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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임, 간첩조작에서 <서울 1945>까지

[한국근현대사의 OST] 이소라, <개희의 노래>


김수민/woodstocksm@naver.com

  2001년 9월 4일, 역사학자 방선주와 정병준의 요청으로 기밀해제된 미육군 정보국의 문서파일과 미 국립문서보관소의 ‘베어드 조사보고서’가 언론에 보도되었다. 조선공산당계(박헌영계)의 주요 인물로 꼽히는 이강국과 임화(시인) 등 남로당의 일부 핵심간부들이 CIC 요원이라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아마 이 대목에서 해방정국기 한국사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라면 하나 같이 김수임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강국의 애인이자 존. E. 베어드 대령(미8군 사령부 헌병감)의 동거녀였던 김수임은 오랫동안 이강국의 기밀입수 활동에 이용되었던, 달리 말해 기밀 유출을 위해 베어드에 접근했던 ‘여간첩’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그날 미 육군부가 1950년 8월부터 석달동안 조사하여 작성한 ‘베어드 보고서’는 김수임의 혐의에 관해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베어드 대령이 거꾸로 김수임을 통해 이강국이 전하는 북한측 정보를 수집했을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1930년대말 김수임은 유학 시절 독일공산당에 참가한 바 있는 이강국을 만난다. 그는 이강국에게 공산주의 사상이나 로자 룩셈부르크의 활동을 전해 듣지만, 이념보다는 사랑에 이끌렸던 것으로 보인다. 자유분방한 성품에 지성을 겸비하고 특히 영어에 능숙해 세브란스병원에서도 일했던 그녀는, 그러나 한반도 분단의 상황에서 애정의 분열을 경험해야 하는 ‘약한 여자’가 되고 말았다.




‘미모의 여간첩’ 김수임? 만들어진 신화일 뿐


  이강국이 체포령을 피해 북한으로 도주한 후 그녀는 반도호텔에서 미군정 직원으로 근무하였다. 이때 그의 상관인 베어드 대령은 그녀에게 끈질기게 구애하였고, 그녀는 옥인동 주택에서 동거에 들어갔으며 서른 일곱 나이에 아들인 김원일을 출산한다. 1949년 6월말 주한미군은 모두 철수하지만 베어드는 경찰고문으로 남한에 잔류하였으나, 그들의 동거는 지속되지 못한다. 1950년 봄 김수임이 간첩죄로 체포된 탓이었다.


  그렇지만 21세기 벽두에 비로소 공개된 CIC의 비밀문서가 아니더라도 김수임의 간첩행위 13가지는 대부분 그 당시에 반박되고 있었다. 우선, 미군정의 체포령에 직면한 이강국을 은닉하고 월북을 도와준 것은 분단이 확정되기 이전의 일이라 간첩죄의 구성이 불가능했고, 기껏해야 범인은닉이나 도주방조와 같은 일방형법, 38도선 월경금지에 관한 법률 위반을 적용할 수 있을 뿐이었다. 미군철수나 한국경찰의 무장에 관한 기밀을 적국에 제공했다는 혐의도, 베어드가 고위전략적 정책을 잘 알지 못했고 따라서 김수임에게 기밀을 유출하지도 않았으므로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민간인이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는 것도, 공포한 흔적도 없는 국방경비법을 적용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당국은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로 특무대에 갇혀 있던 이중업을 김수임이 탈옥시켰다고 여론몰이하였다(정작 기소내용에서는 누락되었다). 김수임의 집에서 나왔다는 권총을 검사들이 증거물로 내세웠다가 혐의와 무관하다는 변호인들의 이의제기가 먹혀 채택이 보류되는 일도 벌어졌다. 심한 고문에 의해 허위사실을 자백했을 가능성은 당시나 지금이나 제기되는 것으로, 베어드 파일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김수임은 재판 시작 3일만에 한번의 공판으로 사형을 언도 받았다. 형은 한국전쟁 직전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집행되었다. 그녀는 ‘여간첩의 신화’로 남아 전해졌고, 네덜란드 출신 무용수이자 독일과 프랑스를 오가며 스파이 활동을 했던 마타하리와 곧잘 비견되었다. 프랑스 정부가 마타하리의 간첩행위를 부풀려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사실보다는 ‘미모의 여간첩’이라는 공통점이 부각되면서 말이다. 그뒤 반공주의를 지향하는 여러 저작과 방송들이 김수임을 다루었고, 비교적 최근에는 윤석화가 주연으로 출연한 <나, 김수임>(연극) 등이 개인적 고뇌에 초점을 맞추어 그녀를 변호하였다.


  2006년 KBS가 상영한 <서울 1945>도 김수임을 모델로 한 인물 김해경(어린시절의 이름은 ‘개희’)를 등장시키고 있다. 한은정이 열연한 김해경은 가난한 어린시절과 같은 성장과정이나 반도호텔에서의 근무와 같은 이력에서 김수임과 닮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강국에 참고하여 만들어진 최운혁(류수영 분)이 공산당계였던 실제 모델과는 달리 여운형(신구 분)의 동지로 나오듯, 김해경 또한 김수임과 다른 점이 많다. 김해경은 이화여전을 나온 김수임처럼 고학력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최운혁이 월북한 뒤 그녀에게 구애하는 인물도 미국인 장교가 아니라 양심적 우익이자 최운혁의 벗인 이동우(김호진 분)였다. 김해경은 간첩으로 체포되지만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의 도움으로 풀려나 최운혁과 해후한다. 그리고 끊이지 않는 포화 속에서 빨치산에 합류한다.



김해경, "당은 오류가 없나요?"


