처:T42.co.kr


  불꽃이 꺼지는 동안 검은비가 내렸다

  조봉암의 후배들이 주류 엘리트의 본연에 충실하며 ‘이너서클’로 화려하게 진입하는 동안, 조봉암의 호위경관이었던 흑우(黑雨) 김대환은 음악에 일로매진한다. 그는 ‘애드 포’가 첫 음반을 내기 직전까지 신중현과 함께 록과 블루스를 연주했고, 조용필, 최이철(훗날 ‘사랑과 평화’)을 대동하고 ‘김트리오’라는 밴드를 결성한 바 있다. 그 후 프리재즈에 투신하며 ‘드럼’이 아닌 ‘북’을 연주하였다. 즐겨 타는 할리 데이비슨을 무대에 올려 그 시동 소리를 음악으로 승화시키고, 한 손에 여러 채의 채를 끼워 절묘한 소리를 내는 모습은 김대환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위에서 인용했듯 조봉암에게 충격과 자극을 받은 그는 글씨에도 능했다. 공연 직전 물 묻힌 손가락으로 화선지에 좌우가 뒤바뀐 글씨를 써내려가는(관객들에게는 글씨가 똑바로 보인다) 퍼포먼스로도 유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압권은 쌀 한톨에 반야심경 200여자를 새긴, 이른바 ‘세서미각’이었다.

  집념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많다. 그렇지만 묵묵히 흐르고 또 흐르는 사람보다는 활활 타오르다가 꺼져버리는 사람이 더욱 많다. 조봉암을 따라다니던 청년들은 가슴 속에 불길 하나씩은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주류의식에 함몰되거나 오랜 야인 생활에 지쳐 하나둘씩 타협하고 훼절하였다. 젊음과 객기에 기대 급격히 피어오른 불꽃은 철이 들어간다는 무상한 핑계 속에서 꺼져가곤 하였다. 진정한 열정은 언제나 은근과 인내에 빚을 지는 법이다. 활화산처럼 북을 치는 김대환의 이면에 세서미각의 김대환이 있었듯 말이다. 지난 3월 1일은 김 선생의 4주기였다.

추신: 원고 마감이 끝난 3월 23일, <조봉암과 진보당>의 저자 정태영 선생이 작고하였다. 북한에게 교육받은 이론가로 조작되어 조봉암과 함께 재판을 받았던 그는 이후에도 줄곧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활동을 했다. 또 뒤늦게 대학원에 들어가 사회민주주의의 한국적 실현을 학술적으로 탐구하기도 했다. 유저로는 <한국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역사적 기원>.

/김수민 woodstocks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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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개의 손가락

史의 찬미 | 2008. 2. 12. 19:40 | Posted by 김수민

악극단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 방랑생활을 보다 못한 외삼촌이 나를 경찰학교에 들여보낸 것이다. 경찰은 의외로 적성에 맞아 그럭저럭 견뎌낼 수 있었다. 31기로 졸업한 뒤 초대 농림부장관을 지낸 조봉암씨의 호위경관을 맡았다. 그분이 외숙모의 친오빠였기 때문이다. 2년 정도 그분을 호위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정신, 옥고와 갖은 고문을 치른 뒤 5개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으로 글씨를 기막히게 써 내려가는 모습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그림자처럼 그분을 따라다니며 나는 늘 그 생각에 골몰했다. 훗날 쌀 한톨에 반야심경 200여 자를 새겨 넣는 '미친 짓'도 나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 흑우 김대환, <<연습은 장엄한 구도의 길이었다>>, 현암사, 2005, 31-32쪽.


조봉암은 일제 말기 투쟁을 접으며 얼마간의 안온함과 양식을 누린 탓에 해방정국에서 소외되었다. 그때 그는 서울로 올라오지 않고 고향인 인천에서부터 '제3전선'의 형성을 위해 활동했다. 그가 이승만 정부의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참여한 사실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견해와 논평이 있다. 하지만 그는 평화통일론과 피해대중을 위한 경제를 포기하지 않았고, 이승만이나 신익희 등 보수 정객들을 능가하는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집념을 가진 사람은 많다. 그러나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은 집념이 아닌 묵묵히 흐르고 또 흐르는 집념을 가진 이는 흔치 않다. 불꽃들이 차고 넘치는 진보진영에는 그러한 사람들도 필요하다. 활화산처럼 북을 치는 김대환의 이면에 세서미각의 김대환이 있었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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