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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의 찬미'에 해당되는 글 38

  1. 2007.12.18 연세대에게 미국과 통일은 무엇이었나(종전선언자 이명박?) 6
  2. 2007.11.15 졸업 논문 4
 

졸업논문 작업이 막바지로 가고 있다. "해방 후 교육주도세력과 사립 종합대의 형성"(1945~1948, 서울). 나의 작업가설과 결론은 일치한다. 그만큼 싱거운 집필 과정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는 눈이 번뜩 뜨이는 깨달음에 앞으로 작업할 또 하나의 과제를 설정하게 되었다.

 
이화여대도 마찬가지겠지만 해방 이후 사립 종합대학교의 건설을 주도하고 미군정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미국 유학파 겸 개신교도들이다. 덕분에 연세대와 백낙준은 숭실대 또는 함석헌과 대조되는 역사를 겪었다. 일제시대 숭실대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폐교당했고, 해방 후에는 서울로 옮겨오는 바람에 비슷한 역사를 자랑하는 연대, 이대보다 위상이 뒤떨어지게 되었다. 함석헌은 퀘이커교 목회자로 신의주 반공의거를 주동한 자유주의자였는데, 월남하고 나서도 독재 정권과 투쟁하게 된다.

  물론 연세대학교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강제로 학교의 명칭과 교육과정이 변경되는 시련을 겪고, 일제는 광혜원의 원두우 동상을 전쟁물자로 징발하고 그 자리에 흥아유신기념사업회비를 세웠다(동양사학입문 수업 때 백영서 교수가 그 비석의 탄생배경을 추적하라는 숙제를 내린 적이 있었지). 원두우의 아들 원한경은 미국으로 외유했고, 백낙준은 조선임전보국단과 미영타도좌담회에 참여한다.


  백낙준은 해방 후에도 교육주도세력의 대표자격으로 활동하며 연희전문을 종합대학교로 승격시키고 초대 총장 자리에 앉는다. 1946년 9월부터 한해동안은 재정 확충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는 등 원조 세일즈 총장의 면모를 뽐내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총장직을 유지하면서 문교부 장관을 맡는 최고의 관운을 과시한다.


그런데 장준하의 <사상계>는 이 시기에 바로 백낙준과 미대사관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장준하 그 자신도 CIA의 전신인 OSS에서 훈련을 받았고 개신교 목사이며 김구의 비서였다가 이범석의 족청에 잠시 가담했던 친미반공주의자였다. 그가 잠깐이나마 5.16을 옹호했던 것에도 이러한 배경이 깔려 있다. 하지만 장준하는 점차 자신의 한계를 벗으며 통일을 부르짖는 선지자로 변신한다.


  장준하 사후 통일운동가로 선 문익환은 '민주연세'로 불리우던 학교에 '통일연세'라는 별명을 붙인다(1987년 연대 중도앞 이한열 장례식에서 터져나온 그의 절규는 근현대사 최고의 연설로 꼽힌다). 특수성을 강조하는 '민족고대'에 비해 좋은 의미든 아니든 보편성을 표방하는 연세가 '통일'이라는 특수한 옷을 입게 된 것이다. 북조선의 입장에서 연세대는 특이한 학교일 것이다. 연대는 (그들이 미제의 스파이라고 여기는) 박헌영의 배후인물인 원한경이 있었던 곳인 동시에 문목사의 흔적이 남은 학교이기도 하다. 5년 전이었던가, 운동권 애들을 따라다니고 구슬리는 게 일이었을 어느 교직원이 금강산에 방문했을 때, 직장의 이름을 대고 안내원에게 예상에 없던 환심을 산 적도 있었단다.


  지금 연세대학교는 하바드대학이 100여년전에 자율화했던 채플을 의무화하고 있을 만큼 근본주의적으로 개신교를 섬기고 있으며, '글로벌 연세'라는 이름으로 세계화를 지지하고 있다. 이 학교가 얼마나 친미적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하기야 한국에서 권력을 가진 단체들이 다 그러하다). 게다가 연세대학교의 재단이사장은 조선일보 전 회장이었던 방우영이다.


  한편으로 연세대는 재미있게도 김대중도서관을 비롯해 김대중기념사업을 주관하고 있다. 정치외교학과에는 문정인, 김기정이라는 햇볕정책의 전도사들이 포진해 있다. 엔엘 학생운동의 메이저 캠퍼스이기도 하지만, 개신교도로서 사회참여를 하는 학생들(정치적으로는 중도, 종교적으로는 보수에 가깝다. 평택사건은 안타깝지만 동성애는 궁휼히 여길 뿐 인정의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역시 통일문화제를 개최하는 등 통일에 관심을 보인다.


  이렇듯 연대에서는 미국과 통일의 의미가 교차하며 만난다. 혹 이것이 노무현이 말하는 '친미 자주'의 정체일까? 연대의 역사로부터 나는 '종전선언 서명자 이명박'의 실현가능성을 헤아려 본다. 우습지만 웃기지는 않는 상상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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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논문

史의 찬미 | 2007. 11. 15. 21:52 | Posted by 김수민

열흘 전쯤 졸업논문의 주제를 정했다(졸업논문을 쓴다고 곧 졸업하는 것은 아니다. 내 소속 학과에서 졸업논문이란 선택가능한 3학점짜리 수업이다). 고심끝에 '19세기 자유교육사상'을 제치고 선택된 주제는 '해방 직후 교육주도세력과 사립대학의 형성'이다. 해방 전후를 다루고자 했으나 분량이 넘칠 것 같아 직후를 택했다.

관련한 자료는 생각보다 많았다. 내 소속 학과의 대학원에서는 1986년 한해동안만도 미군정기 교육정책을 다룬 논문 세편을 쏟아냈다. 교육사나 교육사회학을 다루는 교수들도 1980년대에는 이 문제를 다룬 저서들을 생산했다. 이 자료들을 어떻게 소화해서 재구성할지 고민이 들 정도이다.

실마리가 될 사건인 '천연동 모임'은 김활란, 김성수, 백낙준, 오천석 등이 미군이 진주하기도 전에 서너차례 가진 회합으로 향후 대한민국의 고등교육, 특히 소위 명문사학의 향방을 결정한 계기였다. 그들이 미국식 교육모델을 주창하며 김성수의 경우 6-3-3-4라는 희한한 학제를 도입하려고 한 것은 웃기지만, 아동중심주의, 실용주의, 진보주의 교육학자로서 제도주의 경제학에도 큰 영향을 끼친 존 듀이를 앞세운 것은 더 웃기다. 그 반대편에는 좌파인 백남운은 물론, 중간파인 안재홍이나 극우 민족주의자인 안호상(훗날 그 유명한 일민주의를 집대성한 이데올로그) 등이 포진해 있었는데 그들은 존 듀이에 대항해 페스탈로치를 내세웠다.

그러나 알다시피 한국의 고등교육계는 페스탈로치와 존 듀이가 경합하고 절충되는 공간이 절대 아니다. 안호상이 페스탈로치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었듯 천연동 모임의 멤버들은 존 듀이를 진정으로 계승할 자격도 조건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존재가 의식을 만든다,라는 것이 이 논문의 주제는 아니다.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분량과 역량의 한계로 해방 전 그들의 일제부역 행적과 그 이후 친미적 행보를 연관짓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정치적 선동과 역사적 단죄가 이 논문의 목적인 것 또한 아니다. 사실이 그랬다는 것이다. 팩트가 가장 강한 우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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