  김해경은 비정치적이면서도 정치적이다. 김수임보다 또는 김수임만큼. 김해경의 어머니(고두심 분)는 결혼을 허락하면서 최운혁에게 “정치에 손을 떼고 대학 교수 일에 전념하라”고 부탁하고, 최운혁은 ‘좌우합작까지만’이라는 단서를 달면서 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김해경의 운명은 결코 순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정치에도 이념에도 관심 없는 이 여성은 사랑 앞에서 후퇴하지 않는 열정을 타면서 해방정국으로 더욱 깊숙이 빠져 들어간다.


  극의 막바지, 조선노동당은 최운혁의 스승이자 빨치산을 지도하던 문동기(홍요섭 분)를 제거하라는 밀명을 내린다. 우연히 이를 먼저 알아챈 김해경은 냇가에서 최운혁에게 묻는다. “당(黨)은 정말... 오류가 없나요?” 김해경은 단지 김수임의 분신이 아니라 해방정국의 격동에 휘말린 ‘연약한 여성’의 대변자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비록 정치적인 학습은 깊지 않았지만 어떤 회색의 이념으로도 뭉갤 수 없는 삶의 푸르름을 갈구했다.


  구사일생으로 한국을 탈출해 일본으로 건너간 해경이 들어간 어느 교실, 액자에는 태극기도 인공기도 걸려 있지 않았다. 이것이 최종회의 마지막 장면이다. 높지 않은 시청률과 극우단체의 비난 속에 드라마가 막을 내린 후, 열성 시청자들은 이소라가 노래한 <개희의 노래>를 들으며 김해경과 김수임을 추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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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진 <연두>에 연재.


'그리운 내 님'은 독립운동가 박헌영

[한국현대사 OST] 김정구, <눈물 젖은 두만강>


김수민 woodstocksm@naver.com

 

* 최초의 국민가수? 혹자는 그를 '그레이트 김정구 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97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건국 이후 최고의 코미디언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김국진이 1위를 차지했다. 비결은 간단했다. 그가 ‘당시에’ 가장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같은 조사를 벌이면 비슷한 원리에 따라 순위가 도출될 것이고, 구봉서나 배삼룡 같은 이들은 아무래도 제 영향력에 비해서는 뒷전에 쳐지기 쉬울 것이다. ‘가수’로 부문을 바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평론가나 저널리스트, 연구자를 빼고 일반 국민들에게만 투표를 맡긴다면 말이다.


  순위야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한국사회에서 기록과 기억은 어떤 분야에서든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이것은 ‘학술’이나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사고하는 시간이 짧아질수록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예술도 좁아질 수밖에 없다.


  최고의 스타 김정구와 민중의 희망 박헌영


  이 칼럼의 제목은 ‘한국 현대사 OST'이지만 오늘은 ‘근대사’에 있었던 음악을 끄집어 내려고 한다(왜 나는 제목을 ‘근현대사’라고 짓지 않았을까). 일제시대는 나라 없는 민족들임에도 조선인들이 ‘국민가수’를 가지기 시작했던 시점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김정구이다. 1916년 함경도 원산에서 난 김정구는 연주에 능했던 가족들의 영향을 받으며 자연스레 가수로 성장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개신교 신자로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했고, 일찍 학업을 접고 양치기나 물지게꾼을 해야 할 만큼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음악이론과 바이올린 연주를 배웠다.


   충무로 대중음악계에 뛰어든 그는 <서울감상곡>, <항구의 선술집> 등의 곡을 취입하여 장안의 스타로 떠올랐고, 제법 거금을 벌며 철마다 세벌쯤의 양복을 맞추어 경성 최고의 멋쟁이로 꼽혔다. 그렇다고 그가 ‘가오’만 한껏 잡을 줄 아는 가수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재즈의 선구자, 루이 암스트롱과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재담과 제스춰였다. 아버지의 소질을 물려 받았는지 만담에 뛰어났던 데다가 그의 노래는 대화식으로 되어 있었다. 그는 춤을 추는 것은 물론, <왕서방 연서>를 부르며 이가 빠진 중국인 복장을 하고 세태를 풍자하기도 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은 이러한 김정구를 인기연예인에서 민족의 대표 가수로 격상시킨 노래였다. 이 곡은 작곡가 이시우가 두만강 유역에서 독립군의 아내를 우연히 만나면서 만들어졌다고 전해졌었다. 그러고 나서 정소월이라는 가수가 처음 불렀다가 이시우가 정식음반으로 남기면서 김정구에게 노래를 맡겼고, 김정구가 작곡가 김용호에게 부탁해 가사를 3절까지 늘렸다는 사연이다.


  그러나 이를 뒤엎는 주장이 역사학자 임경석을 통해 소개되었다. 그는 항일운동가이자 조선 공산주의의 거두였던 박헌영의 일대기를 정리하면서 <눈물 젖은 두만강>에 얽힌 증언을 담았는데, 증언자는 원경 스님으로 박헌영의 아들이다. <동아일보>에서의 퇴사와 <조선일보>에서의 해직 등을 거치며 끊임없이 혁명운동을 해온 박헌영은 1925년 부인 주세죽과 함께 경찰에 체포됐다. 모진 고문을 당했던 박헌영은 재판정에서 정신이상 증세를 일으키며 난동을 부리는 등(이것은 의도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병세가 심화되었고, 1927년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병원에 입원한다. “눈을 뜬 채 등골이 뽑히고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섰으니, 그의 아내가 안은 것은 남편의 잔해였다.”:소설가 심훈이 묘사한 그때의 박헌영이다. 참고로 심훈의 소설 <동방의 애인>은 박헌영, 주세죽 부부를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



* 주세죽, 박헌영 부부. 아기는 딸 박 비비안나. 허나 주세죽은 나중에 사회주의 활동가 김단야와 사랑에 빠지고

둘은 결별하게 된다. 일제 말기 박헌영과 잠깐 만난 어느 처녀는 그의 아들인 원경 스님을 낳고 집으로 끌려 내려갔으며,

박헌영은 윤레나라는 여인과 결혼하게 된다.  


   1928년 8월 두 부부는 바닷길을 통해 소련으로 탈출하였다. 그때 영화촬영차 두만강에 있다 소식을 들은 작곡가 김용호가 두만강변에서 영감이 떠올라 노랫말을 썼다는 것이 원경 스님의 주장이다. 가사에 나오는 ‘그리운 내 님’은 박헌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체가 뚜렷하지 밝혀지지 않았던 작곡가 김용호는 다름아닌 김정구 친형 김용환의 다른 이름이었다. 원경 스님은 또 1963년 라디오에 출연한 김정구가 <눈물 젖은 두만강>에 얽힌 이야기를 친형으로부터 들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노래는 널리 불려지고, 박헌영은 잊혀졌다 


  <눈물 젖은 두만강>은 중·노년층 사이에서 끊임없이 불려져 왔던 국민가요이며, 강산에의 <라구요>로 또 다른 울림을 얻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노래가 ‘빨갱이 두목’을 그리워하여 작곡된 것이라니! 대반전이 따로 없다. 더구나 박헌영을 미제의 스파이로 몰아 처형한 북한에서도 이 노래에 담긴 역사성과 철학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던가.


  사실 나는 해방 이후 박헌영의 행적에 대해 지극히 비판적이다. 그는 공산당계의 헤게모니를 무리하게 관철시키기다가 좌익 내부의 협동에도 큰 지장을 주었으며, 공산당계의 신전술에 따라 민중들이 궐기했을 때는 이미 이북으로 탈출해 있었다. 남로당의 봉기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국토완정론’에 힘을 실어주었고, 그 결과 일어난 전쟁은 도리어 이승만의 권력을 더 굳건히 다져 주었다. 북한 역시 건국 때 갖고 있었던 얼마간의 다원성과 역동성을 잃어버렸고, 김일성의 독재체제가 세워지면서 그 자신부터 희생양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당시 북한은 박헌영이 연희전문 창립자 원두우의 아들 원한경을 만나 미국의 스파이가 되었다면서, 일제 말기와 해방정국기 그리고 한국전쟁기에서 보여준 행동들이 죄다 미국을 위한 작전이었다고 우겨댔다).


  그러나 우익 계열의 민족지도자들이 은둔이다 문화운동이다 심지어는 친일이다 하면서 침묵하거나 훼절하던 일제 말기에, 박헌영이 지하에서 부단히 독립투쟁을 이어가며 ‘그리운 내 님’으로서 조선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것은 엄연한 진실이다. 해방정국기에도 미군정은 그를 여운형, 이승만, 김구와 같은 반열에 선 대통령 후보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단순히 권력투쟁에 소질이 있어서 좌익계의 다른 라이벌을 제치고 또 우익의 견제와 탄압을 받았던 것만은 아니다. 그는 명망가 중심의 정치운동에 갇히지 않고 노동자, 농민의 운동을 규합하고 조직하는 탁월한 역량을 보여줬다. 조선공산당의 영수, 북한의 부수상으로 나타나 권력을 잡는 듯했으나 결국엔 숙청의 대상이 되어 사라졌지만 말이다.


  남과 북 모두에게 잊혀진 인물이 박헌영 뿐이랴. <눈물 젖은 두만강>은 그들 모두를 위한 노래이다. 나아가 제국주의와 전쟁, 가난과 독재의 고난에 부딪혀 나갔던 조선 민중의 노래인 것이다.




* <눈물 젖은 두만강>을 합창하는 사람들. 박헌영이 누구인지 아는 관객은 거의 없을 듯하다.

:
이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르자
한국현대사 OST # 4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영화 <품행제로>의 한 장면. 롤러장에서 마주친 공효진네 패거리와 임은경과 그 친구들이 한쪽은 김승진의 <스잔>을, 다른 한쪽은 박혜성의 <경아>를 신청하며 신경전을 벌인다. 당시는 쾌활하고 맹랑한 남성상에 열광하던 이들은 김승진에, 자상하고 부드러운 남자에 이끌리던 이들은 박혜성에 환호하는 분위기였다. 여성 스타의 경우 김완선과 이지연이 각자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라이벌 승부를 펼쳤었다.

  ‘운동권’에서도 각자 ‘미는’ 노래가 달랐다. 그들이 부르는 민중가요의 가사가 정치적 이념을 담기 마련이었으므로 제목에서부터 취향은 확연히 갈렸다. 반미와 통일, 민족해방을 추구한 계열은 한반도 남반부에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했고 김대중을 ‘비판적 지지’했는데, 그들이 불렀던 <아 민주정부>의 가사는 이렇다: “한순간을 살아도 산맥처럼 당당하게 침묵의 거리를 박차고 투쟁하는 삶이라면. (중략) 아 아 민주정부 사천만의 희망이여 죽어도 다시 살아도 세우리라 꽃피우리라.” 

  반면 자본주의 극복과 노동해방을 목적으로 삼았던 계열 가운데 일부는 독자적인 진보정당을 선택했다. 13, 14대 대선에서 백기완 선본을 구성하고 이들은 <민중권력쟁취가>를 불렀다. “독재와 독점의 땅에 빼앗기고 짓밟힌 노동형제여 (중략) 역사 위에 피어 만발한 해방의 불꽃으로 투쟁하리라 노동해방 그날을 위해 민중권력쟁취투쟁.” PD(민중민주계열)라고 불려진 이들은 진보세력의 만국공통 투쟁가였던 <인터내셔널가>도 즐겨 불렀다. 하지만 NL(민족해방계열)은 그렇지 않았다.

박기순과 윤상원의 영혼결혼식에서 울려 퍼지다

  <인터내셔널가>조차 같은 나라에 사는 양측을 묶어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한국 진보진영이 두루 공유하는 몇 가지 노래들이 있기는 하고, 지금은 진보진영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들도 심심하면 열창하는 노래도 있다. 4년 전 총선에서 탄핵역풍을 업고 당선된 열린우리당 국회의원들이 청와대에 입성하여 불렀던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79년 노동운동을 하던 가운데 사망한 고 박기순과 그 이듬해 광주 시민군으로 죽어간 고 윤상원의 영혼결혼식에서 탄생한 노래다. 두 사람은 광주에서 야학활동을 하며 서로 알고 지냈던 사이다. 박기순이 죽던 날 윤상원은 일기를 썼다. “(···) 모닥불이 탄다./ 기순의 육신이 탄다./ 훨훨 타는 그 불꽃 속에/ 기순의 넋은 한 송이 꽃이 되어/ 우리의 가슴 속에서 피어난다.” 광주의 문화운동가인 김종률이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에서 가사를 따와 작곡한 이 노래는 <넋풀이-빛의 결혼식>이라는 음반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진보정당의 행사에 가면 으레 ‘민중의례’라는 것을 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먼저 간 열사들을 묵념으로써 추도한다. 민주·민족·민중운동에 있어 <임을 위한 행진곡>이 가지는 의미는, <애국가>가 일반 국민들에게 가지는 위상과 비견될 만하다. 나아가 이것은 아시아판 ‘인터내셔널가’라고도 할 수 있다. 중국이나 필리핀 등지에서도 이 노래는 알려져 있고, 꽤나 자주 입에 올려진다고 한다.

  1980년대 <님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했던 사람들의 운명은 이리저리 갈라졌다. 자유주의 성향의 노무현과 일부 학생운동가들은 국민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쳐 한국사회의 ‘신주류’가 되었다. ‘백기완 선본’이 만들어낸 흐름은 진보정치추진위, 진보정치연합, 국민승리21을 경유해 민주노동당으로 이어졌고, 김대중을 밀던 민족해방계열도 민주노동당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아 민주정부>와 <민중권력쟁취가> 간의 갈등과 분열은 진보정당 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북정책의 주요 목적은 (연방제)통일인가 평화(체제구축)인가. 북한 인권 문제에는 침묵해야 하는가. ‘민주노총당’으로 노동자들을 대변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을 두고 민주노동당은 분당에 이르렀다. 이른바 평등파(신문기사는 이들을 PD라고 부르지만 정확한 설명은 아니다)와 박승옥, 진중권 등 민주노동당 바깥의 진보주의자들이 모이고, 스타의원인 노회찬·심상정까지 신당창당을 결단함으로써 ‘진보신당’이 출현하게 되었다.

‘민중의례’에 대한 진보신당의 문제제기

  진보신당이 처음 태동할 무렵 한 토론회에서, ‘만화논평’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이창우는 “행사를 할 때마다 반드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야만 하느냐”며 문제제기를 했다. 일부 당원들도 지나치게 상시적으로 이뤄지는 ‘민중의례’를 도마로 올렸다. 마술사, 비보이, 율동패, 통기타가 어우러진 3월 16일 진보신당 창당대회는 그런 고민의 결과였다. 

   
▲ 엄숙주의에 대한 거부에 도전했던 진보신당 창당대회. 의자 마술이 약간 허술했던 모양인지 무대로 동원(?)된 언론인 홍세화와 김석준 부산대 교수는 괴로워 했다.

  만나서 반갑게 인사하다가 행사 초반 갑자기 얼굴빛이 달라지며 묵념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풍경은 아니다. 지금의 통합민주당이나 노무현 계열까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도, 그들의 정치노선이 옳든 그르든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그만큼 그 노래는 빛바래고 변질되었다. 그러나 어찌 그런 이유로 버릴 수 있을까.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낀다지만, 이제는 깃발을 뽑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러보자. 4.3 항쟁기념일을 무심히 지나친 이명박 대통령이, 왕년엔 운동권이었다지만, 다음달에 새삼 이 노래를 외울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 김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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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과 변절한 후예들 그리고 김대환 
김수민의 한국현대사 OST #3
대나무산에 내린 검은비
 
 2008년 03월 22일 (토) 16:11:47 김수민  woodstocksm@naver.com 
 
 
 악극단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 방랑생활을 보다 못한 외삼촌이 나를 경찰학교에 들여보낸 것이다. 경찰은 의외로 적성에 맞아 그럭저럭 견뎌낼 수 있었다. 31기로 졸업한 뒤 초대 농림부장관을 지낸 조봉암씨의 호위경관을 맡았다. 그분이 외숙모의 친오빠였기 때문이다. 2년 정도 그분을 호위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정신, 옥고와 갖은 고문을 치른 뒤 5개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으로 글씨를 기막히게 써 내려가는 모습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그림자처럼 그분을 따라다니며 나는 늘 그 생각에 골몰했다. 훗날 쌀 한톨에 반야심경 200여 자를 새겨 넣는 '미친 짓'도 나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 흑우 김대환, <<연습은 장엄한 구도의 길이었다>>, 현암사, 2005, 31-32쪽.


 
▲ 김대환이 쌀 한톨에 새긴 반야심경. 그 역사적 배후에는 조봉암과 '다섯개의 손가락'이 있었다.


   전향했지만 변절하지 않았던 대나무산

 일제 시대 옥고를 치루면서 다섯 개의 손가락을 잃은 죽산(竹山) 조봉암은 해방을 앞둔 몇해동안 비교적 안온한 나날을 보냈다. 사실상 전향을 선언하고 독립운동을 떠난 결과였다. 이는 그가 해방공간에서 활발하고 주도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원인이기도 했다. 조봉암은 공산당의 지도자인 박헌영과 결별하면서 결국 공산주의자 노릇을 그만두겠다는 제2의 전향을 선언했다.

  그는 자본독재와 공산독재를 모두 반대하는 ‘제3전선’을 형성하는 운동에 나섰다. 남북과 좌우의 통합을 모색하던 인사들이 죽거나 현실정치에서 등을 돌릴 때, 조봉암은 제도권 안에서 견디는 쪽을 택했다. ‘일민주의’의 기치를 내걸며 정당정치에 극도의 불신을 보냈고 전략적 파트너였던 한국민주당과 불화하던 이승만은 전직 공산주의자였던 사회민주주의자 조봉암을 내각으로 불러냈고, 조봉암은 대한민국의 초대 농림부장관이 되었다.

  그의 완강한 제도정치권 참여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지만, 분명 그의 전향은 변절이 아니었다. 조봉암은 공산주의를 버리고 정립한 민주적인 사회주의와 사회적인 민주주의를 따랐다. 왕족 출신 독재자 이승만과 지주·친일파로 이루어진 보수야당에 마음을 주지 못한 인민들이 조봉암의 곁으로 모였다. 왕년에 우익깡패였던 자도 그를 보좌했다. 그는 포연 냄새가 채 가시지도 않은 1950년대에 ‘평화통일’을 제창했고, 진보당의 강령은 ‘피해대중’의 지지를 받아냈다.

  조봉암은 어찌 보면 구질구질하게 느껴질 만큼 살아남는 길을 거듭 선택했다. 그러나 그의 인기가 이승만이나 신익희, 조병옥 같은 보수 정치인을 위협하면서 그는 더 이상 생존할 수 없었다. 이승만은 조봉암의 표묶음 앞뒤에 자신의 표를 덮는 등의 대대적 부정선거로 대한민국의 세 번째 대통령이 되었고, 그 후 정권은 조봉암을 죽이는 공작에 나선다. 꾸준히 외쳐온 평화통일론 그리고 남파간첩이라고 주장·간주된 양명산과의 만남을 근거로 조봉암은 마침내 1959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사형을 당했다. 

  허영만의 명작만화 <오! 한강>은 적지 않은 분량을 주인공과 조봉암의 인연(물론 픽션이다)에 할애하고 있다. 이외에도 조봉암을 기리고 새기는 노력들은 수두룩했다. 반면 조봉암 사후 진보정당인들이 걸었던 행보는 드러내기  부끄러운 변절의 역사였다. 박정희 정권기에 통일사회당을 이끌었던 당산 김철(김한길 전 국회의원의 아버지다)은 전두환 일당이 만든 국가보위입법회의에 들어갔다. 진보당 간사장이었던 청곡 윤길중 역시, 민주사회주의자를 자처하던 남재희와 함께 제5공화국의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에서 국회의원을 지냈고, 민정당 대표와 국회 부의장까지도 역임하였다.

  이 전향과 변절의 이야기는 윤길중의 아들이 반 전두환 투쟁에 나서게 되는 또 다른 일화를 남기기도 했는데, 이것은 김소진의 소설 <혁명기념일>에도 픽션에 섞여 묘사되어 있다. 남재희의 딸도 학생운동에 가담해 아버지를 곤란케 했다고 전해진다. 남재희는 오늘날 진보정당에 애정 어린 충고를 연신 보내며 ‘진보 원로’처럼 행사하는가 하면, 운동가였던 그의 딸은 얼마 전 한미FTA를 주도한 실무진의 한명으로 나타났다.


 
 흑우 김대환의 생전 인터뷰 및 연주 동영상. 출처:T42.co.kr


  불꽃이 꺼지는 동안 검은비가 내렸다

  조봉암의 후배들이 주류 엘리트의 본연에 충실하며 ‘이너서클’로 화려하게 진입하는 동안, 조봉암의 호위경관이었던 흑우(黑雨) 김대환은 음악에 일로매진한다. 그는 ‘애드 포’가 첫 음반을 내기 직전까지 신중현과 함께 록과 블루스를 연주했고, 조용필, 최이철(훗날 ‘사랑과 평화’)을 대동하고 ‘김트리오’라는 밴드를 결성한 바 있다. 그 후 프리재즈에 투신하며 ‘드럼’이 아닌 ‘북’을 연주하였다. 즐겨 타는 할리 데이비슨을 무대에 올려 그 시동 소리를 음악으로 승화시키고, 한 손에 여러 채의 채를 끼워 절묘한 소리를 내는 모습은 김대환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위에서 인용했듯 조봉암에게 충격과 자극을 받은 그는 글씨에도 능했다. 공연 직전 물 묻힌 손가락으로 화선지에 좌우가 뒤바뀐 글씨를 써내려가는(관객들에게는 글씨가 똑바로 보인다) 퍼포먼스로도 유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압권은 쌀 한톨에 반야심경 200여자를 새긴, 이른바 ‘세서미각’이었다.

  집념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많다. 그렇지만 묵묵히 흐르고 또 흐르는 사람보다는 활활 타오르다가 꺼져버리는 사람이 더욱 많다. 조봉암을 따라다니던 청년들은 가슴 속에 불길 하나씩은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주류의식에 함몰되거나 오랜 야인 생활에 지쳐 하나둘씩 타협하고 훼절하였다. 젊음과 객기에 기대 급격히 피어오른 불꽃은 철이 들어간다는 무상한 핑계 속에서 꺼져가곤 하였다. 진정한 열정은 언제나 은근과 인내에 빚을 지는 법이다. 활화산처럼 북을 치는 김대환의 이면에 세서미각의 김대환이 있었듯 말이다. 지난 3월 1일은 김 선생의 4주기였다.

추신: 원고 마감이 끝난 3월 23일, <조봉암과 진보당>의 저자 정태영 선생이 작고하였다. 북한에게 교육받은 이론가로 조작되어 조봉암과 함께 재판을 받았던 그는 이후에도 줄곧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활동을 했다. 또 뒤늦게 대학원에 들어가 사회민주주의의 한국적 실현을 학술적으로 탐구하기도 했다. 유저로는 <한국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역사적 기원>.

/김수민 woodstocks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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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ondo.net/news/articleView.html?idxno=1424

 
'박정희찬가'에 맞섰던, 대운하시대에도 듣고픈 이노래 
김수민의 한국현대사 OST #2
신중현 <아름다운 강산>
 
 2008년 03월 08일 (토) 20:37:22 김수민  woodstocksm@naver.com 
 
 
  전편에 나온 ‘시나위’의 주요 활동무대는 ‘록 월드(Rock World)’였다. 1984년 ‘라이브’라는 카페를 운영했던 신중현이 이태원의 태평극장을 개조하여 만든 이 헤비메틀 전용 공연장은, 신대철, 임재범, 김종서, 김도균, 오태호, 손무현, 서태지 등의 산실이자 숙식소였다. 신중현은 신대철, 신윤철, 신석철이라는 세 음악인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1980년대의 록씬과 1990년대 가요계를 수놓은 뮤지션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신중현은 널리 알려졌다시피 김추자, 펄 시스터즈, 김정미, 박광수, 박인수, 바니 걸스를 스타덤으로 올려놓았고, ‘더 멘’과 ‘엽전들’을 결성해 한국 록 제1의 전성기를 일구었다.   그러나 1980년대와 1990년대는 더 이상 신중현의 전성기가 될 수는 없었다. 김완선의 데뷔곡을 만들기도 했으나 그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1970년대 중후반 활동이 중단되었던 신중현을, 세월은 충분히 기다려주지 않았다.

 전쟁고아 신중현과 전쟁청년 박정희의 악연

 
 ▲ 신중현이 결성한 한국 최초의 록그룹 '애드 포'의 음반
   .
 1938년 출생한 신중현의 인생이 결정적으로 바뀐 시기는 그의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온 뒤 터졌던 한국전쟁이었다. 전쟁고아가 되어 하루 17시간씩 막일을 하며 생계를 꾸리던 중 그는 기타에 취미를 붙였고 홀로 연습하다시피하면서 연주력이 일취월장했다. 그는 ‘재키 신’이라는 별명으로 미8군쇼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주한미군은 그에게 가난을 선사했던 한국전쟁이 남긴 또 다른 유산이자 터전이었다.

  한국전쟁은 많은 청년들에게 위기이자 기회였다. 좌우익의 대결 속에 똑똑한 젊은이들이 상당수 사라졌지만, 그래도 군부의 우산 아래 있던 청년들은 목숨을 부지하고 미래를 도모할 수 있었다. 문익환이나 리영희처럼 나중에 ‘재야 인사’로 불리던 인사들조차 국군 통역장교 출신이다.

  남조선노동당의 군부 내 프락치였다가 체포된 뒤 동료들을 밀고하고 살아남은 박정희는 비공식적으로 군 업무에 복귀했던 즈음에 한국전쟁을 맞이했다. 1949년 이미 북조선의 대대적인 남침 가능성을 예측하면서 정보장교로서의 두각을 나타낸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어머니의 제사를 마치고 부대로 돌아와 그의 사상에 대한 세간의 의심을 깨끗이 씻어냈다. 동거녀와 결별한 고통을 딛고, 전쟁 중 만난 육영수와 결혼하기도 했다. 6.25는 5.16의 젖줄이었다. 신중현은 뒷날 쿠데타 이후 출현한 독재 정권과 악연을 맺는다.

 고향을 떠나온 백인 미군 병사들은 신중현에게 주로 컨트리 음악을 요구했지만, 그는 온갖 장르를 두루 소화하면서도 록을 지향했다. 1962년에는 한국 록밴드의 원조인 ‘애드 포’(Add 4)를 결성한다. 이 밴드는 영국의 비틀즈(The Beatles)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다. 기타 둘, 베이스, 드럼으로 짜여진 라인업도 같았고, 그런 형태를 보편적으로 퍼뜨렸다는 것 또한 비틀즈와 애드 포의 공통점이었다.

  ‘덩키스’, ‘퀘스천스’를 경유하여 ‘더 멘’에서 연주하던 신중현은 1972년 청와대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박정희 대통령을 찬양하는 ‘조국 찬가’를 작곡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딱히 비판적인 이념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신중현은 음악인의 자존심으로 버티며 거절한다. 그리고 반항했다. 삭발한 보컬리스트 박광수를 대동하여, 대통령 찬가 대신 작곡한 <아름다운 강산>을 방송에서 부른 것이다. 그때 영부인이었던 육영수가 쇼에 참석했다가 언짢은 표정을 하고 자리를 떠났다는 후문도 있는데, 어쨌든 그것은 박 정권으로부터 닥쳐올 박해의 서막이 되었다.

  1972년 대선에서 김대중을 꺾기 위해 무자비한 부정선거를 펼칠 만큼 박정희의 지지도는 떨어졌다. 반면 신중현은 1974년 이남이(베이스), 권용남(드럼)과 함께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하여 공전의 히트곡 <미인>을 발표했다. 신중현은 일본으로부터 귀화 제의를 받는가 하면 미국의 언론에게도 주목을 받는다. 

  같은 해 긴급조치 1호가 발표된 다음 정권의 손아귀는 록, 포크 계열의 반항적 음악인들을 더 세게 죄어가기 시작한다. 신중현의 노래 다수도 금지되었다. 김추자가 부른 <거짓말이야>는 불신풍조를 조장한다고 해서, <미인>은 퇴폐적이라는 사유로, <뭉치자>는 “북괴와도 뭉치자는 이야기냐”고 트집이 잡혀 금지곡이 되었다. 특히 <바람> 등 신중현사단의 일원인 김정미가 부른 노래들은 거의 모두가 포박당했다.


대운하시대에 듣는 <아름다운 강산>

  점차 날개가 꺾이던 신중현은 1975년 12월 4일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되었다. 박정희의 아들이 음악인들과 어울리면서 대마초파동이 시작되었다는 루머가 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우스운 건 대마관리법이 제정된 시점은 대마초파동 이후의 1976년 4월 7일이었다는 점이다. 수많은 음악인들이 발이 묶였고, 신중현도 박정희가 죽기 전까지는 노장사상을 접하면서 화를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 <아름다운 강산>을 부르는 신중현. 드럼 연주자는 신중현의 삼남인 신석철이다.


  그가 접한 노장사상은 1990년대 발표한 [무위자연], [김삿갓]에서 만개했다. 하지만 당시에 신중현을 수식한 찬사인 ‘살아있는 록의 전설’에서, 강세는 ‘살아있는’보다는 ‘전설’에 찍혔을 따름이다. 그를 재평가하는 무수한 평론이 분만되는 한편, 그의 영향력에 대한 과대평가에 볼멘소리를 내는 이들도 있었다.

  이달 5일, 필자는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신중현을 처음으로 봤다. 그는 공로상 수상자로 지명되어 무대 위로 올랐고 청중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그의 연주를 들을 수는 없었다. 2006년 11월 그의 은퇴공연에라도 가볼 걸 그랬다는 후회가 잠시 들었다.

  작년 대선에서 ‘노 브레인’이 이명박캠프 측에 로고송을 제공했을 때, 나는 조국 찬가를 거절한 신중현의 꼿꼿함을 떠올렸다. 요즘은 어마어마한 생태파괴가 예상되는 데다가 경제효과마저도 없다는 대운하를 파겠다는 이명박 정권을 경멸하면서, <아름다운 강산>을 다시 꺼내 듣는다. 역사는 어떤 측면에서는 반복되고, 또 어떤 측면에서는 후퇴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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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이한열, 6월 항쟁…그리고 시나위의 음악
[한국현대사 OST] 87년 6월10일, 항쟁속에서 울려퍼진 '새가 되어 가리'
 
김수민
한 대학생이 신촌 교정에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튿날,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은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다. 그리고 박종철고문살인규탄 및 호헌철폐국민대회가 전국적으로 번졌다. 1987년 6월 10일이다. 이날은 그 달 29일까지 진행되는 국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그 항쟁으로 생겨난 헌법은 6공화국의 골간을 이루게 된다.
 
▲ 1987년 6월 10일 발매된 시나위의 2집     ©대자보
“저 멀리 날아가는 새야/ 들판을 날아 어디로 가는지/ (중략)/ 영원토록 외쳐/ 외로이 한 없이/ 날아가는 새야/ 너 새가 되어가리/ 너 새가 되어가리.”

 
시위현장에서 젊은이들이 불러도 어울렸을 법한 이 노래의 생일 역시 1987년 6월 10일이다. 우연이겠지만 말이다. 본곡이 수록된 음반은 <Down & Up>으로 시나위의 2집인데, 시나위는 당시의 학생운동이나 재야는 물론 거리의 시위 인파와 별 연관을 가지지 않았다.
 
3.1 운동 이후 조선총독부가 ‘문화통치’로 우회하였듯 전두환 정권도 1980년 광주의 피륙을 난자한 뒤 ‘3S(섹스, 스크린, 스포츠) 정책’을 기획했다. 자로 치마 길이를 재고 가위로 장발을 자르는 대신, 청년들에게 신나게 놀며 정치적 억압은 잊으라는 주문을 외운 것이다. 그 첫 작품은 <국풍 81>이었다. 신군부 핵심인 허문도까지 제 대학 후배들을 설득하러 다니는 등 당국은 대학생들의 광범위한 참가를 유도하는 데 분주하였고 실제로 축제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 들었다. 그러나 국풍은 거대한 쓰레기 더미와 함께 끝나고 말았으며, 당일 가요제에 출전한 이들은 대학사회에서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새가 되어 가리>도 6월 10일에 태어났건만...
 
서울대에서 사건이 터졌다. 국풍에서 대상을 받은 ‘갤럭시’의 공연 소식을 듣고 성난 학생들이 학생회관 라운지의 무대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청중은 별안간 애국가를 요구했다(반정부 성향을 가진 사람들조차 열심히 국가를 연주하고 태극기를 들고 다녔던 것도 그야말로 ‘한국적 민주주의’의 특징이었다). 기타 연주자가 급한 대로 떠듬떠듬 애국가를 연주하자 학생들은 무대를 부수어 버렸다. 이어 대운동장에서 열린 ‘옥슨(81)’의 콘서트에도 학생들은 각목을 들고 나타나 공연을 무산시켰다. 밴드들의 수모는 이어진다. ‘옥슨(82)’ 역시 공연 도중 학생들의 막걸리 세례를 받았고, 유명 그룹 ‘산울림’도 대학축제 중 앰프의 플러그가 뽑혀지는 봉변을 당했었다. 1980년대, 록 밴드와 학생운동권의 관계는 불화 그 자체였다.
 
학생운동권이 록음악을 경멸한 까닭은 크게 두가지다. 첫째, 향락적 서구음악이자 제국주의의 피조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록의 주역이 노동계급이었음을 알거나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둘째, 그 무렵 대학가의 ‘대세’는 풍물패나 탈춤반이었고 대중음악에서도 1970년대 이후 포크에 경도되어 있었다. ‘록밴드’는 그다지 대학친화적이지 않았다. 1988년 대학가요제 대상을 차지한 ‘무한궤도’의 신해철은 서울대, 서강대 재학 중인 멤버로 채워진 밴드를 유별나게 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고 회고한 바 있다.
 
1980년대 중반 ‘하드록’에서 ‘헤비메틀’로 유행이 옮겨가면서 대학가와 밴드 사이의 괴리는 더 커진 감이 있다. ‘마그마’, ‘무당’, ‘이수만과 365일’에서 언뜻 보였던 헤비메틀은 국내 음반사상 최초로 시나위의 1집에서 만개했다. 그리고 ‘백두산’, ‘부활’, ‘H2O' 등 메틀 밴드들이 속속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캠퍼스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았으며, 당연히 저항적 학생운동과도 멀찍이 떨어져서 걸어갔다. 



▲한강변에서 열린 축제에 나타난 시나위. 김종서(보컬), 신대철(기타), 강기영(베이스, 현 DJ달파란), 김민기(드럼)의 모습이 보인다.

정작 메틀 밴드들을 반긴 건 중·고등학생들이었다. 해적판 외국 음반에 익숙하던 그들은 시나위 1집에서 “한국인도 메틀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신대철의 기타와 임재범의 보컬에 열광했다. <새가 되어가리>가 들어간 2집의 반응은 더 좋았다. 고교생용 잡지 <하이틴>에서 발표한 인기가요순위에서 <새가 되어 가리>가 1위를 차지했고, 같은 음반에 실린 <빈 하늘>, <해 저문 길에서>, <들리는 노래>, <시나위>, <마음의 춤>이 2위에서 6위까지도 석권해 버린 것이다.
 
시나위가 대학가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0년대 중반이었다. 1990년대 초입 국내 메틀밴드는 하나둘씩 해산을 결정했고, 시나위도 1991년 활동중단을 선언했다. 1990년대 다시 록은 강산에, 넥스트, 크라잉 넛의 출현과 함께 부흥기를 맞이했다. 그때는 더 이상 제국주의의 첨병이라는 비난이 없었다. 도리어 록에 호의적인 비평가들에 의해 록은 비판과 저항의 음악으로 격상되었다. 학생회 선거에 나온 어떤 운동정파는 “서태지, 넥스트와의 제휴”까지 거론했다.    
 
항쟁 기념식에서 그 노래를 듣고 싶다
 
1995년, 메틀이 아닌 얼터너티브 사운드에 기초하여 사회적인 가사를 들고 돌아온 시나위도 환영의 대상이었다. 대학가에 초대되는 어엿한 단골 뮤지션이 되었고, 1997년에는 연세대사태 직후 위기에 처해 있던 한총련의 출범식에도 초대된다. NL(민족해방계열)이 주도하던 한총련과 ‘한국 메틀의 원조’ 시나위의 만남이었다. 그 만남은 정치적인 동맹도 아니었고, 문화적 취향에 이끌린 교감도 아니었다. 젊음과 젊음의, 뒤늦은 만남이었다.
 
1987년 이후 정치적 민주화는 엎어지지 않고 더디게나마 진전된 반면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 발육부진에 가까웠다. 나는 그에 보태어 정치적인 올바름과 문화적인 생동감, 세련됨이 좀처럼 어우러지지 못한 것도 ‘1987년 체제’의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90년대 중반께 ‘인디(독립) 음반’이 80년대 금서를 조달하던 사회과학서점에서 유통된 상징적인 사건이 있었지만, 향후 대학가의 문화지형은 단순화되고 대학생들은 탈정치화되었다. 록을 제국주의라고 손가락질하던 학생운동권은 그 이외에도 여러가지 경직성을 안고 있었고, 이를 극복하지 못해 오늘날 소멸의 코스를 밟아가고 있다. 그럼 록은? 홍대앞의 빛과 그림자 속으로 빨려드는 분위기다.    
 
1987년 6월 우연히 함께 나온 해방의 운동과 자유의 노래는, 당시에는 조우하지 못했다. 그러나 역사는 기억되고, 예술은 길다. 언젠가 6월 항쟁 기념행사에서 시나위의 <새가 되어 가리>가 연주되는 풍경을 상상한다. 새가 되어 날아갔을 박종철과 이한열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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